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미로 속, 푸른 맥박을 젓다
기차역을 빠져나와 산타 루치아 역의 넓은 계단 앞에 섰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매캐한 자동차 배기가스가 아니라 코끝을 스치는 비릿하고 짭조름한 물 냄새였다. 아스팔트와 신호등 대신 초록빛 운하와 크고 작은 배들이 얽혀 있는 풍경. 베네치아에 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굳건한 대지 위에서 살아왔던 나의 모든 감각을 일렁이는 물의 법칙에 새롭게 적응시키는 일이었다. 도시는 거대한 하나의 수채화 같았다. 아니, 내가 그 거대한 수채화 작품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간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수많은 골목과 좁은 수로를 지나 탁 트인 대운하로 나섰을 때 마주한 풍경은 비현실적일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파스텔 톤으로 빛바랜 오래된 건물들이 물가에 길게 늘어서 있고, 붉은빛이 감도는 지붕들은 쏟아지는 지중해의 햇살을 받아 따스하게 반짝였다. 저 멀리, 물안개인지 아지랑이인지 모를 뿌연 대기 너머로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의 거대한 돔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바람결에 따라 찰랑이는 물결 위에 길게 드리워진 건물들의 그림자는 이 도시가 땅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물 위에 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선착장에 나란히 매여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곤돌라들은 이 평화로운 캔버스 위에 찍힌 우아한 쉼표 같았다. 그 풍경 앞에서는 누구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가는 마법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그저 낭만적인 관광객들의 시선 속에 박제된 아름다운 정물화가 아니다. 수로를 따라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엽서 속 풍경 이면에 숨겨진 이 도시의 진짜 거친 맥박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거대한 돌다리 밑의 서늘한 그늘을 통과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거친 물보라와 함께 훅 끼쳐오는 열기. 푸른색 유니폼을 맞춰 입은 사공들이 한 무리를 이뤄 묵직한 나무배의 노를 젓고 있었다.
관광객을 태우고 여유롭게 유람하는 곤돌리에와는 달랐다. 다리 밑의 좁고 어두운 수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수십 개의 팔뚝이 동시에 팽팽하게 솟아오르고 구릿빛 근육들이 땀에 젖어 번쩍였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사공들의 짧은 기합 소리가 다리 밑의 공명 공간을 울리며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배 위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공들이 지지 않겠다는 듯 힘차게 물살을 갈랐다. 그 역동적인 찰나의 순간, 나는 베네치아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바다의 변덕과 싸워오며 이 거친 물길을 길들여 온 치열한 '삶의 터전'임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아름다움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눈물겹고 끈질긴 생명력 위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배의 맨 뒷자리에 서서 앞을 향해 묵묵히 노를 젓는 사공들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푸른 셔츠와 붉은 셔츠의 사공들이 만들어내는 엇박자 속의 조화로운 리듬. 그들은 그저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체중을 실어 물이라는 거대한 저항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스라하게 빛나는 전방의 풍경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어쩐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수백 년 전, 훈족의 위협을 피해 척박한 갯벌에 나무 기둥을 박고 도시를 세웠던 베네치아의 조상들도 저런 뒷모습으로 노를 저었으리라.
수면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윤슬은 너무나 눈이 부셔서, 자꾸만 눈앞의 풍경을 희미하게 번지게 만들었다. 뚜렷했던 건물의 윤곽이 물안개 속으로 스러지고, 그 자리에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겹겹이 포개어졌다. 이 도시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아쿠아 알타(조수 상승)를 겪으며 물속으로 가라앉는 운명을 앓고 있다. 광장으로 물이 차오르고 건물 1층이 속수무책으로 잠기는 재난 속에서도, 베네치아 사람들은 장화를 신고 다시 나무판자를 깔아 길을 만든다. 끊임없이 도시를 집어삼키려는 물의 습성 앞에서, 베네치아를 수면 위로 띄우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나무 기둥이나 돌바닥이 아니라 저 사공들의 억센 팔뚝과 도시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뜨거운 부력일지도 모른다.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대운하의 끄트머리, 물빛은 하늘을 닮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고요함과 소란함, 정체된 과거와 펄떡이는 현재, 낭만적인 환상과 치열한 현실. 베네치아는 늘 이 두 가지의 얼굴을 동시에 품고 출렁이는 미로였다. 여행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오는 길, 발밑에 닿는 단단한 땅의 촉감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내 몸은 아직도 물의 리듬을 기억하며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뒤로하고 멀어지는 순간에도, 내 마음속 캔버스 위에는 짙은 푸른색과 아스라한 물안개, 그리고 다리 밑에서 땀 흘리며 노를 젓던 사공들의 뜨거운 뒷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수채화로 짙게 번져가고 있었다. 삶이 때로 퍽퍽하고 건조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기억의 수로를 따라 다시금 이 물의 도시로 흘러들어 안개 낀 축축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