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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16) 종이 한 장보다 못한 차이의 삶과 죽음
어머니의 재봉틀이 두 생명을 살렸다
- 정진석 추기경은 정부가 6ㆍ25 전쟁 참전 유공자에게 수여하는 국가 유공자 증서와 호국 영웅 기장증을 받았다. 정 추기경은 회고록 ‘추기경 정진석’을 통해 이를 외부에 처음 공개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쾅!”
갑자기 지뢰가 터졌다. 앞서 가던 장병들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졌다. 일행은 모두 넋이 나간 듯 혼비백산했다.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천주님! 살려 주세요. 우리 죄인들을 당신 품에 거두어 주세요!”
지뢰 터져 아수라장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기도를 했다. 생사를 오가는 기로 속에서 하느님께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진석도 조금만 앞서 갔다면 지뢰를 밟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말 죽음과 삶은 종이 한 장보다 못한 차이로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폭발이 있어서 주변이 아수라장이 됐을 때는 못 느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런 확신이 더 생겼다. 또 하느님은 왜 나를 살려 두실까 하는 묵상도 자주 하게 됐다.
진석의 일행은 마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마산의 북쪽에 위치한 함안에 집결했다.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온 것이었다. 서울에서 1950년 12월 20일 떠나 해를 넘겨 1월 13일에야 최종 도착지에 이른 것이다. 25일 정도를 걸어 행군하면서 많은 장정이 희생되고 다쳤다. 당시 유례없는 혹한이었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 주고 입혀 주지 않겠나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던 이들도 많았다.
- 정 추기경이 받은 호국 영웅 기장증.
그러나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은커녕 식사조차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장정은 긴 여정에 발이 부르트고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부상과 굶주림, 추위로 건강 상태가 점점 나빠져 갔다. 더구나 먹을 것이 부족하고 극한 추위에 잠자리도 엉망이었다. 심지어 병자나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해도 이들을 돌봐주는 준비나 병력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서울에서 출발한 행군은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차출돼 온 이들도 있었는데 “그래도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고 불평할 정도였으니 군기가 말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진석은 힘든 길을 걸어 드디어 다른 장정들과 함께 함안의 초등학교 건물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한겨울에 텅 비어 있는 초등학교는 밖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나마 눈바람을 막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막사가 된 초등학교 교실 바닥에 짚을 깔아서 추위를 막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이불도 없고 요도 없이 그대로 자야 했는데 추운 날은 이가 덜덜 떨리기도 했다.
며칠 지나면서 아침이 되면 옆에 시체가 생겼다. 추위에 동사한 것이다. 한창 젊은 장정들의 식사라고는 하루에 세 번 소금을 조금 뿌린 주먹밥이 다였다. 크기도 테니스공 정도만 하니 식사라 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고 모두가 배고픔에 허덕이며 훈련을 받았다. 얼마 후에는 작은 주먹밥조차도 배식이 잘 안 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그런 와중에도 주먹밥 반 개를 잘라 담배 한 개비와 바꾸어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있었다. 주는 주먹밥을 다 먹어도 굶어 죽는 판인데 반을 잘라 담배와 바꾸니 진석의 눈에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이들은 금방 죽게 됐다. 담배가 도대체 뭐길래 목숨과 바꾸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독이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나왔다. 그러자 개인적으로 돈이 있거나 값어치 있는 물건을 지닌 사람들은 철조망 근처에서 김밥이나 떡 등 요깃거리를 사다가 연명했다. 진석에게도 어머니가 피란 가면서 남기고 간 재산 1호(?)였던 재봉틀을 판 돈이 주머니에 있었다. 어머니께는 무척 미안했지만 어차피 적 수중에 들어갈 물건이었다. 행군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동네 친구 한 명이 같이 생활했는데 그 아이는 몸이 무척 재빠르고 성격도 쾌활하고 임기응변이 강했다. 많은 국민방위군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친구였다.
-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된 장정들.
“진석아! 내가 철조망 밖으로 가서 김밥을 사올게!” 진석이 돈을 주면 그 친구가 잽싸게 철조망 근처에 가서 김밥을 한 줄씩 사왔다. 그러면 진석과 친구는 김밥을 한 개씩 똑같이 나눠 먹었다. 돈이 모자라니 세 끼는 아니고 한 끼만 보충해서 먹었다. 그래서 둘은 살았다. 아마도 그 친구와 하루에 한 끼씩이라도 김밥을 안 먹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재봉틀은 그렇게 유용하게 두 생명을 살렸다.
그러다가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졌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어리로 배를 채우고 가마니로 이불을 삼는 참상 속에서, 소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자 · 동사자 · 병자가 수천 명이나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951년 1월 15일 부산에서 열린 피난 국회는 첫날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추궁했다.
그에 따라 정부는 2월 17일 36세 이상 나이가 많은 장정들을 귀향시켰으며, 결국 국회 결의에 따라 5월 12일 국민방위군은 해체됐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국고금 횡령 사실이 드러났다. 국회 진상조사단에 의하면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105일 동안 인원을 조작해 24억 원어치의 금품을 착복하고 5만 2000석의 양곡을 부정 처분했다.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려 착복했는데 국회 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 원 또는 60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지도자들의 작태… 국민 공분 사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가는데 국민방위군 수뇌부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흥청망청 뿌리고 다녔다.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지급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한 것이었다.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때 장정 5-8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확인할 수 없다. 참고로 매국 통계를 보면 6·25 전쟁 내내 한국군 사망자는 14만 명 정도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준장 등 5명이 그해 6월 고등군법회의에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고 8월 12일 총살이 집행됐다. 국가의 위기가 눈앞에 닥쳤는데도 지도자란 사람들이 개인의 배를 채우기 위해 많은 젊은 장정들의 목숨을 희생시켰다는 데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추기경 정진석] (17) 밥과 전장의 사내들
거칠디 거친 사내들도 진석 앞에선 고분고분
- 6ㆍ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부산의 천막촌.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학생 선발
국민방위군에서 훈련을 받던 어느 날 책임자인 소령이 기간 사병이 필요하다며 중학교 이상의 학력자를 찾았다.
“중학교 이상 다닌 사람은 손들어 봐!”
장정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기가 무섭게 소령이 외쳤다. 진석이 몇 명의 장정과 함께 쭈뼛쭈뼛 손을 들고 나갔다.
“너희는 이제 여기 있는 장병들을 대상으로 학력, 나이, 지방별로 구분하고 통계를 내도록!”
갑자기 떨어진 명령에 진석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장정들 앞에 서서 평소처럼 거수로 사람 수를 세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숫자도 헷갈릴 것이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진석은 아예 사람들을 이동시켜서 구분하고 셈을 했다. 일사불란하게 인원이 파악되자 생각보다 빨리 끝을 맺었다. 차근차근 일 처리하는 진석의 모습은 지휘관 눈에도 띄었다.
“자네는 어느 학교에 다니다 입대했나?”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 들어왔습니다.“
“그래? 그럼 곧 방위군 사관학교 학생을 선발하는데 지원해 봐. 그리고 기준을 알려줄 테니 후보생이 될 만한 사람들을 네가 한번 뽑아봐!”
국민방위군 사관학교가 막 설정되던 무렵이었다. 1951년 3월 1일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3기가 개교하는데 사관생도로 훈련받을 숫자는 대략 2000명 정도였다. 진석은 국민방위군을 이끌 사관생도를 선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안타깝게도 피란길 함께 김밥을 나눠 먹던 동네 친구는 학력 미달로 후보생에는 뽑히지 못했다. 진석과 동네 친구는 이별해야 했다.
“진석아, 몸 건강하게 잘 지내고 나중에 또 보자!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고맙긴 뭘! 친구야, 너도 몸 건강하게 지내. 다음에 꼭 만나자.”
진석은 마치 전쟁통에 친구를 버리고 가는 것만 같아 그 아이에게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끔뻑끔뻑 자신을 쳐다보던 친구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무엇보다 친구가 앞으로 돈이 없어 김밥을 사 먹지 못할 것이 걱정이었다.
“저 친구가 앞으로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겁이 덜컥 났지만 친구가 국군에 배속됐을 것이라 위안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슬픈 마음을 뒤로하고 진석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선발한 사관생도 후보생들과 함께 부산의 범어사로 출발했다.
진석은 1951년 3월 3일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해 후보생들과 한 달 반 정도 훈련과 교육을 받고 4월 15일 졸업했다. 당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인 국민방위군 사관학교 3기에서 진석은 높은 성적으로 과정을 마쳤다. 어디서나 정직하고 성실히 임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진석은 같은 달 23일 국민방위군 제3단 6지대 직속 제1구대 제2 초대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방위사령부 지휘관들이 부식비를 횡령해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방위군이 해산됐다. 국민방위군 장교들에게는 예비 사관 임명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휘관들은 진석에게 국민방위군에 계속 남기를 권했다. 만약 그랬다면 국군에 배속됐을 것이고 진석의 인생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영어 이력서를 순식간에
- 미군 통역관 시험에 응시한 진석은 처음엔 빠르게 말하는 미군들의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진석이 영문 소개서를 순식간에 써내려가자 미군들은 ‘오케이’를 외치며 그를 채용했다. 삽화=문채현.
진석은 국민방위군에 남지 않고 대구에 있던 미 8군 제 60병기단에서 통역관을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을 찾아갔다. 미군들은 진석을 앞에 세우고 몇 가지를 물어봤다. 진석은 난생처음 빠르게 들려오는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시험관인 미군이 진석에게 영어로 이력서를 쓰게 했다. 학교 수업으로 영어를 익힌 진석은 영어로 말하기보다 영작문이 편했다. ‘나는 서울대학생이고 국민방위군 소위입니다.’
순식간에 영문 소개서를 써내려가는 진석을 보고 미군은 이내 “OK!” 하고 외쳤다. 그렇게 진석은 통역관으로 채용됐다.
진석은 6월 2일 춘천으로 이동했다가 강원도 화천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자동차 정비를 하는 한국인 노동자 100명의 관리를 맡았다. 이들은 미군의 탱크, 자동차, 트럭 등 모든 운송 수단을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거칠고 자유분방한 청년 100여 명을 통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진석의 부임 첫날 첫 임무는 장정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는 미군 보급창에서 준비했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밥솥’이란 영어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됐지만 자신만 기다릴 장정 100명의 밥을 지어 먹이려면 무슨 수든 써야 했다. 손발을 움직여 가며 뜻을 전한 끝에 밥솥을 구해냈다. 입대 전 칩거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어떤 이가 미군에게 북한군으로 오해받자 그를 변호해 준 이후로 처음으로 한 영어 회화였다.
지뢰로 둘러싸인 군부대 철조망 안에서 일하는 전시의 사내들은 거칠었다. 그들은 노름으로 여가를 보냈고 사람 죽이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점차 진석의 말에 고분고분해졌다. 진석은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에게 욕을 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석은 언제나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받은 가르침을 되새겼다. ‘바른말을 쓰라’는 어머니 말씀에 따라 욕설을 할 줄 몰랐던 진석은 전장의 사내들에게 ‘존중’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진석으로서는 어머니께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었다. 전장에서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낙담할 새가 없었다. 진석은 부산 어딘가에 계실 어머니와 만나기 전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머니를 찾아서
1952년 초, 첫 휴가를 얻자마자 그가 향한 곳은 부산이었다. 연고도 없이 이모님과 피란을 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빨리 만나 자신의 무사함도 알려야 할 터였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수소문했지만 어머니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무작정 내려가 어머니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를 찾다가 황해도 출신인 이병만 마티아라는 친구를 만났다. 진석과 동갑이었고 혜화동본당 신자였는데 서울대 치대를 다니던 청년이었다. 우연히 그에게 어떤 신부님이 전쟁 고아들을 돌보고 있는데 통역할 사람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진석은 황해도 연백본당 주임이었던 김영식(베드로) 신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추기경 정진석] (18) 지난날을 뒤로한 채 마주한 운명
“형! 우리, 인류를 위해 봉사하지 않겠소!”
- 정진석 추기경이 장익 주교의 친형 장건에게 보낸 편지의 첫장.
김영식 신부님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을 얼마만큼 바꾸게 될지 그때 진석은 알지 못했다. 첫 휴가를 맞아 부산으로 어머니를 찾아 나선 길에 친구가 소개한 신부님이었다. 상냥한 미소로 악수를 청하는 김 신부님의 손을 진석은 양손으로 잡고 꾸벅 인사했다. 신부님은 고아들을 먹이고 씻기느라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따뜻한 눈빛과 밝은 미소가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분이었다. 김 신부님은 황해도 연백에서 고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피난을 와 계신 중이었다. 곧 부평에 있는 병참기지 근처로 고아들을 위해 이사할 것이라 귀띔해 줬다. 당시에는 다들 하루 세끼조차 먹지 못하고 굶주리기가 일쑤였기에 불쌍한 고아들에게는 기댈 곳이 미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에게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그렇고, 지금도 영어를 잘하는 통역이 필요해.”
진석은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진석을 바라보았다.
“나는 돈을 줄 형편이 못돼.”
당시 영어 통역을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기에 잠깐 통역을 맡는 것도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신부님의 상황을 짐작한 진석은 신부님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돈 걱정은 마세요. 제가 하는 일을 마치고 찾아뵙겠습니다.”
진석은 짧은 인사를 드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귀대하는 열차에 올라 차창 밖을 바라보니, 창밖 풍경과 함께 최근 2년간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린 시절 각별한 사이였던 벗 장건(張建, 안드레아,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친형)에게 얼마 전 편지를 보냈을 때도 꼭 그랬다. 도무지 잊히지 않는 시간을 버릇처럼 되새기고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일,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장형 전(張兄 前)
그동안 어찌 지내셨소. 대단히 죄송하오.
무어라 사과의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나는 감히 이 편지를 쓸 용기조차 얻지 못할 지경이오. 가뜩이나 쓸 줄 모르는 내가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오. 나는 참으로 부족하외다.
다른 것보다 서울에서 헤어진 후에 내 소식을 그다지도 걱정하였다니 내가 그대 심정을 짐작하는 바요. 아니 내가 가히 짐작 못 하게 걱정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오. 대단히 미안하오.
1950년 11월 19일 혜화동 댁(장건의 집)에 갔더니 “오늘 아침에 다 떠났다오” 하니 적적한 감 끝이 없었소이다.
12월 21일 제2국민병으로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마산까지 부득이 내려 가게 되었소. 그리고 1월 8일 경남 함안읍(마산서 진주 가는 길목)에 있던 국민방위군 제10교육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였소. 18일 동안에 매일 날마다 100리씩 걸어서 서울에서 덕소를 거쳐 여주 강을 건너고 충주를 거쳐 새재를 넘어 문경과 의성을 거쳐 함안까지 가는 동안에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겼소. 인생 대학은 못 되지만 인생 중학은 마친 격이오.
2월 18일 국민 방위군 교육대 본부 가문관(假文官)으로 선발되어 주먹밥 대신에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게 되어 굶주림을 면하고 잠시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대의 해산될 날이 머지않음을 느끼고 방위군 사관생도 모집에 응소하였소.
3월 3일 마산, 부산진, 동래를 거쳐 범어사에 있는 국민 방위군 사관학교 제3기생으로 입교하였고 4월 15일 방위군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예비 사관이 되기를 면하고 나와서 4월 23일 수원을 거쳐 안성으로 국민 방위군 제3단 제6 지대 직속 제1구대 제2 초대장(哨隊長)으로 있다가, 4월 30일 풍문을 들으니까 또다시 사태가 좋지 않은 것 같기에 안성에서 나와 5월 3일 대구에 있는 국민 방위군 사령부에 경리관으로 사촌 형이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서 있다가, 5월 12일 방위군 사령관과 그 일당의 부정부패가 극심하여 방위군 해산 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소.
육군 헌병이 방위군 사령부를 접수하여 보초를 서고, 방위군 사령부 안에 근무하던 사병은 제대시키고, 장교는 예비 사관 임관 때까지 대기하라 하였소. 5월 23일 국군 제5군단에 방위군 사령부가 사무 인계를 함으로 나는 사촌 형과 함께 나와서 마침 모집하고 있던 미8군 제60병기단 소속 통역으로 선발되었소. 5월 27일 시민증, 제2국민병 등록증, 여행증 없이 무사히 영등포로 왔소. 6월 2일 미군 부대 통역으로서 트럭 앞자리에 타고 대구에서 춘천까지 갔소. 앞산에 대포들, 기관총, 소총 소리가 콩을 볶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춘천에 갔소이다.
이런 일선에 와서 보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소이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면서 차차 대포 소리도 멀어지며 시민들도 춘천에 차차 들어오게 될 즘에 9월 14일 내가 소속된 제7병기 수리 부대가 춘천 북방 21마일 지점인 화천으로 이동하였소이다. 현재 내가 근무하는 곳은 화천 발전소에서 멀지 않은 화천읍인데 이 읍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소.
제2국민병에 있을 때에는 밥맛이 과자와 같고 소금이 사탕과 다름이 없더니, 미군 부대에 들어가 보니 그 인종차별이 심한 지경이고, 젊은 몸으로 허송세월한다는 느낌으로 불안한 감 그지없었소이다. 그 무지막지한 자동차 수리공들을 데리고 있음으로 낮에는 그들에게 시달려 시름을 모르나, 저녁 후 그들이 술집으로 색시 집으로 또는 노름을 할 때 나는 그들의 지휘자로서 홀로 남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니 눈물이 절로 났소. 더구나 달 밝은 밤에는 이상한 느낌이 나를 뒤덮어 깰 줄을 몰랐소이다.
12월 8일 내가 처음으로 휴가를 맞을 때까지 무려 6개월 동안 10여 차례 걸쳐 편지를 써보았으나 답장은 한 장도 받아보지 못하였소. 무인지경, 그야말로 사회 사람과 떨어져 내 주위에서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지냈으며, 나와 말을 같이 할 사람을 갖지 못한 나는 귀머거리와 소경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소. 그나마 기다리는 답장은 오지 않았소. 이것으로 나의 그동안의 소식은 그치기로 하겠소.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요. 앞으로의 우리의 할 일이 많고도 많소. 이 부패한 사회를 어찌 개조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껏 매일 밤이면 신공 후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왔으며, 한숨으로 잠이 들곤 하였소. 그러나 안드레아, 우리는 청년이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새로운 체계를 세우며, 세계 국가를 만들려는 붉은 피가 우리의 가슴속에 용솟음치지 않소? 우리는 할 일이 많은 청년이오. 인류를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정신적, 도덕적, 물질적으로 봉사하지 않겠소? 우리는 펄펄 뛰는 청년이오.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악을 지상에서 해 중에서 공중에서 일소하기를 선언합시다. 우리는 앞길이 양양한 청년이외다.
동물은 일생이 그의 전 생명이지만 사람은 일생이 그의 전 생명이 아니오. 영원히 살 수 있지 않소? 더구나 그 꽃인 청년은 그 하루하루를, 아니 그 한시한시를 어떻게 지내야 하겠소?
나는 현재 나의 나라가 내 마음에 맞지 아니하게 된 것, 다시 말하면 세상이 이다지도 타락된 원인을 나의 친구 그대와 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소. 만약에 우리가 더 나이가 많았다면 이러한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생각하오. 또 그리되기를 원하는 바외다.
미국에 가니 어떻소? 일본을 거쳐서 갔다 하니 그 소식이나 듣고 싶소. 그러면 다음번에 더 재미나는 소식을 기다리며, 집안 여러분께 안부 전해 주시오.
주께 항상 그대 성공하기를 빌며,
(1951년) 12월 17일 밤 부산에서 진석 씀
※ 이 편지는 50여 년이 지나 장건 안드레아가 아버지 장면 박사에게 받은 오래된 편지함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1999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에게 자신의 편지와 함께 동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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