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히 12:15).
히브리서는 기본적으로 교회시대의 교리가 아닌 7년 환란시대의 교리를 다루는 예언적 교리서입니다. 이 책에서 교회 시대의 교리와 교훈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환란에 초점 맞춰진 구절들이기에 히브리서는 해석하기에 녹록한 책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히브리서가 환란시대를 다룬다고 하는 그 개념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 하여 주의를 환기시켜 드린 것이고 아마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실 듯 하여 구절 설명을 하면서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히브리서 12장 전체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고 최소한 14절과 연계해서 설명하면 적절하리라 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14절 말씀이 교회 시대의 교리가 된다면 사도 바울의 오직 믿음 교리에 반하는 행위 구원의 교리가 맞다는 게 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믿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당연히 행위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즉 행위가 없으면 아무도 믿음만으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본문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죄인은 교회시대에 한 명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대환란 때 구원 얻어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믿음과 실행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지언정 교회 시대의 교리는 될 수 없습니다.
"열심히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나왔다 해서 그것을 지금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그 값없는 은혜, 그렇게 연결짓는다면 미치지 못한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진대(엡 3:2).
바울이 주 예수께 직접 계시를 통해 전수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은 로마서에 가장 자세히 나와 있다시피 그것은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를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교회 시대의 구원론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15의 표현법을 다시 주목해 보십시오.
"미치지 못하는",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뭔가 사람이 애써서 거기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인간적 노력의 의미가 내포된 것 같지 않습니까? 자, 우리가 지금 구원받는 것은 애써서 받는 게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문을 열고 "주십시오"라고 하면 거저 받을 수 있는 성격입니다. 구원의 커트라인이 설정되어 있고 사람들이 그 커트라인을 넘어서기 위해 열심히 시험 공부하듯 애써야 되는 그런 준비 과정이 없다는 얘깁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이나 성공회나 다른 제도 교회들에서는 세례도 받고 교리문답도 하고 예비신자 과정도 밟고 할 것이 많다고 하지만 성경적으로 말할 때 구원의 커트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자체이고 다른 어떤 행위의 조건도 붙지 않습니다.
교회시대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여기도 쓰였다고 해서 그 은혜가 우리가 아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그 거저 받는 은혜, 그렇게 생각하고 넘긴다면 히브리서의 진면목을 놓친 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적할 부분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구원 여부를 남에게 확인받아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열심히 돌아보라고 했는데 이는 각자의 구원을 옆에서 체크업 해주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 또한 교회 시대적 개념은 아닌데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그 사실은 자기 양심이 가장 정확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곁눈질해 보면서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검증받아야 확실한 게 아니란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후 13:5).
우리는 각자 자신이 믿음이 있는지 시험하고 입증을 해서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구원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지 옆에 교인한테 "당신이 보기에는 나 구원받았소?" 그렇게 묻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정 궁금하면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질문 자체가 난센스이겠지요. 거기에 뭐라고 대답해줘야 맞겠습니까? "글쎄요, 내가 어떻게 확답을 합니까, 당신 자신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요.
저는 15절 본문의 '은혜'가 분명 구원과 상관이 있는 용어 쓰임이라고 보고 그 배경 하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냥 성도가 살면서 기도응답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은혜'가 아닌 구원을 받기 위한 특별 '은혜' 말입니다.
또 쓴 뿌리가 나와서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혹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며
이제 쓴 뿌리라는 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 구절은 교회시대의 육신적인 크리스찬에 대해서도 교훈적으로 적용 가능한 부분이 바로 이 쓴 뿌리라는 것 때문입니다. 쓴 뿌리는 육신에서 나오는 어떤 나쁜 열매를 말하는 것인데 저는 그것이 '잘못된 말, 신랄한 말, 험담하는 말' 그런 의미로 해석하겠습니다.
왜 그런가, 14절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화목을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1차적으로 험담과 신랄한 비난 같은 것이기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서 그런 불화를 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부분은 교회 시대와 환란 시대에 50:50으로 적용될 수 있는데 지금도 지역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육신적인 분란들의 대부분은 여인들의 뒷말, 신중하지 못한 흉보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혀는 불이요, 죄악의 세상이라. 그처럼 혀는 우리 지체들 가운데 있으면서 온몸을 더럽히며, 또 일생을 불태우나니, 곧 지옥의 불에서 태우느니라(약 3:6).
혀에서 나오는 말이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할 수 있고, 히틀러나 모택동의 말,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미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요. 또 이단 교주들의 말, 얼마나 많은 사람을 행위 구원에 빠뜨려 괴롭히는지 알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혀는 '온몸을 더럽히며', 혀는 직접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기관이 아니지만 혀를 통해 온 몸이 더럽혀집니다.
본문 히 12:15에서도 쓴 뿌리가 사람들을 더럽힌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쓴 뿌리라는 것이 혀라는 점은 더 확실해집니다.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하리라.”고 하시더라(막 3:29).
성령 모독죄(개신교인들은 성령훼방죄라고 더 많이 알고 있는)는 교회시대에 짓는 죄가 아니지만 어쨌건 이 죄가 어떤 것입니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할 때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혀를 잘못 놀리는 그 죄입니다. 그 죄를 짓게 되면 용서받지 못하게 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100%는 아니지만 거의 확정적)에 처하게 됩니다.
교회시대에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인데, 은사주의자들은 자기들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이 죄목을 붙여서 협박을 날립니다. 그런 것은 엉터리 적용이고 이 성령 모독죄라는 것은 7년 환란 때 14만4천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두 증인(모세와 엘리야)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들을 마귀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사항입니다.
즉, 히 12:15의 그 "쓴 뿌리"는 대환란 때 기준으로 말하자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대단한 위험을 수반한 개념이고 지금 교회시대에 남말 하다가 큰코 다치고, 회개해야 되는 그런 정도의 죄가 아닙니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거나 보완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명확한 말씀주석을 감사드립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