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편집위원 체제 갖추다
장준하 평전/[10장] <사상계> 정론지로 자리잡아 2008/12/11 08:00 김삼웅이 지중(至重)한 시기에 처하여 현재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민족의 동량(棟樑)은 탁고기명(託孤寄命)의 청년이요, 학생이요,
새로운 세대임을 확신하는 까닭에 본지는 순정무구한 이 대열의
등불이 되고 지표가 됨을 지상의 과업으로 삼는 동시에 종(縱)으로
5천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橫)으로
만방의 지적소산(知的所産)을 매개하는 공기(公器)로서
자유ㆍ평등ㆍ번영의 민주사회건설에 미력을 바치고자 한다.
장준하, <사상계> 헌장에서.
< 사상계>가 ‘1인잡지’의 형태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편집위원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1955년 부터이다.
이 해 1월 김성한을 초대 편집주간에 위촉하고 각계의 유능한 인사들을 편집위원으로 위촉했다. 엄요섭ㆍ홍이섭ㆍ정병욱ㆍ정태섭ㆍ신상초ㆍ강봉식ㆍ안병욱ㆍ전택부를 편집위원으로 위촉하여, 편집방향과 기획을 세우도록 하고 내용에 대한 검토도 맡겼다.
이에 앞서 1954년 9월부터 일본신학교 동기인 전택부가 편집을 맡아 12월호까지 참여하고, 1953년 7월부터 김재준(신학자), 김기석(윤리학자), 오영진(극작가), 홍이섭(사학자), 정태섭(변호사), 엄요섭(종교사학자), 김병기(미술평론가) 등이 편집자문위원의 형식으로 참여했다. (주석 1)
1955년 3월에는 광복군 동지로서 대륙장정을 비롯하여 ‘망명잡지’를 함께 만들었던 김준엽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김준엽은 해방 뒤 줄곧 중국에 남아서 중국국립중앙대학교 대학원과 중국국립대만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동양사를 연구하다가 귀국한 것이다. 김준엽의 참여는 장준하에게 백만 원군격이었다.
당시 <사상계> 주간이던 김성한은 김준엽의 참여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같은 해(1955년) 3월에 대만 대학원에 유학중이던 김준엽 교수가 돌아왔다. 김교수는 장사장과 중국 망명동지였다. 초면이지만 그 명랑한 성품으로 해서 곧 통하게 되고 사내(社內)에는 웃음이 돌았다. <사상계>가 일치단결해서 동지적으로 뭉치고 후일 크게 비약할 계기를 만든 것은 김교수의 귀국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이로부터 모두들 마음이 통하고 밤이면 어울려서 맥주도 마시고 식사도 하면서 <사상계>를 근사하게 만들 궁리로 시종했다.
이리하여 <사상계> 발행은 많은 월간지와 학보 <교육문화>, <역사학보>, <진단학보>, <국어국문학>, <동방학지>, <철학>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사상계>는 동사(同社)의 지주로 상승하기 시작하여 그해 6월호는 8천 부가 매진되고 그해 12월호는 1만부가 매진되어 2일간에 다시 3천 부를 증쇄하여 우리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석 2)
장준하는 <사상계>의 발행에 전력하는 한편 <교육문화>, <역사학보>, <진단학보>, <국어국문학>, <동방학지>, <철학> 등 학술지의 발행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역사학회 창설 때부터 오랫동안 학보의 편집간사로서 학보발행을 위한 원고수집ㆍ편찬ㆍ간행까지의 실무를 담당하여 와서, <사상계> 편집이 아닌 <역사학보> 출간을 위해서도 빈번히 발행인 장준하 선생과 접촉을 해야만 했었다. 더구나 <역사학보> 제 10집은 기념호로서 14편의 논문으로 350페이지에 이르는 이를테면 거질(巨秩)이어서 그 출간을 고대하는 필자는 사상계사 사무실을 발이 닳게 찾아가서 그 4층 계단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는 나의 근직한 태도를 바라보곤 하면서 아무 말도 없이 밝은 미소를 짓곤하던 장준하 선생의 그 너그럽고 인자스러운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장선생의 얼굴에는 그 어느 구석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짓곤 하던 그 미소에도 그의 넓고 깊은 흉금이 배어 있었던 것이리라. (주석 3)
장준하는 평소 학술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상계> 편집실이 지식인들의 ‘광장’이 된 것은, 그의 개인적인 관심과 덕성이 학자들을 끌어들이게 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 사상계>사가 들어있던 한청빌딩은 바로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앞에 있었다. 서울의 중심가이다. 교통의 중심지이다. 또한 <사상계>사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은 정말 보람있는 일들이었다. 거기에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권위 있는 모든 학술잡지가 다 사상계사에서 발행된다. 그러니 우리 학계의 중진학자, 소장학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종로를 나오는 기회가 있으면 자연히 한청빌딩으로 발길이 옮겨지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여 어느덧 <사상계>사는 각 대학 교수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사무실이 협소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할 수 없이 사무실을 옮겼다. 종래에 쓰던 방의 배나 되는 방 두 개를 얻어 한 방은 실무를 보는 사무실로, 또 한 방은 사장, 주간이 같이 쓰며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응접실을 겸한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니 맘이 안정되었다. (주석 4)
주석
1) 유경환, '기둥잘린 나무', 앞의 책, 270쪽.
2) 김성한, '나와 사상계', <사상계> 창간 10주년기념 특대호.
3) 한우근, '역사학계에 기여한 장준하선생', <광복 50년과 장준하선생>, 73쪽.
4) 장준하, '브니엘', <장준하문집3>, 118쪽.
민족의 동량(棟樑)은 탁고기명(託孤寄命)의 청년이요, 학생이요,
새로운 세대임을 확신하는 까닭에 본지는 순정무구한 이 대열의
등불이 되고 지표가 됨을 지상의 과업으로 삼는 동시에 종(縱)으로
5천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橫)으로
만방의 지적소산(知的所産)을 매개하는 공기(公器)로서
자유ㆍ평등ㆍ번영의 민주사회건설에 미력을 바치고자 한다.
장준하, <사상계> 헌장에서.
< 사상계>가 ‘1인잡지’의 형태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편집위원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1955년 부터이다.
이 해 1월 김성한을 초대 편집주간에 위촉하고 각계의 유능한 인사들을 편집위원으로 위촉했다. 엄요섭ㆍ홍이섭ㆍ정병욱ㆍ정태섭ㆍ신상초ㆍ강봉식ㆍ안병욱ㆍ전택부를 편집위원으로 위촉하여, 편집방향과 기획을 세우도록 하고 내용에 대한 검토도 맡겼다.
이에 앞서 1954년 9월부터 일본신학교 동기인 전택부가 편집을 맡아 12월호까지 참여하고, 1953년 7월부터 김재준(신학자), 김기석(윤리학자), 오영진(극작가), 홍이섭(사학자), 정태섭(변호사), 엄요섭(종교사학자), 김병기(미술평론가) 등이 편집자문위원의 형식으로 참여했다. (주석 1)
1955년 3월에는 광복군 동지로서 대륙장정을 비롯하여 ‘망명잡지’를 함께 만들었던 김준엽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김준엽은 해방 뒤 줄곧 중국에 남아서 중국국립중앙대학교 대학원과 중국국립대만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동양사를 연구하다가 귀국한 것이다. 김준엽의 참여는 장준하에게 백만 원군격이었다.
당시 <사상계> 주간이던 김성한은 김준엽의 참여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같은 해(1955년) 3월에 대만 대학원에 유학중이던 김준엽 교수가 돌아왔다. 김교수는 장사장과 중국 망명동지였다. 초면이지만 그 명랑한 성품으로 해서 곧 통하게 되고 사내(社內)에는 웃음이 돌았다. <사상계>가 일치단결해서 동지적으로 뭉치고 후일 크게 비약할 계기를 만든 것은 김교수의 귀국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이로부터 모두들 마음이 통하고 밤이면 어울려서 맥주도 마시고 식사도 하면서 <사상계>를 근사하게 만들 궁리로 시종했다.
이리하여 <사상계> 발행은 많은 월간지와 학보 <교육문화>, <역사학보>, <진단학보>, <국어국문학>, <동방학지>, <철학>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사상계>는 동사(同社)의 지주로 상승하기 시작하여 그해 6월호는 8천 부가 매진되고 그해 12월호는 1만부가 매진되어 2일간에 다시 3천 부를 증쇄하여 우리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석 2)
장준하는 <사상계>의 발행에 전력하는 한편 <교육문화>, <역사학보>, <진단학보>, <국어국문학>, <동방학지>, <철학> 등 학술지의 발행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역사학회 창설 때부터 오랫동안 학보의 편집간사로서 학보발행을 위한 원고수집ㆍ편찬ㆍ간행까지의 실무를 담당하여 와서, <사상계> 편집이 아닌 <역사학보> 출간을 위해서도 빈번히 발행인 장준하 선생과 접촉을 해야만 했었다. 더구나 <역사학보> 제 10집은 기념호로서 14편의 논문으로 350페이지에 이르는 이를테면 거질(巨秩)이어서 그 출간을 고대하는 필자는 사상계사 사무실을 발이 닳게 찾아가서 그 4층 계단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는 나의 근직한 태도를 바라보곤 하면서 아무 말도 없이 밝은 미소를 짓곤하던 장준하 선생의 그 너그럽고 인자스러운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장선생의 얼굴에는 그 어느 구석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짓곤 하던 그 미소에도 그의 넓고 깊은 흉금이 배어 있었던 것이리라. (주석 3)
장준하는 평소 학술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상계> 편집실이 지식인들의 ‘광장’이 된 것은, 그의 개인적인 관심과 덕성이 학자들을 끌어들이게 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 사상계>사가 들어있던 한청빌딩은 바로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앞에 있었다. 서울의 중심가이다. 교통의 중심지이다. 또한 <사상계>사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은 정말 보람있는 일들이었다. 거기에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권위 있는 모든 학술잡지가 다 사상계사에서 발행된다. 그러니 우리 학계의 중진학자, 소장학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종로를 나오는 기회가 있으면 자연히 한청빌딩으로 발길이 옮겨지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여 어느덧 <사상계>사는 각 대학 교수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사무실이 협소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할 수 없이 사무실을 옮겼다. 종래에 쓰던 방의 배나 되는 방 두 개를 얻어 한 방은 실무를 보는 사무실로, 또 한 방은 사장, 주간이 같이 쓰며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응접실을 겸한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니 맘이 안정되었다. (주석 4)
주석
1) 유경환, '기둥잘린 나무', 앞의 책, 270쪽.
2) 김성한, '나와 사상계', <사상계> 창간 10주년기념 특대호.
3) 한우근, '역사학계에 기여한 장준하선생', <광복 50년과 장준하선생>, 73쪽.
4) 장준하, '브니엘', <장준하문집3>,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