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대표팀 감독을 만나다!!
날아라 마린보이 : 야생마~린 생생 리포트!/홍보마린의 스토킹
(2012/10/21)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 작은 섬 티모르의 동쪽 절반, 강원도만한 면적을 영토로 인구 100만명이 살고 있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75년 포르투갈이 물러나자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주장하는 쪽과
독립을 주장하는 쪽이 내전을 시작했다. 1976년 독립파는 티모르 동쪽을 영토로 독립을 선언했지만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무력침공했고, 그로부터 27년간 길고 긴 투쟁끝에 지구상 최후의 독립국으로 지난 2002년 정식으로 지구촌의
일원이 되었다. 30만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그 독립과정이 처절하고 안타까워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더위와 지독한 가난, 무기력의 나라.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폐허 속에서 동티모르는 서서히 대중들에게 잊혀져 갔다.
그러던 2004년, 동티모르는 갑자기 리베리노컵 유소년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깜짝 등장하더니 2005년 연거푸 우승하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 한국인 축구선수 출신의 감독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국 국민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갔다. 한국인 감독과 그의 어린선수들의 사연은 충분히 감동과 교훈을 주는
스토리여서 책으로도,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소개됐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후원과 지원도 잇따랐다.
2012년, 벌써 동티모르가 독립한지 10년. 그동안 동티모르는 많이 변했을까? 그들의 축구환경은?
그리고 그 한국인 감독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머나먼 동티모르의 그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한국인 감독의 이름은 김신환.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땅에서 국제축구대회 2연패의 기적을 일궈낸 그는 해병대 선배다.
Q. 제가 Intro에서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독자들은 동티모르라는 나라가 어떤 환경인지 아직 실감이 안 날겁니다.
감독님의 생생한 설명을 더해주십시오.
A. 우리 국군 '상록수 부대'가 지난 1999년부터 4년간 UN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과 2005년 연거푸 유소년 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지만, 2006년 또 내전이 일어났을 정도로 불안정하고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국제사회 도움고 동티모르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금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외국인도 어느정도 편안한 생활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Q. 동티모르에는 어떻게 찾아가시게 된 건가요? 이름도 생소하고 알려지지 않은 나라와의 인연을 알려주세요
A. 동티모르에는 아는 분의 소개로 저 개인의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고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신생국가로 가면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갓 독립한 정세의 불안정, 지독한 가난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정리하고 귀국 전날 달리기를 하려고 숙소 근처 운동장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운명처럼 축구하는 아이들을 보게 되었죠.
Q. 처음부터 축구를 가리치려는생각으로 동티모르를 찾으신건 아니시군요. 사업도 못하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모의 나라였는데,
이곳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A. 저는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어 뭔가 삶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축구도, 사업도 모든게 다 뜻대로 잘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곳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려던 전날 우연히 만난 공터의 아이들은 맨발로 룰도 없이 이리저리 공을 차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해맑았습니다.
진지하고 즐거웠고 눈빛이 살아 있었죠.
오랜 식민생활과 내전에 지친 이곳 사람들에게 베어 있는 피폐와 무기력의 모습이 아닌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이곳의 아이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한 인생에서 벗어나 아이들도, 나도, 한걸음씩 일어나자고 다짐하며 이곳과 단단한 인연의 끈을 엮게 되었습니다.
Q. 생계를 이어가기에도 힘든 나라에서 축구에 몰두하는 모습이 의외이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특히 아이들에게 축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A. 가난하고 교육도 잘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아이들입니다. 놀이문화나, TV, 인터넷 등 즐길거리도 부족하죠.
그러나 공간만 있으면 공을 자기고 놀고, 축구선수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입니다만, 그 성공이라는 것도 그저 잘 먹고 집 하나 번듯하게 갖고 싶다는 소박한 성공입니다.
지금은 동티모르 유소년팀이 많이 알려지면서 이곳 아이들은 팀에 들어오는 것이 목표이고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감독님께서는 동티모르의 유소년팀을 맡은 이후 2년만에 지난 2004년 리베리노컵 대회에서
2년 연속으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셨습니다.
주변 환경이 잘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들이 국제적인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이 기적 같은데요.
감독님만의 훈련비법이 있으신가요?
A. 가난해서 잘 먹지 못하다 보니 아이들의 체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식민지 시절 무기력이 몸에 베어 있고 시간관념이나 예의범절도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운동장이 없었을 뿐 아니라
훈련환경도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화에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정신력뿐이었죠.
그래서 인성과 공중도덕, 생활하는 데 필요한 예의범절을 먼저 가르쳤습니다. 축구를 교육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이 나라 국민과 어린이들에게 꼭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경기력은 한국에서 훈련하는 식으로 향상시켰습니다.
월드컵 4강의 나라에서 온 선수출신의 아저씨가 축구를 가르쳐준다고 하니 아이들도 열심히 따라주었고 훈련에 임하는 모두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뛰다 보니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Q. 국제대회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하며 명장의 반열에 오르시고 명성을 얻으신지가 벌써 6~7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감독님과 동티모르 아이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도움과 후원의 물결이 이어졌었는데요. 지금은 어떤가요?
A. 제가 동티모르에 온 지 11년째입니다. 저 개인적인 생활은 별로 변한게 없습니다. 하루 일상생활이 아이들 운동에 맞춰져 있다보니
저 개인적인 경제생활은 넉넉지 못합니다. 저 개인이 편안한 생활을 하자면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지원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초기보다 아이들이 많아져서 팀을 꾸려나가기는 여전히 힘이 듭니다.
현재 동티모르 각 지역에 5개 팀을 창단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독립 초기보다는 다소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곳의 환경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게 나이 먹어가면서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도 나오고 책도 나와서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지만 부족한 저에게는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동티모르 축구에 한국의 혼을 심어 줄 생각입니다.
Q. 그동안 유소년팀을 이끌어 오시면서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면요?
A. 감동적인 이야기는 많지만 그것보다는 안타까운 일이 더 마음에 남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에도 출연했던 알렉스라는 아이가
페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까운것은 정확한 병명을 몰라서 아이를 떠나보냈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정확한 판단만 했어도 살릴 수 있는 일이었는데..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Q. 감독님을 통해서 통티모르가 또 동티모르의 국민들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축구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요?
A. 식민지 시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끈기도 시간관념도 별로 없습니다. 축구가 하고 싶어 왔다가도 힘들다 싶으면 그만 둬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어른 세대의 무기력, 패배주의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하는 성취감을 맛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결과 덕분에 아이들이 긍정과 희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가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을 거치며 느끼고 배운 것을
이 나라 아이들에게도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동티모르는 기간과 방법은 다르지만 우리와 같은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Q.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듯, 동티모르의 아이들이 감독님으로부터 많이 배운 것처럼 감독님께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바뀌셨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A. 동티모르에 오기 전까지도 저도 욕심이 많고 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일이 잘풀리지 않아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찾아간 곳이 동티모르였습니다. 사업은 뜻대로 잘되지 않았지만 저는 열정과 활력을
이곳 아이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앞으로 더 힘든 삶이 될 것 같습니다.(하하)
Q. 동티모르의 국가적 영웅이 되시고, 다른 나라의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하시는 등 동티모르와의 소중한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으신데요. 앞으로의 비전과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A. 저는 희망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을 통해서 희망과 열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게 희망을 심어준 윌 아이들을 저는 절대 버릴 수 없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티모르 축구 발전을 위해 힘쓸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동티모르 정부와 상의하여 축구학교를 건립하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Q. 감독님께서는 자랑스러운 해병대의 선배이십니다. 허정무 감독과 해병대 생활을 함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해병대원으로 복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 진해에서 기본 훈련 6주를 마치고 해군본부에 전입되어 해병(해군대표)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고 그 당시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신병훈련소에서 축구선수라 인기가 꽤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해병대라는 굉장한 자부심이 엄청났었습니다.
선수생활 당시 육군이나 공군과 여러 차례 시합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전쟁하는 기분이었고 지면 거의 죽음이었습니다.
꼭 이겨야했습니다(하하).
병영생활은 선수끼리 함께하였고 진해에 자주가서 훈련을 했었습니다. 처음 입대했을 때 말로만 듣던 해병대에 왔다는 것이
약간 겁이 났고 긴장도 되었지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했던 군생활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습니다.
Q. 해병대에서 배우고 익혔던 해병대 정신이 지금의 감독님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셨나요?
A. 물론입니다. 해병대에서의 생활이 지금도 감독생활하는 데 중요한 '승부욕'이라는 것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해병대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갈 생각입니다.
Q. 마지막으로 지금 감독님과의 인터뷰를 읽고 있을 해병대 후배들을 위해 힘이 되는 말씀 한마디 해주십시오.^^
A.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특히 젊었을 때는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 정신을 잊지 말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베풀면서 살아가면 반드시 인생에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면서
군생활 보람있고 건강하게 마치길 후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파이팅!
|
첫댓글 저희 기수에도 국가대표 출신 변일우선수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 으로는 4주 훈련후 해군대표로 합류 했던 것 같습니다.
동티모르의 축구환경이 개선 되길 바랍니다.
음지에서 수고가 많으시군요 개척자에 정신 높이 사드리고 싶으네요 화이팅..
변일우 감독님 해병대 선배님 이셨나봅니다.. 경희고 감독선생님이신걸로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