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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우리 한국교회는 ‘영적(靈的) 성숙(成熟)’보다는 ‘양적(量的) 성장(成長)’을 추구하면서, 세상과 교회 안의 ‘죄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부담보다는 ‘교인’들이 교회에 잘 출석하도록 ‘관리’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만을 갖는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심령의 부흥’이 아닌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교세(敎勢)의 확장을 위해 별별 프로그램과 방법들이 동원되고, 교회의 모든 인력과 행정력을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안에서의 음악, 즉 찬송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교회 안에서의 음악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증가해 가면서 분별력이 없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음악을 목회의 한 방편이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찬송의 영성을 상실해가고 있고 또 거의 상실해 버렸다. 즉 교회가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음악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찬송의 본질과 의미를 완전히 흐려 놓아 버렸다. 다시 말해 찬송의 의미를 망각하고 영적인 신앙고백으로서의 ‘드림’의 찬양이 되어야 할 찬송이 단순히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고 그들이 선호(選好)하는 음악을 도입하여 찬송의 ‘영성(靈性)’보다는 노래로서의 ‘음악성’에 치중하는 면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복음성가(gospel song)가 찬송가(hymn)를 대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아가 찬송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기쁨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고, 가스펠 송이 가져다주는 음악적인 즐거움에 취해 있다. 음악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만, 영적인 부담이 없고 나의 신앙고백과는 상관이 없는 가스펠 송을 즐겨 부를 뿐 아니라 심지어 부르는 자의 신앙고백으로 드려지는 찬송을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그것을 음악적으로 즐기기까지 하고 있다.
필자는 박사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중세 기독교 철학을 전공하면서 교회 안에서 15년여 동안 지휘자로 섬겨왔다. 그러면서 교회음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여 왔는데, 갈수록 찬송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본질적인 의미가 상실되며, 엉뚱한 가스펠 송이 판을 치는(?) 한국 교회의 영적인 현실을 아파했다. 이 글은 그런 아픔을 가지고 교회 안에 나타나고 있는 혼탁해지고 타락해 가는 교회음악에 대해 찬송과 가스펠 송의 본질과 개념을 살펴보고 나아가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찬송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교회 안에서 횡행하고 있는 가스펠 송으로 인한 영적 폐해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잃어버린 찬송의 의미와 본질을 올바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2. 찬송의 의미와 본질
1) 찬송의 의미
우리는 ‘찬양’ 또는 ‘찬송’이라고 하면 보통 ‘노래로 하는 찬송’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찬양’ 또는 ‘찬송’이라 함은 구속(救贖)받은 주의 백성들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영광과 감사와 존귀를 돌리며, 그를 높여드리는 모든 형태의 행위를 말한다. 이것을 넓은 의미의 찬송, 찬양 또는 찬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음악 따위의 예술적인 형태를 띠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라면, 모두 찬양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의 직장이나 일터에서 주를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기는 것을 통하여 자신 안에 이루신 주님의 역사를 이방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선포하는 것은 주님을 찬양하는 행위이다. 구속의 진리를 깨달은 말 못하는 벙어리가 몸동작이나 수화(手話)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필자가 문제삼는 것은 이런 넓은 의미의 찬양이 아니라 음악을 통한 찬양, 즉 우리가 보통 말하는 찬송이다. 사실 노래로서 하는 찬송은 한자 표현대로 ‘찬송하는 노래’라는 의미에서 ‘찬송가(讚頌歌)’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통 {찬송가} 책에 실린 것은 찬송이고, 복음성가 책에 실린 것은 찬송이 아니라 가스펠 송이라는 식의 흑백논리적인 구분을 하고 있지만,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찬송가라고 했을 때, 우리가 통상 말하는 찬송이나 가스펠 송 모두가 넓은 의미의 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노래로서의 찬송, 즉 찬송가의 본질이 무엇이며, 거기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우리가 통상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찬송과 가스펠 송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통상적인 구분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가 없을 때는 노래로서의 찬양을 찬송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2) 찬송의 본질
음악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의 태도와 깊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하고 아름다운 예술 형식으로서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래서 음악적 형식을 빌어 주님을 높이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찬송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내적(內的)으로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주님께 드리는 예배인데, 예배의 본질과 찬송의 본질이 신앙고백을 전제로 한 ‘주님께의 드림’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찬양의 본질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인 이상 찬송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즉 찬송의 본질은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찬송을 하는 자는 ‘나’이지만, 찬송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찬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찬양은 하나님 지향적인 행위이지 인간 지향적인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찬송은 ‘드리는’(offering) 것이지 ‘즐기는’(enjoying)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찬송은 어떻게 무엇으로 주님을 높여드리는가? 그것은 바로 ‘음악을 통해서’, 그리고 찬송을 드리는 자의 ‘신앙고백으로’ 높여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 음악적 기능만이 아니라 찬송하는 자와 찬송을 받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찬송은 신앙고백이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자신 안에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믿고 감사하는 자에 의해서만 주님을 향한 자기 고백적인 찬송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찬송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로 드리는 신앙고백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본질임을 알 수 있다.
3. 교회음악으로서의 찬송과 가스펠 송
이제 찬송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하여 교회음악으로서의 찬송과 가스펠 송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가스펠 송이 세상 음악인 것은 아니다. 분명히 가스펠 송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세상 음악과도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교회음악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찬송과 가스펠 송은 어떻게 다른가?
1) 교회음악의 개념과 의미
교회음악(church music)에 대해 정의할 때,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의 지체(肢體)가 되는 성도들이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음악적 활동 일체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의 예배와 전도, 교육에 관계된 모든 음악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개념 정의는 교회음악의 기능적 측면을 강조한 정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음악’이 ‘교회의 음악’(music of church)을 가리키고, ‘교회’는 지체로서의 구속받은 성도들이 모여 이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모든 음악적인 재료를 총동원하여 자신의 신앙을 표출한 신령한 모든 음악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음악의 본질적 의미는 이러한 수사적(修辭的) 정의보다 ‘교회음악’이라는 어휘를 통해서 밝힐 수 있다. 즉 ‘교회음악’은 ‘교회’와 ‘음악’이라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교회의 본질과 음악의 본질,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밝혀내면 교회음악의 본질을 규정할 수 있다.
먼저 ‘교회음악’이라고 했을 때의 ‘교회’는 교회음악의 내용적인 측면, 즉 신앙적 측면을 표현하는 단어요, ‘음악’은 그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즉 교회음악은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을 음악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음악이라는 형식에 교회의 신앙적인 내용을 담아놓은 것이 바로 교회음악이다. 따라서 교회음악의 개념은 내용적 요소인 교회의 본질과 형식적 요소인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면 그 범주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첫째, 교회음악이 내용적으로 담고 있어야 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내용은 죄인을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먼저 교회는 대내적(對內的)으로는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 자들이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구속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예배가 그 중심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예배음악으로서의 찬송(hymn)이 성립하며, 그것은 예배의 본질과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즉 구속받은 백성들에 의한 하나님께의 ‘드림’이라는 점에서 예배는 찬송과 그 목적과 본질이 동일하다. 그래서 찬송은 예배적 개념을 강하게 띠게 된다. 즉 찬송은 주님을 향한 수직적이고 상향적인 것으로서,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적 표현이다. 그리고 구약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감사의 제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찬송의 가사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헌신적인 내용을 통해 주님을 높여드리는 내용이어야 하며, 오직 주님만을 향한 경배와 찬양이어야 한다. 물론 가사의 내용이 성경에 충실하고 교리적으로 올바른 것이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적인 것이 아니면, 찬송은 더 이상 찬송이 아니라 단순한 노래에 불과하다.
또한 교회는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죄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영적인 전초기지로서 전도를 그 사명으로 한다. 여기에서 복음적인 노래로서의 가스펠 송(gospel song)이 성립한다. 즉 가스펠 송은 교회의 대외적 사명인 복음 전도를 수행하기 위해 복음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로서 인간을 향한 수평적인 음악이다. 물론 가스펠 송도 구속함을 받은 이들의 감격적인 기쁨과 신앙의 체험이나 간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찬송과 가스펠 송의 구분은 순수한 ‘드림’의 의미이냐, 아니면 선교적 차원의 ‘선포’ 내지는 ‘초청’이냐가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배적 개념으로서의 찬송은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구속하신 주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헌신의 고백이다. 그리고 선교적 차원에서의 가스펠 송은 세상의 죄인들을 향한 선포, 외침, 부름, 초청이다. 따라서 찬송은 믿는 우리 자신이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불려지는 교회음악으로, 가스펠 송은 주로 세상 사람을 향해서 불려지는 교회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찬송가집’과 ‘찬송’을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성경책과 함께 가지고 있는 {찬송가}라는 제목의 ‘찬송가집’은 찬송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앞에서 구분한 찬송과 가스펠 송 중에서 가스펠 송으로 분류되는 것들도 있으며, 현재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복음성가집인 {찬미예수}와 같은 책 속에도 찬송에 해당하는 곡들도 있다. 즉 찬송가집 {찬송가}에 있는 것은 모두 찬송이요, 복음성가집에 있는 모든 것은 가스펠 송이라고 획일적으로 말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집에도 가스펠 송으로 분류할 수 있는 곡이 있으나, 그것은 단순한 ‘가스펠 송’이라기 보다는 ‘가스펠 힘’(gospel hymn)이라는 점에서 보통의 가스펠 송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둘째, 교회음악의 형식적 요소인 음악의 본질은 무엇이며, 형식적으로 따라야 할 음악적 요소와 기준은 무엇인가? 음악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음을 일정한 방법에 의하여 조화, 결합시켜 미적인 감동을 일으키는 예술 형식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음악은 박자, 리듬, 멜로디, 템포 등을 사용한다. 찬송이 음악적 형식을 빌었을 때는 바로 이 음악적 요소를 통하여 시편 33:3의 ‘공교히’(skillful)라는 말씀처럼 ‘최고의 하나님께 최고의 미적(美的) 찬송을’ 드리려는 목적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할 수만 있으면 음악이라는 예술 형식이 표현할 수 있는 미적 수준을 극대화시켜 찬송도 그 음악적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점에서 교회음악은 찬송이든 가스펠 송이든 음악의 기본적인 기준과 요소인 박자, 음정, 리듬, 속도 등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적 요소를 전달하고 미적으로 승화시키며 미적 극대화를 위한 수단이요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가사가 담고 있는 의미와 영성(靈性)을 표현하기에 적절해야 하며 주님을 향한 경건성과 엄숙성 그리고 거룩함과 같은 것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기준이 전제되어 있다.
이렇게 교회음악은 신앙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가 내용과 형식을 이루어 결합된 것인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까? 이는 아주 어리석은 질문이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이 없는 내용은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앙적 요소와 형식적 요소, 즉 가사와 리듬 및 멜로디가 모두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음악은 음악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주를 찬양하고 주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음악적 형식보다는 신앙적 내용이 우선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음악적 형식을 무시하거나 간과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혹자는 ‘은혜만 되면 되지, 리듬이나 멜로디가 뭐 그리 중요하냐’라고 하면서 찬송을 부를 때 대단한 편곡 솜씨(?)를 보이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음악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변명이다. 악보에 충실하여 음악적 기준에 맞추어 부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마땅한 태도이다.
물론 지나치게 음악적인 요소만을 강조하여 찬송이 주는 영성과 가사의 신앙고백적 의미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더 큰 우를 범하는 것이요, 음악성을 강조하여 영성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악보를 무시하고라도 가사가 주는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은혜’ 아래 있지 못하고 ‘율법’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보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은 율법을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에게 성경이 모든 신앙의 기준이요 척도(canon)이듯이 자기고백적 신앙을 담은 찬송의 음악적 기준은 악보이다. 따라서 찬송은 신앙고백적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인 음악적 기준과 요소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교회에서 찬송을 인도하는 이들은 영적으로 찬송을 인도해야 함은 물론이고, 음악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자신은 물론 회중들로 하여금 음악적으로도 바른 찬송을 부르게 해야 한다.
2) 음악사적으로 본 찬송의 역사
이제 이러한 교회음악의 개념과 의미에 관한 이해 위에 찬송과 가스펠 송에 대해 간단히 역사적으로 일별하여 그 본질에 접근해 보자.
교회음악사적으로 보면, 종교개혁(Reformation)을 전후하여 교회음악은 큰 차이점을 보인다. 쯔빙글(Zwingli), 루터(Luther), 칼빈(Calvin)은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그들은 모두 교회음악에 관한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신령한 찬송을 원했는데, 그것도 뜻도 잘 모르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라틴어로 되어 있던 찬송에서 벗어나 자국어(自國語)로 된 찬송으로 만들어 불렀다. 그리고 성경 외적인 것들로 찬송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지만, 주로 시편 가사로 찬송을 만들어 불렀다. 또한 그들은 찬송을 예배를 돕기 위한 부수적인 장식물로 보지 않았다. 그 자체를 예배적 요소로 보았다.
이러한 공통점을 볼 때, 종교개혁자들은 무엇보다 찬송의 영성(靈性)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自國語)로 찬송을 만든 것은 가사의 의미와 뜻을 알고 자기의 고백으로 부르는 찬송만이 진정한 찬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가사를 주로 시편에 의지한 것은 찬송의 가사가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찬송을 장식물이 아닌 경배와 찬양 그 자체로 보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찬송의 본질이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교회음악의 가장 큰 변화라면 바로 회중찬송(會衆讚頌)이다.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4세기에 있었던 [라오디게아 회의]의 결정에 의해 자유롭고 즉흥적인 회중찬송을 금지하여 교회가 임명한 자 외에는 찬송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러한 결정은 찬송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문란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초대교회 당시의 교부(敎父)중의 한 사람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사람들이 만일 퉁소나 현악기, 찬양대, 춤, 애굽인이 치는 손뼉, 그리고 이와 비슷한 부질없는 일만을 중요시한다면 그들은 무절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라나 소고를 두드리고 헛된 악기를 써서 소음만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 의식과 교회 찬송의 지나친 형식화의 결과였다. 그 결과 중세의 교회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교권주의에 빠지고, 찬송도 그 생명력을 잃고 형식만이 의미없이 되풀이 되었다. 따라서 찬송의 회복 역시 종교개혁의 필연적 과업이었다. 즉 개혁자들은 찬송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 임명된 자만의 특권이 아니라 구속받은 모든 백성의 특권이요 권리임을 천명하여 회중들에 의한 찬송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그 가사는 시편에 의지하는 찬송, 즉 시편가(詩篇歌, Psalmody)였다. 이러한 시편가의 전통은 칼빈(Calvin)으로부터 유래된 관습으로서 종교개혁 이후 18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주로 스턴홀드(Stemhold) 홉킨스(Hopkins)가 운문으로 번역한 시편으로 찬송했다. 그리고 이것은 청교도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적인 개념의 찬송으로서의 시편가(詩篇歌)는 아이작 와츠(Isaac Watts, 1674-1748)에 의해서 기독론을 중심으로 하는 신약적인 개념의 찬송가(讚頌歌, Hymnody)로 전환되었다. 그는 “찬송을 시편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예배자들이 마치 그리스도가 태어나지도 않고, 죽으시지도 않고, 부활하여 영광 가운데 승천하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찬송가에 신약적이고 기독론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라는 더 나은 형태의 시에 대한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시편가와는 사뭇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적인 내용으로 약 750여 곡을 작시하였는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도 115, 138, 141, 147, 391, 401장 등 영감이 넘치는 찬송이 모두 17곡 실려 있다.
그래서 시편가에서 찬송가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즉 시편을 찬송으로 변형시켰다는 점에서 와츠를 ‘찬송의 아버지’라고 하기도 하고, 객관적인 시편의 가사만으로 노래했던 시편가와는 달리 복음적 주관성, 개인적 표현의 찬송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복음성가(gospel song)의 아버지’라고 하기도 한다. 그는 무엇보다 ‘나’와 ‘하나님’과 ‘복음’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앙고백을 중시했다.
이러한 와츠에 의한 찬송의 변화는 운율적인 시편을 점잖게 노래하는 전래의 방법과는 다르게 아주 열정적인 형태로 찬송할 것을 강조한 존(John)과 찰스(Charls) 웨슬레(Wesley) 형제에 의해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했다. 물론 웨슬레 형제의 그러한 주장은 모라비안 교도들이 파선(破船)의 위험 속에서, 또 그들의 집회에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서 감동을 받은 결과였다.
웨슬레 형제는 부흥운동 초기에는 같이 설교도 하고 찬송도 쓰곤 했으나, 후에 형 존은 설교, 동생 찰스는 찬송을 쓰기에 열중했다. 찰스 웨슬레의 찬송은 자서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묘사했다. 즉 죄에 묶여 있는 영혼의 영적인 불안, 회심을 통한 죄에서의 즉각적인 해방, 구원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인의 시험과 승리,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 등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찬송했다. 그는 모두 7,000여 편의 찬송시를 썼는데, 우리 찬송가에도 영감이 풍부한 16, 23, 26, 55, 154, 161, 269, 338, 372, 441 등 13곡이 실려 있다.
이렇게 교회음악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중세의 형식적 찬송에서 해방된 종교개혁 이후의 회중의 찬송은, 특히 와츠와 찰스 웨슬레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의 찬송이 되었고, 그것은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전제된 찬송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구약적 개념의 하나님, 즉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경배보다는 종교개혁 이후의 근대적 찬송의 내용은 그동안 간과되었던 기독론적인 찬송, 즉 죄인들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사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감사하고,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찬송이 강조되었다. 그런 점에서 와츠와 웨슬레의 찬송곡과 가사는 교회음악으로서의 찬송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과 모범을 제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4. 가스펠 송의 기원과 본질
앞에서 보았듯이 18세기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전래의 교회음악, 즉 시편을 번역한 가사로 된 판에 박은 듯이 규격화된 가사의 찬송, 즉 시편가에서 기독론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이 강조되는 찬송가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기독론이 강조되는 찬송이야말로 찬송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의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을 통해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의 개념만으로만 찬송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반쪽짜리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신앙고백이 담긴 내용의 찬송은 종래의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내용으로 찬양하는 전통적인 시편가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이것을 가스펠 송의 효시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스펠 송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말 그대로 ‘복음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가스펠 송과는 다른 가스펠 힘(gospel hymn), 즉 ‘복음 찬송’이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대외적 기능을 위한, 즉 복음 전도를 위한 교회음악인 가스펠 송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무디(Dwight Lyman Moody) 목사가 대중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부터인데, 그것은 무디와 함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음악 전도자인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와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 그리고 맹인이었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더 눈이 밝았던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 여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구원의 감격과 확신을 노래하며, 아직 복음을 모르는 죄인들을 향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초청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이 말 그대로의 ‘가스펠 송’(gospel song)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초청에 그친 ‘가스펠 송’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주를 찬양한 ‘가스펠 힘’(gospel hymn)이었다. 그것은 ‘가스펠 송의 아버지’로 불리는 생키가 펴낸 {Sacred Songs and Solos}(성가와 독창집), 그리고 생키가 블리스와 함께 펴낸 {Gospel Hymns and Sacred Songs}(복음찬송과 성가집), {Gospel Hymns}(복음찬송집)이라는 제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 우리 찬송가에 들어 있는 그들의 대표적인 찬송을 열거해 보면, 우리가 소위 즐겨 부르는 가스펠 송과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생키 : 191, 342, 349, 391, 397, 412, 478, 535 등
크로스비 : 43, 46, 144, 163, 187, 204, 219, 231, 275, 321, 337, 424, 434, 446, 492, 496
등블리스 : 35, 185, 235, 241, 257, 276, 379, 470 등
이같이 초창기의 가스펠 송, 즉 가스펠 힘은 복음 전도의 현장에서, 그리고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서, 또한 영적인 현실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불신자들을 예수 앞으로 초청하는 내용은 물론이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그 찬송을 부르는 이들에게 영적인 감동을 주고, 듣는 이들의 심령을 움직인다.
그
런데 1920년경부터 가스펠 송은 그 영성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불신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라는 목적에서 세속적인 음악의 형태를 빌어쓰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기 시작하면서 음악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 중반 이후에 와서는 포크(Folk), 컨추리(Country), 웨스턴(Western), 서던(Southern), 하드 록(Hard Rock), 소프트 록(Soft Rock), 메탈(Metal), 랩(Rap)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이 가스펠 음악에 원용(援用)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스펠 송도 기본적으로 찬송으로서의 본질을 전제한 선교적 차원의 교회음악이 되어야 하지, 전도와 선교라는 미명하에 교회음악이라는 범주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인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만약 교회음악으로서의 본질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음악이 아니라 세상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가스펠 송의 문제는 무엇인가?
5. 한국교회의 가스펠 송의 문제점
필자는 {찬송가} 책에 실리지 않은 모든 곡은 찬송이 아니고 가스펠 송이요, 찬송가에 실린 것만이 찬송이라는 구분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앞에서 밝혔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고백으로서의 찬송의 본질과 관련하여 찬송가에 실린 찬송을 대신하여 너무도 많이 불려지고 있는 가스펠 송의 문제점에 관한 것이다.
먼저, 가스펠 송의 발생적 문제부터 살펴보자. 사실 맨 처음 우리 나라에서 복음성가라고 하여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 말경부터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처음에는 주로 외국 곡들을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때 소개된 곡들은 그래도 매우 복음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교회음악의 대중화’라는 명목으로 음악적으로는 대중음악화하고, 가사의 내용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이 되어갈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강조하되 그것을 달콤한 이데올로기화하여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과는 무관한 사랑을 노래했다. 더구나 방송 매체가 주최하는 창작 복음성가 경연대회가 열리면서 찬송이 경연대회용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런 대회는 음악 꾀나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가스펠 송이라는 음악을 통한 복음가수가 되는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곡들이 영적인 감동보다는 음악적인 감동을 강조하고 또 지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런 일들을 통해 찬송의 의미 상실과 무감각 현상이 진척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다.
둘째, 현재 횡행하는 대부분의 가스펠 송은 리듬과 멜로디에 문제가 있다. 가스펠 송에 주로 사용되는 리듬이나 멜로디를 보면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메탈(Metal)이나 하드 록(Hard Rock), 포크(Folk), 컨추리(Country)풍과 같이 빠르고 경쾌하며 흥겨운 스타일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뉴 에이지(New Age)풍의 차분하고 서정적인 스타일의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가스펠 송은 록 계열의 강한 비트와 씽코페이션(당김음)이나 엇박자를 많이 사용하여 감정을 들뜨게 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사용하여 부드럽고 멋있고 감미로운 음악을 지향한다. 그런데 전자는 음악의 흥겨움을 노리기 위한 경향이 강하고, 후자는 영성을 자극하기 보다는 감성을 자극하여 음악의 감미로움에 젖어들게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다시 말해 영적인 유익보다는 음악적인 흥겨움과 서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말이다.
셋째, 가스펠 송의 가사를 면밀히 분석하면 찬송해야 할 정확한 내용이 얼마나 희석되고 초점이 흐려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모든 가스펠 송이 분명히 신앙적인 단어와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피상적이고 추상적일 뿐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서정적(抒情的)이다. 그리고 개인의 신앙고백적인 가사보다 공동체적인 가사를 많이 사용한다. 다시 말해 ‘나’가 아닌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이는 자칫 나의 고백이 아니어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 고백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하는 객관화시킨 가사들도 많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worship and praise) 계열의 가스펠 송의 가사는 매우 구약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고, 성경 구절을 그대로 따와서 가사화한 것이 많다. 그렇지만 성경을 많이 알고 읽으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듯이, 성경 구절을 가사화한 가스펠 송을 아무리 많이 부르고 즐겨 불러도 그 가사가 나의 신앙고백과 상관이 없으면 그것은 찬송이 아니고 노래이다.
그런데 가스펠 송과 찬송가에 쓰인 가사를 분석해 보면, 가스펠 송에는 경배, 영광, 찬양, 사랑, 기쁨 등이 가장 많이 사용된 반면, 찬송가에는 죄, 구원, 회개, 천국, 보혈, 피, 십자가, 동행이라는 가사로 뒤덮여 있다. 한 마디로 가스펠 송의 가사는 구약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고, 찬송가는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더구나 웃지 못할 사실은 가스펠 송을 즐겨 부르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가스펠 송을 부르는 것’을 ‘찬양함’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래서 화려하고 멋진 곡으로 힘있게 가스펠 송을 부르면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이요 경배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찬양하고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이유와 영적인 고백이 없이, 그저 아름답고 흥겨운 곡조로 ‘찬양드립니다’, ‘영광돌립니다’, ‘경배합니다’라고 노래하면 그것이 곧 ‘찬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말이다.
넷째, 무엇보다 가사가 주는 영성이 찬송가에 실린 찬송이나 가스펠 힘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가스펠 송은 성령의 인도와 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의 심령에 부흥이 온 결과로서 나타난 신앙고백적인 찬송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스펠 송은 경연대회를 출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인위적인 노력의 산물이 많고, 심지어는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추어 그들의 귀를 자극하는 음악으로 가스펠 음악을 만들어 음반 판매량의 절대적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전문 가스펠 가수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곡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가스펠 송은 유행을 타기 때문에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영성보다는 음악을 아름답고 감미롭고 감동적이고 멋지고 즐겁고 재미있게 하는 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점은 가스펠 송이 교회 안에서 무분별하게 불려지면서 진정한 찬송의 의미를 상실하고 ‘노래’를 부르는 경향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성으로 인해 현대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담고 있는 감각적이고 흥겹고 서정적인 가스펠 송이 오랜 기간에 걸쳐 검증된 찬송가를 대신할 정도로 찬송가를 잠식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겨우 예배 중에나 부르는 의식적인 노래의 수준으로 찬송가를 전락시키고 말았다. 심지어 어떤 청년부나 학생회에서는 예배 중에도 가스펠 송 일변도의 찬송을 부르고 있는 사실은 심히 우려된다.
6. 가스펠 송을 선호하는 이유와 그 폐해
그러면 왜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가스펠 송이 찬송가를 대신하여 즐겨 불려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교회의 타락된 영적인 현실과 관계되어 있다.
1) 가스펠 송 선호의 이유
먼저, 지금 즐겨 부르는 가스펠 송이 음악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친근하기 때문이다. 가스펠 송을 선호하는 주된 연령층이 10, 20대라는 점을 주목하라. 현대의 가스펠 송은 영적인 자기 신앙고백으로 듣고 부르는 이의 심령의 울림이 되게 하기 보다는 세속 음악을 사용하여 거기에 익숙한 이들의 귀에 호소하고 있다. 리듬과 멜로디를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찬송가는 단순하면서 화성(和聲) 위주이지만, 가스펠 송은 화려한 멜로디, 흥겨운 박자와 리듬, 서정적인 가사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찬송가가 만들어진 시기가 오래된 옛날 음악이고, 가스펠 송은 현대음악을 사용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찬송가는 음악이라는 형식을, 가사를 담는 그릇의 차원으로 생각하여 가사의 영성을 강조하지만, 가스펠 송은 그 반대적인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젊은이들이 가스펠 송을 선호하는 이유는 현대적인 리듬을 담고 있는 가스펠 송을 부르면 즐겁기 때문인데, 그것은 ‘찬송’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아니라 ‘노래’가 주는 기쁨이다.
무엇보다 가스펠 송은 찬송가의 가사에 비해 내용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매우 직접적이고, 신앙고백적이라서 거기에 부합하지 않은 신앙으로는 부르기에 부담스럽고 껄끄럽다. 예를 들어 “예수 십자의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라는 찬송은 죄를 가지고 부르기에는 부담스럽지만, “고개들어 주를 맞이해”는 그런 부담없이 부를 수 있다. 찬송가의 가사는 대부분이 죄로부터의 회개,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속죄, 성결과 헌신, 전도와 선교, 봉사와 충성, 주님과의 동행을 찬송하고 다짐하는 내용들이지만, 가스펠 송의 가사는 막연한 찬양, 경배, 영광, 사랑, 기쁨만을 노래하여 영적인 부담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쉬운 말로 가스펠 송은 죄를 버리지 않고서도 무감각하게 부를 수 있지만, 찬송은 그것이 무척 부담스럽다는 말이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즐겁고 흥겨운 가스펠 송을 많이 하다가 보혈이나 속죄, 성결 또는 전도와 헌신에 관한 찬송을 불러보라. 그들의 얼굴과 태도에서 어떤 변화와 현상이 나타나는지…. 만약 참된 신앙고백으로 가스펠 송을 부르면서 찬송의 기쁨을 가진 사람이라면 찬송가를 불러도 마찬가지의 기쁨으로 부를 것이다. 그러나 가스펠 송을 부르면서 감격해 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사람이 찬송가를 부르면서는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가스펠 송을 부르면서 함께 드린 신앙고백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가스펠 송의 음악적인 면이 주는 감정의 자극이었음에 틀림없다. 불행스럽게도 가스펠 송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은 바로 이러하다. 그것은 가스펠 송을 즐기면서 예수도, 십자가도, 보혈도, 은혜도, 복음도 모르는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2) 가스펠 송의 폐해
앞에서 지적한 가스펠 송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지금 그것을 지나칠 정도로 선호하고 또 교회 지도자들과 찬양 인도자들에 의해 그것이 계속 확장일로에 있다. 그러한 현상은 주로 예배 전의 찬양 시간에 일어나고 있는데, 가스펠 송으로 찬송하는 것이 마치 음악회에 온 것처럼 분위기도 나고 기쁘고 즐거우니까 외면적으로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불행스럽게도 그러한 현상들이 교회의 영성을 무뎌지게 하고 찬송의 초점을 흐리게 하여 그로 인한 영적인 폐해가 적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영적인 부담없이 부를 수 있고, 영성보다는 음악성에 의존하는 가스펠 송이 즐겨 불려지면서 한국교회의 찬송은 드리는 찬송, 고백하는 찬송이 아닌, 즐기는 찬송, 즐기는 노래가 되고 있다. 만약 찬송을 부르면서도 주님에 대한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영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한 부담이 없이 그냥 ‘부르는 즐거움’만 있다면, 그것은 찬송이 아니고 ‘노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펠 송을 통해 ‘찬송의 기쁨’이 아니라 ‘노래의 기쁨’을 구하고 있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교회의 경제력에 힘입어 많은 교회들이 재즈용 전자 오르간이나 신디사이저, 드럼, 심지어 전자 기타나 색스폰까지 동원하여 심하게 말해서 나이트 클럽이나 디스코텍, 락카페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라는 성경 말씀이 악기 소리가 찬송하는 소리를 압도하고 사람을 흥분시키도록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드럼을 두들기고 전자 기타를 연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라. 연주에 취했는지 주님을 향한 찬송에 취했는지! 그들의 생활을 보라. 주님을 따르며 성령과 동행하는 삶인지 세상을 따르는 삶인지! 또 찬양을 인도하는 젊은이들이 예쁘고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앞에 나와 때로는 거룩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인도하고, 때로는 박수치고 율동하면서 흥을 돋운다. 그러나 찬송은 분위기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찬송은 흥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다. 가스펠 송을 고백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노래’ 정도로 생각하며 부르면서 거기에다가 손동작, 몸동작까지 덧붙이는 것을 가스펠 송의 외형적 다변화, 문화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찬송의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단순히 가스펠 송을 부르는 행위, 즉 가스펠 송을 노래하는 것이 곧 찬양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심화되고 있다. 때때로 가스펠 송으로 찬양하다가 예배가 시작되기 전, 찬양 인도자가 “이제 예배 드리기 전에 찬송 한 장 합시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이것은 가스펠 송을 즐겨 부르는 가운데 세련되고 현대적인 가스펠 송은 찬양이요, 전통 형식을 띤 찬송가는 구닥다리(?) 찬송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배 자체가 생명력이 없이 죽어 있고, 그 때 불려지는 찬송가 또한 그러해서 찬송가를 구닥다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들은 ‘예배 갱신’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열린 예배’를 드린다느니, 활력 넘치는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린다느니 하면서 요란한 가스펠 송을 도입하여 음악적인 흥과 즐거움으로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애쓰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정신차리라! 예배의 갱신은 ‘분위기’의 갱신이 아니라, 예배 드리는 자의 ‘심령’이 갱신되고 변화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찬송의 기쁨은 찬송의 가사 속에 있는 신앙고백을 ‘아멘’ 하는 마음으로 고백하고, 주님을 높일 때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음악적 형식을 통한 미적 감동이 주는 기쁨과 희열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찬송은 주님을 향한 나의 신앙을 드리고 고백하는 행위이며, 찬송을 부를 때 오는 기쁨은 그것을 통해 다시 주어지는 주님의 은혜이다.
7. 맺음말
교회에서 가스펠 송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대치하여 지나치게 가스펠 송이 횡행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미 수험 수위를 넘어섰다. 혹자는 필자의 우려를 단순히 가스펠 송이라는 하나의 기독교 문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필자는 가스펠 송을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근절해야 한다는 극단론을 펴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문화를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주님의 일과 영적 성숙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본질과 사명, 십자가의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단호히 거절하고 버려야 한다.
찬송은 주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이다. 신앙고백이 없는 찬송은 찬송이 아니라 단순한 노래이다. 따라서 찬송가에 있는 찬송을 부른다고 해도 그것이 다 찬송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찬송에 담긴 신앙고백적인 내용들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찬송이 되는 것이다. 또한 찬송의 기쁨은 노래의 기쁨이나 분위기에서 오는 기쁨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찬송의 기쁨은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에서 오는 기쁨이다. 따라서 복음의 기쁨이 회복되어야 찬송의 기쁨도 회복된다.
그러므로 찬송의 회복은 먼저 십자가의 복음 회복이 선행되어야 하며,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상실하고 구원의 기쁨을 상실할 때 찬송의 기쁨이 상실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정한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리면 그와 유사한 다른 대체물을 구하게 되어 있다. 찬송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찬송의 의미를 상실하고, 진정한 찬송의 기쁨을 상실하면 유사한 대체물을 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가스펠 송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처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고전 10:23). 모든 것을 교회가 사용할 수 있으나, 교회의 모든 초점이 되어야 할 십자가를 희석시키고 흐리는 모든 것은 유익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지금까지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볼 때, 교회 안에서 가스펠 송을 지나치게 선호하여 횡행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심각한 찬송의 위기이자, 영적인 위기이다. 따라서 먼저 교회 안에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적인 찬송을 회복해야 한다.
영적인 폐해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성도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찬송의 기쁨이 아니라 노래의 기쁨에 취해 부르는 가스펠 송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가스펠 송에 대한 영적인 측면의 고려 없이 짧은 시간에 너무도 깊고 빠르게 교회 안에 파고 들어와 둥지를 틀고 있어서 당장에 가스펠 송 부르는 것을 모두 그만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진정한 의미의 찬송과 그 기쁨이 회복되려면 수 년, 아니 십 수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찬송의 본질과 가스펠 송을 즐겨 사용할 때 가져오는 폐해를 분명히 인식하고 버려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특히 담임목사님들은 가스펠 송을 통해 교회음악에 진척되고 있는 무서운 영적인 폐해를 직시하고 그 남용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가스펠 송을 즐기는 청년들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지도자들은 가스펠 송으로 그들을 결집시킬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끄는 힘’으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찬송 인도자들은 찬송을 부르는 자들이 찬송을 통해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부르도록 인도해야 한다.
우리가 심령 깊숙한 곳에서 참으로 회개하고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심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찬송은 가스펠 송이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찬송, 그것도 주님이 나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그로 인해 받은 속죄함을 노래하는 주님의 ‘보혈’ 찬송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찬송은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찬송이 되도록 해야 한다.
찬송은 사람이 즐기는 것이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해야 한다.
찬송은 부르는 자의 영적인 신앙고백일 때 비로소 진정한 찬송이 되며, 그럴 때에야 찬송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주여! 이 땅에 찬송이 회복되게 하시고, 모든 주의 백성이 찬송의 기쁨 속에 거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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