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의술]
6·25전쟁과 야전병원
 
부산 스웨덴병원,
, 20개국 200만 장병의 상처 보듬다
 
스웨덴, 유엔 사무총장에게 ‘한국에 전투 병력 대신 야전병원 파견’을 통보
전선에서 50~100㎞ 거리 부산상업고등학교 교사에 병동, 병실 등 갖춰
정전협정 체결되자 스웨덴 적십자야전병원서 ‘부산 스웨덴병원’으로 개명
|
요사이는 뷔페 식당이 많지만,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무렵에는 을지로의 국립의료원 안에 있는 ‘스칸디나비아클럽’을 유일하게 손꼽았다. 이 식당과 국립의료원은 1958년 이전에 서울시립시민병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스칸디나비아클럽’이란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6·25전쟁 때 16개국이 전투병을 파병했고 5개국은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그중에 스칸디나비아 3개국, 즉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는 각각 적십자야전병원·적십자병원선·이동외과병원을 파견했다. 이 3개국은 1951년부터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의 의료체계 복구를 위한 논의를 했다.
전후에 이들이 철수하게 되자 한국 정부는 국내 의료 환경이 열악하므로 스칸디나비아 3개국의 의료진이 계속 진료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스칸디나비아 3개국과 ‘운크라’라고 부르는 유엔한국부흥위원회(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한국 정부가 협력해 스칸디나비아교육병원을 짓기로 합의해 국립의료원이 건립됐다. 그래서 그 안에 설치된 뷔페 식당의 이름도 ‘스칸디나비아클럽’이었다.
스웨덴이 파견한 적십자야전병원(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은 6·25전쟁 중 가장 많은 인원으로 가장 오랜 기간 활동했다.
6·25전쟁 당시 국군의 의무지원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민간 시설을 이용하기도 곤란해 전상자 진료에 어려움이 많았다. 1950년 7월 대구에서 야전의무단이 창설된 이후 부산 제5군병원에 수용된 많은 환자를 분산하기 위해 1950년 9월 경주(제15)·안동(제18)·울산(제28) 등지에 육군병원이 세워진 정도였다.
영세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1950년 7월 7일 결의에 따라 7월 14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한국에 전투 병력을 파병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대신 스웨덴이 인력과 비용을 부담하는 야전병원(field hospital)을 남한에 파견하겠다”고 통보하고 야전병원 파견 준비를 스웨덴 적십자사에 위임했다. 8월 초 유엔군은 부산교두보(Busan Perimeter)를 지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이 수세(守勢)의 지연작전으로 전선에서는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스웨덴 적십자야전병원에 자원한 600명 중 선발된 176명이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이 이뤄진 직후인 9월 23일 부산에 도착해 25일부터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이때 부산은 전선에서 불과 50~100㎞ 거리에 있었다. 부산상업고등학교의 교사에 병동 2개, 16개 병실 그리고 진찰실, 수술실 등을 갖췄다. 운동장에는 간호원 기숙사, 입원실, 식당 등의 조립식 퀀셋(quonset) 건물들을 세웠다. 개원 시 200병상 규모로 92명의 의료진, 76명의 행정직, 목사 1명을 포함하는 총 169명의 스웨덴인이 근무했고, 200여 명의 한국인이 청소부·잡역부·세탁부·경비원 등으로 일했다.
스웨덴 참전 기념비. 사진 출처=국가보훈처
|
이때는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할 때였다. 많은 부상병이 부산으로 유입돼 10월 초에는 400병상으로, 이후 600병상으로 증설됐다.
야전병원은 본래 전선에 가까운 후방에 설치하는 임시병원으로 전황에 따라 이동한다. 그러나 이 야전병원은 철수할 때까지 계속 부산에 남았다.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전선에 가까운 함경남도의 흥남과 원산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중공군의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로 최후방에 남게 된 병원은 야전병원에서 후송병원(evacuation hospital)으로 기능이 바뀌었다. 전상병들은 항공편이나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후송돼 이 병원에 입원했고 그중 상태가 위중한 부상병들은 항공기와 선박으로 일본이나 미국으로 후송됐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스웨덴 적십자야전병원은 ‘부산 스웨덴병원(Swedish Hospital in Pusan)’으로 개명했다. 이후 1957년 4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스웨덴병원이 부산에 체류한 6년6개월 동안 1124명의 스웨덴인이 일했고 20개국 국적의 200만 명 이상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전후의 열악했던 한국 의료환경에서 부산 스웨덴병원은 수준 높은 의료를 제공했다. 지금은 기념비로만 남아있지만, 진흙 같은 전쟁에서 연꽃 같은 의술을 꽃피웠던 것이다.
<황건 인하대 성형외과 교수>
모닝 클래식 16곡 연속듣기
H. K. ---> 클릭 Top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