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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 이 | 팔공산 (八公山) 1,192.9m |
위 치 | 대구광역시 동구, 경북 경산시 외촌면, 군위군 부계면, 영천시 신녕면 |
관리사무소 | 054-975-7071 |
특징/볼거리 | 대구의 진산으로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최고봉인 주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리고 있으며,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것처럼 뻗쳐있다. 정상의 남동쪽으로는 염불봉, 태실봉, 인동, 노족봉, 관봉등이 연봉을 이루고 서쪽 으로는 톱날바위, 파계봉, 파계재를 넘어 여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꺾어져 멀리 가산을 거쳐 다부원의 소아현에 이르고 있다. 특히 동봉일대는 암릉과 암벽이 어울려 팔공산의 경관을 대표하고 있다. 봉우리의 암벽은 기암이다.
팔공산 관봉(850m)에 평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조성된 단독 원각상 갓바위는 보물 제 431호로 지정 되어 있으며, 본래의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으로 갓바위라는 이름은 이불상의 머리에 자연판 석으로 된 갓을 쓰고 있는데서 유래 된 것이다. 갓바위는 누구에게나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다. |
인기순위 | 인기명산 100 24위 (한국의산하 1년간 접속통계에 의한 순위)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갓바위, 동화사등 볼만 한곳도 많아 특정 계절에 치우치지 않고 사계절 두루 도시민의 휴식처로 인기가 있다. 산림청 선정 100 명산 선정사유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6km에 걸친 능선 경관이 아름다우며 대도시 근교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도시민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1980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
등산시간 | 2 - 3시간 |
등산지도 | |
등산코스 | ㅇ동화사 주능선 코스 : 부도암 - 내원암 - 염불암 - 염불봉 - |
산행기 | ㅇ팔공산 산행기 |
대중교통 | 대구 시내에서 파계사나 동화사까지는 50분 걸리며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다. 영천 은해사는 대구 동 시외버스정류장(053_756_0017)에서 포항행 직행버스를 탄다. 첫차 오전 5시30분, 막차 밤 9시. 은해사까지 45분 걸린다. |
도로안내 | [갓바위지구] |
안내 사이트 | ㅇ팔공산 : [경상북도] 팔공산 소개 |
대구 팔공산(八公山) 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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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중악, 부악, 공산이라 불렀다.
여기서 중악이란 오악의중앙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악이라 부른것이다. 신라시대 오악이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남악 지리산으로 그 가운데 위치하는 산이라 뜻에서 중악이라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동화사 사적비의 기록도 이를 방증하는 사료라 할 수 있다.
공산은 팔공산의 본래 이름이다. 동화사 사적비의 기록에 보면 중악에 제천단이 있어서 공산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악중에 오직 중악에만 제단을 둔 것이 아니어서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공산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 고려사 등에서 팔공산의 이름을 모두 공산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서, 고려시대는 팔공산을 공산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와 경상도속찬지리지 에서도 팔공산을 공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비로소 공산을 팔공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공산을 팔공산이라 명명한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설이 전하고 있다.
첫째, 팔장군이 순사했다는 데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달성군지에 의하면 고려와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자 고려태조 왕건이 정병5천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하려다가 도리어 이곳에서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하여 전세가불리하여 동수대전때 신숭겸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견훤의 군사와 싸우다가 전사하였을 뿐 아니라 김락, 복지겸, 홍유인, 전이갑, 전의갑 등 여덟 장수가 순사하자, 고려 태조 왕전이 팔장군의 팔자를 공산 앞에 붙였다고 한다.
둘째, 팔간자를 봉안한 데서 팔공산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동화사사적비에 의하면 심지가 영심으로부터 팔간자와 고간자를 동사 곧 지금의 통화사에 봉안했다. 그 뒤 고려 예종이 명하여 궁중에 가져와 친견하실 때 구간자를 분실하여 대용품을 만들어 보냈다. 이 때에 구간자를 분실하여 대용품을 만들어 보냈기 때문에 팔간자만 서기를 발하여, 팔간자의 팔자를 공산앞에 붙여 팔공산이라 명명했다는 설이다.
셋째, 공산이 여덟 고을의 경계를 이룬 산이라는 데서 팔공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여덟 고을이란 주장은 신령현읍지와 영종대왕원당사적의 팔주와 팔읍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팔공산의 명칭에 관한 항간의 유래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수 있으나 이 외에도 중국 안휘성 봉대현의 동남쪽 비수의 북쪽 회수의 남쪽에 팔공산이 있으므로, 조선 유학자들이 모화사상의 발로에서 공산을 팔공산이라 명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한 그거라고는 단정지을 수가 없다. 팔공산의 깊은 유서만큼이나 그 명칭의 유래 또한 복잡다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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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窟 앞에 거미줄이 있어서 안에 태조 왕건이 없는 것을 알고 다른 곳에서 찾아 다님
어쨌든 고생했네
좋은것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네 짝짝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