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동안 지속된 전쟁과 그로 인한 격량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떤 물음과 답을 얻을 수 있을까
7세기 동북아시아 격량의 시작점은 589년 수에 의한 중국 통일이다.
수의 중국 통일은 누구보다 고구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까지 남북조 분열 구조 위에서 전개하여 온 등거리 외교 전략이 무너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607년 4월부터 9월까지 수 양제는 몸소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북쪽 변경지대를 순행하였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어디까지나 양제와 그의 측근들의 욕망과 관념 때문이다.
612년 정월, 양제는 고구려 원정군에게 출진 명령을 내렸다. 군사는 모두 113만 3,800명이었고, 치중을 담당한 인원도 200만 여명에 이르렀다
613년, 수 양제의 2차 침공을 또다시 좌절시킨 요동성전투와 농민봉기군의 반란으로 철수
614년, 다시 군사동원령을 내려 고구려 침공 준비했으나 영양왕이 입조하여 항복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퇴각
영양왕의 입조가 이루어지지 않자, 양제는 615년 10월 고구려 원정을 다시 꺼내들었으나 군신의 반대가 심해 결국 수 멸망 때까지 실행하지 못했다.
618년, 이연은 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 왕조를 개창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626년 7월, 이세민은 정변을 일으켜 형 태자와 동생을 차단하고 아버지 고종을 압박하여 양위를 받아 황제에 올랐다. 그가 당 태종이다.
642년 10월, 연개소문 정변을 일으키다.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 즉위시켜 전권 장악
644년 11월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선포, 645년 1월 총사령관 이적. 고구려 10여 개 성을 점령 했으나 안시성에서 패배하고 후퇴
660년 당 고종은 신라와 함께 백제 정벌, 661년 고구려 정벌 선포하지만 662년 철수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의 권력 투쟁. 668년 고구려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