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38) ///////
202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 이봉주
폐사지에서 /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석 하나 얹어 놓으면 그만이겠다
여기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겠다
옛 집이 나를 부르는 듯
문득 옛 절터가 나를 부르면
천 년 전 노승 발자국 아득한데
부처는 귀에 걸었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을
부도 속 깊게 묻어 놓고 적멸에 드셨는가
발자국이 깊다
*귀부
(龜趺)【명사】 거북 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
*당간 지주
(幢竿支柱) 당간을 받쳐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 절 입구에 ∼만 남아 있다.
당간
(幢竿)【명사】 『불』 당(幢)을 달아 세우는 대.
당
(幢)【명사】
『불』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의 문 앞에 세우는 기.
부도
(浮屠·浮圖)【명사】 『불』
1. 부처.
2. 이름난 중이 죽은 뒤에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둥근 돌탑. 승탑(僧塔).
[당선소감] “응모 3년 만에 얻은 결실”
걸어갈 때나 운전을 할 때 그리고 일을 할 때 스치는 직관들.
시는 그렇게 문득문득 나에게로 찾아왔다.
잡아두지 못하면 달아나는 한 줄의 시어들.
내가 시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였다.
그 열쇠 하나로 시를 쓰길 9년.
삼 년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당선 전화를 받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풍경은 어제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나도 변한 것이 없다. 허기가 밀려 올 뿐이다.
이제 이 허기를 어떤 시로 채울 것인가를 고민한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시의 부리로 결빙된 시간들을 쪼아야 한다.
저 너머에 숨겨진 다른 모습을 투시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시인이고 싶다.
부족한 글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날이 오면 내가 시를 배운 유일한 스승님 이영춘 선생님께 제일 먼저 알려드리고 싶었다.
선생님의 칭찬에 고래가 시를 쓰듯 시를 썼다.
오늘이 있게 지도해주신 이영춘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매달 머리를 맞대고 시를 토론하던 ‘빛글동인회’ 회원님들과
시를 도자기처럼 수없이 부수며 다시 빚고 있는 한림대학 시창작반 문우님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 기쁨을 같이 하고 싶다.
[심사평] ‘있고 없음’ 경계 허무는 담대한 상상력 돋보여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편들을 읽었다.
불교적인 소재들이 시적 모티프로 작용한 작품들이 많았다.
사찰 공간에서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목어, 운판 등의 사물과 수행의 경험,
불교의 가르침 등을 시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경우가 우세했다.
그러나 시적인 구조에서의 완결성이 부족한 경우나
한 편의 시를 통해 노래하려는 생각의 내용이 시행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방대한 경우들도 있었다.
관심 있게 본 작품들은
‘바다 출력’,
‘집에 들다’,
‘수련의 바깥’,
‘동전 불사’,
‘색패’,
‘갑사의 봄’,
‘폐사지에서’였다.
이 작품들은 서로 경합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또 한 편의 시를 통해 뭉클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거나, 관습적 사고를 깨뜨리거나,
사상의 둘레를 확장시키는 데에 성과가 있었다.
이 작품들 가운데
‘집에 들다’, ‘갑사의 봄’, ‘폐사지에서’를 최종적으로 정밀하게 살펴보았다.
시 ‘집에 들다’는
집이라는 공간을 인심(人心)의 공간으로 해석한 작품으로 그 고요한 교감의 내면을 무량수전에 빗대었다.
다만 시적 표현의 모호함을 시편에서 들어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시 ‘갑사의 봄’은
생명들의 역동적 움직임을 맑은 언어에 담아낸 작품이었다.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깨끗한 시심이 돋보였다.
“물을 밀면 여러 갈래의 뿌리가 읽혀진다”와 같은 시구에서는 내밀한 감각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나열의 방식에 의해 시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는 점은 아쉬웠다.
당선작으로 ‘폐사지에서’를 선정했다.
함께 보내온 시편들이 일정하게 고른 높이를 보여주었고, 또 시 창작의 연륜이 느껴졌다.
시 ‘폐사지에서’는 허공에서 독경의 소리를 살려내고,
떨어진 낙엽에서 풍경의 소리를 복원하면서 절이 사라진 공간에 다시 절을 짓는,
멋진 정신의 노동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또한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라고 말해 모든 생명 존재 그 자체에
법성이 깃들어져 있다고 바라보는 대목과 있고 없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담대한 상상력은 당선작으로서의 풍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불교시의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시길 기대한다.
당선하신 분께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모든 분들께도 정진을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