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의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지난 10여 년 간 19세기의 미국 문학을 강의할 때마다 윌든(1854).을 가르쳤으면서도 정작 월든 호수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처럼 떨어지는 자연 사이로 단풍 숲이 그대로 비친 호수는 신의 손길이 아니고는 도저히 창조할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직접 오두막을 짓고 계절에 따른 호수의 숲의 변화를 관찰하며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의 진리에 관해 사색한 책 ‘윌든’은 그의 자아 여행의 기행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2년 2개월 2일 동안 그곳에서 살았지만, 4계절을 압축하여 이른 봄에서 시작하여 다음 해 봄에 이르기까지 가장 기본적인 경제 사회생활만을 유지하면서 자연 속에서 어떻게 우주와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진리를 추구했는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아름다운 이미지, 유려한 문체 뿐아니라 정신적 황무지에 사는 현대인의 영혼 지침서로서 ‘윌든’은 한 번도 소위 말하는 문학도의 필독서, 정전(正典)에서 제외된 일이 없었지만, 요즘 문학과 환경학과의 연계가 대두되며 더욱 부상하는 작품이다.
나는 어디에 살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지 는 이 책 제 2장의 제목이다. 다시 한 번 ‘윌든’을 읽으며 나는 이제 내리막길로 들어선 내 인생 여정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올해를 제외하고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번 째 질문은,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애 대한 답은 궁하다. 소로는 이 질문에 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나는 주도면밀하게 살고 싶었다. 군더더기를 다 떼어낸 삶의 정수만을 대면하고, 삶이 가르쳐 준 바를 배우고, 죽을 때가 되어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갖고 싶어 나는 숲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윌든에서 그는 ’삶의 골수까지 뽑아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영혼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윌든‘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소로의 모범답안인 것이다.
죽을 때가 되어 나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라고 말할 수 잇을까? 여기서 ’산다‘는 것은 그냥 숨쉬고 신진대하사는 물리적인 생명유지가 아닐진대, 참다운 목적의식을 갖고 가치있는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확신에 찬 답을 할 지신이 나는 없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아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돈을 위해 사는가?‘ 분명 그렇지 않다. 딸린 식구가 없으니 교수 월급이 넘치도록 충분하고 게다가 요새는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류까지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적은 별로 없다. 그럼 명예나 권력? 그것도 아니다. 맹세컨대 나는 한 번도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적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타향에서 깊어가는 가을이 나게게 던진 화두였다.
그런데 오늘 들어온 이메일 메시지에서 선숙이가 어렴풋이나마 답을 주었다. 월급 많이 주는 직장을 그만 두고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브츠로 떠난다는 선숙이는 ’선생님, 아이들을 가르칠 책, 게임 등을 준비하며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기쁩니다.‘라고 쓰고 있었다.. 편한 삶을 두고 고생길을 자처하고 나서는 제자가 한편으로 안쓰러우면서 또 한편으로 나름대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발견한 것 같아 대견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소로나 디킨슨같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내가 가르치는 작품을 통해 나의 학생들이 올곧고 가치 있는 삶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나의 삶도 완전한 낭비는 아니리라.
소로는 어느 농부의 부엌에 놓여 있던 식탁 속의 마른 잎에서 60년 전 사과나무의 알이 부화되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부활의 이미지로 책을 덮는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또 한 해가 저물어 가지만, 이제 얼마 후면 다시 돌아갈 내 자리가 소중하고 어김없이 다시 찾아올 찬란한 부활의 봄을 기약하는 가울이 춥지만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