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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9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다니 7,15-27
복 음 : 루카 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의 묵상
김 동희 모세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그리고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21,36)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듯이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연습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신앙인이 사랑을 실천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말과 행동을 삼가는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노력일 뿐만 아니라 믿는 이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가꾸고 지켜 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는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고여 있지 않고 흐르며 출렁이는 물이라야 썩지 않고 바다까지 흘러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은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샘을 벗어난 그 힘으로 계곡을 겁 없이 흘러내려야 하고,
계곡에서 쏟아져 내린 힘으로 구불구불 강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을 새롭게 할 기회인 ‘대림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과 새롭게 만납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사람이 자기 집 정원을 단장하기 위해 전문 업체와 계약했습니다.
일주일 뒤, 이 사람은 부엌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다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동안 오랜 친구였던 관목이 너무 많이 잘렸고, 잔디는 삐뚤삐뚤한 상태였습니다.
일주일 동안의 작업이 절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약했던 전문 업체 대표를 만나서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조용히 말을 듣던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어색하겠지만, 한 달 뒤에는 충분히 만족하실 것입니다.”
정말 한 달 뒤에 이 사람은 너무나 만족했습니다.
비용을 들인 가치가 있었고, 그의 정원은 그토록 원했던 꿈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왜 이 사실을 느낄 수가 없었을까요?
이 전문 업체는 관목과 잔디의 성장에 맞춰서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오랜 기간 만족할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주님의 일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순간에는 감사의 마음보다 불평불만의 마음이 더 큽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면 주님의 일이 가장 옳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삶이 아닌 영원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영원한 삶만이 우리를 희망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 날의 징조들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현재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언제 그날이 올지 계산하기보다,
‘오늘을 어떻게 깨어 살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루카 21,34)라고 하시지요.
바로 자기 내면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갑자기 덮쳐오고,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친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환난을 피하기 위한 도피 수단이 아닙니다.
그보다 그 환난을 견뎌낼 힘을 얻는 통로가 됩니다.
특별히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루카 21,36)이라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서다’라는 동사는 법정 용어로,
심판관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엎드리거나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죄를 선고받고 당당히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당히 서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의 아들과 가까운 관계, 함께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행동 양식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만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면 늘 숙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어,
성전에서 행하신 종말에 대한 긴 담화의 결말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그렇습니다. 종말을 기다리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선 두 가지로 대표됩니다.
<첫째>는 “스스로 조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먼저 자신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합니다.
“그대 자신과 그대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1티모 4,16)
<둘째>는 “늘 깨어 기도” 하는 일입니다.
곧 기도하되, ‘깨어 기도하는’ 일이요, 깨어 기도하되, ‘늘 깨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소망하고 의탁하는 일이요,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는 일이요,
“늘 깨어 기도하다.”는 것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고, 그분 안에 머무는 일입입니다.
우리는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루카 21,36)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일상 안에서 당하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루카 21,34)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끊임없이 멈춤이 없이 드리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깨어남’의 종교가 아니라,
‘깨어있음’의 종교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오신 주님’께 깨어있음이
바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면 깨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면 항상 그분을 향하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늘 깨어 기도하라.”
조 욱현 토마 신부
한 해의 전례력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권고를 주신다.
“너희 마음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 참조).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없는 자에게 종말은 두려움이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영광과 해방의 순간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있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묵상해 보자.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세 가지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신앙을 약화하는 유혹이다.
방탕 : 하느님 대신 쾌락을 추구하며 순간적 만족에 묶이는 삶이다.
만취 : 육신을 넘어 영혼마저 마비시켜 주님을 향한 감각을 잃게 만드는 삶이다.
일상의 근심 :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속적 걱정에 사로잡혀 마음이 무거워지는 삶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영적 무감각을 불러오며,
그 결과 마지막 때에 덫처럼 갑자기 우리를 붙잡을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깨어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는 삶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된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기에,
죽음은 그에게 영광의 시작일 뿐이다.”(Homilia in Matthaeum 77,2)
성 아우구스티노도 권고한다. :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오늘을 당신의 마지막 날처럼 살라.
그러면 언제 종말이 와도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 가운데 주님을 맞을 수 있다.”(Sermo 38,4)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과연 오늘 지금 주님을 만나도 기쁘게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제는 이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죽는 연습 : 내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매일의 작은 선택이 곧 종말의 준비이다.
기도의 삶 : “늘 깨어 기도하라.”(36절)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드려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종말론적 삶 : 종말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 안에 이미 시작되어 있다.
전례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있는 삶과 끊임없는 기도의 삶으로 초대한다.
세상 근심이나 방탕, 만취로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고,
주님을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주님을 맞이하며,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공지능의 대표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을 인공지능 사업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인공지능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인공지능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건이 4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은 자체로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과 네이버’는 한국이 오랫동안 구축한 플랫폼입니다.
이런 플랫폼을 통해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이미 구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정보 처리능력이 관건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입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 국가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배터리입니다.
인공지능의 정보는 배터리가 있어야 저장할 수 있는데
한국은 세계 최고의 배터리 생산 국가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인공지능을 산업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생산 공장이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더욱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 단계를 보면, 마치 인간의 진화를 보는 듯합니다.
처음 인공지능은 ‘햄버거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햄버거를 그릴’ 수 있었고,
그다음에는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었으며, 이제는 ‘직접 햄버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손을 빌리던 기술이, 이제는 인간을 돕는 비서가 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존재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일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은사는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은
단순한 위치의 질문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입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은 관계의 책임을 묻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들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내면의 거울과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수많은 정보를 알고, 더 빠르게 답을 내놓는다 해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영혼이 묻고, 믿음이 답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지식의 시대’를 열어주었지만,
신앙은 여전히 ‘지혜의 시대’를 열어줍니다.
지식은 알고 이해하는 힘이지만, 지혜는 사랑하고 나누는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처럼,
깨어 있는 신앙인은 받은 은총을 세상과 나누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신앙의 눈을 뜨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희망의 눈을 뜨고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나누는 것도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큰 행복입니다.
신앙인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결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하루, 우리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기를,
그리고 하느님 앞에 늘 깨어 기도하며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또 다시 한해의 끝자락에서!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또 다시 교회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총의 선물인
‘새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입니다.
마지막 날에 저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오늘따라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 12-13)
우리가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마치 섬광처럼 다가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의 내 삶을 진지하게 한번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진흙탕처럼 흐려진 영혼의 상태를 진정시켜야겠습니다.
아직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좀 더 영적이고 좀 더 단정하고 품위 있는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자주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올해도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헛되고 의미 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시간들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 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곰곰이 성찰해보니 놀고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한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남아있는 시간들,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프란치스칸 모든 성인의 날 - 부끄러워하며 쇄신하며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든 성인의 날이 있는데
굳이 프란치스칸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성인도 많다고 자랑삼는 축일이라면 참 유치한 축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사실은
제가 바로 자랑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삼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전혀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하셨습니다.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이 우리에게는 자랑하는 날이 아니라
성인들처럼 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는 날입니다.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는 사람은 이 축일을 지낼 자격이 없고
내가 프란치스칸입네 하고 얘기하지도 말 것입니다.
왜냐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자랑만 하는 것은
프란치스칸으로 살려고 하지 않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 이름으로 득만 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프란치스칸 이상을 얘기하면 외려
현실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우리는 물론 성인들처럼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지 못합니다.
진정 닮기를 원했고 닮으려고 노력하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지금까지보다는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미래가 있고 발전의 가능성이 있지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뻔뻔한 것일 뿐 아니라 미래가 없습니다.
그냥 내내 득이나 보고 덕이나 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쇄신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쇄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앞서는 것이지만
개인의 쇄신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이 축일을 같이 지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인은 홀로 성인이 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홀로 쇄신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있었기에 클라라가 있고,
클라라가 있었기에 프란치스코가 있음을 알고 있고
이 두 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성덕에 나아갔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처럼 정말 독하게 혼자 성덕을 이룬 성인들이라면 몰라도
거의 모든 성인은 같이 쇄신하고 같이 성덕을 이루어갔습니다.
이는 마치 한배를 탄 사람들과 같은 이치입니다.
배를 타면 나 혼자 갈 수 없고 내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같이 하느님께 가든지 같이 세속을 향해 가든지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같이 하느님께로 향해 가는지 돌아보고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면 쇄신을 같이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인 하느님
박 상대 미르코 신부
“늘 깨어 기도하라.”(36절)
이것이 한해 전례달력의 마지막 날에 선포되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위함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재림하시는 人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기 위함이다.
우리가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매일미사의 복음을 묵상한 바에 의하면
인자의 재림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재림의 순간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묵시적 징조나 표징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둑(마태 24,43; 루카 12,39)이나 덫(35절)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거나 어느 것일까 하고 점치려하지 말라.
잘못 골랐다간 낭패를 본다. 그러므로 둘 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인자의 재림은 준비된 ‘바로 그날’에 일어날 사건이 되겠지만,
사실상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듯이(루카 17,21),
인자의 재림도 반드시 미래의 어떤 사건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마태 28,20),
인자의 재림은 우리 가운데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더 이상 옛적의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를 향하여
그 여정을 시작하였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의 재림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별 다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우주계시적 사건이며,
영광의 그분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하여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발췌된 성서를 읽음으로써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서는 누구에게나 그를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성서가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으로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정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그 마지막 또한 어떤 모양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서 있는 극히 제한된 그 자리와 시간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며,
전역사의 차원으로 극대화 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알파(A)요, 오메가(Ω)이시기 때문이다.
더러는 길게 살고, 더러는 짧게 사는 것이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탄생과 죽음은 세상의 창조와 종말의 의미를 가지며,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세상 전역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없으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러기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만의 삶을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으로 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시자가신 일, 그 일을 당신 뜻에 맞게 질서 지워주시고,
용기와 지혜로써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그 마침을 채워주실 것이다.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
이 승화 시몬 신부
마지막 날입니다.
전례력의 끝이자
내일을 위한 발걸음을 새로 내딛는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기본에 충실해야 함을 다시금 다짐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
이미 알고 있는 그 길을 꾸준히 걷는 것만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는 우리를 유혹하는 3가지를 말해줍니다.
방탕은 기준이 없어질 때 생깁니다.
자유의 남용이 바로 방탕으로 이어지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만취는 이성적 판단을 멈추게 합니다.
감성에만 치우쳐 관계를 해치게 합니다.
옳고 그름을 놓치게 만들죠.
일상의 근심은 불안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부정적 생각에 가둬지게 하여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관심을 흩어버립니다.
이 3가지 유혹에서 자신을 보호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절제와 이성과 믿음을 든든할 때
어떤 상황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구원된 삶을 이미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또다시 영적 평화와 함께하는
한해를 맞이할 수 있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