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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제4주일)
데오도코스, 마리아의 순종
삼하7:8~11, 16; 롬16:25~27; 눅1:26~38
올해는 오늘 대림절 넷째 주일이 성탄절 바로 전 날이라서, 오늘 대림절 마지막 주일이 성탄절이 시작되는 성탄 전야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대림절 넷째 주일 예배는 더욱 성탄절과 가까운 예배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올해 대림과 성탄을 통해 사도바울이 전하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비밀”을 좀 더 환히 들여다보고, 믿고 순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회퍼 목사님의 대림절 설교 한토막을 테오리아에 올렸습니다.
“우리는 마치 무너진 갱도에 갇힌 광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광부는 갱도가 뚫릴 때까지 구조대에 귀를 기울이고,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집중합니다. 간절히 탈출을 바라는 그는 처음 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부터, 집중해서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림절의 부르심이 그것과 다를까요? 여러분의 구원이, 여러분 모두의 구원이 점점 다가옵니다.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까? 그 소리는 돌 같이 단단하고 거친 당신의 마음을 뚫고, 당신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마음까지 뚫고 갑니다. 그분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당신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다림의 주간에, 성탄절을 기다리는 주간에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존재라는 감옥에서, 걱정과 죄, 외로움이라는 감옥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십니다.”
우리에게는 “무너진 갱도에 갇힌 광부”와 같은 간절함이 있을까요? 자신을 구하러 오는 구조대의 작은 소리라도 온 힘을 다해 집중해서 듣지 않을 수 없는, 갱도에 갇힌 광부의 기다림이 있을까요? 정말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우리가 원하는 구원은 어떤 구원일까요?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런 질문들에 정직하게 대답하고, 그래서 우리의 간절함이, 우리의 기다림이, 우리의 구원이, 너무나도 “내 중심적”이고 또 늘 그럴 수밖에 없어서, 이런 나를 그대로 내어드리며,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처럼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의로움이나, 나의 자랑거리가 내가 구원을 받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연약함과 나의 어둠이 구원받는 근거라는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 진정한 해방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오랜 세월동안 감추어 두었던 비밀”을 환히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리스도는 당신의 마음까지 뚫고 갑니다. 그분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당신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다림의 주간에, 성탄절을 기다리는 주간에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존재라는 감옥에서, 걱정과 죄, 외로움이라는 감옥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십니다.”
올해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일에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수태고지 장면입니다. 이 수태고지 장면은, 고단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네 현실 속에서 역설의 신앙(신앙의 역설?)을 보여주는 뜻깊은 장면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약혼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 당연히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을 맞닥뜨리면서,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마리아는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응답은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은혜를 입은 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우리 신앙의 현실은 역설을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성탄의 신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나 여러분의 자랑거리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 여러분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말해, 예수님처럼 하늘 아버지를 우리의 중심으로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또 성탄의 신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과거를 통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늘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 새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아기가 있어서 당신에게 온갖 새로움을 접하게 해주고, 아직 쓰지 않은 온전한 마음을 준비시켜 줍니다. 당신 안에 새로움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그래서 이 땅에서의 짧은 인생을 고난 중에서도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요?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삶을 경축하며 새로워지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갑작스럽게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마리아를 방문합니다. 천사의 방문으로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궁금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궁금히 여겼다는 말은, <디알로기조마이> “곰곰히 생각하다” “숙고하다”는 뜻입니다. “품는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천사의 등장은 마리아를 놀라게 했지만, 그녀는 놀라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고 숙고하고 품었습니다. 이것이 처녀에게서 예수가 태어난다는 예고를 듣고 마리아가 보인 첫 번째 태도입니다. 단지 이성적인 판단만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넘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품은 연후에 그녀는 천사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엄청난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그녀는 묻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마리아의 태도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녀의 질문에는 근본적으로 천사의 말을 쳐내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솔직한 의심만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큰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기서 도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녀는 자신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식, 그리고 세상 사람들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이 이미 다 판단하고 그래서 되니 안되니 하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딜레마를 공손하게 하나님의 앞에 내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두 번째 태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태도와 얼마나 다른지를 보십시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이미 받아들이지 않는, 이미 굳어버린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지요? 거기서 불평과 불만이 생기고, 심지어는 적대적인 태도까지 생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면서, 일어난 일들에, 또는 일어날 일들에 마음의 문을 닫아 걸어버립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품고, 솔직한 의심을 드러내지만 그러나 그 의심마저 하나님 앞에 내어 놓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척하며 사는 것을 진정한 믿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 판단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도 진정한 믿음으로 가는 길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전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최종 판단을 주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문제를 내놓았으니 주님께서 문제를 풀어 주십시오. 지금 제가 ‘예’라고 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니오’라고 말씀드리지도 않겠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부디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다시 천사가 설명을 해 줍니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승복했던 사람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어머니”(데오도코스, 431년 에베소공의회)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만든 행복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그보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주님이 보여주시려고 하는 “불가능이 없는 세계”를 보게 된 사람의 표상입니다.
대림과 성탄은, 마리아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한 아기가 탄생하도록,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탄생하도록, 우리를 열어놓는 시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네가 이미 가지고 있는 너 자신의 “행복에 대한 프로젝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을 받습니다. “내가 만일 이러이러지 않으면, 만일 네게 이것이 없다면, 만일 내가 이것을 이룰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하지 않아! 행복할 수 없어!” 라는 “나의 행복 기획안” 말입니다.
마리아는 자신 생각에 자신 안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이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혹은 “이런 일은 내게 일어나서는 안돼” 라고 규정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대하는 세 번째 태도입니다.
이 세 가지 태도로 인해 마리아는 승복하는 사람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사람”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시작”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탄생시킬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의 성탄 설교처럼, 우리가 구세주의 오심을 경외심으로 축하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작을 축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에 우리 자신의 시작을 축하한다는 말은 우리가 과거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고 상처도 입었습니다. 우리는 그 상처와 잘못 때문에 새로 시작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과거를 그냥 떨쳐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과거에 놓쳐버린 기회나 상처 주변을 계속 맴돌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새로운 시작을 보면서 성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성탄은 오늘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꿈꾸었지만 우리가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바람에 자신에게 없는 것처럼 여겼던 삶을 다시 살도록 초대합니다. 이것이 나사렛 시골처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위해서 그녀가 맞닥뜨려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크던 작던지 간에 혹은 깊던지 얕던지 간에 우리의 지금 수준에서 맞닥뜨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빠져 있는 함정으로 인해 큰 낭패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넘어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고 더 큰 분의 능력이 우리를 덮을 것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나를 괴롭히시는가 원망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마리아처럼, 자신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식에 대해 그것을 거부하거나 뻗대지 않고, 되니 안 되니 판단하지 않고, 주님께서 문제를 내놓았으니 풀어 주십시오, 저는 예도 아니요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 공손히 그분의 발치에 내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인가 우리는,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고백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세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그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