Wehrmacht님 추천으로 유튜브에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본 김에 1972년작 영화인 의사 안중근도 같이 찾아봤습니다.
우선 북한 영화 쪽부터 살펴보면, 전체주의 국가 중에서 공산권은 영화를 포함한 대중매체를 이념 선전용으로 활용하며 역사는 좋은 소재입니다. 그래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도 중요한 장면에선 이념 교양용 해설을 넣습니다. <의사 안중근>에선 앞부분 해설은 없고 중간에 해설이 나올 때 나레이션 목소리가 시끄럽습니다. <도마 안중근>에선 해설은 넣었으나 후술할 바와 같이 일제와 이토가 구체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그냥 자막으로만 띄웠기 때문에 이 부분은 이등박문을 쏘다가 낫습니다.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도입부 해설
십구세기 중엽부터 일제는 원조의 미명하에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조선침략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천팔백구십사년 갑오농민폭동이 일어나자 부패한 리조정부는 자기들의 더러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농민군을 진압해줄 것을 청국에 요청하였다. 조선침략의 기회만을 노려오던 일제는 이를 구실로 하여 조선에 출병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미제의 지원 밑에 청일전쟁을 승리한 일제는 천팔백구십오년 사월 시모노세끼 강화조약에서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일제의 지배권을 승인케 하였다. 천구백이년 일월 삼십일 영일동맹조약. 조선에서 청국 세력을 몰아낸 일제는 영국을 등에 업고 짜리로씨야 세력을 물리치는 길에 들어섰다.
천구백사년 이월 팔일, 일제침략군은 인천과 원산에 강제상륙하고 십일 로일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천팔백구십사년부터 천구백사년에 이르는 십년 동안에 일제가 도발한 두 차례의 전쟁터로 화하였다. 일제는 로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조선의 모든 것을 동원하였으며 수많은 인민들을 강제부역으로 끌어내였다.
북한답게 미국 비난이 빠지지 않습니다. 참고로 청일전쟁 때 미국은 중립이었고 그 때도 친일 기조가 있었지만 당시엔 청일 어느 쪽 편도 아니었습니다. 러일전쟁을 끝낸 포츠머스 조약에선 자료사진으로 루즈벨트, 가쓰라, 비테(영화는 문화어인 위테로 표기) 사진도 보여주면서 중요한 역사 장면에는 해설을 넣습니다. 이토 사살 장면에선 몰입을 생각해서 넣진 않았지만요.
잠시 도마 안중근의 도입부 해설과 비교해 봅시다.
광복 59주년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독립과 통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신 익명의 희생자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1907년, 한국땅에 일본인이 발을 들여놓은 후 우리에게 조국은 없어지기 시작했고 세계의 열강들은 우리를 먹이감으로 보았으며 국민의 대부분은 살던 고향을 떠났다. 애국열사 안중근은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그만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미친 운전수에게 차를 맡기면 그 차의 모든 이들은 죽는다. 히틀러는 미친 운전수이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미친 운전수를 끌어내지 않을 수 없다. 본하퍼 목사. 히틀러 암살단(1906~1045)
본회퍼 어록 사이에 중략된 장면은 해설이 없고, 일제 군대가 독립군 기지를 불태우고 학살하는 장면인데 그 독립군과 안중근의 관계는 일절 언급이 없습니다. 그냥 당시 상황을 나열하다가 안중근이 일본인 사채업자를 처단하고, 이토 사살로 심문받고, 이토 사살한 뒤 처형당하고, 아들 독살당하는 장면으로 끝입니다.
<의사 안중근>에서 을사조약 체결 후 해설 겸 연사의 대사
나라가 망하던 날 민족의 분노는 화산처럼 폭발했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피를 뿌려 이천만의 분기를 재촉하였다. 매국 오족을 규탄하는 원성은 하늘을 찼다. 놈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의 스승을, 우리의 동지를 학살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해 바친 고귀한 목숨은 만 사람의 피를 끓게 할 것이니, 이것만은 그들의 기관총도 대포도 막지 못할 것이다. 정녕 그대들은 대한제국을 뺏었다고 생각하는가? 아아 동포여! 우리들은 살았느냐 죽었느냐? 동포여! 사랑하는 형제여!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입니다! 동포여! 이제 우리는 누굴 믿어야 합니까? 오직 우리 자신뿐이요. 이천만 우리의 힘으로,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아냅시다. 대한의 나라, 대한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오직 뭉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뭉치면 살고 뭉치지 못하면은 죽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갚기 전에는 조국을 도로 찾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의 용기요 의지입니다. 알겠습니까?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와 <의사 안중근>은 사건 전개 순서는 비슷하지만 안중근의 독립운동 관련 내용은 충실합니다. 도마 안중근은 시간대 배열이 엉망입니다. 제대로 반영한 게 이토 사살 후 안중근에게 감화된 교도관 이야기뿐입니다.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러일전쟁🠖을사조약🠖헤이그 특사🠖군대 해산🠖국채보상운동🠖안중근의 의병 활동🠖이토 처단🠖재판🠖순국
의사 안중근: 을사조약🠖안중근의 의병 활동🠖이토 사살 계획 수립🠖이토 사살🠖안중근 투옥, 재판🠖순국
도마 안중근: 헤이그 특사🠖군대 해산🠖안중근의 독립운동🠖이토 사살🠖심문🠖순국🠖이토 장례식🠖안준생 독살
내용 구성 자체가 엉망인 도마 안중근은 논외로 치고, 이등박문을 쏘다에서는 이토가 무슨 짓을 했는지 초반에 짚고 넘어갑니다. 안중근이 재판에서 이토를 처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등박문을 쏘다와 의사 안중근은 잘 넘겼지만 도마 안중근은 엉망입니다. 두 영화에선 중간에 안중근이 껴서 사정을 듣는 장면이 있는데, 안중근이 주인공이니까 문제될 건 없습니다.
1) 한국 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3) 오조약과 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한국의 국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강탈한 죄
7) 제일은행 지폐를 강제로 사용케 하여 한국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킨 죄
8)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한국인의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 유학생의 해외 유학을 방해한 죄
11) 국어, 역사 등 한국 교과서를 불태운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원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13) 한국과 일본 사이에 다툼이 없고 오히려 태평하다며 천황을 속인 죄
14) 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태황제를 죽인 죄
도마 안중근에서는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자막으로 대충 처리했지만, 이등박문을 쏘다와 의사 안중근은 재판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규탄하는 장면과 함께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지 못하고 뤼순의 일본 법정에서 재판받아야 하는 사정을 넣었습니다.
이토를 사살하는 장면은 가장 중요한 장면인 만큼 세 영화가 모두 공들인 장면입니다. 그 중에선 이등박문을 쏘다가 연출을 잘 했습니다. 의사 안중근은 그냥저냥이었고, 도마 안중근은 처절함을 강조한 것 같은데 이 영화가 그렇듯 어색하기만 합니다.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이토를 사살한 직후 안중근이 이토를 밟고, 체포되기 전까지 조선 만세를 외칩니다.
의사 안중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끌려갈 동안에도 이토를 규탄합니다.
도마 안중근: 이토와 주변 일제 요인을 쏜 뒤, 헌병에게 붙잡히자 꼬레야 후라 비슷한 발음으로 대한 만세를 외칩니다.
이토의 반응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야라렛타 소리와 함께 쓰러진 뒤 객실에서 안중근을 망할 자식이라고 합니다.
의사 안중근: 객실로 실려간 뒤, 내가 죽어도 대일본제국의 번영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 후 안중근이 재판 전까지 고문받는 장면도 나옵니다.
도마 안중근: 그냥 죽음
참고로 안중근이 순국 전에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는 장면은 의사 안중근에만 나옵니다. 도마 안중근에서는 수녀가 또마스 낄드 이또라 말할 때 오 갓이라 말하는 장면 및 세례 주는 장면, 성모상 앞에서 안중근 어머니가 기도하는 장면에서만 천주교와의 연관을 보여주며, 이등박문을 쏘다는 북한 특성상 천주교 언급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결말 부분은 안중근이 형장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끝난 의사 안중근이 낫습니다. 도마 안중근은 불필요한 장면인 이토 장례식과 안준생 독살 때문에 결말도 엉망이며, 이등박문을 쏘다는 형장으로 가는 길에 나온 안중근의 독백이 이 영화가 사상교양용 영화라는 걸 증명합니다.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마지막 부분에서 안중근의 독백 및 해설
'나를 옳게 이끌어줄 그런 영웅은 없었구나. 오천년의 력사를 가졌으나 짓밟히고 천대받는 우리민족을 구원해줄, 세계에 당당히 내세워줄 그런 절세위인을 한번 만나보았댔으면. 아아 그런 영웅은 언제나 나타나려는지.'
렬혈애국청년 안중근은 나라를위해 한목숨 바치였으나 그가 걸은 길로써는 조선을 구원할 수 없었다. 이등박문은 죽었으나 침략자들은 계속 남아있었으며 일제는 한일합방을 다그쳐 천구백십년 팔월 이십구일 형식적으로나마 남아있었던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고 삼천리 강토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하여 조선은 세계지도 우에서 그 빛을 잃고 말았고 조선인민은 삼십육년이란 긴긴 세월 일제의 식민지로의 비참한 멍에를 쓰고 피눈물나는 암흑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중근은 렬렬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국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옳은 지도사상을 내세우고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인민을 깨우치여 하나로 굳게 엮어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조국광복의 옳은 진리를 밝히고 전체인민을 자유와 독립으로 이끌어 나갈 새로운 여명이 밝아올 날은 아직도 멀었었다.
북한 안에서야 사상교육용 '력'사 영화니까 넘어가더라도, 남한이나 해외에서 보기에는 해괴한 결말입니다. 결말에서 말하는 지도사상이야 북한을 아는 분들이라면 다 알 내용이니까요. 도마 안중근은 안중근 큰아들이 엔딩에서 독살당했으니 더 말할 내용도 없고요. 그 점에선 차라리 의사 안중근이 낫습니다.
결론
1) 이등박문을 쏘다는 사상교육용 내수 영화로서는 뛰어나지만 북한 안에서만 통할 결말
2) 의사 안중근은 옛날 영화치고는 무난하고 튀진 않지만 엉터리 결말을 내놓진 않음
3) 도마 안중근은 엔딩을 언급할 가치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