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7-10)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태초에 물질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스스로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존재하려면 선행하는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원인이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법칙이 있었거나 정신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스스로 계시며 물질과 법칙과 정신의 원인이 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이들이 전하여 준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믿거나 순종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평생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경험하면 그의 신앙은 견고합니다. 죄를 짓는다 해도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안에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내재성이라 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나 사도들도 믿었던 것이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생소한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면 범신론자라 비난을 받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내재성의 교리는 범신론이 아닙니다.
범신론은 피조물 전체가 곧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사상은 자연과 하나님이 하나이기 때문에 나뭇잎 하나, 돌 하나를 만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과 세계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분이 창조한 것들과 아무리 깊은 관련이 있어도 그것들은 그분이 아니며, 영원히 그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그것들보다 먼저 계시며 그것들에서 독립해 계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 내재하시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초월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서나 그분을 만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라
본문에 다윗 왕은 하나님을 피하려 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 고백 다음에 다윗은 하나님의 내재성의 영광을 찬송합니다.
시편 139:8-10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죽은 자의 세계)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임재를 피하여 숨으려 하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모세는 일터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나 내재하시기에 신자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분은 그곳에 계십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분께 더 가까이 있지도 않고 그분으로부터 더 멀리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것은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당에만 있다면 우리는 교회당을 떠날 때 불안하고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사도 바울도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도행전 17:27-28에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고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십시오.
둘째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하라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그분이 계시다면 어찌하여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모르고 있을까요? 야곱은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라고 외쳤습니다.
야곱은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야곱이 집에 있을 때는 부모가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머물 때 그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전혀 몰라도 그분은 여기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만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한다면 그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분은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의 관계 안에서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나타남이 있는 사람은 그분의 얼굴에 빛으로 빛나게 됩니다. 그것이 없다면 이름뿐인 신자인 삶이 되고 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하였을 때 그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임재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늘 원하십니다. 각각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 마음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로, 영적 수용성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발견하는데 왜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할까요? 왜 그분은 어떤 이들에게는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면서도, 다른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불확실한 신앙으로 살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만나거나 못만나는 원인은 그분께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습니다. 신앙의 본이 되는 훌륭한 20명을 성경에서나 주변에서 선택해보세요.
그들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이사야가 다르듯이 요한과 바울이 다릅니다. 그들은 서로 차이가 많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삶보다 훨씬 높은 길, 영적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중요한 한 가지 자질에서 똑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영적 수용성’입니다. 그들 안에 무엇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도록 강한 충동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의식이 있었고, 그 영적 의식을 계속 키워나가서 결국 그것을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은 마음 속에 영적 갈망을 느끼면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반응의 습관을 평생 가지고 살았고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환상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런 습관은 다윗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영적 수용성은 하나님과 잘 맞는 것이며, 하나님께 자꾸 기울어지는 경향입니다. 이런 수용성은 적거나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에 의해 늘어나지만 내버려두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영적 수용성의 은사를 훈련하고 키워나가십시오. 옛 성도들에게는 은사를 키워나가고 훈련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었지만 우리 신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누구든지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누구라도 훈련을 통해 영적 수용성의 능력을 키워나간다면 하나님을 더 자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그분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분은 낯선 하나님이 아니시며, 수천 년 동안 죄 많은 인류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예수님의 친근한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위를 끌어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와 소통하려고 애쓰십니다. 그분이 내민 손을 잡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그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할 때 반응하는 것이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용성이 믿음과 훈련에 의해 완전해질수록 그분을 더욱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일터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우리 직장이나 일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너무 빠져 있던 죄를 회개합니다. 제 눈에는 세상이 너무 크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줄곧 여기에 계셨지만 알지 못했나이다. 주님의 임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 안에 주위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설교=목천교회/김상원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