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아침 식사 (외 2편)
이 경
아침에 한 차례 비가 왔다
뇌성이 푸른 산봉우리들을 데리고 더 먼 곳으로 달아났다
못난이 감자 새끼들이 흙속에서 오그르르 한 곳으로 모인다
아침 비는 신들을 태운 말발굽 소리가 옥수수 밭을
가로지르는 소리를 거느렸다
왈칵 어지러운 깨꽃 향기를 앞세웠다
햇빛조차도 아직 금빛 반짝임이 시작되기 전이다
모든 빛깔이, 말이, 생각이 시작되기 전
신들은 약속 장소로 모여 앉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흰 새가 한 바퀴 선회하는 걸음으로
빠르게 아주 빠르게 호박벌의 날갯짓처럼 바쁘게
한 꽃과 꽃 사이를 입 맞추며
비릿비릿하고 아찔한 신들의 아침 식사는 거행되었다
꼴깍꼴깍 신의 목젖소리가 어린 벼들이 자라는 논을
넘고 넘었다
만삭의 옥수수 배흘림기둥 속에서
갓 태어난 신의 붉은 수염이
깔깔깔 희고 가지런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화인火印
어린 매화나무에게 봄을 뺏는다
첫 꽃을 따 주어야 나무가 장수한다는 말에
젖 몽우리같이 만지면 아픈 꽃을
맨손으로 훑는다
눈을 질끈 감아라
이 아픔으로 먼 길 가거라
첫사랑을 바쳐 얻는 길고 튼튼하고 지루한 사랑을 위해
달군 혀로 상처 속에 새겨 넣은 말
사랑은 짧고 삶은 길지니
사랑이 버리고 간 삶을 버리지 못하리
클로버
나는 풀밭에서 결혼했어
초록의 신부가 되어 오늘만 살기로 했지
엉덩이에 풀물이 들도록 오래 살았어
날마다 돌아갈 시간을 놓쳐
오늘을 살고 나면 다시 오늘이 왔어
초록의 아이를 낳아 풀밭에 풀어 놓았지
나는 나에게 잊혀졌어
이름을 잊고 집을 잊고 돌아갈 마을을 잊었어
잊었다는 것을 또 잊었지
해 질 무렵이면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나를 부르면 오래전에 잊은 나를 부르면
결혼의 마법에서 풀려나
가난한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나는 어디 먼 사랑으로부터 이 풀밭에 와서
잠깐 꽃 피는 중이었어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지워지는 중이었어
—시집『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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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 1954년 경남 산청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93년 계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소와 뻐꾹새 소리와 엄지발가락』『흰소, 고삐를 놓아라』『푸른 독』. 계간 《시와시학》편집장 역임. 경희대학교 고양학부 겸임교수.
첫댓글 좋은 시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최분임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