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스탄불 첫날 (23.4.11, 화)
한국과 터키 간에는 6시간 시차가 있어 이제 여행의 첫 일정이 시작됩니다. 원래 미국 오렌지 카운티 장로교회(OCPC)는 32명을 계획했는데 한 명이 모자란다고 하여 처제가 집사람에게 형부를 데려오라는 지시/부탁을 하여 내가 선 듯 나선 겁니다. 그런데 그 뒤 인원이 늘어 모두 45명이 되었지요. 목사님이 3분 동행하고 현지 가이드도 이스탄불에서 17년째 목회 일을 하는 김홍기 목사라는 분입니다.
분위기를 대강 짐작하시겠지요? 여행은 기도와 함께 출발하고 여행 중 술을 마실 기회는 한 번도 없었지요. 요즘 술을 하지 않아 아쉬움은 없었지만, 터키 반도인 아나톨리아 중부의 대평원이 포도밭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이곳 와인은 어떤 맛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은, 처제가 대강 세어 보니, 7-8명이 된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돌아가 만보기로 재어 본 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첫날 1만 5천보, 둘쨋 날 1만 2천 보, 평균이 1만 보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를 배려하여 힘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번 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순례가 목적입니다. 관광은 보고 즐기고 떠들며 노는 것이지만 순례는 수난이 따른 여행입니다. 수난은 영어로 suffering이지만 예수의 수난을 말할 때는 passion을 쓰기도 합니다. 독일어로 수난이 Leiden이지요.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Leiden 말입니다. 그러나 schaft를 붙인 또 다른 명사형 Leidenshaft는 정열입니다. 영어와 독일어의 passion과 Leidenschaft가 모두 정열과 수난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게 뭔가 통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수난을 겪는 과정에서 고통과 희생을 수반하지만, 희열이 뒤따른다는 게 아닐까요?
아침에 일어나 호텔 창문을 열어보니 여늬 도시의 아침과 다름없이 출근길 차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10시에 출발이라 이번 여행 중 가장 널널하게 아침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버스 좌석은 한국식으로 한번 앉으면 끝까지 같은 좌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 칸씩 뒤로 물러나는 서양 여행사의 방식이 어떻겠느냐고 슬쩍 물어보았더니 여러 목사님과 장로들이 논의한 후 그대로 하자고 합니다. 나는 차멀미가 심해 늦게 타면 뒷자리가 배정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데 별탈 없이 여행을 마쳤습니다.
비잔티움이라.... 감회가 색다른 도시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1453년 5월 29일 화요일이군요. 이탈리아의 (서)로마제국이 476년 야만족의 침략으로 망한 뒤 그 정통성이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와 기독교의 본산이 되었다고 해서 제2의 로마(the second Rome)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도시지요. 당연히 서방 문명의 상징이었지요. 그래서 정통성을 가진 교회(the orthodox church)라고 부르지요. 오늘날은 동방정교회라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멸망 후에는 러시아가 그 정통성을 이었다면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the third Rome)이라고 자칭했습니다. 기독교, Christianity의 전통은 이어졌을지 몰라도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간의 관계는 지금도 원만하지 않습니다. 십자군 전쟁 중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진군하던 서유럽 가톨릭 군대가 창끝을 돌려 콘스탄티노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보물들을 약탈한 악랄한 사건이 있었지요. 콘스탄티노플의 약탈(the 1204 sack of Constantinople)이라 부릅니다. 2001년 로마교황이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 ‘뿔 둘 달린(교황의 모자) 로마의 괴물’(two horned monster of Rome)이라고 비난하며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젊은 군주 무하마드/모하메드/메흐메트 2세에게 함락된 된 날이 5월 29일입니다. 서양에서 예수의 순교일이 금요일이고 예수와 12사도를 합치면 13이라 해서 13 금요일을 불길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에서는 29일 화요일을 싫어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공방전에서도 그리스 지원군이 앞장서서 오스만 터키군과 싸웠지요. 그리스는 1세기에 로마에 의해 멸망되지만, 그리스 문명이 로마에 계승되었다고 자부해왔습니다. 20세기 초 세계의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갈 때 영국인들은 여전히 앵글로·색슨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1930년대 영국의 한 외교문서는 미국에서 앵글로.색슨 majority가 무너지고 있다고 아쉬워하지요.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일찍부터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후삼국 말기 신라의 경주와 같았지요. 경주를 제외한 주변 지역이 고려와 후백제에 점령된 것과 같이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이 도시만이 10m가 넘는 두꺼운 장벽으로 둘러싸여 명맥만 유지하면서 오스만 터키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공성전이 시작된 1453년 4월 2일부터 약 2달 만인 5월 29일 수도는 함락됩니다. 대포가 역사상 처음으로 위력을 발휘했으며 이후 도시국가는 쇠퇴하고 넓은 땅을 가진 민족국가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다고 하지만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제국의 쇠망사>에는 대포의 힘보다는 전통적인 공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네요.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우죠. 그는 이교도에게 포로가 되기를 원치 않아 ’나의 머리를 베어 줄 기독교인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고 외치면서 자주색 망토를 벗어 던지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다음 날 황제의 것으로 추측되는 시신만 발견되지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비잔티움만큼 인류사에 에 큰 영향을 미친 도시가 있을까요? 그리스-로마 문화의 계승자인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인들이 서유럽으로 탈출하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지요. 또 오스만 터키가 동서 교역을 종착지인 이 도시를 장악하자 유럽인들은 새 무역로를 찾아 나선 것이 미주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대포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도시국가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넓은 영토를 가진 민족국가가 등장하며 유럽에서 중세는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됩니다.
이같은 상념을 뒤로하고 일행은 비를 맞으며 관광명소인 그랜드 바자를 찾았습니다. 원래 500개 정도 상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5천 개로 늘어났답니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상품을 팔고 있어 하나만 보면 된다는군요. 시장이란 물물교환뿐만 아니라 정보와 지식이 교류되는 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던 곳이지요.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럼, 오늘날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도 이런 역할을 해왔습니다. 스토아 학파의 stoa는 공공건축, 주랑, 상점(store)에서 나왔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사진 1, 바자 내부)
이어 이스탄불의 상징인 소피아 회당으로 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날 시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온 사제, 수도사, 수녀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당을 메워 신의 가호를 빌며 기도했지만, 도시의 함락과 함께 참혹한 학살의 현장으로 변하지요. 동방정교회 대성당은 이슬람 모스크로 선포되어 500년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가 2020년 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어졌다고 하네요. 중동에서 불던 세속화 바람이 다시 이슬람의 부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기독교 성당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짓고 이슬람 모스크는 메카로 향한다는데 약 15도 차이랍니다. 문득 인간과 침팬지의 DNA 차이는 1-2% 정도인데....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는 15도 정도란 말인가, 그런데도 엄청난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역사는 하나의 선으로(linear) 전개되지 않으며 다른 요소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다가 만나기도 하며 그래서 호수를 이루다가 다시 각자의 길로 나아간다는 역사의 중첩성이 느꼈습니다. 우리는 소피아 회당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한때는 예수님을 모시던 곳이 이슬람의 성자를 모신 곳으로 변한 높은 제단(podium)을 무심히 올려보았습니다. 이슬람에서는 문자 외에는 인물화나 조각상을 세지우 않지요. 그래서 튤립은 알라신을, 장미는 모하메드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사진 2, 소피아회당 돔 천장)
현재 터키는 세속정권입니다. 세속(secular)이란 종교가 정치와 구분되어 종교가 정치 영역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차 대전 후 서구화의 열풍 속에 터키 외에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이란, 이라크 등 여러 중동 국가가 세속정권을 세웠지요. 그러나 반서구화가 이슬람의 정체성을 찾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종교가 다시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터키는 종교는 자유이지만 주민등록증에 자신의 종교를 쓴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서구인들도 굳어 자신의 종교를 말하라면 기독교라 하듯이 터키인 98%가 모슬렘 신자라고 쓴답니다. 그러나 터키인의 종교적 스펙트럼은 넓어 무종교에서 사이비 신앙인, 샤머니즘, 평생 모스크에 한번도 가지 않은 무슬렘 등등이랍니다. 이집트도 비슷합니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코란 낭독이 들리는데도 대부분 애들이 이를 무시하고 공놀이를 하더군요.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터키에서는 기독교를 고급문화로 인식되어 세례만 받는 모슬렘도 있다나요. 여성들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전통에 얽매여 있는데 여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공부를 잘하여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외국인들과 결혼하는 것이라 하군요. 한국인들은 처음에 인기가 없었으나 요즘 마초형 서양인들을 싫어하는 추세에서 한국인들의 인기가 높아진다고 하군요. 물로 K-pop의 영향도 있겠지요.
소피아 회당에서 나오니 히포드롬의 흔적만 남아 있군요. 히포는 말이고 드로모스의 길이니 말이 다니는 길 즉 경마장을 말합니다. 영화 ’벤허‘는 네로시대 로마가 배경이라 이곳 히포드롬은 아닙니다.화려한 경마경기만 생각나지만 사실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532년) 반란군 4만 명을 학살하고 1826년엔 3만 명을 학살한 장소라 하군요. 1826년이라면 그리스 독립전쟁 시기인데 지리적으로 먼 이스탄불에서 이런 만행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불가리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한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넓은 광장에 오벨리스크만 우뚝 서 있어 쓸쓸함을 더해 줍니다. 원래 히포드롬은 450mx130m의 엄청난 규모였지만 지금은 많이 축소되고 또 판석으로 포장된 광장 형태로 남았습니다. 옛날 이집트 여행 중 오벨리스크가 런던, 파리, 뉴욕과 함께 이스탄불에도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이것이군요. 그 반대편에 독일 분수/샘 (German Fountain)이란 게 눈에 띄네요. 독일 황제가 선사한 것이라는데, 1차대전 이전 영국의 동진정책에 대항하여 터키를 포용하려는 독일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스탄불에서의 첫날 이야기를 끝낼 수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합니다. (2023.5.6.)
사진 3, 히포드롬과 오벨리스크
사진 4, 히포드롬에 있는 독일황제의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