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임채성 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 제주 4·3항쟁의 영령들에 대한 추모시집
제주 4·3항쟁의 현장을 시조의 3·4조로 승화시킨 『메께라』
제주도의 4월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붉고 슬프다.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라 할 수 있는 제주 4·3항쟁의 희생자를 여전히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임채성 시인은 작정하고 제주 4·3항쟁의 현장을 하나씩 살펴가며 시조의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제주도의 수려한 풍경과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낯선 이미지들을 배경으로, 임채성 시인의 이번 시조집은 애절한 슬픔을 어떻게 승화시켜야 할지 그리고 시조의 리듬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독자에게 제주 4·3항쟁을 추모하고 희생자를 기억해야 할 당위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시인의 말
알맹이는
어디 갔나?
껍데기만
무성한 봄날
애기동백
목을 떨군
올레, 올레
톺아가며
씻김의
해원상생굿
그 축문을
외고 싶다
2024년 봄
임채성
경남 남해 출생.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조)로 등단. 김만중문학상(시·시조) 우수상, 오
늘의시조시인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정음시
조문학상, 백수문학상, 한국가사문학대상 등을
수상하였고,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2010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왼바라기』 (2016서
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야생의 족보』 (2021 아
르코문학창작기금) 및 시조선집 『지에이피』 발
간, <21세기시조) 동인,
◆awriter@naver.com
다시, 사월에
동백 지는 봄을 맞는
섬은 늘 겨울이다
멍이 든 잎새마다 고개 숙인 사월 앞에
연북정 옹성 축대가
북쪽으로 기운다
대답 없는 안부 같은 목청만 가다듬다
가납사니 뜬소문에 주저앉은 산과 오름
뭍 향한 무언無言의 절규
파도마저 목이 잠기고
오천만이 절을 하면
하얀 목련 촛불을 켤까
태풍에도 지지 않을 꽃 한 송이 기다리듯
고사리 어린 상주가
조막손을 모은다
한모살*
누구는 당캐라 하고
누군 또 당포라던
넓디넓은 백사장에 화약 연기 자욱한 날
산 넘은 겨울바람은
칼끝보다 매서웠네
한라산 세명주할망 눈 감지 못한 바다
표선리와 가시리에서 토산리 의귀리 한남리 수망리
세화리 성읍리까지 매오름과 달산봉을 타고 내린 눈물
들이 웃말개미 천미천 지나 남초곶 해신당으로 휘뚜루
마뚜루 흘러들어 포말로 흩어질 때
조간대 갯것들에는 피 냄새가 묻어있네
상군해녀 물질로도
건지지 못한 혼불
부러진 죽창 위에 지노귀굿 기를 달면
까치놀 서녘 하늘이
제사상을 진설하네
*제주 4 ·3 당시 표선면과 남원면 일대 주민들을 총살하던 표선리 백사장.
송령이골* 억새
몸빛이 흐려질수록
기억도 가물거린다
파도치던 푸른 힘줄도
바람을 탄 핏빛 함성도
무명빛 봉분들 앞에 다비를 준비할 때
억새라 불러도 좋다
어욱이라 불러도 좋다
넉시오름 능선 따라
한 점 불티로 스러져도 좋다
산사람 붉은 묘비명 고쳐 쓸 수 있다면
*1949년 1월 10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벌어진 토벌대와 무장대 간 교전으로 사망한 무장대의 합동묘역이 있는 4 · 3 유적지.
불카분낭*
화산섬 산과 들이 국방색으로 타오를 때
동백꽃 빛 울음들이 돌담으로 막혀 있는
선흘리 초입에 서면 발바닥이 뜨거워진다
마을 안 올레에는 시곗바늘 멈춰 있다
온몸에 화상 입은 후박나무 늙은 둥치가
곰배팔 가지를 벌려 옛 상처를 보듬는 길
곶자왈 용암굴이 연기 속에 무너지고
별빛마저 소스라치던 그 새벽 그 총소리
나이테 헛바퀴에도 정낭을 걸어야 했다
기나긴 겨울 지나 새살 돋는 나목의 시간
숯등걸 덴 가슴에 봄을 새로 들이려는
뼈저린 나무의 생이 핏빛 놀을 털어낸다
*불에 타버린 나무'라는 뜻의 제주도 토박이말. 제주 4 ·3 당시 군 경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있는 나무.
해원방사탑 앞에서
뼛속까지 새긴 앙금
털고 씻는 해원굿판
비창 쥐고 솔발 흔들며 시왕 맞이 들어간다
절벽 위 소낭머리에서 총 맞아 죽은 영가님들,
표선 한모살 혀 빼물고 죽은 영가님들, 성산포
터진목에서 피 터져 죽은 영가님들, 대정 섯알
오름에 고무신만 두고 죽은 영가님들, 중문 신
사터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영가님들, 큰넓
궤 무등이왓 어둠 속에 갇혀 죽은 영가님들
모두모두 나오셔서 술이나 한잔 받으시오. 거
동 불편한 하르방과 할망들, 꽃다운 삼촌들, 이
름조차 호적부에 올리지 못한 물애기까지 저 악
독한 총칼 앞에 그 뜨거운 들불 앞에 원통하게
스러져 갔나이다. 허공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
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해 불효 천
년을 간다는데 무시로 도지는 이 오랜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
정한 세월이여, '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 삼아 버
틴 시간이여, 앙상한 어욱밭 방애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우진 못하는 법. 봄이면
산과 들에 삐죽이 새순 돋지 않던가요, 풀 건 풀고
태울 건 태우고 조질 건 다 조져드릴 테니 혼행은
땅으로 가고 백은 하늘로 가서 이제 그만 원怨도
한恨도 남김없이 푸시옵기를*...
징소리 꽹과리 소리
탑을 따라 돌고 있다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의 제주 4.3 희생자 공동묘역인 현의합
장묘(顯義合葬墓) 묘비명 일부 차용.
빌레못굴* 연대기
1.
대지도 물김 뿜는 화산도의 숨찬 겨울
녹이 슨 쇠살문이 불침번을 서고 있다
선사의 푸른 달빛이 결빙된 연못가에
한 굽이 돌아들면 가슴 시린 바람 소리
역사의 앞마당에 들지 못한 기억들이
억새풀 줄기를 잡고 혼불처럼 일렁인다
2.
꺽짓손 설문대할망 불구덩이 잠재우면
한라산 자락 따라 살아 뛰던 푸른 맥박
태초의 어둠을 쫓는 아침 해가 솟았다
물과 불 그 경계를 넘나들던 맨발 자국
폭풍우도 눈보라도 온몸으로 그러안은
수천 년 묵언의 시간 화석으로 기록되고
곰 노루 울음마저 굳어버린 지층 아래
탄화된 씨족사氏族史가 돌무지로 깨어날 때
구석기 돌도끼 몇 점 해와 달 겨누었다
3.
수렵시대 잔해 같은 살육의 불씨 한 점
옛 주인 가고 없는 동굴 속에 되살아나
바다도 하늘과 함께 핏빛으로 물들였다
초가집은 태워지고 마을은 또 지워졌다
낮과 밤 두지 않던 생사의 가름 앞에
칡매끼 얽히고설켜 짧기만 했던 목숨줄
동굴 속 미로에도 깨지 못할 벽은 있어
미쳐 뛰는 구구총 소리 산 쪽으로 돌려놓고
핏발선 동공에 맺힌 붉은 눈물 쏟았다
아비가 아들을 묻고 할망이 산담을 쌓는
선대先代의 주름살이 산과 들을 뒤덮어도
탐라의 제사상에는 지방紙榜조차 쓰지 않고
천둥이 칠 때마다 몸을 움찔 떠는 동굴
빌레못에 갇혀 우는 시간의 샅 밑으로
용암은 출구가 막혀 속으로만 끓었다
4.
청맹과 유물 캐듯 헛손질에 부은 목젖
봉인된 메아리가 실어증을 벗어날 쯤
까마귀 목쉰 울음이 물소리로 잠긴다
식민지 흉터 위에 막소금을 뿌리던 땅
야만의 어둠 걷는 볕은 아직 희미해도
다시금 새봄을 여는 저 야성의 숨비소리
빗돌 하나 겨우 세운 굴은 차츰 무너져도
수평선 휘적시는 까치놀의 문신 같은
동굴 속 연대기 한 장 축문 짓듯 쓰고 싶다
*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에 있는 용암 동굴. 석기, 동물화석,
숯 등이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지이자 제주 4 · 3 당시
인근 주민 29명이 희생된 학살 현장.
[ 서평 ]
시인 임채성은 화산섬의 대지에 엎드려 땅속의 웅얼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혔어도 원한 때문에 결코 삭지 않고 푸른 피로 살아있는 수만 영혼들의 음성이다. 그 음성을 들으면서 시인은 절실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수만 영령의 그 원한을 달래면서, 그 원한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간절한 진혼곡이다.
─ 현기영(소설가)
임채성의 시집 바탕에는 해방공간의 제주 공동체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난 4·3항쟁의 주체뿐만 아니라 이와 분리할 수 없는 제주의 자연과 일상에 대한 순례(또는 답사)의 시적 수행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하여 그의 이번 시집에서 눈여겨볼 것은 “무너진 산담 앞의 풀꽃들과 눈 맞추며/ 4·3조, 때론 3·4조로 톺아가는 제주올레”를 함께 걸으면서, “온몸에 흉터를 새긴 현무암 검은 돌담/ 섬 휩쓴 거센 불길에 숯검정”을 묻힌 “팽나무 굽은 가지가 살풀이춤 추”(「올레를 걷다」)며, 섬의 상처를 응시·위무·치유하는 시의 감응력이다. 이것은 ‘시인의 말’에서, “씻김의 해원상생굿 그 축문을 외고 싶다”는, 이번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시적 재현으로 실감된다. 여기에는, “죽어서 할 참회라면 살아서 진혼하라// 산과 들 다 태우던 불놀이를 멈춘 섬이// 지노귀 축문을 외며/ 꽃상여를 메고 간다”(「제주 동백」)가 함의하듯, 4·3항쟁의 영령들에 대한 축문으로서 시 쓰기의 진혼이 이승에서 봄의 새 생명의 불길을 타오르게 한다.
─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