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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충성의 제자도
누가복음 17:5~10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국과 지옥의 내세의 심판을 배경으로 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경고의 가르침을 주신 후에 자기를 믿고 따르는 여러 제자들을 향해서도 경고와 훈계의 메시지를 주시는 부분의 일부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죄와 회개한 자를 용서하지 아니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며 다른 사람을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회개하는 자는 반드시 용서해주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제자들의 대표자 격인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 후에 이렇게 간청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사도들의 이 간절한 간구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과 배려, 회개한 자를 기꺼이 완전히 다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마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은혜 없이는 전혀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별력을 주시지 않으면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너그러운 사랑의 마음, 은혜의 마음을 주시지 아니하면 내게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범한 사람을 기꺼이 완전히 용서해주는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사랑을 더해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지혜로운 판단입니다. 참으로 우리들 역시 사도들과 같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달라는 기도를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에는 크게 보자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벌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대속의 사실을 믿고 그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믿는 믿음이 바로 구원적 믿음입니다. 이렇듯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고, 성경이 약속한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성경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이 교회 문턱만 오고가는 사람이 우리 중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구원의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구원의 진리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을 힘써 읽고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자주 들으려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여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구원적 믿음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요 주권적 선물에 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는 이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그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편 107편 9절 말씀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 이하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초대하시기를
“오호라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라는 갈급한 마음을 가지라고, 진리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와서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초대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구원의 믿음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은 자는 영적인 목마름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말씀을 듣고 또 듣는 중에 심령에 영생에 대한 소원과 영적인 갈급함도 생겨나게 되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혼자라도 조용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교회에 와서 선포되는 말씀을 귀담아 듣다보면, 어느틈엔가 불신앙이 사라지고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형벌을 담당하여 그를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는 확신이 심령에 어느틈엔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에서 선포하기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녀도 왜 나는 믿음이 잘 생기지 않나 고민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낙심하지 말고 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주권적 은총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간절히 간청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주 들으십시오. 기록된 성경 말씀을 조용한 중에 꾸준히 읽으시며 다른 세상 뉴스나 정보들을 열심히 듣기보다는 성경 말씀 오디오 앱을 핸드폰에 설치해서 꾸준히 들으십시오. 교회 예배 시간에 성실히 나와 말씀의 은혜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듣는 귀와 보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시는 결정적인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대주재자가 되시고 그가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주신 대속의 구주요 부활의 구세주이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심령에 쑥 들어와 박히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소중한 아들 딸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심령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충만해지고 천국의 소망이 확고해져서 이 세상의 남은 생애 동안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적 믿음 외에 또 한 가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그와 동행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고 기도에 응답해주시어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차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는 큰 믿음도 있고 작은 믿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치려고 예수님께 매달렸던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하여 이르실 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신 바 있기도 하고, 열두 제자들을 향하여서는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혹은 “어찌하여 믿음이 적으냐?”라고 책망하신 바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줄 믿습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간절히 간구했다면, 연약한 우리들은 그 얼마나 이러한 기도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더 많은 부귀와 더 높은 존귀와 명예와 더 풍성한 행복과 건강과 자손의 번성함을 구하기보다는 사도들처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 믿습니다. 믿음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요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와 행복과 생명의 은혜가 임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르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간구해야 할 많은 기도 제목들이 있지만, 그것들보다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귀하게 보시는 믿음을 우리에게 더 달라고 하나님께 늘 간절히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렇게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주변에 있던 뽕나무 한 그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뽕나무가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고 명령한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로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작은 믿음을 제자들이 갖고 있다고 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 곧 제자들이 믿음으로 명령할 때 뽕나무가 뽑혀져 물결로 인하여 좌우로 흔들리는 바닷물에 심겨져 멀쩡히 꼿꼿하게 서 있는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극히 적은 믿음일지라도, 작지만 그 진실한 믿음만 가지고 얼마든지 큰 기적도 가능하다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큰 믿음이 있어야 할 줄로 알고 더 큰 믿음을 구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순수성이라는 점을 가르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순수성, 믿음의 진실성이라는 것입니다. 크고 위대한 능력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의 크기보다는 믿음의 진실성이라는 것입니다. 크고 위대한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믿음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온전히 우리의 문제를 맡기고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기를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을 통로로 삼으시고 친히 개입해주셔서 얼마든지 그의 위대한 능력을 우리의 간구와 소원 위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 하더라도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을 의뢰한다면 주님은 얼마든지 우리 삶에 크고 놀라운 기적, 불가능한 일들도 이루어주실 줄 믿읍시다.
그래서 아무리 큰 문제와 난관을 만날지라도 우리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하여 낙심하지 말고, 진실하고 순수하게 하나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아뢰면서 불가능할 것 같은 문제를 맡기면서 해결해달라고 간절히 청합시다. 그리할진대 하나님은 그의 위대한 능력을 발휘해주셔서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문제도 기이하고 놀랍게 완전히 해결해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 역사 속에 이루어진 수많은 일들은 그 점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대 온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이집트로부터 2백만, 3백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홍해를 가르고 건널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온통 모래뿐이고 도처에 불뱀과 전갈들이 우글거리는 시내 광야, 바란 광야,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저축된 물과 양식도 없이 버틸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이 강력한 군대와 높은 산성으로 무장한 채 버티고 있던 가나안 땅을 그 노예 생활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 들어가 그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나라의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서 기근으로 인하여 성중에 주려서 비둘기 똥과 말 대가리 값이 일반 밀과 보리보다 수백배 비쌌을 때에 다음날이 되면 그 성중에 평온할 때에 평상시 시장에서 팔리는 시세로 밀과 보리가 매매될 것이라는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 때에 선지자의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군대 장관은 코웃음치면서 “여호와께서 하늘의 창을 내신들 그런 일이 어찌 이루어질 것인가?”하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날 황혼 때에 문둥병자 네 명을 포위하던 아람 나라 진영에 보내시고 아람나라 진영에는 마침 거대한 군대의 진격 소리를 듣게 하여 급하게 도망치게 하여 그 진영의 모든 보급 물품들을 고스란히 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넘겨주어 다음날 아침 성문에 열린 시장에서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대로 밀과 보리가 팔리는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극히 적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 적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수하게 의지하며 그 적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에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역사하실진대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도 얼마든지 우리를 위하여 일으켜 주시는 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실족케 하는 일들도, 원수를 용서하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는 일도, 믿음이 없어 방황하거나 반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혼을 살리는 일도, 우리 힘과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 우리는 순수하게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함으로 의탁합시다. 그리할진대,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 한가운데 심기는 것 같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도 얼마든지 우리의 겨자씨 만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믿음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진실성 순수성이 더 중요하며, 그러한 적지만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주님께 나와 아뢰고 의탁하는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믿음을 가지고 도전하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르는 제자의 도리를 가르쳐주시고자 한 비유적 교훈을 덧붙여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7절로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은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의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의와 타산적인 신앙 태도를 늘 날카롭게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제자들 역시 그러한 태도를 갖게 될 위험성이 있음을 아시기에, 진정한 신앙의 자세는 온전한 충성과 헌신의 자세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고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예로 든 것은 당시의 노예의 생활입니다. 당시 어떤 집에 노예가 있을진대 그 노예는 그 집의 모든 농사 일들을 담당할 뿐 아니라 집안에서 주인을 수발 드는 일들도 다 그 노예의 몫이었습니다. 당시 주인이 돈을 주고 사서 종을 집에 두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모든 일을 종이 다 맡아서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양이나 소나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거나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거나 곡식들을 가꾸는 일을 하루 종일 하고 돌아오면 그것으로 종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종은 집안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 종은 주인의 저녁 밥상도 차려주어야 합니다. 서둘러 밥을 하고 밥상을 차려서 주인이 다 먹을 때까지 그 곁에서 수종을 들어야 합니다. “국 더 좀 가져와라, 고추장, 시금치 반찬 더 가져와라, 숭늉 가져와라” 다 시중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종이 가축들을 데리고 나가 꼴을 먹이고 돌아왔을 때 어서 와서 밥 먹으라고 주인이 종을 위하여 상 차려주지 않습니다. 밭일을 힘들게 다 마치고 돌아왔을 때 “고생했다, 애썼다, 고맙다”라고 말하고, “배고플텐데, 어서 여기 와서 밥먹으라.”고 말하면서 주인이 종을 위하여 밥 상 차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밭에 나가 일하거나 양이나 가축을 돌보거나 집안에서 주인의 수종을 들어주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 당시의 종들이 당연히 해야 할 그들의 일거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노예 제도가 없어졌으니 이런 일이 없고, 회사에서도 회장이나 직장 상사라고 해서 이렇게 직무적인 일 외에 무리하게 요구하면 갑질로 고발당하고 사회의 지탄을 받고 매장당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으니 종들이 이렇게 수고하는 일들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니 불평하거나 자기 공로를 내세워 불평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노예 제도의 악한 점을 인정하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당시의 당연시 하던 노예 제도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신앙적 섬김의 자세를 발굴해내서 이것을 진정한 제자의 자세로 가르쳐주시고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자세에서, 바로 온전한 충성을 다하는 종의 마음과 종의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 계산적인 태도로 섬기는 종들이었습니다. 주인이 오늘 밭에 가서 씨앗을 뿌려라 하면 그일만 하고 돌아옵니다. 오늘 양들을 이끌고 어디 산에 가서 꼴을 먹이고 와라 하면 그 일만 합니다. 돌아왔을 때도 밥 차려 와라 하면 밥을 차려 냅니다. 하라는 대로만 하고 하라고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규례 속에 담겨놓으신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과 뜻을 깨닫고 그러한 바람과 뜻을 이루려는 열심과 헌신의 마음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율법을 행함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만족케 하고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늘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자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였습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먼저, 계산을 뛰어넘은 헌신의 자세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시키는 명령만 하나씩 행하는 노예 정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인님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해야 주인님이신 하나님에게 이익이 돌아갈까 하는 열심을 가지고 의무감을 뛰어넘어 헌신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시키지 않은 일까지 더해드리려고 일을 찾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와서 예루살렘 다윗 성에 모셔들여 잘 섬길 뿐 아니라 그 법궤가 천막 아래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을 지어 드릴 소원을 갖고 선지자 나단에게 이야기합니다.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여 그 성전은 다윗의 아들에게나 짓도록 허락한다는 말을 듣자, 다윗은 포기하지 않고 그의 남은 여생의 모든 일들을 그 성전을 완공할 모든 철, 동, 은, 금, 보석, 비단과 같은 옷감, 백향목과 같은 나무, 철못, 구리, 석수장이, 벌목공 등을 한없이 준비합니다. 그리하여 그 아들 솔로몬 왕 때에 성전 건축이 아름답게 완공되도록 온전히 헌신합니다. 시키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열심을 낸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헌신의 자세는 먼저 주님의 일을 챙기는 자세입니다. 이 종이 하루 종일 밭일, 가축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주인의 밥상을 챙겨드리고 남은 일을 다 마무리한 후에야 자기 밥상을 챙겨먹습니다. 주인 일을 다 돌본 후에야 자기 자신과 자기 가정의 일을 돌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처럼 선공후사의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제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섬김의 자세를 보여준 분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의 자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청지기인 늙은 종은 여주인 사라가 죽은 뒤에 주인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라는 주인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들어 밧단아람의 나홀 성에 갔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주인의 형제의 집안인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집안의 허락을 받고 결혼의 승낙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혼의 승낙을 받고 난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리브가의 어머니와 오라버니에게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깜짝 놀란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과 그 어머니는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고 요청합니다. 생각해보면, 리브가의 가족들의 요청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며칠이라도 어머니와 딸이 먼 나라 팔레스타인으로 시집 가기 전에 정을 나누고 아쉬움을 달래야 할 터인지라 자연스런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도 먼 길을 한 달 남짓 왔으니 여행의 피로도 풀고 좀 대접도 받고 쉬고 가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종은 하루도 더 쉬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서둘러 주인 아브라함의 명령을 이루고자 합니다. 또 어머니를 사별하고 슬픔에 잠겨 있는 젊은 주인 이삭에게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 리브가를 하루라도 빨리 데려다 주어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만 가득합니다. 그는 자기의 일을 먼저 구하지 않고 오직 주인의 기쁨, 주인의 명령만을 먼저 다 이루고 나서 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뜻을 먼저 이루기까지 그는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인님이신 하나님의 일, 우리 구주 예수님의 명령과 그 바람과 뜻을 먼저 이루어드리고 그 나중에야 자기 일을 챙기는 자세가 우리가 취해야 할 제자의 자세인 줄 믿습니다. 내 할 일 다하고 내 누릴 것 다 누리고 부스러기 시간, 부스러기 정열과 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참 제자의 자세일 수 없습니다. 내게 가장 귀한 시간, 가장 귀한 건강과, 가장 귀한 재능 들을 주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참된 제자의 자세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최선을 다했는데도 늘 부족함을 느끼는 자세가 참된 제자의 자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늘 자기 의로움이 가득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자기를 더 의롭다고 여기고 비교하며 우쭐하며 남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습니다. 내가 이만 하면 잘했다라는 자기 공로 의식이 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고 무엇인가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생각대로 얻지 못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하였습니다. 자기 뜻대로 무엇인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만을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게을리 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이렇게 무엇인가 해주었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하고 계시느냐?”며 빚쟁이처럼 따지곤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10절에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바른 제자의 자세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주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고, 자원하여 넘치게 헌신했고,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일까지도 알아서 행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한 일을 돌아보면, 언제나 하나님께 유익을 끼친 것은 별로 없게 느껴지고 도리어 부족한 것뿐임을 깨닫습니다. 자기보다 더 충성된 종이 자기의 직무를 행하였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텐데,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을 섬길수록 더 느낍니다. 그러면서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전혀 없고 단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겼다고 해서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듯 맡겨주신 일들을 힘써 행하고도 늘 부족한 것뿐이라고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여기며 아무런 자랑이 없는 사람, 모든 자기의 수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최선을 다하여 길러놓고 또 교육시키느라 최선을 다하고 또 시집 장가 보내놓고서도 계속하여 무엇인가 더 주고 싶어하면서도 늘 못해준 것만 생각하면서, 속 마음으로 미안한 마음뿐이고 시집 장가 보낸 다음에도 무엇인가 더해주고 보태주는 것을 당연히 하여야 할 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부모님이 자식들을 섬기는 것이 사랑의 동기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으로 섬기는 부모는 항상 자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도 늘 부족하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의무감으로 섬기는 사람은 항상 수고에 대한 공로 의식과 자기 의와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까닭에 다가오는 불평과 원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과 섬김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구주 예수님의 구원의 큰 은혜와 우리 삶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에 대한 진실한 감사와 사랑이 있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절대로 계산적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시킨 것만 해야지, 더 이상은 안할 거야.” 하는 계산적인 봉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좀 섬겼다고, 좀 드렸다고, 그것 때문에 자기 공로 의식에 우쭐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섬긴 일에 대한 보상이 아직도 없고 아직도 해야 할 의무만이 넘치고 축복과 상급 대신에 시련과 역경만이 가득차 있노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제자의 섬김의 자세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그의 섬김은 무한 섬김입니다. 드려도 드려도 늘 부족한 것뿐입니다. 자신의 마지막 일분 일초까지도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섬김의 기회를 특권으로 알고 감사하면서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 주님께서 말씀해주신 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섬김의 자세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갑시다.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37절 말씀에 친히 약속하신 바를 우리에게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이 약속대로, 이 땅에서 우리가 충성된 종으로서 우리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원망 없이 보상과 칭찬을 바람없이 지성으로 섬길진대, 훗날 주님께서 저 천국에서 우리들을 천국 잔칫상에 앉히고 천사들을 시종으로 삼아 우리를 환대하여 대접해주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이 땅에서 우리 모두 자신을 항상 무익한 종이라는 겸손한 마음 간직하며 의무를 뛰어넘는, 자원하는 마음 가지고 모든 것을 헌신하여 섬기는 충성된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