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죽음
내가 기억하는 두 개의 죽음이 있다. 하나는 구본형 사부의 죽음, 다른 하나는 할머니의 죽음이다. 구본형 사부가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지구 반대편 에콰도르에 있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밤, 내내 뒤척이다 새벽에 ‘소천’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다. 사부의 부고를 알리는 이메일이었다. 바로 한국을 갈 수 없었기에 나는 멀리서 사부를 배웅했다. 열흘간 끙끙 앓았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다행히도 곁에 있었다. 할머니는 가족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자는 듯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의 숨이 넘어가는 순간, 삶과 죽음이 그토록 가깝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뒤 엄청난 상실감에 시달렸다.사랑하는 존재를 영원히 잃어버린 슬픔은 말로 하기가 어려웠다. 평생을 함께 해온 할머니가 영영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자다가도 벌떡 깼다. 공허감과 슬픔이 쓰나미처럼 시시때때로 밀려왔다.
상실을 견딘다는 것
상실(loss)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상태다. 소중한 대상을 잃게 되었을 때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류시화 작가는 “인간은 소유하고 경험하고 연결되기 위해 태어나지만 생을 마치는 날까지 하나씩, 그 전부를 잃어버리는 삶의 역설을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처럼 상실은 삶의 일부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상실감에 빠지면 허무감이 생겨난다. 매일 자연스럽게 행하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억지로 해야하는 짐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죄책감’도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생각과 살아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후회, 회한 역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미국 심리협회(APA)에 따르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실감이 오래 가거나 극복되지 못하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로 빠지기 때문이다.
필수통과의례, 애도작업
상실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 잘 잃어버릴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 현재의 삶을 훼손하는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너무 아파하지 않고 상실을 견디는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심리학에서는 그를 ‘애도작업 grief work’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슬픈 감정이다. ‘애도’는 사랑하는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 앞에서 그 대상에 투자되었던 모든 리비도(욕망)를 철회하려는 고통스런 ‘노동’이다. 애도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을 행동으로 옮기는 노동'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슬픔이 정서라면, 통곡은 노동이다.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노동이다. 괜히 장례식장에서 ‘아이고, 아이고’ 애달프게 곡을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애도를 통해 대상과의 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애도란 장례를 치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떤 죽음에 대해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감정적 비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어요. 그에 대한 죄의식, 증오 등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으로 나한테 되돌아올수 있습니다. 애도의 작업을 회피한다면 10년이 지난 후 그 상실의 경험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있는 겁니다. 과거의 상실이 어느 순간 증상을 만들어내면서 삶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되돌아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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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 저자인 맹정현 정신과 박사의 말이다. 그는 “애도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상실한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떼어내는 것이며, 이는 죽은 대상을 다시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고 설명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지 않는다. 상실은 오직 애도의 작업을 통해 잊혀진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였던 퀴블로 로스는 [상실과 애도]를 5가지 단계로 나눠 이야기한다.
1단계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부정하는 단계
2단계는 상실에 대한 좌절감이 분노로 표출되는 단계
3단계는 자신의 상실과 타협을 시도하는 협상의 단계
4단계는 자신의 상실된 마음을 체감하며 깊은 슬픔을 느끼는 우울의 단계.
5단계는 결국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는 단계다.
이런 애도작업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대상을 포기하게 되고, 상실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애도작업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상과 분리되지 못하고 계속 동일시한다. 이 경우 대상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포기하게 되며, 상실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아에게 전가되어 죄책감, 자책, 나아가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을 나눈 결정적 기준이 ‘애도작업의 유무’에 있다고 보았다. 애도는 상실을 자아가 능동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느냐, 아니면 그를 인정하지 않고 현실에 등을 돌리며 자폐적인 병적 상태에 빠지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잃어버리기를 성공적으로 하게 되면 자아가 다시 자유로워지고 원래의 에너지 상태로 귀환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실을 회피하거나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면 이는 고스란히 트라우마로 남으며 우울에 빠지는 계기가 된다. 때문에 애도작업은 힘들지만 반드시 지나야 하는 통과의례다.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기억할 것
잊으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 낫다. 특히 언어를 통한 기억이 중요한데 감정이 언어와 함께 표출되기 때문이다. 계속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글로 쓰면서 리비도를 고갈시켜야 한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부터 애도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과부로 지낸 어머지를 추모하며 쓴 2년 간의 일기를 모아 <애도일기 Moruning Diary>를 출간했다.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뇌종양으로 죽은 아내를 애도하며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2012)를 썼고, 조이스 캐롤 오츠는 평생 해로한 남편을 잃고 자살충동에 시달리며 6개월간 <과부이야기>를 썼다. 이들은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경험하면서, 그럼에도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분노와 여전히 일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분노하며 애도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했다.
이처럼 ‘잘 잃기 위해선’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감정을 인정하고 적극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애도의 방식은 각자에게 달렸다. 몇 날 며칠을 통곡할 수도 있고, 수개월동안 애도일기를 쓸 수도 있고, 스크랩북을 만들거나 포토북을 만들어 그를 기억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거나 봉사활동을 하고, 집안에 사진을 걸어 자리를 마련해두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사랑했던 이의 상실을 지금의 삶에 연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상실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며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두고두고 고통받는다. 나 역시 생애 처음으로 크나큰 상실을 경험하면서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걸 느낀다. 이젠 시작만이 아니라 끝을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보게 되는 누구라도 언젠가 끝을 맞는 존재라는 게,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영화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 (2016) 에 사랑하는 딸을 잃고 슬퍼하는 아빠가 나온다. 상실의 슬픔과 분노로 가득찬 그에게 한 노인이 이런 말을 해준다.
“상실의 아픔을 겪고 나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이지.”
첫댓글 상실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잘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