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프리터족, 패러사이트 싱글, 사토리세대부터 한국의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삼포세대까지.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이 끝난 동아시아의 두 국가를 살아가는 현대 청년들의 비참한 삶을 분석하는 진단명은 차고 넘친다.
세부는 조금씩 다르지만 청년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호명들이 내포하는 공통점은 ‘무력감’이다. 현대 청년들 다수는 무언가를 시작도 하기 전에 고꾸라지는 구조적 열패감을 겪는다. 청년세대가 ‘무언가에 도전해봤더니 어렵다’는 건강한 패배감 대신 ‘무언가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는 무력감을 먼저 느끼는 것은 심각한 사회적 병증이다.
청년세대가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회를 쌓아올린 기성세대는 이러한 구조적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꿈과 희망의 복권(復權)’이라는 안일한 대안을 제시한다. 꿈과 희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기계발 서적은 서점가를 강타했고, 그럴싸한 말들로 포장된 각종 강연들은 연일 매진됐다.
힐링과 독설의 양극단을 오가던 기성세대의 기만은 잠시간 청년세대의 눈을 가렸지만, 더이상 ‘꿈과 희망’ 프레임에 갇혀서는 공고히 다져진 적폐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눈 밝은 청년들은 이내 깨달았다. <백엔의 사랑>은 링 위에 오르기도 전에 이마에 1패 딱지를 붙여야 하는 모두가 패배자인 시대에는, 꿈과 희망을 논하기에 앞서 패배의 서사를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꿈과 희망’이라는 허울
이치코(안도 사쿠라)는 전문대 졸업 후 수년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부모에게 얹혀사는 백수다. 취업 의지 없이 허송세월하는 이치코는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 이치코는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 동생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이치코는 생계유지를 위해 모든 걸 백엔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저렴한 보급형 편의점 ‘백엔생활’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한다. 이치코가 ‘백엔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점장,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은 중년 동료, 폐기 도시락을 훔쳐 먹는 노숙자까지. 상대적 강자인 본사 직원마저도 강도 높은 업무량에 치여 항상 불우한 모습만을 보인다. 사회 보편적 기준으로 봤을 때 ‘백엔생활’은 얼핏 경쟁체제에서 뒤처진 이들의 무덤처럼 느껴지지만, <백엔의 사랑>은 이곳이야말로 사람들이 동등하게 백엔의 가치로 묶이는 패배자들의 요람이라고 말한다. 이치코의 패배 서사가 ‘백엔생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유는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자기객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패배의 서사를 겪기도 전에 패배자가 된 사람은 결코 패배의 기승전결을 알 수 없다. 과정 없이 결과로만 존재하는 패배는 무력감만 남길 뿐 누구도 성장시키지 못한다. ‘백엔생활’이란 상징적 공간은 ‘우리의 가치는 왜 바닥에 떨어졌는가?’란 의문을 싹틔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출발점이다.
오프닝부터 이치코는 보잘것없고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백엔의 사랑>은 그녀의 비루한 일상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치코 스스로 자신이 선 자리를 돌아보는 순간이 올 때까지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가 이치코를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이유는 그녀가 지질한 현재를 자책하거나 불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의점 중년 동료에게 강간을 당한 후에도 이치코는 불행한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담담히 경찰에 신고한다. 이치코는 무력하지만 다가오는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 캐릭터다. 더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의 자리는 역설적으로 이치코가 비겁해지지 않을 수 있는 단단한 배경이 된다.
그런 이치코가 유일하게 흔들리는 순간은 퇴물 복서 카노(아라이 히로후미)에게 연심을 드러낼 때다. “그 주먹으로 세계를 뚫어라”라는 원대한 문구가 적힌 복싱 체육관에서 열정적으로 훈련하는 카노를 향한 이치코의 사랑은 반등이 필요한 그녀 인생의 필연적 감정 발현이다. 카노 곁을 서성거리던 이치코는 쉽사리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 그러나 작은 희망으로 치환될 것만 같던 이치코의 감정은 첫 데이트부터 산산이 부서진다. 왜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냐는 이치코의 질문에 카노는 “거절 안 당할 것 같았거든” 이라는 서글픈 답변을 내놓는다. 안전장치 없이는 이치코와의 관계를 시작하지 않았을 카노의 선택은 실패하면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란 두려움 때문에 많은 걸 포기하는 현실 속 청년들의 살풍경과 정확히 겹친다.
전력으로 패배하기
이치코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과는 상반된 열정적인 카노의 모습에 반하지만 그 역시 냉소를 두른 패배자인 건 마찬가지다. <백엔의 사랑>은 카노를 우러러볼 수 없는 캐릭터로 설정함으로써 이치코의 서사가 신데렐라 스토리로 비칠지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낭만성이 결여된 카노는 이치코의 감정적 안식처가 되어주진 못하지만 자신의 복싱 시합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패배 서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시합에서 패배한 카노가 상대 선수와 포옹하고 어깨를 두드리는 순간은 이치코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전력으로 패배한 경험이 없는 이치코에게 죽기 살기로 싸우던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거대한 물음표로 남는다. 그 장면은 스스로의 의지로 도전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결코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이자 이치코로 하여금 직접 복싱에 뛰어들게 만드는 강렬한 동기가 된다. 이치코가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은 이후 <백엔의 사랑>은 복싱 시합에 나가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그녀의 훈련 장면들로 가득 채워지고, 카노와의 이별이나 ‘백엔생활’에서의 해고는 부차적인 갈등으로 흘러간다.
이치코의 복싱 훈련 장면들은 보편적인 몽타주의 기능을 상회하는 몰입도를 이끌어내는데, 이것은 오롯이 배우 안도 사쿠라의 공이다. 이치코의 빠른 극적 변화가 당위성을 갖는 이유는 안도 사쿠라가 분장이나 편집의 힘을 빌리지 않고 체중감량과 복싱 훈련을 촬영 기간 동안 실시간으로 완벽하게 소화했기 때문이다(복싱 훈련 몽타주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치코의 풋워크나 섀도복싱은 준프로의 풍모를 띤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링에 오른 이치코는 큰 이변 없이 패배한다. <백엔의 사랑>은 이치코의 시합 장면을 통해 스포츠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전달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이치코의 처절한 모습을 묘사하여 전력으로 패배하는 감정을 복싱으로 물화하는 데 공을 들인다. 시합이 끝나고 상대 선수와 포옹하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행위를 통해 이치코는 드디어 패배의 서사를 체화한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무력한 패배가 아니라 자의에 의한 찬란한 패배다.
대기실을 떠나기 전 거울에 비친 멍투성이 얼굴을 보며 패배의 맛을 만끽하는 이치코. 영화 내내 단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했던 이치코는 자신이 선 자리를 떳떳하게 돌아본다. 경기장 밖에서 카노를 만난 이치코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오열한다. 지난한 과정을 거친 이후에 터진 이치코의 눈물은 승리의 서사를 가져보지 못한 인생들을 향한 사려 깊은 격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