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날씨: 대체로 흐리고 시원한 가운데 가끔 부슬비 내리다가 점심 때쯤 빗줄기 굵어짐
일요일 새벽 싱신골 집성촌과도 같은 부킷티마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보다 약간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1호차 운짱님을 제외한 모두가 이미 나와 계셨다. "혹시 우리 오늘 못 가게 되면 재밌게들 쳐~"라며 농담하시는 알바 님과 레드불 님을 뒤로 하고 우리 2호차는 먼저 출발했다. 실로 오랜만에 뵙는 이글아이 님은 여전히 다부진 구릿빛 근육질 몸매와 짱짱한 실력을 유지하고 계신듯했다.
이글아이: (봉에게) 이제 핸디 20대로 내려와야지?
필립: 봉 핸디 28이잖아.
이글아이: (깜짝 놀라며) 아, 그래?
봉: 아놔 그게 언젠데, 모르셨단 말이에요? 그때부터 영 살림이 안 핀다구요...
이날 처음 뵌 솔라 님이 뒤에서 조용히 듣고 계신 가운데 이글아이 님의 싱신골 첫 라운드 얘기, 코찔찔이 초보 골퍼들을 가르치며 한때 잠시 운영하던 싱신골 유치원 얘기 등을 나누며 출입국을 통과하는데 바로 옆줄에서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던 1호차가 활짝 웃으며 먼저 통과했다.
오늘 라운드에 참여하는 전원이 모이게 된 아꿍에 도착하자마자 필립 님은 입구에서 그릇 4개에 우리가 원하는 국수가락을 찔끔 떼어 담으셨다. 능숙한 모습이 마치 그곳의 직원 같았다. 2018년 2월까지 싱가폴에서 지내신다는 솔라 님은 말레이시아에 와본 적은 있지만 조호바루는 처음이라고 하셨다. 부인도 골프를 꽤 잘치신다며 부부동반도 가능하냐고 물어보셨다.
골프장에 도착하니 6시 40분이었다. 이글아이 님이 말레이시아 골프장 중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고 하신 오스틴 하이츠 여성 라커룸에 들어가니 직원이 안 보였다. 다른 외국인 골퍼와 함께 우린 데스크 안에 걸려 있던 라커룸 키를 챙기고 각자 알아서 기록부에 이름 등 정보를 써넣었다. 그런데 여러 키를 시도해봐도 라커룸이 잠기지 않았다. 전자식인 이곳의 라커룸은 아침마다 직원이 전체 라커룸을 작동시켜야 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테리 님은 지금쯤 한국에 도착하셨겠네"라는 이야기로 오늘의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오스틴은 후반 처음 몇 홀이 가장 어려운데 오늘도 다른 골퍼들로 밀려 있어 우리는 모두 애매한 거리의 태평양 해저드를 건너야 하는 오르막 파5(인덱스 2) 10번홀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앞조들을 기다리면서 아무리 연습 스윙을 휘둘러도 꼭 처음 몇 홀은 양파로 장식하며 전반을 마쳐야 슬슬 몸이 풀리기 시작하는 건 도대체 뭔 조화 속인지 모르겠다. 난 이날 전후반 타수 차이가 12개나 되었다.
봉주르: (티샷을 준비하는 남자분들에게) 오늘 22-1이 누군지 정해지는 건가요?
호마산: 그러게요. 봉님의 참관 하에 그렇게 되겠네요.
앨런: (데니를 향해) 현재 22-4는 형님 아니세요?
봉주르: (티샷 준비하는 데니를 보고) 앗, 데니도 저 축구공 모양의 공이네. 달보까 님이 항상 저런 공 쓰시던데.
앨런: 아, 직접 그리신 거예요?
봉주르: ㅎㅎㅎ 설마...
데니: 그래, 나 시간 남아 돌아서 이거 일일이 다 그리고 있다. 지금 구찌 주는 거지?
조호 집에서 여유롭게 15분 만에 골프장에 도착한 앨런은 이번에 새로 장만해 아직 손잡이 비닐도 채 벗기지 않은 미즈노 아이언 세트를 시험해볼 기대에 부풀은 것 같았다. 아이언을 쓰고나면 매번 버기 옆구리 통에 열심히 담금질하며 부지런히 닦아주고, 부슬비가 내릴 때마다 젖을세라 얼른 커버를 덮어주는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새끈한 아이언으로 칠 때마다 자꾸만 생크가 나는 바람에 라운드가 끝날 무렵에는 "다음엔 옛날 아이언을 가져올까 봐요"라고 했다. 무엇보다 앨런은 첫 홀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선크림과 마커, 아끼는 티 등은 물론 라커룸 키까지 담겨 있는 파우치를 바로 앞조의 레드불 님 버기에 옮겨놓았던 것이다. 2-3홀이 지난 후 파우치가 없는 걸 깨달은 앨런은 그걸 어디에 놓았을까 생각하며 걱정스러워하다가 몇 홀이 더 지난 후에는 거기에 라커룸 키까지 들어있다는 걸 깨닫고 근심이 깊어졌다.
전반에는 데니가 안정적인 플레이로 승리했다. 잃어버린 물건도 없는 호마산 님과 나까지 허덕거리면서 데니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래도 호마산 님은 전반 마지막 파3홀에서 2걸음 니어를 챙겨 이에 만족하셨다. 상대적으로 쉽다는 1-9번홀에서 후반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데니 혼자 유난히 허덕거렸다. 티 그라운드에서 먼발치 아래의 페어웨이가 거대한 헤저드로 끊어져 있는 8번 파4홀에서는 티샷이 물에 퐁당 빠지자 데니는 "차라리 처음에 빠지는 게 나아"라며 명랑하게 스스로 위로했다. 그리고 그 다음 샷도 물에 퐁당했다. 앨런은 3번 파5홀의 그린 밖에서 잘못쳤다 싶었던 공이 홀컵에 쏙 들어가면서 버디를 했다. 이런 버디는 2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한편 호마산 님은 옆동네에 떨어진 공을 찾느라 한참 헤매신 후 마침내 그린의 프린지에 떨어진 공을 칠 준비를 하면서 "이래 봬도 이거 3번 만에 온거야"라더니만 거기서 바로 퍼팅을 성공시켜 파를 하는 등 놀라운 신공을 발휘하셨다.
마침내 마지막 9번홀에 이르자 빗줄기가 제법 강해지고 있었다. 티샷을 준비하는 데 저 멀리 9번홀 그린에서 단체 함성이 들려왔다. 18홀 내내 거의 모든 홀에서 앞조 분들의 모습 덕분에 그린 위치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던 우리는 아마도 앞조 점수도 우리처럼 시원찮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빗속에서 저런 이글 수준의 함성까지 들려오다니!
앨런: 저건 아무래도 버디를 해서는 나올 수 없는 함성인데요?
봉주르: 맞어, 누가 이글했나봐! 음, 저기 손을 흔들고 있는 레드불 님인가? 만세하고 있는 부기맨 님 같기도 하고...
빗속에서 꾸역꾸역 우리도 마지막홀 그린에 이르렀다. 그린 바로 앞의 클럽하우스 테라스에서 맥주로 기분이 한껏 고양되신 듯한 고수조 분들이 이글은 커녕 그린에 공이 올라가기만 해도 함성을 지르고 감탄하고 난리였다. 명랑쾌활한 고수 갤러리 앞에서 살짝 부끄러워진 우리는 대충 오케이 주며 얼른 마무리했다. 그렇게 후반과 전체를 승리하신 호마산 님은 명실공히 22-1에 당당히 등극하여 우리 클럽 세척과 점심까지 화끈하게 쏘셨다.
말레이시아 최고의 라커룸에서 퀵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로비 소파에 싱신골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고수조의 점수도 딱히 좋진 않았다는데 모두 표정만은 승리자 같아서 오늘 누가 제일 잘 쳤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동서울로 이동했다. 식당에 들어가자 다른 일행과 오신 케빈 님이 반갑게 일어나 인사하셨다. 6명씩 나누어 앉는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1,2등과 3,4등으로 나누어 앉을까?"라고 했고 이미 레드불 님 및 알바 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나는 "그럼 난 이미 제대로 앉았구만. 앨런 이리와~"라고 했다. 점심값은 이글아이 님, 얌얌 님, 호마산 님이 각조의 승리자로서 나누어 계산하셨다. 점심 자리에서 솔라 님이 보기 보다 의외로 한참 연장자이심을 깨달은 다른 분들은 호칭에 대해 선생님, 형님, 당숙 등을 고민하다 형님으로 결정을 내리신 눈치였다. 점심 후에는 마사지를 받을 분들이 2개 차량으로 나누어 탔고, 바로 귀싱하는 인원은 데니 차량으로 이동했다.
필립: (싱가폴로 돌아오는 차에서) 솔라 님은 뉴질랜드에서도 가족들과 몇 개월 지내며 골프를 치셨데. 캬, 은퇴 후 그렇게 여유롭게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데니: (갑자기 거드름 톤으로) 필립 형님 그 정도 여유는 되시잖아요?
필립: 아, 그렇지. 난 아예 골프장을 사려고.
레드불: 아, 난 주문한 전용기가 도착하는대로... 도착이 왜 이리 늦어지는지 원..
이분들의 재미있는 허세에 실컷 웃고나니 난 스마트폰이 없던 그 옛날 지하철에서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복권 1등에 당첨되면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1시간을 훌쩍 보냈던 때가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대충 정리를 마친 후 초저녁부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해가 바뀌는 카운트다운 순간에는 깨어 있고 싶었지만, 온몸의 근육이 기분 좋게 뻐근하면서 스르륵 잠드는 순간이 너무나 달콤했다. 페어웨이에 카트 허용 여부, 캐디 고용 여부, 골프장 지형 등이 이만큼이나 피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일까? 바로 지난 주 이틀 연속으로 3번 라운드를 했을 때보다 훨씬 피로를 느끼는 게 신기했다.
아무튼 이렇게 잔잔하고 즐거운 일상 속에서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왔다. 새해에는 골프 실력이 얼마나 나아질까, 어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들을 깨닫고 배우게 될까? 모쪼록 그 과정이 지금까지처럼 순탄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봉팔이의 일기 끝~
첫댓글 골프 후기 잘 봤습니다. 마지막 홀은 정말 비오는 와중에 갤러리들의 함성이 더해지니 정말 분위기 살더군요. 퍼팅도 더 신중하게 하게 되고 재밌었습니다. 무엇보다 덥지 않아 좋은 날이었습니다.
맞아요, 시원해서 참 좋았어요. ^^ 얌얌 님 핸디 10대 고수들 속에서 이날 우승자가 되신 걸 축하드려요~ 역시 공부 열심히 하신 효과인가요? ㅎㅎ
후기 정말 잘 보았습니다. :)
쌩크 방지 연습을 좀 해야겠어요
그날 고생 많았어 앨런. 다음에 더 잘 칠텐데 뭐 ^^
조호에서의 골프후 싱가폴로 돌아와 봉주르님의 일기를 읽는게 하나의 패턴이자 낙이 되어버린듯.
집사람도 항상 봉주르의 일기를 즐겨 읽는답니다 ^^
감사합니다 필립 님 앤드 줄리아 님 ^^ 그런데 제게는 어쩐지 자꾸 숙제처럼 돼가는 것 같아요. 이제 내킬 때만 올려야 겠어요 ㅋ
2017년 마지막 라운드를 봉팔 일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