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의 말씀(2021.11.14.) 말씀/요한 3:16
사랑의 기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주와 지지난주 목요일 연속으로 독서모임을 가지면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공부하였습니다. 신안 천사대교를 지나 팔금도 주변 섬과 바다가 내다보이는 채일봉 전망대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거기서 묵상하는 '사랑의 기술'도 아주 은혜스러웠습니다. 독일 태생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가 철학적으로 쓴 사랑학이라 그런지 좀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래도 사랑에 대해서는 이만큼 좋은 책도 찾기 어렵습니다. 이 분은 사랑을 기술이라고 합니다. 언듯 들으면 "사랑이 기계인가, 뭔 기술인가?"하는 생각이 들수 있지만 그가 말하는 핵심은 사랑은 단지 우연히 경험되고, 겪게 되는 감정이 아니라 반드시 배우고 숙달해야할 필수 과제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설, 시, 노래, 드라마 영화 등 모든 방면에서 단골 주제가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며 행복하고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사랑을 말하고, 듣고, 시를 쓰고, 노래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작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고 있는 모든 사랑의 결말이 거의 해피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이별의 부산정거장, 다시 못 볼 사람, 낙옆 따라 가버린 사람, 날 두고가지마오 등..거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설령 오래 붙어 지낸다 해도 사랑의 감정은 다 사라지고, 결국에는 실망, 권태, 적대감, 불감증 등만 남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업이나 활동은 실패할 때 원인을 분석하고 실패를 성공으로 돌리고 만회를 하는데, 사랑에 관해서는 한번 실패하면 원인 분석 없이 끝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에리히 프롬이 지적하는 대로 사랑에 대해서 공부를 안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 역시 정말 배우기를 원한다면 다른 기술 즉, 음악이나 그림 건축 또는 의학 공학기술을 배울 때처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첫째, 이론의 습득, 둘째, 실천의 습득, 세째 기술 숙달입니다.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잘 알지만 마음먹었다고 절대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론적인 기초공부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실습과정으로 들어가 연습을 해야하고, 그리고 한 두번이 아니라 숙달될 때까지 고급과정의 공부와 피나는 연습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10년 지나서 천상에 소리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은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독생자를 주심으로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천지창조 이래 가장 위대한 선포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가 사랑으로 시작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는 사랑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그냥 우리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심으로(give)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주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닌 활동언어이며 생명 언어입니다. 주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주면 신기하게 역사가 꿈틀거리며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이기적이고 차갑고,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얼굴이 모두 어둡고 시무룩하다고 합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안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무엇인가 작은 것을 주어보십시오. 반드시 웃음 소리가 들리고, 행복해하는 밝은 얼굴이 보이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그렇게 사랑의 활동이 나로부터 시작될 때 우리는 삭막한 세상이 살만한 따듯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어느 한 아이가 약국에서 진통제와 약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들켰습니다. “이리 나와! 이 도둑놈아! 도대체 뭘 훔친 거야?” 주인한테 발각이 되고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소년은 그렁그렁 눈물어린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약을 가져다 드리려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는 중 갑자기 옆 식당의 주인아저씨가 등장하여 그 약값을 대신 계산해줍니다. 직접 팔고 있는 음식까지 넣어주어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 30년 식당 아저씨는 아직도 식당을 했습니다. 역시 거지에게 음식을 주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뇌출혈이 찾아와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병원비가 나왔습니다. 병원은 딸에게 아버지의 병원비를 청구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할 때 무려 2,700만 원에 이르는 큰 금액 이었습니다. 병원비 마련에 전전긍긍하던 딸은 결국 가게를 급매물로 내놓고 다시 힘없이 병원으로 돌아와 아버지 침상 곁을 지키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상 위에 놓여있는 병원비 청구서에는 금액이 ‘0’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청구서 뒤에는 조그만 메모지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병원비는 이미 30년 전에 지불됐습니다. 세 통의 진통제와 맛있는 수프와 함께…. 안녕히 계세요. 안부를 전합니다.” 그 순간 딸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 하나있었습니다. 30년 전 약을 훔치다 붙잡혀 어려움에 처했던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 그 소년이 어엿한 의사로 성장해 바로 아버지의 주치의를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사는 정성스레 30년 전 자신을 돌봐 주었던 식당 주인 할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것입니다. (Giving is the Best Communication)” “베푸는 것이 최고의 소통입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이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태국 공영 광고방송에 실려 전 세계인을 울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들이 느끼는 수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라는 것은 많은 것을 가져서가 아니라 줄 수 있기에 부자입니다. 주지 못한다면 역시 가난한 자입니다. 만일 내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나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다면 나는 여전히 나는 행복자 이며 부자입니다. 왜냐하면 없어도 여전히 사람들을 부요케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며 배우며 사랑하며 남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많은 재물, 많은 땅과 건물을 가진 거부라고 해도 남에게 베푸는 것이 없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없다면 성공인생이 아니라 실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주는 것만이 남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주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전 인간적 영역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무엇인가 준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속에 살아있는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때론 슬픔도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서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킵니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 됩니다. 천 권사님이 독서모임 때면 찰밥에, 여러가지 맛있는 반찬을 해 오셔서 참석자들을 감동시킵니다. 나주에 있는 정상국 목사님도 달려오게 만듭니다. “이번에는 힘들고 사람들도 많으니 그냥 김밥이나 식당에서 먹지요”해도 보면 또 잔뜩 한 보따리 해오십니다. 전번에는 민어찜, 이번에는 코다리 찜으로... 때로는 새벽시장가서 장을 보시기까지 하며 수고를 하십니다. 오늘 아침에는 또 추수감사예배 생각하며 가래떡으 만들어 보낸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부자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섬기고 주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천사표 음식을 맛있게 먹고 행복해 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또한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라 합니다. 제가 아침 큐티 말씀을 올린지 벌써 69번째가 되었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일년 365일 매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아침 5시전에 항상 일어나야 하고, 아무리 밖에 나가 여행이나 등산을 하고 피곤하여 돌아와도 밤이 오기 전에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루라도 멍 때리며 게으름을 피우며 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매일 하게되는 것은 아침마디 말씀을 나누어주는 기쁨, 말씀을 붙들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일어나는 생명역사를 보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번 씩 댓글을 올리던 일본의 디모데 선교사님은 이제 매일 댓글을 보내며 회개와 결단의 소감을 보냅니다. 짧고 임팩트하게 다가와 생명과 힘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제가 큐티로 디모데선교사님과 영적 소통하게된 것이 큰 은혜요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최은선 자매님도 내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영광 진리로 기도하며 예배하고 노래하는 자가 되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제목을 보내고, 대구의 조은미 사모는 귤과 애기 전복을 보냈습니다. 아이구 또 보냈다요 하니까 목사님이 잘 해드시는 것 같아서 드리면서도 자기도 기쁨이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지말라고 말릴 수 있겠습니까? 서용주 집사님은 큐티를 보내며 아들 안부를 묻고 기도하겠다고 하니 대봉을 보내주셨습니다. 준다는 것이 단지 어떤 물건이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의 소통이며 기쁨과 생명의 창조라는 것을 요즘 깊이 느끼고 배우고 있습니다. 아멘! 사랑은 또한 보호와 책임감도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산을 좋아해, 나는 바다를 좋아해 하면서 쓰레기를 쉽게 버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꽃을 너무 사랑합니다. 꽃만 보면 이쁘다고 사진을 찍고 보내곤 합니다. 그러면 서 꽃을 꺽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꽃을 키우고 가꾸면서 물로 주지 않고 관심을 갖기 않는다면 그것은 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랑은 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활짝 핀 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꽃말을 연구하고, 꽃씨를 얻어다가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가꾸고, 벌레를 잡아주고, 여름에는 물을 주고 겨울에는 얼어죽지 않도록 관심 갖고 보호해주는 것, 온갖 수고와 땀 흘리는 모든 것이 꽃을 사랑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꽃과 같다 한번 들어보세요. 사랑은 꽃과 같다 사랑은 꽃과 같다꽃처럼 아름답게 피기도 하고 꽃처럼 슬프게 시들기도 한다 꽃은 언제나 활짝 핀 모습만이 아니다 꽃 씨도 있고 꽃 잎도 있고 꽃몽우리도 있듯이사랑도 씨가 있고 잎이 있고 몽우리가 있다 활짝 핀 꽃만이 꽃이 아니듯이활짝 핀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다. 아주 작은 씨앗 하나를 뿌려 꽃을 가꾸듯이 작은 씨앗을 심고 가꾸는 과정 모두가 사랑이다 그렇게 피어난 사랑은 마음속에 꽃씨가 되어영원히 시들지 않는 사랑의 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사랑은 꽃과 같다꽃이 피고 지듯이 그렇게 피고진다사랑하는 사람은 꽃을 닮는다.
‘사랑의 기술’ 책을 보면 요나의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왜 그는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갔는가? 그가 고래 뱃속에 던져져서 3일 동안 갇혀 지내며 회개를 하였지만 여전히 그는 니느웨성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불평스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니느웨 백성이 회개를 하자 그로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지체하시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는 성읍 동쪽에 앉아 거시서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앉아 심판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박넝쿨을 준비하사 그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주시자 요나가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자 이틑 날 아침에 박 넝쿨을 보내어 갈아먹게 하셔서 시들게 하십니다. 해가 머리에 쪼여 요나가 혼미하여 죽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요나 4:9-11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여기서 하나님은 요나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요나는 스스로 고백하듯이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 시대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선지자로서의 사명인의 자세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랐지만 백성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성에 심판을 선고하시면서도 그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지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오래 참으시는 것은 구원의 역사를 오랫 세월동안 공들이며 섬겨오셨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 이만 여명의 사람들과 육축도 많이 있습니다. 심판 이전에 아끼시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랜 세월 힘써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마침내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구속의 역사를 가꾸시며 돌보아오셨는데 어찌 한 영혼인들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백성을 위해서 한 것이 없습니다. 꽃씨 하나 심지를 않았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울어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끼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한 심판 뿐 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배우려면 실제로 관심 갖고 책임감 갖고 물을 주고 까꾸는 노력작은 실천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도 사랑이 자라게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기다리고 참는 마음, 아끼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열심히 사랑의 기술을 배우는 자들이 되어, 사랑을 줌으로써 많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변화되는 것을 보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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