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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 國立故宮博物館
2016.08.09(화) 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는 景福宮 境內에 있는 國立故宮博物館을 답사하였다.
원래 三伏더위에는 답사를 쉴 계획이었으나 屋外를 피하고 국립고궁박물관 답사로 선정했는데
연일 暴炎特報가 발령되는 더위에 이날도 서울 최고기온 33.6℃, 불쾌지수 82까지 올라가는
날씨였는데 회원 16명(부인 4명 포함)이 10:00에 집결하여 文化踏査에 참가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特別展으로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를 전시하고 있어
이를 먼저 둘러보고 常設展示室을 관람하였다.
朝鮮王陵, 王室의 靈魂을 담다 -전시기간: 2016.06.21~08.28-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왕릉은 生前에 居處하던 궁궐과 마찬가지로 聖域으로 취급되어
위치 선정부터 건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차는 국가적 禮法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왕릉은 祖上神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자 王室 儀禮의 장소로서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조선왕릉은 500년 역사의 建築, 造景, 彫刻, 制度, 儀禮 등 有∙無形의 요소가 어우러져 있는
공간으로, 朝鮮王朝 歷代 27대 왕과 왕비의 왕릉이 대부분 온전하게 남아 있어 역사적 변천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으며, 조선왕릉은 2009년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전시는 [조선왕릉, 세우다]: 國葬 節次부터 왕릉의 위치선정 및 건설 -[조선왕릉, 정하다]:
封墳의 형식, 내부 형식 및 副葬品 결정 –[조선왕릉, 모시다]: 山陵祭禮, 陵幸, 遷陵, 封陵
–[조선왕릉, 돌보다]: 왕릉의 관리와 守護, 왕릉 주변에 願刹 설치의 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사진을 정리하고 사진을 찍을 때 서두르고 많이 찍느라고 서둘렀더니 글씨가 작은 설명문을
判讀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다른 곳에서 자료를 찾아 간단한 설명과 참고자료를 병기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번에 [朝鮮王陵, 王室의 靈魂을 담다]를 올리고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 전시품의
사진을 정리하고 간단한 설명문이 정리되는 대로 올릴 예정이다.
2016. 08.12 孤 山 朴 春 慶
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1); 國立故宮博物館 특별전시 朝鮮王陵
特別展 朝鮮王陵, 王室의 靈魂을 담다
(01) 국립고궁박물관 前景
(02)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吳회장과 매번 解說하느라 수고하는 白九 동문
(03) 특별전,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
(04) 해설하는 白九와 경청하는 답사회원들
(05) 조선왕릉의 위치
왕릉의 위치는 漢陽都城 城底 十里(4km)에서 百里(40km) 이내(임금이 當日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정하였다.
*端宗의 寧越 莊陵 제외: 단종이 流配地에서 賜死되어 寧越戶長 嚴興道가 棺을 갖추어 몰래
장사 지낸 뒤 숨겨오다가 肅宗 24년(1698) 追復되어 廟號를 端宗이라 하고 왕으로 봉하여
莊陵이라고 했다.
(06) 朝鮮王陵 象設圖 -문화재청 리플렛 사진-
조선왕릉의 공간은 크게 進入, 祭享, 陵寢領域으로 나눠지는데 齋室이 있는 진입공간은
祭禮와 參拜를 준비하기 위한 俗世의 영역이며, 제향공간은 丁字閣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그 뒤로 封墳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능침공간은 陵寢과 魂遊石, 石羊, 石虎, 望柱石과 曲墻이 있는 上階와 文石人과 石馬가
있는 中階, 武石人과 石馬가 있는 下階로 구분된다.
*封墳은 매장 형태에 따라 單陵, 雙陵, 同原異岡陵 등 다양한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07) 조선왕릉의 영원한 수호자 文石人과 武石人(오른쪽)
조선왕릉의 封墳 앞에는 文臣과 武臣 모습의 石人이 永眠한 王과 王妃의 영혼을 지키고
있으며, 石人은 王陵의 대표적인 石物로 王과 王妃陵에는 文∙武石人 각 1쌍씩세웠으나
死後에 왕으로 追崇되었을 때는 文石人만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08) 문석인과 무석인의 크기 변화
文石人과 武石人은 시대에 따라 크기와 양식이 변화되었는데 조선 초기~15세기후반까지는
대체로 크기 2m 50cm정도로 다양한 표현방식이, 16~17세기에는 3m이상으로 얼굴이
커지고 표현방식이 단순해졌으며, 18세기 이후에는 석인상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표현방식도
寫實性이 추구되었는데 이 같은 변화는 當代의 사회와 왕실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明宗 20년(1565)에 조성된 中宗의 두 번째 繼妃 文定王后 尹氏의 무덤인 泰陵은 王妃의
單陵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조선 최고의 惡后라고 할 정도의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케 하며 泰陵의 文石人 317cm, 武石人 328cm로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큰데 泰陵에 묻힌 文定王后의 勢道가 대단했던 사실을 反證하고 있다.
태릉(사적 제201호)은 文∙武石人 뿐만 아니라 封墳과 다른 석물들도 큰데 반하여 문종왕후가
垂簾聽政하고 明宗이 親政 후에도 친정동생 尹元衡과 계속 攝政했던 明宗과 明宗 妃의
雙陵으로 三育大學 정문 옆에 있는 康陵(사적 제201호)은 태릉에 비해 작고 초라하여
죽어서도 母后의 치마폭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09) 조선왕릉 일람
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그리고 死後에 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4基에 이르며
이중 40기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유적으로 모두 史蹟으로 지정되었다.
(10)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 44기 중에서 北韓지역 開豊郡에 있는 太祖의 王妃 神懿王后의 齊陵, 定宗과
定安王后의 厚陵, 폐위된 서울 燕山君墓(사적 제362호)와 南楊州 光海君墓(사적 제363호)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1) 哲宗國葬都監儀軌. 1865년 -보물 제1901-3호-
高宗 즉위년(1863) 12월 8일 昌德宮 大造殿에서 昇遐한 哲宗(재위 1849 ~1863)의 國葬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국장도감의궤이다.
국장의 진행 과정과 각 관청 간의 連繫와 재정의 출납, 인력의 동원과 사용한 祭器 및
儀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의궤는 총 4책으로 구성되었으며,
彩色 圖說과 班次圖가 포함되어 있다.
*儀軌: 조선시대 王室이나 국가의 주요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록.
(12) 국조오례의-국조상례보편(오른쪽)
=國朝五禮儀: 조선 초기 吉禮, 嘉禮, 賓禮, 軍禮, 凶禮 등 五禮儀에 관하여 기록한 책으로
세종 때 시작되어 成宗 5년(1474) 申叔舟 등이 완성하였다.
=國朝喪禮補編: 英祖 34년(1758) <國朝五禮儀>의 喪禮에 관한 부분을 보충∙개편하여
완성한 책으로 淡窩 洪啓禧 등이 저작한 활자본. 6권 6책.
(*淡: 맑을 담 *窩: 훔집 와 *禧: 복 희)
(13) 철종빈전혼전도감의궤-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오른쪽)
=哲宗殯殿魂殿都監儀軌는 哲宗이 1863년 昌德宮 大造殿에서 승하하자 國喪을 거행하기
위한 임시기구인 三都監을 설치하고, 山陵都監은 陵墓를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는
기구였는데 이 의궤는 당시 산릉도감의 설치와 운영, 업무내용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殯殿魂殿都監儀軌는 조선시대 국왕 및 后妃의 喪事가 났을 때, 襲∙斂∙成服∙成殯 및
魂殿의 설치 등 일반적 의식을 기록한 책으로 현재 전하는 의궤는 총 45의궤에
87책이 있다. (*斂: 염할 염)
=哲宗睿陵山陵都監儀軌는 哲宗의 睿陵 조성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이다.
*山陵都監儀軌는 조선시대 국왕 및 后妃의 國葬 때 山陵에 관한 儀節을 기록한 책으로
玄宮·丁字閣·齋房 등의 일을 관장하던 山陵都監에서 기록한 것이다.
*哲宗(재위 1849년~1863년): 全溪大院君 壙의 셋째 아들로, 憲宗 10년(1844) 兄인
懷平君 明의 獄事로 가족과 함께 江華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大王大妃
純元王后(純祖 妃) 金氏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德完君에 책봉되고, 1849년 19세로
憲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壙: 뫼 구덩이 광)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垂簾聽政하였으며, 1851년 대왕대비의 近親인 金汶根의 딸을
왕비를 맞아 김문근이 國舅로서 정권을 장악, 安東 金氏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으며
1852년부터 왕의 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에 어둡고, 安東 金氏 일파의 專橫으로
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하였다. (*舅: 장인 구)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勢道政治의 소용돌이 속에서 女色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여 高陽 睿陵에 安葬되었다.
(14) 순종황제 因山輓章. -1926년 경-
純宗皇帝(재위 1907~1910)의 葬禮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적은 輓章을 모아놓은 것.
(*輓章: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
(15) 仁宗 金寶
明宗 즉위년(1545)에 만든 仁宗의 御寶로 昇遐 후 ‘仁宗’이라는 廟號와
‘獻文懿武 章肅欽孝’라는 諡號를 올리면서 만든 것으로 金寶는 追上尊號를 새긴
도장이다. (*懿: 아름다울 의 *欽: 공경할 흠)
*仁宗.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中宗과 章敬王后 尹氏의 맏아들로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産後症으로 7일 만에 사망하여
繼妃 文定王后의 영향아래 자라게 되었으며 문정왕후의 성격과 기질이 고약하여 인종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목숨이 위태로운 시달림을 받았다고 전한다.
中宗 15년(1520) 世子에 책봉되고 1544년 30세에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賢良科를 부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己卯士禍 때 화를 입은
趙光祖 등 士林派를 伸寃하고 개혁정치를 행하려 했으나 中宗의 繼妃이자 인종의 繼母인
文定王后의 권력욕에 시달렸으며, 인종 자신도 병약하여 포부를 펴지 못한 채 재위
9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 *伸: 펼 신 *寃: 원통할 원)
인종이 사망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明宗이 즉위하였는데 野史에서는 인종이 문정왕후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高陽 孝陵에 安葬되었다.
(16) 소병풍
素屛風은 殯殿과 山陵, 隧道閣, 魂殿 御齋室에 배치했던 6폭 병풍으로 바닥 면에 종이나
苧布, 비단만 바르고 그림이나 글씨로 꾸미지 않았다.
*殯殿: 因山 때까지 왕 또는 왕비의 관을 두는 전각.
*魂殿: 왕이나 왕비의 國葬 뒤 삼 년 동안 神位를 모시던 전각.
*因山: 太上皇, 皇帝, 皇太子, 皇太孫과 그 妃들의 장례. 또는 上王, 王, 王世子, 王世孫과
그 妃들의 장례. (*비슷한 말: 國葬, 禮葬, 因封)
(17) 朝鮮王朝의 國葬節次 (주요행사 요약)
國葬都監 설치→ 殯殿 마련→ 成服(상주들이 상복을 입음)→ 發靷→ 下棺→ 返虞(신주를
궁궐로 가져옴)→ 국장도감 해산 의 순서로 진행된다.
(18) 최고의 명당을 찾아서
사진 위; 與地圖 중 京畿附忠淸道, 아래 왼쪽부터; 명릉도-북도각릉전도형-태조망우령가행도
=明陵圖: 肅宗과 제1繼妃 仁敬王后, 제2계비 仁顯王后의 陵을 그린 山陵圖
=北道各陵殿圖形: 함경도에 있는 太祖의 4代祖陵과 태조와 관련된 史跡地를 그린 山陵圖
=太祖忘憂嶺駕幸圖: 태조가 忘憂嶺[망우리고개]에서 자신의 陵地를 살피는 모습을
그린 그림(宜寧 南氏 집안에 전래되는 왕실 行事圖를 模寫한 그림)
*망우리고개는 太祖 李成桂가 劍岩山 아래 東九陵의 健元陵 터를 자신의 幽宅으로 정한 후
망우산 고개 위에서 쉬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
[於斯 吾憂忘矣]”라고 했다고 ‘망우리고개’라고 한다.
(19) 정조산릉도감의궤
正祖山陵都監儀軌는 純祖 즉위년(1800) 7월~11월에 진행된 정조의 健陵 조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山陵都監儀軌: 조선시대 국왕 및 后妃의 국장 때 山陵에 관한 儀節을 기록한 책.
*山陵都監: 國葬 때 山陵 조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임시 官衙.
(20) 산릉도감계회도 -보물 제901호, 개인 소장-
山陵都監契會圖는 宣祖 8년(1575)에 제작된 明宗 妃 仁順王后 장례 당시 山陵都監 관원의
계회도로 冲齋 權橃의 아들 靑巖 權東輔가 당시 도감 계원으로 받아서 그의 자손에게
전한 것이다. (*橃: 뗏목 벌)
*계회도: 風流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된 文人들의 契會 광경을 그린 기록화.
(21) 수릉산릉도감의궤
綏陵山陵都監儀軌는 高宗 27년(1890) 4월에 昇遐한 翼宗 妃 神貞王后를 九里 東九陵의
綏陵(翼宗의 陵)에 合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翼宗(1809~1830): 純祖의 元子로 王世子(孝明世子)로 책봉되고, 死後에 왕으로 追尊
되었음.
(22) 朝鮮王陵群
(23) 九里 東九陵(사적 제193호)의 모습
① 健元陵(太祖 李成桂의 陵)
② 顯陵(제5대 文宗과 顯德王后 權氏의 능)
③ 穆陵(14대 宣祖와 懿仁王后 朴氏·繼妃 仁穆王后 金氏의 능)
④ 徽陵(16대 仁祖의 繼妃 莊烈王后 趙氏의 능)
⑤ 崇陵(18대 顯宗과 明聖王后 金氏의 능)
⑥ 惠陵(20대 景宗의 비 端懿王后 沈氏의 능)
⑦ 元陵(21대 英祖와 계비 貞純王后 金氏의 능)
⑧ 景陵(24대 憲宗과 妃 孝顯王后 金氏, 계비 孝定王后 洪氏의 능)
⑨ 綏陵(純祖의 世子 翼宗과 妃 神貞皇后 趙氏)의 능).
(24) 大棺(梓宮) 제작, 즉위하는 해에 왕의 관을 제작한다. (*梓: 가래나무 재)
(25) 經國大典 -경국대전 卷三은 보물 제1521호, 원본 개인 소장-
世祖는 즉위하자마자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後代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崔恒·盧思愼·姜希孟·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世祖 6년(1460) 먼저 ‘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위해
施行은 미루었으며 睿宗 때 2차 작업, 成宗 때 수정이 계속되어 成宗 2년(1471)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經國大典>이 만들어졌으며 1481년에는 다시 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經國大典>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改修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
(26) 묘전궁릉원단묘지
廟殿宮陵園壇墓誌는 조선왕실의 宗廟와 주요 祠堂, 王陵, 陵園, 胎室, 墓에 대한 기록으로
1936년 李王職 禮式課에서 간행했으며, 왕릉에 대한 기록은 47건, 園∙壇∙墓는 13건을
수록하였다.
(27) 철인왕후예릉산릉도감의궤
哲仁王后國葬都監儀軌는 1878년 5월 철인왕후 김씨가 승하하자 왕실에서는 국상을
거행하기 위하여 國葬都監·殯殿都監·山陵都監의 三都監을 설치하게 되며 이 자료는 당시
산릉도감에서 능묘를 준비하고 각종 의례를 진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哲宗 妃 哲仁王后 金氏(1837-1878)는 金汶根의 딸로 1851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1858년
元子를 낳았으나 6개월만에 죽어 安東 金氏 勢道期의 마지막 왕후로, 1863년 철종이
승하함에 따라 결국 자손 없이 42세(1878)를 일기로 승하하여 高陽 西三陵의 睿陵에
철종과 함께 안장되었다.
(28) 太祖 健元陵 表石 拓本. 탁본제작: 1970년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태조 건원릉 표석 탁본은 高宗이 九里 東九陵의 健元陵 神道碑 옆에 1900년에
세운 표석의 碑文을 탁본한 것으로 光武 4년(1900년) 太祖를 高皇帝로 追尊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앞∙뒷면에 새긴 글은 高宗의 親筆이다.
(29) 명릉의 향대청에 걸었던 현판-홍릉의 재실에 걸었던 현판(아래)
=明陵 香大廳 述懷 懸板은 英祖 32년(1756) 가을 肅宗과 繼妃 仁顯王后의 능인 明陵을
참배했던 일을 돌아보며 느낀 感懷를 적은 詩를 새겨 명릉 齋室의 향대청에 걸었던 현판이다.
*香大廳: 제사에 사용할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獻官(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대기하던
장소.
=書附 弘陵齋室 懸板은 英祖 妃 貞聖王后의 능인 弘陵(高陽 西五陵 陵域) 齋室에 걸었던
현판으로 英祖가 처음으로 홍릉에 거둥하여 느낀 감회를 적은 글로 英祖 34년(1758)
南崖 鄭翬良의 글씨로 새긴 것이다. (*翬: 훨훨 날 휘)
(30) 조선왕릉 斷面圖
初期 조선왕릉의 내부는 石室 안에 棺을 安置하여 사후관리가 容易한 반면 많은 人力과
工事期間이 긴 단점이 있어 睿宗 때에 世祖의 光陵을 조성하면서 세조의 遺言에 따라
처음으로 灰隔 構造를 도입하여 後代의 왕릉은 대부분 회격 구조로 조성되었다.
회격 구조는 內梓宮(왕의 棺)을 덮는 外梓宮을 만들고 그 위를 석회혼합물인 三物(회+
모래+황토)로 덮어 굳힌 후 그 옆에 구멍을 파 棺을 넣고 다시 삼물로 마무리하는 방식의
회격 구조는 인력소모가 적고 盜掘의 위험성도 적은 것이 장점이었다.
(31) 梓宮(임금의 관)
재궁은 왕이 卽位 즉시에 제작하여 해마다 옻칠을 더해 사용하였다.
(32) 正祖國葬都監儀軌 -보물 제1901-1호, 서울대학교奎章閣 소장-
1800년 조선 제22대 국왕 正祖의 國葬 節次를 기록한 의궤로 왕릉의 副葬品에 관한 기록도
자세하게 실려있다.
(33) 정조 구릉지 명기(正祖 舊陵地 明器)
1800년 正祖가 昇遐하고 처음 묻혔던 곳에서 出土된 明器로 조선왕릉에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祭器類, 樂器類, 그릇 등을 작게 제작한 明器를 副葬하였다.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었다고 한다.
(34) 명성황후 홍릉산릉도감의궤-명성황후 빈전혼전도감의궤
=明成皇后 洪陵山陵都監儀軌는 高宗 妃 明成皇后(1851~1895)의 능인 南楊州 洪陵의
조성절차를 기록한 산릉도감의궤로 각종 도구와 건물의 평면도, 石物들의 彩色 圖說에서
皇帝國으로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明成皇后 殯殿魂殿都監儀軌는 高宗 妃 明成皇后 國葬 당시의 殯殿과 魂殿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 각종 祭具와 물품 등의 彩色 圖說에서 皇帝國으로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35) 유릉 천봉만장
裕陵 遷奉輓章은 純宗 妃 純明孝皇后 閔氏(1872~1904)의 輓章으로 1926년 수백 명의
官僚들이 故人을 추모하는 글을 쓴 것을 엮은 것이다.
*輓(挽)章: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 또는 그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旗처럼 만든 것.
주검을 산소로 옮길 때에 상여 뒤에 들고 따라간다. (*輓: 애도할 만 *挽: 당길 만)
(36) 국기판(國忌板)
왕과 왕비의 忌日 등 國忌의 행사에 관련된 사항들을 적어 놓은 현판으로 太祖부터
哲宗까지의 忌日과 陵號, 위치 등을 적어 놓았다.
(37) 山陵祭禮 陳設 再現
각 왕릉에서 올리는 忌晨祭 때의 상차림을 재현한 것이다. (*晨: 새벽 신)
*忌晨祭: 왕실에서 歷代 국왕이나 왕후의 忌日에 각 陵에 지내는 제사.
(38) 산릉제례 제기(山陵祭禮 祭器)
(39) 正祖 華城陵行圖 (부분)
先代王의 陵을 방문하는 行次인 陵幸은 國王의 孝心과 王權의 正統性을 萬邦에 알리는
儀式이면서 九重宮闕에 居處하는 임금이 백성들과 접촉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국왕은 능행을 통하여 백성들의 民心을 파악하기도 하고, 正祖의 경우 능행을 군사 훈련의
기회 및 首都圈의 防衛 狀態를 點檢하는 기회로 삼았다.
(40) 華城行幸圖 屛風 –보물 제1430호, 삼성미술관 리움 所藏- 중 배다리
화성행행도병풍은 正祖가 모친의 회갑을 맞이하여, 正祖 19년(1795)
윤 2월 9일부터 8일간에 걸쳐 母親 惠慶宮 洪氏를 모시고 父親 思悼世子의
묘소가 있는 華城의 顯隆園을 行幸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그린
8첩 병풍이다.
각 폭의 내용은 華城聖廟展拜圖, 洛南軒放榜圖, 奉壽堂進饌圖, 洛南軒養老圖,
西將臺夜操圖, 得中亭御射圖, 還御行列圖, 漢江舟橋還御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榜: 방 붙일 방 *饌: 반찬 찬)
당시 최고의 畵員으로 奎章閣 溠備待令畵員이었던 金得臣, 李寅文 등이
그렸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양하고 諧謔性이 있어 당시의 풍속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세련된 색채를 구사하고 묘사가 매우 정교하다.
(*溠: 강 이름 자)
이 그림은 대표적인 역사적 기록화로서 풍속화적인 성격도 강한데,
그림으로서만이 아닌 史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며 묘사, 색채 면에서
매우 우수하여 18세기 최고의 기록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41) 영조가 효릉 祭禮 후 짓고 쓴 시를 새긴 현판[慾法 舜堯 法相宗 懸板]
英祖가 1741년 仁宗의 孝陵에서 직접 祭享을 올린 뒤 짓고 쓴 詩를 새긴 현판이다.
(42) 유릉섭행작헌례홀기-장릉축식-융릉축식-건릉축식(왼쪽부터)
=裕陵攝行酌獻禮 笏記는 제27대 純宗과 妃 純明孝皇后 閔氏, 繼妃 純貞孝皇后 尹氏를
合葬한 裕陵에서 올리는 酌獻禮의 순서를 적은 기록이다.
=章陵祝式은 仁祖의 부친인 追尊王 元宗과 모친 仁獻王后의 무덤인 金浦 章陵에서
寒食節 祭禮 때 올리는 祝文의 書式을 기록한 문서.
=隆陵祝式은 思悼世子(추존왕 莊祖)의 능인 隆陵에서 祭禮儀式을 거행할 때 올리는
祝文의 서식을 기록한 문서.
=健陵祝式은 正祖의 健陵에서 祭禮儀式을 거행할 때 올리는 祝文의 서식을 기록한 문서.
(43) 영조의 연보를 새긴 각석-영은경희록(오른쪽)
=영조의 연보를 새긴 각석(英祖大王御筆 刻石)은 영조가 1757년 자신의 年譜를 기록한
각석으로 왕실어른들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올리거나
陵幸한 내용을 적고 있다.
=迎恩慶喜錄은 英祖 40년(1764) 영조가 明陵(西五陵에 있는 肅宗과 仁顯王后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올 떼 世孫이었던 正祖가 迎恩門 밖에서 맞이하자 英祖가 이에
감동하여 지은 四言詩 등이 실린 책이다.
(44) 정조가 광릉주변의 백성들에게 내린 윤음을 새긴 현판
정조가 광릉주변의 백성들에게 내린 윤음[御製論楊州抱川夫老民人等書]을 새긴 현판은
正祖가 世祖와 貞熹王后의 능인 光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楊州 및 抱川의 노인과
백성들에게 내린 綸音을 새긴 현판이다.
*綸音: 국왕이 官人과 백성을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문서. (*綸: 벼리 윤)
(45) 영조가 명릉 참배 후 지은 글을 새긴 현판
英祖가 제19대 肅宗과 제1繼妃 仁顯王后 閔氏, 제2계비 仁元王后 金氏의 능인
明陵(高陽 西五陵 묘역)을 참배한 후 領議政인 晉庵 李天輔에게 적도록 하여 명릉 齋室에
걸었던 현판이다.
(46) 純祖 仁陵 薦奉都鑑儀軌 -보물 제1901-1호-
哲宗 7년(1756) 純祖의 仁陵을 坡州 交河에서 太宗과 元敬王后 閔氏의 능인 獻陵 근처로
遷陵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47) 온릉 봉릉 도감계병 서문(溫陵 奉陵 都監契屛 序文)
英祖 15년(1739) 端敬王后의 位號를 회복시키라는 命이 내려와 太廟에 올려 合祀하고
溫陵에 奉安하였다. (中略)
우리 聖上께서 至誠과 達孝로써 이루지 않음이 없으니 역사가 빨리 끝난 것과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어지 聖上께 功을 돌리지 않을 수 없으며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모두가 “옳소. 公께서 기록해 주시오”라고 하기에 이처럼 차례대로
기록한다.
都提調 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 監春秋館事 宋寅明이 서문을 짓다. (중략) (
*글 쓴 이의 官職名이 많고 길기도 하다)
*端敬王后 愼氏: 益昌府院君 愼守勤의 딸로 燕山君 5년(1499) 중종이 晋城大君일 때
그와 결혼하여 府夫人이 되었으나 1506년 中宗反正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부친 愼守勤이 매부인 燕山君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成希顔 등의
反正推進派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中宗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逆賊의 딸이라 하여
단경왕후도 廢位되어 仁王山 기슭 本家로 쫓겨나 中宗을 그리워하며 치마를 걸쳐놓아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을 남기고 1557년에 他界하였다.
英祖 15년(1739)에 王后로 復位되었으며, 능은 경기 楊州郡 長興面 日迎里에 있는
楊州 溫陵(사적 제210호)이다.
*反正으로 王位에 오른 中宗이나 仁祖는 反正功臣들의 勢力에 밀려 王權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48) 단종 금보-단종 옥책(아래)
=端宗 金寶: 肅宗 24년(1698) 端宗이 復位되어 諡號를 올리고 제작한 금보.
=端宗 玉冊: 肅宗 24년(1698) 端宗이 復位되어 ‘端宗’이라는 廟號와 함께
‘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라는 諡號가 追贈되면서 제작한 옥책으로 45行에 걸쳐
단종의 복위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金寶: 追上尊號를 새긴 도장.
*玉册: 國王·王妃·大妃·王大妃·大王大妃 등에게 尊號를 올릴 때 頌德文을 玉에 새겨 놓은
簡冊.
(49) 단종 비 정순왕후 금보와 玉冊
=端宗 妃 定順王后 金寶: 端宗이 魯山君으로 降封될 때 함께 夫人으로 강봉되었던
定順王后를 肅宗 24년(1698) 王妃로 復位하며 제작한 御寶.
=端宗 妃 定順王后 玉冊: 정순왕후에게 ‘定順’이라는 諡號와 ‘端良齊敬’이라는 徽號를
올리며 제작한 옥책.
*徽號: 死後에 王妃에게 諡號와 함께 올리던 尊號.
(50) 조선왕릉의 역사
-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2); 國立古宮博物館 상설전시실에 계속 -

첫댓글 孤山의 문화답사기는 서울상대17동기회 카페에서도 항상 인기만점!
무엇보다 그가 발로 쓴 현장감 있는 사진들과 해박한 고전적 역사 지식과 상세한 설명은
정말 압권이다.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끔 그의 문화답사기중에 몇몇을 펌 했었는데 , 이번 조선왕릉기도 하룻만에 벌써 조회 51회나 클릭 중이다.
참고로, 2016년 4/16 김구선생 경교장 조회 78회, 7/7일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은 조회 158 이었다.
아무쪼록 주변의 역사 문화답사기가 계속 되도록, 고산의 건투를 빈다.
항상 올라오던 고명호동문의 댓글이 없어, 대신 댓글을 올린다 . - 海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