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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앞서.
본 답사는 2월에 떠났고 저 역시 3월에 창원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생활도 있고 여러 가지 일이 겹치다 보니 글 쓰는 게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다들 봄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저만 2월 눈 소식을 전할 듯합니다. 시간이 맞지 않더라도 너그럽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 답사라 그런지 조금 깁니다. 원래 3편에 나눠서 하려 했는데...)
신라의 혼이 머무는 진산,
남산, 그 아름다운 땅에서.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2월 말이 되었다. 다음 주에 임시로 머물 김해로 간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16년간 경주에 지냈고 작년 12월에 이사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생활까지는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이사는 갑작스럽게 진행이 되었고 벌써 부모님은 창원으로 내려가셨다. 그리고 오늘이 이제 창원으로 가기 전 경주에서의 마지막 답사가 될 것 같다. 마지막인 만큼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신라가 시작되고 끝난 남산으로 가기로 했다. 아마 살면서 수십 번은 오르락내리락한 산이 남산이다. 가장 좋아하는 절터인 용장사터와 천룡사터도 남산에 있고 가장 좋아하는 부처님인 감실 부처님도 여기 계신다. 중학교 때 답사부에서 처음으로 간 곳도 남산이었고 이후 가장 자주 갔던 곳 역시 남산이었다. 남산은 그 어느 곳보다 생에서 가장 가까웠기에 그곳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침 일찍 남산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용장골 주차장에 내린다. 이 길을 통해 고위봉도 가고 용장골도 자주 갔다. 그리고 항상 앞에는 염주 거북이가 있었다. 2012년, 고위산 등정 때 처음 보았고 1년 후 정보고등학교 등산 때 다시 한 번 봤는데 관리하시는 분께서 내 글 첫 번째에 이 거북이가 실려 있었다며 알아보셨다. 글을 쓰면서 아마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던 것 같다. 오늘도 거북이를 보며 답사를 시작한다.
(백팔염주 거북이. 용장골 답사의 시작.)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징검다리를 건너 본격적으로 남산에 올라간다. 혼자 등산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산이라 그런지 며칠 전 내린 폭설의 흔적이 아직 군데군데 남아있다. 소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즐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용장사터 가는 길의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돌탑계곡에 도착했는데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이 거대한 돌탑군을 할머니께서 처음 만드셨다고 하신다. 용장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여기인데 할머니께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고는 계속 용장사터 삼층석탑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며 찾고 계셨다. 저기 봉우리 끝에 있는 걸 가르쳐 드리니 보시고는 만족하신 듯 밑으로 내려가신다. 요즘은 몸이 안 좋으셔서 저기까진 안 가신다고 한다. 같이 갔다면 좋았을 텐데.
(용장골 계곡. 눈도 왔는데 수량이 조금 적어 보였다.)
(할머니께서 쌓기 시작하셨다는 용장골 돌탑떼.)
(멀리 보이는 용장사터 삼층석탑.)
(용장사터로 가는 설잠교.)
설잠교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구멍이 뚫린 돌이 나온다. 그 돌에서 더 올라가면 대나무숲이 나오기 시작한다. 대나무숲 끝자락에서는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금당 터, 오른쪽은 석탑과 불상으로 향하는 길이다. 금당 터를 갔다가 바로 석탑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조금 올라가면 삼륜 대좌 위 앉아계신 불상이 나온다. 불두가 없기에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옆에는 마애불도 함께 새겨져 있다. 용장사터를 좋아하는 큰 이유다. 다만, 삼륜 대좌 불상은 오후에 오면 햇볕을 받아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아니면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도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경주 떠나기 전에 새벽 남산등산은 꼭 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용장사터에서 바라본 남산. 군데군데 눈이 보인다.)
(용장사터 삼륜대좌 석불. 언제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용장사터 마애불. 삼륜대좌 불상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마애불과 불상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석탑이 나온다. 가는 길에 멀리 삼화령이 보인다. 처음엔 뭔지 몰라 혹시 남산에 있었다는 고허성의 흔적이가 했다. 아무튼, 한 발 한 발 내디뎌 석탑을 향한다. 그리고 봉우리에 우뚝 서 있는 석탑을 봤을 땐 그 느낌은 정말 황홀하기 그지없다. 남산을 기단 삼아 늠름하게 서 있는 삼층석탑! 만약 석가탑이라도 이 자리에 선다면 저 용장사터 석탑만큼 아름답진 않으리라. 그대는 작은 모습이기에 이 남산을 기단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늠름하게 느껴진다. 용장사터 삼층석탑은 다른 곳보다 항상 머물러있는 시간이 길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이제 자주 못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계시는 분께 기념사진을 부탁하고 조용히 빠져나온다. 언젠가 또 볼 수 있겠지?
(용장사터 쪽에서 바라본 삼화령.)
(용장사터 삼층석탑. 세상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저 늠름한 모습!)
(용장사터 삼층석탑. 기단을 산에 있는 자연석으로 쓴 게 특징이다.)
(용장사터삼층석탑에서. - 지나가시던 등산객께서 사진제공)
(몇 번을 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재.)
아주 오래전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어머니랑 둘이서 여길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용장사터의 모습에 반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절터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어릴 적 기억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용장사터 뒤쪽 길이었는데 나만 하거나 더 작은 어린 소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던 게 생각난다. 마치 분재를 아름답게 심어놓은 듯한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로부터 약 5년 만에 다시 가본다. 다시 가 보니 작긴 작지만, 이제는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커졌다. 이 소나무도 나랑 비슷하게 커 가는 것 같다. 더 먼 훗날 다시 온다면 나보다 더 커져 있으려나. 솔 내음과 함께 추억에 젖어본다.
(가는 길에 바라본 내남 일대. 수도 없이 본 저 익숙한 모습...)
(나와 함께 커가는 소나무. 다음에 오면 나보다 더 커져 있겠지...)
용장사터를 벗어나 남산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능선길에 접어든다. 날씨가 춥고 그늘진 곳이 많아서 그런지 아직도 발이 푹푹 빠질 정도의 눈이 곳곳에 쌓여있다. 삼화령을 가려 했는데 길을 잘못 아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간다. 넓은 능선길을 따라가다가 삼화령 관련 이야기가 있는 안내판 위로 조금 올라가면 삼화령이 나타난다. 이곳은 현재는 불상이 없고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만 남아있다. 그래서 여기에 있었을 부처님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온 분들은 다들 하나같이 대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여러 가지 부처님 수인을 취하면서 사진을 찍으신다. 이곳에 앉아있으면 정말 부처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남산 능선길.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삼화령 대좌. 불상이 있었다면 아마 남산에서 제일가는 부처였을 텐데...)
(삼화령 대좌에서 바라본 남산.)
(삼화령에서. - 지나가시던 등산객분 사진제공)
삼화령에서 옆으로 난 작은 쪽 길을 따라 간다. 걸으면 걸을수록 나타나는 시원한 경치는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맑게 만든다. 언제와도 남산 경치는 정말 아름답고 장쾌하다. 이런 곳을 두고 떠난다니, 아쉬움이 더 커지는 것 같다. 경치 좋은 바위에서 조금 쉬었다가 곧장 팔각정 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 바위에서 바라본 동남산 일대.)
능선길을 따라 금오봉 올라가는 길을 지나 조금 더 가서 오른쪽을 보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어느 바위에 세워진 비석이 나타난다. 옛것은 아니고 1970년대 남산개발을 하면서 기념으로 세워둔 것 같다. 비석 세운 사람 눈썰미가 좋았던 것인지 경치가 무척 좋다. 비석이 세워진 바위에는 '사자봉'이란 한문이 새겨져 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팔각정 터가 나온다. 예전에는 경치 좋은 곳에 있는 팔각정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가니 그 자리 위에서 등산오신 분들이 점심을 들고 계셨다. 식사가 길어지는 것 같아 사람 없는 사진을 포기하고 먼저 발걸음을 돌린다.
(입구의 비석. 희미하지만, 바위에 '사자봉'이란 한문이 새겨져 있다.)
(비석에서 바라본 남산. 오른쪽에 다음에 갈 금오정이 보인다.)
(팔각정 터. 터 모양을 봐서는 근대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왜 없어졌을까?)
다시 능선길로 돌아와 금오정으로 향한다. 콘크리트로 지어져서 그런지 애착이 가는 정자는 아니지만, 주변 경치가 수려한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금오정 밑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무너진 석탑의 부석재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남산의 명물인 늠비봉 오층석탑이 나온다.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백제식 석탑으로 기단에 비해 몸돌이 굉장히 작은 게 특징이다. 역시 주변 경치 하면 남산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석탑에 도착했을 땐 대학교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단체 사진을 찍어달라 해서 찍어드리고 곧 밑으로 내려가신다. 혹시 대학에 간다면 여기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이제는 너무나 친숙한 석탑을 두고 밑으로 나 역시 밑으로 내려간다.
(남산 금오정.)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석탑재.)
(가는 길에 본 남산 일대와 늠비봉 오층석탑. 여긴 항상 들른다.)
(오늘도 잘 살아있는 바위틈 어린 소나무.)
(햇빛을 받아 더 늠름한 늠비봉 오층석탑. 몇 년 전 남산정비사업을 일원으로 복원되었다.)
늠비봉 오층석탑 밑에는 부흥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고즈넉한 멋도 있고 특히 벚꽃이 필 때 무척 아름답다. 부흥사 옆 작은 길로 들어가면 연못이 나오고 그 연못 앞에는 귀여운 불상이 하나 있다. 솜씨 좋은 장인이 아닌 근래에 민간인이 조성한 민불인데 문화재적 가치는 없더라도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남산에 꼭 있어야 할 보물이다. 소박한 멋이 또한 느껴진다. 이러한 민불은 확인해 본 것 중에서는 남산 부석 밑에 하나 있는 걸로 안다.
(남산 부흥사.)
(부흥사 민불. 조각적 멋이 있는 걸작 같은 건 아니지만, 그 나름의 소박한 멋이 있어 정감이 간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다시 남산능선길로 들어와 내려가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길을 잘못 들어 이상한 계곡으로 내려왔다. 길을 못 찾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는데 한 등산객께서 나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널찍한 계곡을 따라 내려갔는데 아직 의문이 드는 건 그 계곡 오른쪽을 따라 정체 모를 돌덩이들이 쌓여있었단 것이다. 남산신성이라고 하기엔 위치가 아니고 일반적인 절터의 기단이라 하기엔 규모도 작고 그렇게 튼튼해 보이지도 않는다. 도대체 뭐에 쓰려고 이렇게 잔뜩 쌓아둔 것일까?
(혹시 아시면 가르쳐 주십시오!)
(우연히 내려가게 된 길. 널찍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 있는 정체 모를 것.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규모가 큰 것. 무슨 용도로 쓰이려고 한 것일까?)
산에서 내려오니 포석정 입구다. 이제 막 등산을 준비하는 사람과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아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짜로 포석정에 들어간다. 오래전 아버지께서 경주에 와서 가장 실망한 유적이 바로 포석정이라고 하셨다. 교과서에는 신라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경애왕 피살장소로 장렬하게 묘사되어 있고 유상곡수연이란 과학적이고 신비한 장치가 있다는 설명에 비해 실상 와보니 면적도 그리 크지 않고 물도 흐르지 않아 과연 교과서로 봐왔던 그 역사의 장소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하셨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다. 포석정은 안 면적만 해봐야 성인 다섯 명 정도만 들어가면 꽉 찰 것 같고 이제는 물도 흐르지 않는 어쩌면 너무나 포장되었기에 가장 처량한 유적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포석정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규모는 작다 하더라도 물이 나오는 배수구 쪽에서 보면 그 구불구불한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지금이라도 물이 흘러넘칠 것만 같다. 물론 이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난 그래도 그렇게 포석정을 생각하며 서남산에 오면 빠짐없이 들른다.
(포석정. 눈 때문에 그런지 오늘은 물이 약간 고여있다.)
(포석정 앞에 있는 우물. 생각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
포석정에서 삼릉 가는 길을 따라 창림사터로 향한다. 이 길은 월정교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월정교가 복원된다면 월성, 월지, 교동마을을 보고 월정교를 건너 남산으로 갈 수 있는 말 그대로 그 옛날 신라의 천 년 길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지만, 언젠가 완성되면 꼭 걷고 싶다.
(삼릉 가는 길에 있는 벽화.)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창림사터가 나온다. 최근 발굴조사가 끝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도 어느 정도 사라지고 넓찍한 부지 때문인지 시원한 느낌도 든다. 이곳은 절터라는 점보다는 신라 최초의 왕궁터라는 점이 더 눈에 띈다. 서남산 일대는 신라를 세운 혁거세가 태어난 나정부터 최초의 왕궁터인 창림사터, 신라의 마지막이 된 포석정까지 있어 어쩌면 거대한 1,000년의 역사의 첫 매듭과 끝 매듭이 지어진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이 남산을 가지 않고 경주를 갔다 할 수 없다 하고 남산 없이 신라를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림사터에는 석탑과 귀부, 그리고 곳곳에 흩어진 주춧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귀부는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쌍 거북이다. 목이 없는 게 조금 안타깝다. 그리고 창림사터 가장 위쪽에 있는 창림사터 삼층석탑은 1979년 넘어져 있던 걸 복원한 것으로 현재 남산에 있는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석탑 몸돌에는 문고리 장식이 있고 기단에는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어 석탑의 화려함을 더한다. 가을날, 날씨가 맑을 때 오면 이 절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서남산을 답사할 땐 항상 빠지지 않는 곳이다. 2012년, 개천절 날 여기 처음 왔는데 그때 그 감동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남산에 있는 몇 안 되는 이름이 알려진 절터이기도 하다.
(창림사터. 멀리 큰 도로에서도 탑이 보일 정도이다.)
(창림사터 귀부.)
(창림사터 삼층석탑. 몸돌에 문고리 장식이 있다. 규모도 그렇고 고선사터 삼층석탑이 생각난다.)
(팔부신중. 정교하고 아름답다.)
창림사터를 나 밑으로 내려가면 남간사터 당간지주가 나온다. 창림사터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 남간사터 유물이 있는데 상당히 규모 있는 절인 것은 확실하다. 십자가 모양 구멍을 오랫동안 보다가 백련사를 지나 일성왕릉으로 향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여기 백련사에서 차를 얻어 마셨는데 꼬박 3년이 지났다. 그때 보살님께 들은 말은 지금도 인생의 교훈으로서 항상 지키고 있다.
"사람은 선행을 했을 때 그것을 남에게 말하면 덕이 아니고 업이 되어 돌아온다. 선행은 항상 남이 모르게 행해야 한다."
(남간사터 당간지주.)
(일성왕릉. 눈 때문인지 소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일성왕릉.)
다시 남간마을로 돌아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남간사터 석정이 보인다. 석정과 당간지주는 생각보다 꽤 떨어져 있는데 이런 걸 보면 어렴풋이라도 남간사의 거대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아까 보고 온 포석정 우물과 비교해도 좋다.
(남간사터 석정.)
어느새 답사한 지도 6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밝았던 하늘도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석정에서 걸어오며 양산재를 잠시 지나 바로 나정에 도착한다. 신라가 시작된 1,000년의 시작점. 사실 발굴 후 그냥 풀밭 비슷하게 돼서 뜻깊은 유물은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언젠가 개천절 날 여기 왔을 때 그 맑은 하늘 때문인지 이 나정이 얼마나 편안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나정인데 난 나정이 참 좋다.
(양산재.)
(나정.)
이제 오늘의 마지막 답사이자 경주 마지막 답사처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을 골목 사이 위치한 솟을대문을 지나면 나오는 고즈넉한 고택, 김호장군 고택. 최부잣집 덕분인지 찾는 이가 그리 많진 않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여느 가정집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집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자 한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맞이해주신다. 감격에 젖어든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한 번 서남산 자락 전체를 종주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차와 다과를 대접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유연히도 같은 경주김씨 영분공파라고 하셔서 놀랐다. 아주머니는 이곳 김호장군 고택의 종가댁이시다. 3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그리고 곶감을 띄운 수정과를 내주신다. 아주머니께 3년 전 그 얘기를 꺼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신다 한다. 빈말이었을 지라도 너무나 고맙게 들렸다. 수정과를 마시고 정원을 둘러보는데 언제나 그렇듯 지금도 쓰고있는 오래된 우물이 보인다. 우물 옆에는 노란 복수초가 아름답게 피어나 있다. 눈 속을 뚫고 피기에 더 아름다운 복수초, 아주머니께서 옆에서 설명해 주신다.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고향 집 같은 이곳을 나온다.
(김호장군 고택 문.)
(김호장군 고택. 크진 않더라도 어느 곳보다 편하게 느껴진다.)
(고택 안 우물. 이 우물은 집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신다.)
(복수초.)
만약 여길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창원에 와서도 미련이 남아 입맛을 쩍쩍 다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곳에 와서 그분을 뵙고 그 마당을 거닐었기에 미련없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16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태어나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한 이 땅, 경주를 떠난다는 것은 분명 아쉽고도 슬픈 일이다. 그렇게 열심히 다녔지만, 아직도 남산 골짜기 곳곳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고 저 멀리 벽도산 쪽과 안강 일대는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누구보다 경주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정작 지도를 펼쳐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산, 소금강산, 토함산, 분황사, 황룡사터, 대릉원, 월지, 월성, 양동마을, 선도산, 무열왕릉, 황성공원 등등... 너무나 익숙한 이곳들이 이제는 더는 가까운 곳이 아닐 거라는 것은 방금 분명 미련이 없다 했지만, 또다시 발걸음을 묶어두게 한다. 어디를 간들 이곳보다 아름답고 편안한 곳이 있을까? 감실할매앞에서 치성드리는 분과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독산 너머로 보이는 별자리를 그어 볼 수 있을까? 선도산 자락에 물든 노을을 볼 수 있을까? 얼어붙은 형산강에 홀로 서 볼 수 있을까? 산 중턱에 있는 천룡사터 주막에서 비빔밥을 먹어 볼 수 있을까? 시내에 가면 이따금 들리는 녹음된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고즈넉한 황성공원 숲에서 글을 써 볼 수 있을까? 어딜 간들 그럴 수 있을까?
떠난다 한들 분명한 것은 난 여기 경주를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답사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제 집주인이 아닌 객(客)으로서 오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대는 날 안사람처럼 맞이하겠지.
마지막이 아닌 마지막 답사를 이렇게 마친다.
終
-여정- (2014. 2. 22. 土)
용장골 주차장→ 108염주 거북이→→ 용장골 돌탑떼→ 설잠교→→ 용장사터 금당 터→ 용장사터 삼륜대좌 불상, 마애불→ 용장사터 삼층석탑→ 키 작은 소나무길→→ 삼화령 연화대좌→→ 팔각정 터 입구 사자봉 바위→ 팔각정 터→→ 금오정→→ 늠비봉 오층석탑→ 부흥사, 부흥사 민불→→ 정체 모를 석조물→→ 포석정→→ 창림사터 귀부→ 창림사터 삼층석탑→ 남간사터 당간지주→→ 일성왕릉→→ 남간사터 석정→ 나정→→ 김호장군 고택
새롭게 펼쳐라!
羅新
첫댓글 삼화령 연화대좌 위에 앉은 모습이 참 보기 좋으네.
그리고 MBC 원더풀 금요일의 안유리 작가가 민욱이와 통화하고 싶다고 해서 전화번호 알려줬는데 통화했는지 모르겠네?
민욱이 글을 보고 재미있고 물어 볼 것도 있다면서 통화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