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의 부인이 되기보다 당신의 창녀가 되겠습니다.”
삼십대 후반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아벨라르는 당시 노틀담성당 참사회원 풀베르의 조카딸인
십대 후반의 엘로이즈의 총명과 미모에 관한 풍문을 듣고 자청하여 엘로이즈의 가정교사를 맡는다.
하지만 아벨라르의 고백처럼 교육이 시작된 후로 책과 교육은 눈속임일 뿐,
두 사람 사이엔 격렬한 사랑의 행위가 주류를 이룬다.
엘로이즈의 임신과 두 사람의 결혼설에 분노한 엘로이즈의 삼촌이
사람을 보내어 아벨라르가 자는 틈에 아벨라르를 거세시킨다.
육체적 손상과 수치감을 못 이겨 아벨라르가 수도원 행을 택하면서 두 사람 관계는 소원해지지만
아벨라르를 향한 엘로이즈의 사랑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벨라르의 요청에 따라 수녀가 된 엘로이즈와 아벨라르 사이엔 많은 서신이 남아있다.
위의 인용문은 만나주지 못하는 자기 처지를 엘로이즈에게 이해시키는 아벨라르에게,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모욕이나 불이익도 불사하겠다는 엘로이즈의 각오다.
아벨라르가 먼저 죽고 후에 엘로이즈는 자기 유언에 따라 자신이 수녀원장으로 있던
파라클레 수도원에 애인이요 남편이었던 아벨라르와 나란히 묻힌다.
그 후 1817년 사람들이 두 사람의 유골을 파리에 있는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이장한다.
12 세기 유명한 로맨스였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 이야기.
안정된 생활과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는 여자라면 감히 위의 인용문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벨라르는 손상됐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엘로이즈이다.
불륜이냐 정상 관계냐를 떠나서 아벨라르와의 관계의 결과는 분명 상처였다.
그녀는 이 상처도 사랑한 것이다.
진실한 사랑에는 상처가 동반되며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것은 사랑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인간적 상처가 아니라 어떤 초인간적 상처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 상처란 그분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근거도 없는,
그 대상을 위해 자기 신성의 영광의 희생을 감수하시는 상처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보이신 지독한 고뇌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압박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당하실 죽음의 종류, 고통의 종류에 대한 고뇌였다.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감성적 차원에서의 이해는 금물이다.
인간 죄의 깊이와 이 깊은 죄를 상쇄하시는 신성의 상처라는 차원에서의 이해가 요구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버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곧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 전부터 연합되어 있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버려짐을 받으신 것이다.
그 고뇌의 최고조와 극단화가 가상칠언 중 이 말씀이다.
그래도 우리의 인성으로는 주님 고뇌와 희생의 본질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주님 구속의 죽으심에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심대한 희생이 기초되어 있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체코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의 말처럼 나는 상처 받지 않은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
세속의 신들은 상처 없는 거짓 것들이다. 근거도 없이 대접 받기 좋아하고
권위를 주장하고 심술궂고 인간의 형상을 투영한 것들에게 무슨 상처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의 하나님이시다.
2023. 4. 5
이 호 혁
첫댓글 그 상처를 우리는 다 알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아멘! 상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 주님.. 당신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신성한 상처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던 저와 인류를 구원으로, 영생으로 이끌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