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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1년 1월 23일 토요법회
보산 김제원 교무님 설법
원불교를 만나서 – 황자명
초벌: 김혜진 교우님
완성: 한지훈 교우님
잘 들으셨죠? 자명교우님이 오랜만에 하셨는데, 아마 자명교우님이 겪었던 과정을 겪고 있는 분도 계실 것이고, 겪었던 분도 계실 것이고, 겪을 예정인 분도 계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 설영우 교우와 이진수 교우의 인사가 있었습니다. 설영우 교우는 저와 16년 인연이 있었습니다. 거의 무결석을 하고, 토요일, 일요일 모두 피아노반주를 도맡아 하신 분입니다. 이진수교우는 학사에 살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간에 퇴사했는데,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진수교우님이 나가서도 열심히 해서 좋았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본인이 이런 법동지들과, 대종사님의 법을 만나서 자기 마음속에 기준을 삼고 대조를 삼는다는 것은 지금은 잘 몰라도 나중에는 얼마나 큰 은혜인줄 알게 됩니다. 젊을 때는 밥 사주고 하는 것만 고맙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뭐가 더 고마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군대에서 1회독을 하겠다고 했는데, 더 읽으십시오. 바빠서 못한다는 것을 거짓말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없는 시간도 만들어냅니다.
자명교우님 강연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자명교우는 창원 출신인데, 어머님께서 신심이 있으십니다. 저는 자명교우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머님께서 외동딸을 데리고 계속 교당을 다니고, 어릴 때도 원불교 유치원에 멀리까지 보내는 것들을 보면서 어머님의 공덕으로 이렇게 자명교우가 이 자리에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 어머님의 공덕입니다. 자명교우님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어릴 적 그런 경험들 덕분에 재수를 하고 다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한 사람의 교육은 거의 7살 이내에 끝나기 때문에 어릴 적이 중요합니다. 청년 때는 별로 안 변합니다. 어머니께서 그 멀리까지 데리고 다니셨는데 얼마나 그 고마움을 알지 모르겠습니다. 모태신앙이 그렇게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태신앙으로 겉만남만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공부방을 하면서 느낀 점이 원불교를 오래 만난 사람들은 원불교의 인연은 많이 알고, 교무님은 많이 알지만 원불교의 법을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합니다. 원불교는 친숙하지만 교전은 잘 안봅니다. 그래서 음과 양이라고 생각해요. 인연은 많지만, 법은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 인연이 혈연으로 만나고 입교하면 불연이 됩니다. 그런데 법연까지 가지 않고 불연에서 끝납니다. 저는 원불교를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출가해서 잘 몰랐습니다. 성가를 4개 알고 출가를 했는데,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입교는 해서 불연은 됐는데 법연까지 가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 멀어지고, 그대로 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일생 핑계만 대다가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어렸을 때 인연을 맺어주는 겁니다. 이렇게 법회를 보지 않으면 결국에 다 사라집니다. 교당에서도 쉽게 멀어집니다. 여기서 단장하고 큰소리 빵빵 쳐도 결혼하고는 안 나옵니다. 마음은 있지만 정말 내 마음속에 법이 뿌리가 내리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업은 마음공부입니다. 회사생활은 부업입니다. 그런데 다 뒤바뀌어 삽니다. 이것은 주종이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체를 잡아야 합니다. 마치 그 사람들 말을 모아놓으면, 교당을 일 없는 사람만 다니는 것, 바보들만 다니는 겁니다. 아니지 않습니까, 법을 뿌리를 잘 내려서, 법을 실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여자들은 결혼하면 친구들과도 연락을 잘 안합니다. 새끼들 밖에 안보입니다. 그래서 모태신앙이 양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명교우님 어머니가 외동딸을 인연을 걸어보겠다고 노력하셨습니다. 부모가 가장 자식한테 잘하는 것은 이 법을 만나게 해주고, 자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이에요. 편한 것이 결국 나를 망치는 길입니다. 힘들 때 그 속에서 도가 솟아 올라오고, 편할 때 욕심이 솟아 올라옵니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욕심은 한량 없습니다. 그래서 핑계 속에서 삽니다. 교무님이 전화해도 핑계대고, 끊임없이 핑계 댑니다. 자명교우가 처음 4년을 다녔을 때의 출석을 다 합하면, 무결석 한 사람에 비해 훨씬 덜 나왔습니다.
우리 교당에 여수식구랑 마산식구가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떨어져 나갔습니다. 연애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많이 사라졌습니다. 차라리 교당을 안다녔던 사람이 더 잘합니다. 원불교를 알았던 사람이 더 비교심을 느끼고, 어중간하게 알기 때문에 오자마자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비교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그냥 잘 다닙니다. 저희 교당이 법회가 긴 것이 아니라 다른 교당이 짧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대산종사님은 법문을 몇 분 하셨냐고 출가여행때 물어보니, 마음 나시면 1시간 반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을 다닐 때 들어보니 설교는 20분, 30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운동을 할 때도 워밍업을 하고 올려야 합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똑같습니다. 법회도 20분만에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끌어올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대종사님께 전화해보니 제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특이합니다.
우리 자명교우가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자명교우가 20kg 넘게 뺀 사람입니다. 대부분 빼고 나면 다시 찝니다. 그런데 우리 자명교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전체 강연 중에 힘들었을 때 교전을 읽고, 다시 교당에 왔다고 하지만, 아직도 교전을 많이 안 봤습니다. 강연에 법문이 없습니다. 법문이 없다는 것은 마음 깊숙이 법연으로 승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법을 더 가까이 하라고 주문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추운데 여기 앉아있는 이유가 법을 가까이 해서 더 잘 살아보자고 온 것이지 친구들 만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 법문을 더 가까이 해서, 생활할 때 딱딱 떠오를 수 있을 만큼 지금보다 몇 배 더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자명교우가, 유령교도, 법명만 있는 정도라고 하셨는데 비단 자명교우님 일만은 아닙니다. 지금 지하에서 어린이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당의 훈련은 애들이 먼저 훈련을 하자고 합니다. 그만큼 프로그램이 재밌고 좋습니다. 그렇게 어릴 때는 재밌게 해주는 것이 맞습니다. 어릴 때는 누리는 것이 많지만, 점점 커질수록 달라져야 합니다. 거지근성으로 계속 원불교는 불공만 하라고 하는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당이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교당을 재밌게 다니려면, 뭔가를 맡아서 해보세요. 오늘 중요한 일을 말씀드릴게요. 대종사님의 당대제자인 훈타원 양도신 선생님 방에 제가 자주 놀러 갔었습니다. 제가 놀랐던 점이 있었습니다. 대종사님께는 무조건 다 복종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구타원 이공주 선생님의 제자인 훈타원 양도신 선생님을 사람이 필요한 교당으로 발령 내고 싶었지만, 구타원님의 사무원 서기로 일했습니다. 이제 좀 부릴 만하니 다른 곳에 발령 내는 것이 미안하셨던지, 바로 훈타원님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닌, 교당에 발령 낼 사람이 필요하다고 먼저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서서히 훈타원님을 보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바로 보내라고 명령한 게 아니라, 처음에는 조금은 빌고 부탁하신 거죠. 대종사님은 인간적인 스승이었습니다.
우리 자명교우님이 법회도 빠지고, 공부방도 빠지고, 훈련도 빠지고, 또 좋은 식당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같이 다녔습니다. 그래도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철이 들고 또 지금 엄청 달라졌습니다. 자명교우님이 작년에 단장을 하면서 그때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매일 참회를 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의 단장한테 죄송해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웃긴 단원들이 있습니다. 제가 조카가 있는데 엄마가 밥을 먹으라고 하니까 엄마한테 안 먹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냥 굶기라고 했습니다. 마치 엄마를 위해서 밥 먹으라고 하는 것처럼 안 먹겠다고 하더군요. 마치 교무, 단장을 위해서 교당을 오라고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없지요?
아까 했던 말 다시 합시다. 원불교 법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대종사님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마음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냐면, 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음공부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법회, 공부방, 훈련을 빠지지 않고, 사경을 잘하고, 강연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아닙니다. 두 번째로 놀랐던 점이 원불교는 일 위주라는 점입니다. 원불교에 서울대 나오고 똑똑한 사람이 출가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큰 도인들이 별로 없습니다. 교화도 잘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러나면 머리를 먼저 쓰고, 효율을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교도들은 인간적이고, 나한테 잘해주고, 시간과 에너지를 나에게 투자해주는 사람이 좋지, 나한테 적당히 잘해주고 효율을 따지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무와 교도의 관계가 80~90도 정도 밖에 안 되어 끓지 않습니다. 교화가 잘 될까요? 거기에는 감동이 없고 정이 없습니다. 교화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사업을 한다고 생각하면 다 진심과 정이 들어갔을 때 다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불교는 실천종교입니다.
핸드폰이란 처음 만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을까요? 처음부터는 무전기 같은 것을 들고 다녔습니다. 만들어서 쓰다 보니 이런저런 의견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계속 발전이 됩니다. 그러면서 지금과 같은 기가 막힌 스마트폰이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핸드폰을 만들기까지 앞에 실천이 없었으면 이런 핸드폰이 나왔을까요? 연구만 하면 절대 이런 작품은 안 나옵니다. 실천을 바탕한 수양과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허영심과 탐심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깨어있지만, 서원이 없으면 탐심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목표가 없을 때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게임을 합니다. 똑같은 겁니다. 여러분들이 헌공을 하고, 단에서 임무를 맡아서 하는 것, 일을 맡아 하는 것, 실천을 하다보면 자연히 욕심이 줄어듭니다. 욕심과 서원은 반비례합니다. 서원이 크고 탐욕이 살짝 있는 사람이 있고, 탐욕이 크고 서원이 살짝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비를 얼마 낼까, 할 때 내 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희사는 내 마음에 욕심을 덜어버리는 겁니다. 강연도 잘하고, 법문도 잘하고, 일기도 잘 쓰는데 헌공은 잘 안냅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보시심은 내 욕심과 반대되는 겁니다. 탐욕을 관장하는 것이 수양입니다. 실천을 하다보면 내가 얼마나 탐욕이 많은지 증명이 됩니다. 그럴 때 수양이 들어갑니다. 원불교는 교리가 있습니다. 신앙과 수행, 그리고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은에 보은하는 것이 사요입니다. 실천을 하려다 보니 수양이 필요하고,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 취사가 사은보은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을 못하냐면, 화살을 맞고 분석하는 사람입니다. 실천이 중요하지, 100프로 연구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은 기회를 놓칩니다. 실천을 하면서 연구를 하고, 다시 업그레이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온지 얼마 안 되어도 제가 다 부서에 넣는 이유가 실천을 해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바자회 할 때 물건도 팔아보고, 청소도 해봐야 합니다. 우리 교당 한 달 보일러 기름값이 120만원 넘게 나옵니다. 그 돈은 어디서 나올까요? 누군가는 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과 관념으로 원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실천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몸으로 해보면 다릅니다. 운전을 했을 때 처음에는 생각하면서 하다가 나중에는 몸이 자동으로 기억합니다. 실천을 해보면 몸이 기억합니다. 실천을 하지 않고, 관념이 먼저 앞서면 계속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엠티를 갔다 왔다고 합시다. 엠티 때 내가 돈을 냈다던가, 차를 운전했다던가, 요리를 했다던가, 설거지를 했다던가, 뭔가 하고 온 사람이랑 받아먹고만 온 사람이랑 다릅니다. 원불교는 실천종교인데, 결국 그 실천은 취사요, 보은이요, 불공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핵심입니다. 관념이 주였던 사람이 실천이 주가 되고, 나만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 견성입니다. 삶의 가치관이 바뀌는 겁니다. 생각을 하면서 실천해야겠지만, 우리는 너무 관념 위주입니다. 기본적인 것을 준비한 다음에는 실천하면서 연구하고 연구해야합니다. 그 속에서 내 욕심을 확인하고 계속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천종교의 원불교입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실천하고 보은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이것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불교가 문제가 많이 생긴 이유는 학문으로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깨침의 종교, 실천의 종교가 학문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불교도 만약에 학자불교, 신앙불교, 실천종교가 모두 필요하지만, 다 묶었을 때 실천종교가 가장 중요합니다. 삶에서 실천종교를 제일 중요시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된다고 했을 때 보면 해본 적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 번 하다가 안 된다고 합니다. 될 때까지 해보십시오. 안될 일이 없습니다.
질문
이도심
Q. 수행품 51장 보고 질문이 생겼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일상수행의 요법도 내주시고, 계문도 내주셨는데 여기서 불법이 그것이 맞는지, 불법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에 대한 대중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궁금합니다.
A. 불법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이 세상을 낙원세상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묶여버렸을 때, 내용이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 스승이 있어야 하고, 성리에 바탕 해야 합니다. 스승에게 감정을 받고, 성리에 바탕 하여 근간을 잡아야 합니다. 내용이 담긴 것이 형식이지, 형식만 채워서는 안 됩니다. 형식을 위한 형식이면 안 됩니다. 좌선을 위한 좌선을 하면 안 됩니다. 좌선을 하기 전에 일상수행의 요법을 암송합니다. 좌선을 하는 이유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초반에는 법에 묶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나중에 스승의 감정을 받고, 알게 됩니다.
김용재
Q. TV를 보다가 너무나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이 힘든 상황에도 웃으면서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저도 힘든 상황 때 교당에 오고, 처음에는 교전도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다시 편안해지고 열심히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수행법으로 생각했을 때 상시일기와 일상수행의 요법을 대중 삼아야 하는데, 순경에서도 지속적인 수행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봤을 때 천상락이 필요한데, 보통사람들이 수행을 할 때 뭐가 필요한지요?
A. 신앙생활에서 고통이 왔을 때, 어려울 때 와서 기도를 하고, 일이 잘 풀리면 공양 한번 하고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고득락을 위해 다닙니다. 여기서의 ‘락’은 극락입니다. 고와 락에는 ‘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극락은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서원이 있는 사람은 평범하게 살아도 서원이 크면 괜찮습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신앙은 기복적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원력이 필요합니다. 무아에 대한 극락을 모르고, 서원의 국한이 크지 않으면 다 걸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극락으로 가는 것은 불퇴전이라고 합니다. 퇴전하지 않습니다. 출가위에 올라가면 퇴전하지 않습니다. 항마위에 올라가면 아직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가위에 올라가면 이순신, 간디같이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재미와 맛을 몰라서 그럽니다. 명예, 돈 같은 것은 별거 아닙니다.
종교에 돈이 들어오면 발전한 적이 없습니다. 거의 다 퇴락합니다. 출가위까지 올라간 사람은 돈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좋게 만드는 데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미치지 못할 때 돈이 많으면 다 죄업입니다.
종법사님께 출가자가 물어봤습니다. 제가 정남을 할까요, 결혼을 할까요? 했는데 종법사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견성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남이나 결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견성을 하고 그 극락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다음 생애 좋은 집안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식이 많고 부자이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도가에 들어와서 수행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상산 박장식 선생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내면에 다 락에서 극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파에 여기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겁니다. 젊은 시절에 이 법의 재미, 이 수행의 맛을 알게 되면 출가를 해도 되고, 재가를 해도 되고, 결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다 상관없습니다. “서원함”이라고 했습니다. 일원에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 서원해야합니다. 드시 돈을 얼마 벌고, 차를 무엇을 사고, 어디를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