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등촌 이계선 |
김근태 선생이 별세했는데 이근안 생각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요즘은 죽은 자가 산자를 이기는 세상이다. 최근에 사망한 김정일의 죽음도 그렇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강대국들이 벌벌 떨고 있다. 29살 철부지 김정은을 후계자로 확실히 밀어 줄 테니 제발 불장난 하지 말라고 애걸복걸이다.
김근태 선생이 죽자 이근안 목사가 다시 세인들의 입방에 오르고 있다. 군사독재시절 이근안 경감으로부터 받은 고문 휴유증으로 김근태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근안은 군사독재하수인으로 악명을 떨쳤다.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기술을 발휘 했다. 얼마나 고문이 잔인했던지 사람들은 그를 “인간백정, 고문기술자”라 불렀다. 그가 전기고문을 하면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떨었다.
거꾸로 매달아놓은 채, 코에 고춧가루를 넣고 물을 부우면 창자에 불이나면서 속이 뒤집혀갔다. 피가 튀고 살타는 냄새가 가득한 고문장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目不忍見) 지옥이었다. 이근안은 김근태에게 이런 고문을 열 번이나 자행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즐겼다. 고문당하는 사람이 고통에 못 이겨 단발마의 비명을 질러대면 희열을 느껴가면서 더 가혹하게 달려들었다.
이러한 고문기술자가 어느 날 갑자기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간증을 했다는데 자기가 행한 비인간적인 고문을 “고문의 예술”이라고 자찬했다니! 극악무도와 잔인하기가 염라대왕 이 손 사래를 칠 정도다.
이근안이 천하의 악질이라서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그만한 고문은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시절 유관순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애국선열들이 고문 끝에 죽어갔는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독재시절 조봉암 도예종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 끝에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갔는가? 또 이근안만 탓할 수도 없다. 독재정부 공무원이 되어 녹을 먹고 살려면 그 정도의 과잉충성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김근태만 해도 그렇다. 이근안에게 당한 고문후유증을 앓다가 64세에 세상을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그가 그렇게 열망하던 민주한국에서 부귀를 누리다 갔으니 다행 아닌가? 삼선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총재에다 장관까지 지냈으니 상처뿐인 영광만은 아니다.
내가 이근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내 고향 사람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고향 평택인들 모임에서 누가 물었다. “이목사, 이근안이가 평택사람이라는데 이계선, 이근안 모두 이 씨니 혹시 같은 마을 친척 아냐?”
“우리친척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우리 동네 옆에 당째(堂峴)가 있는데 그곳에 친구 이근상이가 살고 있지. 머리 좋은 사촌형이 경찰에 있다는데 그가 이근안인 모양이지?”
알아보니 당 째 건너 마을 행궁(杏宮)이 사람이라 했다. 그 마을에도 근자돌림의 근애, 근준, 근석이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도 아니었다. 행궁이 사람들은 이근안이가 소롬모지(松潭) 사람이 라고 했다. 그런데 소롬모지 사람들은 펄쩍 뛰었다.
“우리 마을 300년사에 이근안같은 악질이 태어난 적이 없소이다.”
악명 높은 이근안이가 고향출신이 아닌 게 천만 다행이었다. 안심하고 그럭저럭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 목사가 전화로 알렸다.
“목사님, 이근안 이가 목사가 되어 부흥회를 하고 다닌 데요. 악마가 회개하여 천사가 됐어도 그렇지, 뭘 잘했다고 간증까지 하고 다닐까요?” 민주화가 되자 숨어 다니다 붙잡힌 이근안이 7년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김근태는 장관이 되어 교도소를 찾아갔다.
“이근안씨 당신을 용서하려고 왔습니다.”
죄수는 벌벌 떨면서 빌었다.
“제가 장관님에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장관님에게 용서를 빌면서 살겠습니다.”
평생 회개하면서 지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용서를 비는 죄수의 모습에 장관은 마음이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노무현정권이 끝나고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이근안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지난날을 후회하기는커녕 또다시 그런 날이 오면 똑같은 일을 하겠노라고 했다. 천인공노할 고문행위를 “고문의 예술”이라고 떠들어 댔다. 후안무치도 유분수다.
목사가 된 것도 그렇다. 감옥에서 통신신학을 하고 출옥 한 후 70세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뉴욕에도 10여개의 통신신학교가 있다. 천하의 엉터리가 통신신학이다. 중학교검정고시 수준에도 한참 못 비치는 교과과정이다. 그래도 “한미개혁통합 대학교 총장 아무개 박사”이름으로 광고하며 사람을 모은다.
일 년에 수십 명에게 박사학위를 팔아먹는 곳도 있다.그래서 가짜 박사에 사기꾼 박사가 목사가 되어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 목사안수만 해도 그렇다. 제대로 된 교단은 50세 이상에게는 목사안수를 주지 않는다. 목사도 70세면 은퇴다. 그런데 이근안은 70세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장로교합동개혁이란다. 참으로 웃을 수 없는 코미디프로의 한 장면이다.
장로교라고 하면 모두 영락교회 맥락인 줄 안다. 천하의 엉터리들이 장로교간판을 달고 사기를 치고 있는 현장이다. 장로교간판을 내건 이단 사이비 엉터리 교단들이 100여개나 된다. 이근안이가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하니 심히 마음이 상하고 분노하고 싶다. 지금 내 심정이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들 정도니 말이다.
“내가 전생에 이근안과 무슨 원수였단 말인가? 고향사람이라고 나를 부끄럽게 하더니 이제는 목사가 되어 목사들 얼굴에 똥칠을 하고 다니는 구나” 지금이라도 내가 목사 은퇴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김근태선생이 위독하다는 뉴스를 듣고 울고 또 울었다. 혹시 살아나실까 해서. 그 당시 유신독재에 대항했던 서울대 3총사 김근태, 이해찬, 손학규는 모두가 대통령 감들이다. 그러나 시대는 아직도 어두운 그림자가 처처에서 도사리고 있다. 민주와 인권이 후진을 하고 있는 이때에 결국 그는 떠났다.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에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님의 영정위에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 부디 천국에서 편히 쉬며 위로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땅에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인권이 유린당하는 살생이 사라지기를 생명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