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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아래 친동생 같던 이희천
불온서적 소지 혐의로 처형되자
국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보다
힘없는 백성에 대한 사랑 깨달아
숨 막히는 현실의 탈출구로
다른 세계인 중국 여행 택해
폭포 소리 듣는 선비.연암이 그렸는데 마치 자화상 같다. 필자 제공 |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괴테. 필자 제공 |
이몽직을 애도하는 글
연암 박지원이 펴낸
최고의 역작이 '열하일기'라면, 최초의 작품은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행위를 다룬 '이충무공전'이다. 연암의 일생이 오늘에까지 비교적 상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둘째 아들이 지은 '과정록(過庭錄: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 덕분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아버지는 열다섯 살에 성년이 되는 의식을 치렀고, 결혼과 동시에 장인에게 '맹자'를 배웠다. 또한,
처숙부로부터는 사마천의 글과 문장을 익혔는데, 이때 아버지는 중국 옛 왕조의 흥망사를 다룬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항우에 관한 이야기를
모방해서 '이충무공전'을 지었다. 이 글을 보고 처숙부는 사마천과 같은 글솜씨라고 크게 칭찬했다."
요즘 중학교
3학년 학생의 나이에 벌써 충무공에 관한 글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연암의 남다른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작품이 현재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연암이 지은 '이몽직을 애도하는 글'을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다.
이몽직은 이순신 장군의 6대손이다. 원래 이름은 '한주'인데, 죽은 후에 '몽직'으로 불렸다. 그는 대대로 군인
집안 출신이지만 문인을 좋아해서 여동생의 남편인 박제가('북학의' 저자)와 함께 연암을 자주 찾아가서 학문을 배우고 어울렸다. 연암은 이몽직보다
나이가 12세, 박제가보다는 13세나 위였다.
활달한 성격의 미남 청년 이몽직은 1774년 서울 남산의 석호정에서
활을 쏘고 나오다가 잘못 날아온 화살에 맞아 25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사망했다. 연암은 나라가 평온할 때에도 충무공처럼 유비무환의 자세를
가졌던 이몽직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시도 포함됐다.
열하일기 (단국대 소장). |
참선비가 펄쩍 뛰어 전장으로 향하니 바람에
모래 날리고, 양쪽 군사 맞붙는다. 서로 사나운 소리 지르는 아우성 속에 칼을 입에 물고 창 휘두르며 전진하는데 수많은 창끝에도 눈 하나 깜짝
않네. 오른발을 딛고 왼 다리는 날리면서 온갖 힘을 쏟는 것은 나라를 위함이라. 모습과 소리는 사납지만 미친 것은 아니네. 아, 목숨은 끊겼지만
쓰러지지 않고 선 채로 아직 손을 불끈 쥐고 두 눈을 부릅떴네. 자손은 벼슬하고, 마을엔 기념비 세워지며 역사에 기록되어 장한 이름 길이
전해지리.
연암의 삶을 바꾼 이희천의 죽음
'이몽직을 애도하는 글'에는 이희천이라는 인물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도 보인다.
"이희천이 죽은 후부터 나는 사람들과 다시 교제하고 싶지 않아 축하해 주거나 조문하는 일을
모두 그만두었다. 그 때문에 절친한 친구들이 험한 액운을 만나 섬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도 일절 안부를 물은 적이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를
무척 원망하고 노여워하면서 한꺼번에 비난을 쏟아냈으나, 나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이희천은 연암에게 '주역'을
가르쳤던 스승의 아들이며, 연암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런데 마치 친동생 같던 이희천이 불온서적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33세의 나이에 목이
잘리고, 이후 사흘 동안 그의 머리는 강변에 매달려 있었다. 또한, 그의 부인과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1771년
7월 8일자 영조실록에는 이 비극적 사건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이날 조선 태조 등을 폄하하는 내용이 실린 중국의 역사책을 소지했다는
죄를 물어 이희천과 책 판매자에게 극형을 내렸다. 연암의 윗글은 인간의 생명을 파리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국왕에 대한 분노와 언젠가 자기도
허망하게 죽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의 표시로 볼 수 있다.
'이몽직을 애도하는 글'에는 하찮은 이유로 백성들의
목을 자르는 잔인한 국왕과 평시에도 전쟁에 대비하는 청년이 극명하게 대비돼 있다. 즉, 연암은 이희천의 허망한 죽음을 통해서 나라사랑이 국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보다는 힘없는 백성에 대한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고, 이몽직의 죽음을 계기로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했다.
연암과 괴테
1774년 이몽직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때,
그와 동갑내기인 25세의 독일 작가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로 유럽에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감상적이고 정열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유분방한 성격의 청년 괴테는 당시 유럽 절대 왕조의 숨 막히는 현실사회와는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여성에게 연정을 품고 번민하다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은 바로 외교관의 약혼자인 15세 처녀에게 강제로 키스하며
대시했다가 딱지 맞은 괴테 자신이었다. 이 소설이 광풍을 일으킨 시기는 유럽에 국민주권 사상이 퍼졌던 때와 일치한다. 이는 공교롭게도 연암이
전제정치의 폐해를 절감한 때이기도 하다.
연암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여럿이겠지만, 무소불위의 국왕을
비롯한 관리들의 시대착오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과 질식할 것 같은 현실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그중에서 으뜸이었을 것이다.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등질 수도 있지만,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이 동양의
대문장가 연암에게는 1780년 중국 방문이었고, 서양의 문호 괴테에게는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연암과 괴테의 여행은 6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으며, 여행 기간도 각각 5개월, 19개월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둘이 남긴 '열하일기'와 '이탈리아
기행'은 동서양을 대표하는 최고의 기행문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본 연재물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국왕의 백성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이기를
원했던 연암과 괴테의 눈을 통해서 18세기 청나라와 이탈리아의 문화를 비교해보는 기회도 제공할 것이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