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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6.
기독교의 변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칼은 사람을 죽이는 흉기도 되고, 사람을 살리는 수술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 들려지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대장간을 없애면 살인이 없어질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검 곧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심령 골수를 쪼개서 욕심과 교만과 음란과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독을 도려내며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생명을 살리는 칼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언제나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제물의 목을 따고, 가죽을 벗기고, 정강이를 자르고, 내장을 제거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였습니다.
칼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나 자신을 십자가에 죽여서 제물 되어 하나님께 향기로 드려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복음이 변질되어 천당 가기 위한 수단으로,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출세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이단이나 이방종교만 아니라 정통교단에서도 이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하셨습니다.
욕심이란 자기만족을 위하여 타의 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내가 천국을 가기 위해서,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유명해지기 위해서, 내가 권력을 얻기 위해서, 나의 평안과 안일을 위해서 복음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기도합니다. 헌금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안식일을 지킵니다. 무슨 목적이지요?
새 차를 샀는데 토요일에 출고가 되었습니다. 당장 끌고 나가 전국을 일주하고 싶은데 내일이 주일입니다. 하루를 꾹 참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월요일에 전국 일주를 했습니다. 사고도 없고, 고장도 없이 명승지를 다니며 즐거운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참 잘 했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만약 주일을 지키지 않고 그 차를 운전하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사고가 나거나 불행한 일을 당할까봐 참고 기다렸다가 월요일에 운전을 했습니다. 사고 안 나기 위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누구를 위한 예배입니까?
월급을 받았습니다. 급한데 쓸 곳이 많습니다. 돈이 모자랍니다. 그래도 십일조를 떼서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떼먹으면 몇 배로 손해가 날 것 같고, 십일조를 드리면 더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을 믿고 드렸습니다. 함 잘 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누구를 위한 헌금이었습니까?
나를 위해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나를 위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를 위해서 십일조헌금을 드렸습니다. 모두 나를 위해서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변질된 기독교 복음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나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의 이웃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서로 주님을 대하듯 해야 하며, 부자간이나 성도간이나 목회자와 교인간에 모두 서로 주님을 대하듯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1-27)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큰 교회, 유명한 교회, 신령한 목사, 능력의 목사, 신유의 은사를 가진 목사를 향하신 주님의 책망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무엇이며,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31-34)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위해서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이방종교의 다름이 무엇입니까?
모든 종교는 선을 행하라고 하며, 그래야 천국이나 극락세계를 갈 수 있다고 하며, 그러므로 종교는 다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선을 행하는 목적이 구원을 얻기 위함이며, 천국을 가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선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며 달리 표현하면 사기꾼의 수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기꾼이 더 친절하고, 독버섯이 더 아름답고, 유해식품이 더 달콤합니다. 그러나 쓴 것이 약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시간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를 잘 드리고, 헌금을 잘 드리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선을 많이 행하며 주여! 주여! 항상 부르짖으면 믿음이 좋은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는 기도를 많이 할수록 욕심을 많이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절대로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배나 헌금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칼이라도 어느 목적으로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를 많이 합니다. 입시철이 되면 새벽기도를 하는 숫자가 늘어나고 사업이 부도가 나면 금식, 철야, 산상기도를 하는 숫자가 많아집니다.
물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입시철이 아니라도, 부도가 나지 않고 사업이 더 잘 되더라도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도의 목적은 달라야 합니다.
합격되기를, 또는 사업이 회복되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기도했어야 합니다.
방생을 하고 구제를 하고 자비를 베푸는 목적이 복을 받고, 천당을 가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방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이방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상종교가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기 위해서 효도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수작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수작입니다.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욕심쟁이가 가면을 쓰고 친절을 베푸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가 양의 가죽을 둘러쓴 것입니다.
천당은 왜 가야합니까? 만약 지옥에 가면 영원히 불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니까 천당에 가서 영원히 평안히 살기 위해서 천국을 가야한다면 대단히 잘 못된 복음입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가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뜨거운 불 속에 계신다면 우리도 뜨거운 불 속으로 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전혀 없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하여 전 재산을 다 날린다고 해도 부모를 극진히 부양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천국이 없고 영혼이 없고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죽는 그 시간 까지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하여 선을 행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천국을 가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종교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믿음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천국이 없고 상급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자녀는 부모를 위해서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친구는 친구를 위해서 목사는 교인을 위해서 교인은 목사를 위해서 위정자는 백성을 위해서 백성은 위정자를 위해서 피차 죽을 수 있는 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천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고 말씀을 주셨고 복음을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흉기로 사용한다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아닐까요?
교회 건물 평수와 교인 숫자와 예산에 따라 목사의 마음이 좌지우지한다면, 교회를 크게 짓고, 교인의 수를 늘리고, 많은 헌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과연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는 책망을 면할 수 있겠는가?
소돔과 같은 이 땅에서 의인 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칼을 바로 쓰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잘 사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유명해지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천국을 가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말씀대로 사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한국에는 교인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99%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도 기복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1% 희생적인 신앙을 가진 것만 못합니다.
몽둥이를 든 100명의 장정보다 한 자루 총을 가진 자가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엘리야 선지자 1명과 대결하여 누가 승리했습니까?
바알 선지자들의 능력은 소리였고 엘리야의 능력은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소리만 요란한 기독교가 아닌가? 믿어야 복 받는 다, 예수 잘 믿으면 구원 얻는다. 성공할 수 있다. 병 낫는다. 출세할 수 있다. 등등 소리가 요란하지만 말씀의 능력인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백만 명, 천만 명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할 때 분하고 원통하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일으켜 주고 핍박하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입니다. 건물 꼭대기 네온싸인 십자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낮아지고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대신 죽을 수 있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며 기독교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가져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부활을 믿으면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지 못했기에 고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온유와 겸손이 아닌 주님의 마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진단이 정확해야 하고 진단에 따라 처방해야 하고 처방전 대로 치료해야 합니다. 혈색이 좋다고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의료방법으로 진단을 해야 하듯 말씀에 근거해서 진단하고 고쳐야 합니다. 기독교의 변질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평균임금이 하루 10만원인데 좀 힘들고 궂은일이지만 하루 9억 원을 선금으로 받고 일한다면 힘들거나 짜증나서 9억 원을 반납하고 취소하겠습니까?
우리는 9억 원의 9억 배가 더 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겐 억울함이나 슬픔이나 원망이나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물질이 아깝지 않습니다. 자손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억울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아집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가 새로워집니다. 이 세상도 곧 천국입니다.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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