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다섯 단계
존 포웰이나 로날드 애들러에 의하면 대화에는 다섯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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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차원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의 대화입니다.
그저 아는 체하는 정도의 대화를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재미 좋으시겠어요?" "언제 한 번 만납시다"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떻습니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응, 그래." "차 조심해라." 그야말로 형식적이며 의례적인 대화를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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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차원이 객관적인 사실, 지식 등을 교환하는 대화입니다.
일상 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대화형태를 말합니다. "양말 어디 있어?" "지금 몇 시야?" "언제 들어올 거 에요?" "당신 오늘 어디 있을 거야?" "옆집에는 쌍용에서 나온 지프차를 샀대요." "그 집에 초상 낫 떠 구만." 이처럼 2차원적 대화는 일 중심의 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우 사무적이고 피상적인 대화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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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차원은 대화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생각이나 견해를 주고받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둘의 관계에 어느 정도 신뢰가 형성된 사람들끼리 나누어지는 대화를 말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선생님이…." 이런 식입니다. 자신의 분명한 견해와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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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차원의 대화는 사사롭게 여겨지는 감정까지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그럴 때 솔직히 말해 화가 나요." "그 일 때문에 무척 실망했소." "정말 감사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존경하는지 모르지요." "네가 아빠를 실망시킬까 봐 걱정이 돼." "당신이 얼마나 든든히 느껴지는지 몰라요." 이처럼 상대방의 감정을 수용해 주거나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수준의 대화야말로 수준 높은 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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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마지막 차원의 대화는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는 대화를 말합니다.
따뜻한 눈길만으로도 마음이 읽어지고 작은 미소와 얼굴 표정만으로도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관계의 대화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나누는 말없는 대화 같은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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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대화에도 수준이 있는데 우리는 차원 높은 수준의 대화를 위해 자신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대화도 훈련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평소 목회 일정에 쫓기면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이야기 나눌 시간이 많이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의 휴가를 얻어 사모님과 함께 해외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생각하기에 오랜만에 둘이 있게 되었으니 못다 나눈 이야기를 실컷 나눌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의 빚을 조금은 벗어 낸 듯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 보니 할 말이 하나도 없더라는 겁니다. 결국 사모님은 바닷가에 나가 조개 껍질을 줍고 목사님은 텔레비젼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대다 시간을 다 보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평소에 대화가 안 이뤄지면 무대가 마련된다고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더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이였습니다. 매우 의미 깊게 들었습니다.
평소에 훈련되지 않은 언어가 어느 날 갑자기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입과 혀를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잠언 21:23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존하느니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혀를 제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의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니라."(약1:26).
왜 혀를 훈련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멸망에서 벗어나고(잠13:3)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함에서인 것이다. 다 함께 베드로전서 3:10을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훌을 말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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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량한 혀
예배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도둑이 들어와 교회당의 물건을 훔쳐 도망치려는 찰나였습니다. 그들을 발견한 목사가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이 얼마나 자기 일에 열심인지. 우리도 우리 일을 열심히 잘해 봅시다. 자, 저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시다." 예배는 계속되었고 도둑들은 보따리를 두고 도망쳤습니다. 이 얼마나 시원한 장면입니까? 어쩌면 이런 것을 우리가 온량한 혀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온량한 혀란 단순히 재치 있게 말하는 기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영혼의 아픔을 싸매고 치료가 주어지는 언어를 말합니다. 슬픈 자에게 위로를,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용기를 심어 줍니다. 상처받은 자를 감싸주며 실패한 자를 격려해 줍니다.
시인 이해인 씨가 쓴 '말을 위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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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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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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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요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내뱉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하고
좀더 분별 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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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희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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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 한마디가 자녀의 인격에는 치명상을 입히는가 하면 그들의 미래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가 배우자를 초라하게 만들어 의욕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샘솟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우리의 가정에 '패려한 혀'가 아닌 '온량한 혀'의 축복이 넘쳐 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언어 생활의 거듭남을 간구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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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셔서 우리의 말하는 바를 들으시는 아버지여, 저희의 아름다운 대화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육 하시면서 까지 인간과 대화를 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에게 임 하옵시며, 하늘이 뜻이 저희에게 나타나 저희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눌 수 있는 건전한 의견을 주시옵고, 어제의 잘못된 생각을 용서하여 주시며, 서로의 견해 차이로 갈등에 휩싸이지 않도록 이해하게 하시옵고, 또한 충돌과 불일치로부터 건지시옵소서.
이는 모든 의견이 결정권과 참된 지혜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이니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