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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12지파 연구
1. 서론 - 12라는 숫자의 상징성
1. 오늘부터 ‘이스라엘12지파연구’라는 제목으로 13주로 계획되는 시리즈설교에 서론으로 누가복음22장47-49절을 본문으로 정하였습니다. 요즘 사순절 기간 중에, 스킬더목사의 ‘수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읽으시면서 묵상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그 설교집1권의 23번째 설교인, ‘불경스럽게 된 조화’라는 제목의 뜻과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2제자중의 하나인 가룟유다가 배신의 키스를 하는 이 장면은, 단순히 인간적인 배신감 정도의 아픔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이루실 비젼 자체가 깨뜨려져 버리는 순간이라는 구속사적 맥락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은 그리스도로서의 사명 성취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 사명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인데, 그 나라가 바로 구약성경에서는 12라는 숫자를 통해서 약속되어 왔습니다. 곧, 완전수 3과 세상을 나타내는 숫자인 4의 더하기는 7, 곱하기는 12인데, 이 네 가지 숫자는 성경의 숫자상징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3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고, 4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세상을 나타냅니다. 그 둘을 더하기는 7은 하나님의 본질의 속성(영광과 능력)을 나타내고, 곱하기 하여 얻은 12는, 하나님(3)께서 이 세상(4)을 통해서, 당신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요소가 결합되어 성취되는 하나님의 비젼성취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7의 대표적인 예는, 6일간의 창조사역 후에 오는 안식일이 대표적입니다. 세상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속성들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안식년과 희년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12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야곱의 12자녀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지파를 이루고, 나중에는 예수님의 12제자들과 새예루살렘성의 열두대문과 열두기초석으로 이어지는 상징들입니다.
2. 이런 숫자들에 너무 지나친 상상력을 불어넣으면 안되지만,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가르쳐주는 대만큼은 우리가 상고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과제입니다. 그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성경의 깊이를 그 깊이만큼 파고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나는 이 숫자의 상징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1장17절은 족보를 기록한 후에,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14*3=42입니다. 이 42라는 숫자도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만 너무 복잡하니 생략합니다(광야생활 때 진을 친 장소들의 숫자이면, 성전이 42개월 동안 짓밝히게 될 것이라는 예언 등). 중요한 것은, 분명히 42라는 숫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데, 그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헤아려보면 예수님을 포함해서 모두 41명입니다. 이것은 14대,14대,14대는 숫자로 계수하면서 일종의 트릭을 쓰고 있는데, 다윗이라는 이름이 두 번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명을 센 후에는 다윗을 빼놓고 솔로몬부터 14명을 헤아려하는데, 다시금 다윗을 포함해서 14명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족보의 서문도 헬라어 원문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דוד)이라는 이름 각 철자들이 갖는 숫자의 값을 모두 합치면(4+6+4), 14입니다. 14대별로 나눠서 강조하는 이유도, 다윗에게 초점을 맞추는 셈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축하는 바는, 예수는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만 아니고, 나아가서, 다윗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는 예언들이 모두 완성되고 성취시키는 인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3. 다윗을 통해서 이루져야 했을 이스라엘의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12지파로 형성된 왕국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공동체, 곧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제사장나라로서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왕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이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왕이었던 다윗의 왕국도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실패했던 다윗왕국의 비젼을 완전하게 성취할 메시야가 왔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 이 비젼성취에 대한 사명을 예수님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밤을 새며 기도하시고는 12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12명의 제자들이었을까요? 바로 구약의 사라져버린 12지파의 회복이 그 목적입니다. 북이스라엘의 10지파는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남유다왕국의 2지파는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포로 되어 잡혀갔다가, 70년 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해서 귀환령이 발하여지고 그 난민들이 고토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유다지파”중심으로 돌아왔고(그래서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됨), 나머지 지파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버렸다고 하겠습니다. 그 12지파를 회복시키는 의미가 12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냥 숫자로만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 그 12지파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12제자를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5. 이런 점들을 배경으로 하면, 오늘 본문의 의미, 곧 유다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입을 맞추면서 인사를 하면서, 로마 군병들에게 예수가 누군지를 가리켜준 것은, 단순히 배신의 입맞춤에서만이 아니라, 스킬더 목사가 강조한 것처럼, 예수님의 비전이 뭉개지고 박살나버리는 그 순간이었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심장에 다가왔던 피맺힌 고통과 아픔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젼, 곧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이 비전과 그것이 무시되는 것의 이 아픔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교회의 분열만큼 주님의 마음에 큰 아픔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 뒤 드리신 대제사장적 기도(요17장)를 보면, 그 기도의 핵심은 제자들의 하나 됨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전도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면, 우리 주님을 다시 한 번 더 짓밟는 것과도 같습니다(히10:26-31).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는 맥락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히10:19-24).
6. 우리가 이스라엘 12지파를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게 구약의 12지파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면서 서론적으로 말씀드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완성은 바로 요한계시록의 14만4천과 새예루살렘의 12대문에 대한 계시의 말씀에까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12기초석과도 연관됩니다. 사소한 주제가 아닌 것임이 분명합니다. 벌레같은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며, 12지파를 이루되, 대제사장의 흉패에 새겨진 보화가 되어 새예루살렘의 12대문로 이어지는 계시의 역사는, 바로 우리들의 구원의 과정에 대한 교훈의 말씀들이기도 합니다. 열두 아들부터 한 지파씩 살펴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들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2. 르우벤(보라 아들이라!)-진짜 장자를 보라!
창세기29:31-32
1.지난 주일에 12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대해서 서론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젼이 그 숫자에 담겨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첫 번째 아들인 르우벤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이 르우벤이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초점이 되겠습니다. 그 답을 질문형식으로 표현하자면, “참된 장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2. 먼저 그의 출생의 기원을 살펴봅시다. 야곱의 결혼과정과 레아와 라헬과의 결혼과정은 너무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알고 있다고 하면, 왜 레아가 그 첫아들의 이름을 ‘보라 아들이라’(르우벤)고 불렀는지 이해가 됩니다. 일종의 처연한 인간적 애절함, 남편의 사랑을 호소하면서, 주목을 요구하고 있는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그만큼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르우벤의 성품의 특징을 나중 창세기48장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저주?)에서 보면,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였”지만, “물의 끊음”같다고 하니, 그 마땅한 모습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성품이 안정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전체의 성품도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합환채를 따와서 모친에게 주려는 애틋한 심정도 있고(창30:13), 야곱이 형들에 의해서 죽임 당하려고 할 때, 우물에 빠뜨렸다가 나중 살려줄 생각도 했습니다(창37:21-22). 하지만, 그의 성품은 안정이 되지 않아서, 아버지 야곱도 르우벤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르우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창42:37-38)을 보아도 분명합니다. 레아가 “보라 아들이로다”고 하였지만, 그 아들을 야곱은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때에 불만이 누적되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자기 아들에게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녀의 성품은 불안정해집니다. 그것이 양육의 법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르우벤의 잘못만을 강조하는데, 르우벤의 잘못을 책하려면, 먼저 그 부모의 양육에 대해서 잘못을 책해야 우리가 배울 것을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예 애당초부터 장남을 장남으로서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곱 자신도 차남이어서 장남이 아닌 애환을 겪었던 인생인데, 똑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르우벤이 장남으로서의 영적 위치를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소실과 더불어 동침한 것은 너무나도 잘못된 것입니다. 소실을 두었다는 것 그 자체도 함께 책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인생의 연약함과 범죄를 이용하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의 역사를 이뤄 가십니다.
4. 이런 개인 르우벤의 모습은 그 지파의 모습에도 투영되어 나타납니다. 성품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고 인내했다가 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생활 중에도, 레위지파의 고라자손들과 더불어서 반역을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민16:1; 신11:6). 그런 모습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도 전 정복한 처음의 땅을 그들이 요구하였을 때에도(수13:8-23),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요단 맞은 편”을 요구하고 정착하였던 것입니다(민32:37-38). 그리고 그 뒤 이곳 지역의 역사를 보면, 사사도, 선지자도, 영웅도 없고, 단지 다윗의 군대 가운데 용감했던 삼십 명의 부하와 더불어 ‘아디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대상11:42). 아마도 아디나의 지휘 아래 있었던 르우벤 자손들이 얼마 있기는 하여서, 헤브론에 있던 유다지파만의 왕이었던 다윗에게 나아와 그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데 일조를 하기는 합니다(대상12:37~40). 긴 역사의 관점을 보게 되면, 그 지역이 제일 먼저, 아람왕 하사엘에 의해서 정복을 당하고(왕하10:32-33), 나중(BC740년)엔 앗수르왕 디를랏 빌레셀에 의해서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습니다(민32:1-33; 대상5:26). “끓는 물”같은 그의 성정과 그 지파의 성향은 스스로 자신의 장자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지파만의 안녕을 우선시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사명에 실패한 사람, 사명에 실패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보라, 아들을! 하였지만, 볼 것이 전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이 이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 이런 지파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5. 먼저, 이 지파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패한 모습 그대로, 대제사장의 흉패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오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심장에 새겨져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흉패에 2단3번째에 석류석으로 상징되었던 것이 바로 이 르우벤지파입니다. 석류석은 ‘에메렐드’의 다른 이름인데, 푸른 바다의 물결을 연상한다고 해서, 삶의 풍파가 많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르우벤지파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패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연약한 모습 그대로 보석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광야생활의 진을 칠 때에 남쪽에 위치했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최소한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가 맨 앞에 위치하고 그 다음에 (유다-잇사갈-스불론)이 한 무리로, 그 다음에 성막이 오고 그 뒤에 (르우벤-시므온-갓)이 따르며, 또한 그 뒤에 성물들이 따르고, 그 뒤에 나머지 여섯지파(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단-아셀-납달리)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르우벤은 그렇게 표시가 뚜렷하게 나지 않는 위치에서 최소한의 역할은 하였던 것 같습니다. 끓는 물같은 지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역할은 감당하면서 끓는 물 같았던 같습니다. 끓는 물같아도 쓰임새는 또한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지파를 위하여 예언하기를,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살마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33절)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모습입니다. 좀더 분투하라고 권하고 명령하면 따라오지를 못하고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책망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격려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손잡아 주면서 이끌어야 할 그런 모습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 일을 하기도 합니다. 사사시대에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혁파한 뒤 부른 노래를 보면,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삿5:15)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하여 큰 결심을 하고 나서면 놀라운 승리를 이루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기적인 공동체인데도,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벗어버려야 공동체르 위한 큰 결심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변덕이 심하고 성정이 안정되지 못하여 별로 큰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나 공동체가 “큰 결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6. 그런 자들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르우벤 지파에게 속하는 1만2천명 속에 속하는 것으로 헤아려지는 것입니다(계7:5). 그것도 순서상으로 유다지파 바로 그 다음 두 번째로 기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21장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의 대문위에도 그 이름이 새겨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그 마음 속에 선한 소원이 일어나 그 소원을 좇아 행한 사람들의 지복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 끓듯이 온전치 못한 우리 인생들을 보석같이 여기시고, 또한 정금같은 새예루살렘의 대문으로 여겨주시는 이는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구속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시고, 그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들을 보라!는 르우벤의 진정한 의미는, 진짜 그 아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3. 시므온(들으셨다)-참된 들으심은 하나님 안에서!
창세기29:33
1. 베냐민(보라 아들이라)은 참된 아들이 누구냐는 것을 질문하게 합니다. 야곱의 첫부인 레아를 통해서 낳은 시므온은 참된 들으심의 방법은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질문합니다. 먼저, 그의 출생의 내력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주목합시다. 첫아들을 낳고, 보라 아들이라!고 하여도 야곱이 사랑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부부관계는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들으셨다)고 하는 것은, 다시금 야곱에 대한 관심의 촉구라고 하겠습니다. 그저 육신적인 것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일종의 영적인 협박을 한 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33절)고 합니다. 인간적인 연민과 애련을 갖게 하지만, 이런 레아의 모습은 적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부르짖어야 하는데, 남편의 사랑을 위해서 부르짖었습니다. 응답이어도 참된 응답을 못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르우벤의 성품은 안정적이지 못하였다면, 시므온의 성품은 다혈질적이고 거칠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야심이 만만치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형 대신에 자기가 뭔가를 주도하려고 하는 성품이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둘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2. 가령 예를 들자면, 막내동생 디나가 세겜성읍의 왕자 세겜에게 욕을 당하였을 때(창34장), 형 르우벤은 가만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 세겜성읍을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은 시므온과 레위였고, 그중에서도 시므온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디나와는 레아를 같은 어머니로 두고 있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창34:31) 하였을 때, 야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조부나 부친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던 예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야곱이 당당하게 책망했어야 했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야곱의 자녀양육은 큰 문제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요셉이 채색옷을 입고는 꿈이야기를 하면서 형들이나 부모까지도 자기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 비슷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그를 미워하고 증오했던 형은 시므온이었습니다. 르우벤은 어떻든 살려보려고 하였지만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는 일에 앞장섰던 형이 시므온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나중에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선 이 형들 중에 가나안 집으로 다른 형들은 돌아가지만, 시므온은 감옥에 남겨 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한데, 유대인들의 전통이 강하게 전승되어온 탈굼역본에 의하면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3. 시므온의 후손들의 성격도 시므온과 유사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벌어진 유명한 사건들 중에 하나가 고스비사건입니다. 싯딤이란 곳에 머물러 있는 중 발람 선지자의 유혹을 받아서 가나안예배(바알브올숭배)에 이스라엘사람들 몇이 참석하게 되고(민25장),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압 여자 고스비를 데리고 진중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이 ‘시므리’이고, “시므온인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민25:14)라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 시므온족속의 범죄는, 레아가 그 이름을 짓는 맥락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여호와께서 들었다’ 하면서 그 이름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또한 시므온이 세겜주민들을 살해하면서 할례언약을 빙자하였던 것처럼, 이곳 싯딤(바을브올숭배장소)에서도 음란한 우상숭배에 참여한 것으로서 변질된 예배였습니다. 시므온지파의 죄가 그저 단순한 죄가 아니라, 더욱 깊은 죄였습니다. 예배를 가볍게 하고 경홀히 여기는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4. 이런 성향을 간파하였는지, 야곱은 죽을 때(창, 시므온을 향해서 축복아닌 축복을 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니라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나눠지고 흩어지는 모습입니다. 이름이 “들렸음”인데, 그의 수고와 노고가 전혀 들림이 안 된 모습입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해서 떠나는 각 지파의 인구수를 보면, 시므온 지파는 떠날 때는 군인들만 5만9천3백명이었는데(민2:13), 여행을 마칠 때쯤에는 2만2천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민26:14). 모세의 축복이 선포되는 신명기33장에는 시므온지파에 대한 언급조차 없습니다. 또한 각 지파가 가나안땅에 제비뽑기를 통해서라도 그 몫이 배정될 때에도 시므온지파에게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제비를 뽑기는 뽑는데, 유다지파의 기업 중에서 그 몫을 갖게 되는 방식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자기들 지파만의 토지가 분배되지 않은 것입니다. 유다지파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백명씩 집단을 이뤄서는 유다지파의 지경을 넘어서(세일)까지도 흩어지곤 하였습니다(대상4:42-43). 아사왕 때(대하15:9)와 요시야왕 때(대하34:6)의 기록을 보면, 나중에 북이스라엘지파에 흡수되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유다지파의 기업에서 흩어져 있어야 하는데, 북이스라엘의 10지파의 구석구석으로 흡수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도 결국 잘못된 예배를 따르고자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소망이 별로 없는 지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땅의 기업을 물려받는 일에 있어서는 흩어져 버려서 그 기업을 상실해 버린 지파였지만, 하늘의 기업은 물려받는 지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요한계시록7장을 보면, 14만4천명 중에서, 1만2천명이 바로 “시므온지파 중에서” 계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7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6.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대제사장의 흉패에 보석같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기도에 의해서 지킴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단지파의 경우에도 흉패에 새져져 있었는데, 14만4천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면(그 이유는 나중에 살펴볼 것입니다!), 이것 외의 다른 이유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시므온지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므온의 길을 갔는지는 몰라도, 그 안에 소수의 사람들 중에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또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숫자를 1만2천명으로 헤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아사왕때나 요시야왕때에 남유다왕국, 곧 그들이 원래 있어야 할 그곳으로 되돌아오거나 개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사사기1장3절을 보면, 유다지파와 함께 가장 먼저 정복전쟁에 앞장섰던 지파가 시므온지파였습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진정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참된 예배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부르짖고 참으로 응답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땅한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면서, 주의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태어나서 8일만에 정결례를 행하게 될 때, 예루살렘에 있었던 노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시므온과 안나인데, 안나의 경우 아셀지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시므온은 지파이름이 안 나옵니다. 그 이름으로 지파이름을 대신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몬 베드로의 이름, 시몬이 바로 시므온의 헬라어 형태입니다. 동일한 이름이란 뜻입니다. 바울이나 사울이나 같은 이름인 것과 같습니다. 사실, 시므온지파 중에서 유딧같은 가경상의 인물도 유명하지만, 저는 시몬 베드로가 시므온지파를 대표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버려진 지파였지만,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서 주님의 교회와 나라에 기초석이 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흩어진 자들 가운데서도 주님이 불러 모으신 자들로서 말입니다.
4. 레위(연합)-참된 연합의 원리
창세기29:34
1. 레위는 야곱의 첫 번째 부인 레아의 세 번째 아들입니다. 레위는 ‘연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뜻의 이름을 붙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분명히 나옵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합’이 이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네 번째인 유다를 낳기까지는 말입니다. 유다는 ‘찬양’이라는 뜻인데, 나중 12지파중에서 메시야가 출생하는 지파가 된다는 면에서, 유다를 거쳐서야 레위가 진정한 연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연합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실, 레위와 레위지파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바로 이 참된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대제사장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연합의 원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2. 먼저, 지난 번에 살펴보았던 야곱의 저주, 둘째 시므온과 함께 세겜성읍을 살해하는 살인극에 동참하였다가 받은 저주를 살펴봅시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7). 나눠지고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래서 유다지파 가운데서 나눠지고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유다지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시므온을 언급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눠지고 흩어지는 측면에서는 레위지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나눠지고 흩어지는 것은, 저주가 아니고, 오히려 축복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눠지는 그런 의미로서의 나눠짐이고 흩어짐입니다. 여섯 개의 도피성과 48개성읍을 배당받습니다(수20-21장). 모세는 이렇게 상당히 길게 예언합니다: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신33:8~11절). 그 양으로 치자면 유다지파에 대하여보다 더 많고, 요셉지파에 대한 축복과 버금갑니다. 그 내용으로 보자면, 우림과 둠밈, 부모자녀형제를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과 더불어 세속의 일들보다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일, 곧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데 헌신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런 지파를 향하여 재산이 풍족하고 대적자들을 대적해 달라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전환,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3. 어떤 이들은 모세와 아론이 레위지파였기 때문에, 이것은 특혜였었다고 합니다. 편파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서라도 충성스러웠던 모세에 대한 보상이었다고도 합니다. 역사적인 사례를 든다면, 시내산정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금송아지숭배에 빠져들며 방자히 행하였을 때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는 모세의 말(출32:26)에 레위지파가 다 모여 우상숭배자들 3천여명을 죽인 신실함이나, 싯딤에서 바알브올의 우상숭배에 빠진 시므리와 고스비를 배를 꿰뚫어서 죽였던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헌신(민25:8)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 일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모세의 말 속에서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듯이, 그들은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신33:8)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투었던 자들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다툰 자들, 하나님과 시비를 걸고 싸웠던 자들입니다. 맛사의 경우(출17:1~7, 므리바라고도 함)에는 반석을 한 번 칩니다. 므리바의 경우(민20:1~13)에는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못하고 혈기 때문에, 모세 자신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이 두 사건을 두고 시95편8절에서는,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고 하는데, 신약성경 히브리서3장15절에서도 인용하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다툰 지파였던 것입니다. 이런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민12:1-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가 르우벤자손과 더불어서 당을 짓고는 모세를 거스렀습니다(민16:2). 사사시대에는 더욱 타락해서 레위지파 사람으로 인하여 지파간 전쟁까지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다윗을 대적하여 압살롬을 편들다가 자기꾀가 안먹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살을 하고 맙니다(삼17:23). 말라기서 전체는 이 구약의 제사장지파인 레위지파와 하나님께서 다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야곱)을 사랑하시고 에돔(에서)는 미워하셨는데, 왜 너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4. 신약에서의 결정적인 다툼은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을 대적하여 바로 레위지파의 제일 마지막 끝에 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다투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시대에 아비아달의 길을 거부하고 사독과 더불어서 다윗과 솔로몬을 끝까지 따랐던 사독의 후예들이지만, 시대를 따라서 변질되어버려 사두개인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다투면서 타락하였던 것입니다. 그 제일 마지막 대제사장이었던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을 심판하는 중, 가야바는 자신의 옷을 찢으면서 신성모독하였다고 예수님을 사형판결을 내리고, 세상법정으로 끌고 갔던 것입니다.
5.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싸움과 다툼 가운데서 매번 치심을 당하였던 반석은 그렇게 내침을 당하시는 중에, 레위지파의 모든 불의와 죄를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레위지파만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지만, 레위지파가 그것을 대표하였습니다. 제사장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레위지파를 대신하여, 모든 백성들, 모든 자녀들을 제사장으로 삼기 위해서, 그리하여 제사장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출19:6)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전 작정과 예정, 그 기뻐하시는 뜻에 그 이유가 있고 원인이 이것에 있는 것입니다. 레위에게, 혹은 모세에게, 아론에게, 이 지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서 싸우기만 하고, 놀라운 특권을 주었는데도 그 특권을 악용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싸울 빌미만 찾고 있던 자들이 레위지파였습니다.
6.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순종했던 구약의 인물들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희미하게 나마 자기 지파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상하신 계획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믿었습니다. 소망하였습니다. 모세는 두말할 것도 없고, 비느하스, 에스겔선지자 같은 이, 사독같은 이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바나바이고 그 사촌인 마가 요한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우리 자신들이 레위지파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레위지파요,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이들은 이제 하나님과 다투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다투던 그 죄까지도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1만2천명의 성도가 되어서(계7:7),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며(계7:17; 14:4; ), 어린 양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계22:5).
5. 유다(1)-섬기는 지도자가 되라!
창세기29장36절
1. 유다는 레아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야곱에게 사랑을 받는 라헬에게는 아들이 없는데, 레아는 자녀를 생산을 잘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29장31절에 분명히 강조되는 대로,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적게 받으면, 하나님께는 사랑을 더 많이 받습니다. 그것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다의 출생입니다. 유다의 출생과 그의 삶과 그의 후손인 메시야의 출생과 그 메시야를 통해서 이뤄진 인류구속의 놀라운 일들은, 바로 사람에게 사랑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는 것의 절정에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서만 아니고,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음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교훈입니다.
2.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레아가 네 번째 아들을 낳고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6절)”하면서, “찬송”(유다)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제는”입니다. 곧,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면서 자녀들 세명까지 낳았는데, 여전히 그 남편 야곱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지 않고 있는 중에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의 사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유다”의 출생과 그의 삶과 그의 후손인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어떠하여야 할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메시야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것입니다. 바로 유다와 유다지파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이 관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 메시야의 본질이 “섬기는 지도자”, 곧 종으로서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3. 그런 면에서, 유다에 대한 첫기록은 인상적입니다. 야곱의 아들 중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순간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라고 한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창37:27). 그렇게 해서 요셉은 종으로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되고, 바로 그 직후에 기록된 것이 창세기38장의 유다가 다말을 통해서 쌍둥이 아들 곧 세라와 베레스를 낳게 되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셉이 팔려가서 나중에 형들과 대면하기까지의 기간은, 10년간의 보디발의 집생활, 3년정도의 감옥생활, 그리고 총리가 된 뒤 7년의 풍년과 2년의 흉년을 지내게 되니, 모두 22년간인데, 다른 형제들의 일들이 굉장히 많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동안 베냐민의 경우에는 자녀들을 10명이나 낳습니다(창46:21). 다른 형제들에게도 기억될 만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은 일언반구도 없고, 단 하나, 유다의 실족이랄까,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두 자녀를 낳는 사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다의 이 자녀생산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을 통해서, 요셉이 팔려간 사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속의 역사 전체가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 곧 인간의 생각과 계획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따라서 진행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자녀생산과정을 통해서 강렬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사실, 그의 후손들 가운데서라도, 가나안 사람 수아를 통해서 낳은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 중에서도 두 형은 죽고 남은 셀라조차도 유다의 정통 장자가 되지 낳고, 오히려 이상하게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낳은 두 형제 중에서도 막내가 오히려 적자가 되는 변화무쌍함 자체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4. 유다는 다른 형제들에게 비해서 아버지 요셉에게 신뢰를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장남 르우벤이, 시므온이 애굽에 잡혀 있는 중에 집으로 되돌아와서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시므온을 데려오지 못할 것이라면서, 르우벤 자신의 두 자녀까지를 죽이라는 말에도 야곱은 전혀 응하지 않았습니다(창42:37-38). 하지만, (양식이 모두 떨어진 가운데서이기도 하지만) 유다가 간곡히 간청하면서, 자신을 담보로 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면서 다른 선물들도 바리바리 준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허락을 합니다. 유다의 말을 야곱이 더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총리가 된 요셉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형들이 어떻게 하나 관망을 하고 있는 중에, 유다가 나서서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자신을 베냐민을 대신해서 볼모로 잡아두라고 부탁하는 말(창44장, 특별히 33~34절)에 요셉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애굽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뒤에, 눈물을 터뜨리면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신이 요셉인 것을 밝히는 것도, 유다의 역할을 잘 보여줍니다. 곧 대속하실 메시야의 모형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종이 되고 희생물이 됨으로서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 이러한 유다에 대해서 나중에 야곱이 축복할 때에, 이렇게 합니다(창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이것은,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유다의 이름을 갖고 말놀이(“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를 하는 것만 아니고, 그가 곧 메시야를 산출하는 지파가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이 속한 자”라는 뜻인데, 문맥을 보면, 그것은 “규” 혹은 “통치자의 지팡이”를 말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백성들은 혼동해서 “실로”라는 지명으로 착각을 하고, 가나안땅을 정복하였을 때, 그곳에 성소를 두고 예배의 처소를 삼았습니다만(수18:1),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의 처소로는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고 있었더랬습니다(신12:11). 통치권을 가진 그 분, 곧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계속 통치권을 가진 자가 유다지파를 통해서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유다가 왕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왕권의 진정함은 “실로”, 곧 참된 왕권을 보여준 그분을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반복해서, “나귀”와 “포도나무”가 이 예언에 등장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한편으로는 유다지파가 받게 될 축복의 상태를 말하면서, 또한 피의 희생을 통해서 얻게 될 것을 다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6. 유다지파에 대해서 그 양이 많아서 두 번으로 나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의 지도권은 희생과 섬김을 통해서 오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이 지파를 통해서 오시게 될 메시야의 메시야되심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교훈이 이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그 종으로서 왕이신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도 또한 그와 더불어 세상을 통치할 왕으로서(벧후1:9)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요13:1~20,세족). 이것이 유다지파가 우리들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6. 유다(2) 그리스도지파 안의 적그리스도들
창49:8-12
1. 지난 주 수요일에는 유다지파의 종으로서의 리더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유다지파 안에 있는 반유다의 세력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들에게 주는 경고와 위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상고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유다를 통해서 지도자가 나올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12자녀들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유다에 대해서는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고 합니다. 그리고 나귀와 포도나무를 언급하는데, 12절에서는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포도주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중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두면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포도주로 누리게 되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메시야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하나는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입니다. 슬픔을 통해서 기쁨에 이르게 되는 메시야의 사역의 스타일을 암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에 이르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슬픔도 없이, 곧 십자가가 없이 영광만을 생각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길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점에 집중하겠습니다. 유다지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예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 먼저, 훌륭한 지도자들의 예를 그 지파의 역사 속에서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출애굽을 해서 모세를 지근에서 섬기며 도와주었던 사람으로 훌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땅을 향한 여정 중에 가장 첫 번째 치루게 되는 전쟁(창17:8-16, 여호와 닛시)인 아말렉족속과의 전쟁을 치룰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장군이 승리하고 내리면 패배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론과 더불어서 모세의 손을 함께 들어주어서 결국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이 훌의 손자가 브살렐인데(출31:1~5), 성막을 세우는 중,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금과 은과 놋에 관련된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더욱 유명한 인물은, 두 정탐꾼 중의 한 명인, 갈렙입니다(민13:6).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에게 부탁하기를,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기도 하였습니다. 곧 헤브론지역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아브라함부부, 이삭부부, 야곱부부의 묘지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이지역이 차지하는 영적 의미를 감안하면서 요청하였을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활약했던 유다지파의 인물로는,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하였고(수15:13~19), 사사시대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을 들 수 있겠습니다(삿3:9-11). 사사들 중에는 베들레헴출신으로서, 아들을 30명, 딸 30명을 두고는 7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르셨던 입산이 있습니다(삿12:8-10). 그리고 우리는 다윗으로 이어지면서, 왕국의 역사가 전개되고, 그 왕국은 유다지파를 통해서 나타나게될 메시야왕국의 그림자, 혹은 예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다지파에는 항상 이렇게 훌륭하고 멋진 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메시야)의 길을 닦아가는 중에, 그 길을 훼방하고 막아서고 부패시키고 오염시켰던 자들이 바로 유다지파 속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제일 첫 번째 상고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직접 죽이셨던 자들이 유다의 후손이었습니다. 창세기37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바로 뒤에 유다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유다가 아들 세 명을 낳게 되는데 결국 다말을 통해서 세라와 베레스를 낳게 된다는 그 핵심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삽입된 이야기입니다만, 그 이야기 자체 내에서도 교훈이 많습니다. 특별히 가나안여인 수아를 통해서 세 아들을 유다가 낳는데, 첫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이 죽게 되는데,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고 합니다(창38:7,9). 메시야지파의 선조인 유다의 첫아들, 둘째 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서 하나님께 직접 죽임을 당하게 되는 비운이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합니다. 모세의 첫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도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는데(레10:1~7), 이것도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여준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4. 유다지파를 통해서 준동하는 적그리스도의 활동들은, 특별히 다윗왕국이 형성된 이후에, 그 왕권을 이어가는 왕들의 역사를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모습들을 못보여주는 왕들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모두 19명의 왕들이 이어지는데, 다윗과 솔로몬, 이후 아사왕, 여호사밧왕, 히스기야왕, 요시야왕을 제외하고는 악한 왕들이라고 분류될 수 있고, 선한 왕으로 분류되는 왕들조차도 거의 모두 다 약점들을 노출시킨 것들이 확연하게 대조가 됩니다. 이런 왕들의 후예로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는 예상되지 않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의 왕조는, 인간이 세운 왕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왕조였었고, 기어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던 역사로 사용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5.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살다가 되돌아온 지파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다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역사를 보게 되면, 특별히 신약시대에 오면, “유대인”이란 호칭이 대두됩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전체를 대표하는 식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쥬”(Jew)라는 호칭으로 하나의 인종으로 여겨지고 “이스라엘”은 국가이름으로 사용되어서 중첩이 되는 셈입니다.
6.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의 또 다른 후손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메시야사역을 돕는 것처럼 보이다가 결국은 배신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에돔(이두매)족속인 헤롯왕이었고, 레위지파에 속했던 사두개파사람들이 주도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이 협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체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가룟인 유다였습니다. “가룟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유다의 고향을 말하는데,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면 아주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지역 출신입니다. 그런데, 가룟, 곧 그리옷이 남쪽 유다 곧 헤브론지역에 있었던 곳임을 감안하면, 지리적으로도 차이가 나고, 그 지역이 학자출신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알려진 점들을 감안하면, 유다지파였다는 점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도회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많이 보여주었던 자입니다. 이 점은, 마태가 세리출신이어서 돈계산이 밝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자공동체의 재정관리는 유다가 맡고 있었던 점도 감안하면, 수리와 계산이 밝았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제자들과는 특이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했었을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고 기도하셔서 뽑으셨지만, 유다가 자원하는 심령도 없었던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곧 자신이 생각하는 면에서,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해방전쟁을 주도하고, 이 인간적 정치적 해방의 지도자로서 예수를 생각했었다고 하겠습니다. 곧 자기 중심의 하나님 나라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의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중심이 되는 모든 계획과 활동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유혹과 미혹에 넘어간 일입니다.
7.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찌니라”(마16:24). 이것이 섬김의 리더쉽, 종됨의 지도자의 길을 보여주는 유다와 유다지파가 보여주는 핵심 교훈인 것입니다.
7. 단(심판)-심판받은 시기심
창세기29장1~6절
1. 지금까지 레아의 네 자녀들의 출산과 그 역사에 대해서 상고하였습니다. 이제 라헬의 자녀를 살펴보게 될 것인데, 라헬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입니다. 이 출생은 아주 특별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척 싫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내를 두 명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나 한 아내의 시녀를 통해서 자녀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멉니다. 결국 이 자녀 곧 “단”은 “심판”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요한계시록의 14만4천이라는 구원받은 자들의 총수에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버렸습니다. 새예루살렘의 12대문에 새겨진 12지파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참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첫째로 배워야 할 것은, 구원이란 혈통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도요한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한 것같이, 구원은, 혈통으로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이 점을 고려하면서, 그 출생의 과정을 살펴봅시다. 그 출생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자면, 시기심입니다. 1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였습니다. 이 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단의 출생의 동기가 “시기심”이었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면서 그 이름을 “심판”이란 뜻의 “단”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불신앙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언니를 시기하여 시녀 빌하를 빌려서 아들을 가지게 되는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도 악한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라헬이라는 한 여인의 구속사적 의미를 평가할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3. 라헬은 야곱에게 사랑받았으나, 야곱과 함께 매장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큰 교훈을 우리들에게 제공해 줍니다. 특별히 그가 “베노니”(슬픔의 아들)를 낳으면서, 벧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에브랏길에서 죽습니다. 아이를 더하여 갖기 원해서 “요셉”이라고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렇게나 원하였던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는 죽고 맙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것을 성경이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히 이런 역설적인 모습을 성경은, “라헬의 울음”이란 이미지로 전승시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의 시대에 베냐민지파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라마”라는 곳은, 바벨론으로 잡혀갈 포로들을 집결시키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까지 예레미야도 잡혀왔다가 풀려납니다(롐4:1). 그런데 그곳에 있게 될 큰 슬픔의 이별을 예언하면서 예레미야는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롐31:15)고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가까운 바벨론포로에 대한 예언일 뿐만 아니라, 먼 미래, 곧 메시야의 날이 도래하였음에도 그 메시야를 통해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시대를 향한 예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베들레헴의 모친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마2:17~18). 예레미야선지자의 말(31:15)를 인용하면서,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함이 이루어졌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그저 자녀들이 학살당하는 것이 너무 비참해서 위로를 받기를 거절한다는 뜻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요구, 이기적인 욕심의 성취만을 기대하기 때문에, 참된 영적 위로는 거절하고 있는 불신앙의 모습이, 라헬에게서와 같이, 예레미야시대의 라마의 여인에서와 같이, 베들레헴의 여인들에게서도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4. 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가 라헬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라헬의 불신앙을 알아야, 그리고 그 불신앙의 핵심인 시기심을 알아야, 그의 육신의 첫아들과 그 지파의 역사의 본질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5. 사실, 단지파의 역사는 참으로 미묘합니다. 창세기49장의 야곱의 예언을 보면, 단에 대해서는,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6-18절)고 아주 이상야릇한 예언합니다. 모세는 신명기33장22절에서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고 합니다. 나중 단이 제비뽑기를 통해서 얻게 되는 기업의 몫은 요단강 동쪽의 바산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요단강 서쪽 지중해 해변가의 해양민족인 블레셋과 유다지파 사이에 있다가(이곳에서 삼손이 활동함), 그곳이 좁아서 북쪽지역(갈릴리윗지방)으로 올라가서 레센이란 곳을 차지하고는 단이라고 이름 붙이는데(수19:47), 나중, 북이스라엘의 최북단을 나타내는 지명이 됩니다. 곧 우상을 섬기는 지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삿18:30). 라헬이 밧단 아람에서 남편을 따라 가나안지역으로 올 때, 오빠 라반이 쫓아와서 자기 가족신상을 왜 훔쳐가느냐고 하였을 때, 라헬이 낙타에 올라앉아 엉덩이에 깔고 있으면서, 지금 월경중이라고 변명하면서, 결국 그 우상을 가지고 왔었는데, 그런 모습을 단지파가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결정적인 두 번째 교훈은 시기심에 대한 경계인 것입니다.
5. 라헬은 레아를 시기하였습니다. 이런 시기심은 사탄의 하나님에 대한 시기심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 참 많았습니다. 야곱에게 사랑받았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사탄도 천사장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었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기하였습니다. 단도 재주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성막을 짓는데, 유다지파 브사렐과 더불어서 단지파의 오홀리압을 세워서 성막을 세울 때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셔서 성막의 온갖 기구들을 만들 수 있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있게 해주셨습니다(출31:6). 이런 재주를 물려받은 단지파의 한 여인은 두로사람과 결혼하였다가 나중 솔로몬의 성전과 왕궁건축에 불려온 히람을 낳습니다(대하2장11-14), 흥미로운 것은, 왕상7장13-14절에서는 납달리지파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 낳게 되는 둘째 아들로서 ‘경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았는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재주로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하여서, 저주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6. 이런 모습은 삼손의 모습에서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도 많은 축복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과신했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하였고, 자중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만 스스로의 자중에 과신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여인 들릴라에게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비밀을 누설해 버리고 맙니다. 한 백성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그만 몰락해 버리고 마는 비참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두 눈알이 빠지고 우상신전에 묶여서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백성을 심판하던 위치에서, 길의 뱀노릇, 첩경의 독사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고통을 주는 역할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정신의 적그리스도가 바로 단지파를 통해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합니다.
7.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절망 속에서, 마지막은, 살았을 때보다 더 많은 원수들을 죽이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원수들을 음부에 몰아넣으신 우리 주님의 장엄한 죽음을 예표합니다. 그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시기심의 죄악들이 용서를 받고, 이제는 참으로 겸손하게 주를 섬기는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8. 납달리(경쟁)-연약함 중에 강한 역사
30장7-8절, 49장21절
1. 오늘은 라헬이 빌하를 통해서 나은 단의 동생 납달리와 그 지파를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그를 낳았던 여종 빌하에 대해서 상고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레아와 라헬에 대해서는 집중하지만, 그 여종들인 빌하와 실바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빌하와 실바가 받았을 고통은 가히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레아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점에 대해서 그 슬픔과 애환을 고려했지만, 그 레아의 아픔보다도 더 큰 아픔 가운데 살았을 여인들이 바로 빌하와 실바입니다. 여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식 아내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자신들이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단이나 납달리, 그리고 실바를 통해서 낳은 자녀들, 갓(복되도다), 아셀(기쁜 자)의 이름도 실바가 붙이지를 않고, 레아가 붙이고 있습니다.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주었다고는 하더라도, 최말종으로 여겼다는 점은, 야곱이 나중 형 에서를 만나게 될 때, 총알받이같이 먼저 앞세우는 이들이 바로 이들 여종들과 이들에 의해서 낳아진 자녀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여종들의 아이들도 야곱이 자신의 아들로서 간주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족장의 후손으로 등록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참 서러움을 많이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애정이나 사랑도 없이, 꼭 씨받이라고, 애 낳아주는 기계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2. 이 중에 단은 나중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구원받은 자들의 계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게 되면, 빌하를 통해서 낳게 되는 이 두 번째 아들의 경우는, 참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곧, 메시야가 오셔서 복음의 빛을 제일 먼저 비춰주는 지역을 그 지파의 몫으로 분배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이사야9장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옜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과 납달리 땅(여종 빌하의 둘째 아들)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호수아 당시 정복하여 분배되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한 부분이었는데, 이방인에게 빼앗겨 버려서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던 곳인데, 이곳이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된...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리실 메시야가 그곳에서 자라셨고 말씀사역을 시작하셔서,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왜 메시야가 이 지역을 택하셔서 자라셨고 활동을 시작하셨는가,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하심으로써 복음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을 받게 되는 스타일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품과 연관되어지는 것을 고려할 수 있게 됩니다(베드로와 바울). 그것이 납달리의 성품이 야곱과 모세의 예언들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창49:21),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신33:23)입니다.
4. 먼저, “놓인 암사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풀려난 암사슴”이란 뜻입니다. 원래 암사슴은 갇혀 지내지를 않고 풀려난 채로 자랍니다. 특별히 앙징맞은 발굽을 활용해서 산악지대의 높은 곳을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선지자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암)사슴(아얄라: 여성명사)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합니다. “나의 높은 곳”은 나의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선지자의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 모든 크리스챤들이 기대하고 이루고 싶어 하는 그것일 것입니다. 둘째,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아름다운 소리(소식)”을 복음과 연관시켜 말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이사야40절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고 합니다. 납달리가 이런 역할을 잘 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셋째,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하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갈릴리의 서편과 남쪽지역을 차지하게 될 것을 말하는데, 앞으로 메시야가 이곳에서 활동하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면서 예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과 연관해서 복이 넘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 납달리는 뭔가 소심한 것 같습니다. “암사슴”으로 묘사된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파에서 유명한 단 한 사람인 바락도 무척 소심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사사시대에 가나안왕 야빈의 압제하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드보라라는 여인을 사사로 세우셨는데, 군사를 일으켜 야빈왕의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물리치고자 하였을 때, 납달리 게데스에 있었던 바락을 불러왔을 때에도 소심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사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신도 전투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남자인 바락인데도, “암사슴”같은 모습입니다. 결국 시스라장군도 바락의 손에 죽지를 않고 야엘이라는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승리를 이뤘던 것(삿5장의 노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락이 드보라에게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삿4:8)는 말을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의 모양을 나타낸다고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암사슴”과 같은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는 그 하나님과 함께 싶다는 담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대열에, “드보라”는 언급되지 않지만, 오히려 “바락”은, 인용되고 있습니다(히11:32). 연약한 중에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입니다. 연약한 질그릇에 영광의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불론지파와 더불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삿5:18)여 얻어내는 영광의 역사가 이 연약함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6. 요즘 우리가 하나님나라QT로 묵상하는 고린도후서4장7절~11절이 이 납달리적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찾아서 함께 읽어봅시다). 예수의 생명이 환난 중에서도 그 몸에 넘쳐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사람이지만,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말하기를(12절),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합니다.
7. 납달리가 이런 은혜를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은, 납달리의 태생이나 그 지파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무시되었던 여종 빌하의 후손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은혜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지파를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메시야가 하필이면 이들이 지역에 오셔서 말씀의 빛을 비추신 것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은혜의 복음을 받아서, 우리도 또한 연약한 중에, “암사슴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여야 하겠습니다. 지옥불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계14:4) 12,000명의 납달리 지파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사람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9. 갓(행운)-진짜 복으로 바꾸는 역전의 신앙과 율법수호의 사명
창30:9-11
1. 자녀를 낳지 못하는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빌려서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이것을 보고는 레아도 자기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내어주어서 자녀를 생산하게 되는데, 갓과 아셀입니다. 먼저 갓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 11절을 보면,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갓’이란, 한글로 ‘복되도다’고 번역되기 보다는, ‘횡재야!’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복되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는 두 개가 있는데, ‘바룩’과 ‘아쉐르’인데, 일반적으로 이 ‘갓’이란 단어는 좋은 의미로서 사용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의 아들 ‘갓’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지 않고 유일하게 사용되는 곳이 이사야65장11절인데,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운수의 신)에게 상을 베풀며 므니(운명의 신)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라는 구절입니다. 운수의 신, 행운의 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곳 창세기30장에서 자녀를 생산하였을때에 ‘갓’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횡재야! 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레아가 ‘오직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고 하였던 그 신앙이 오히려 타락하고 변질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역전의 상태로 대전환을 이루는 지파가 갓지파입니다. 우리가 이 지파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역전의 신앙입니다. 엉터리 횡재신앙에서 참된 축복의 신앙으로의 대역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야곱의 자녀로서의 갓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야곱의 마지막 예언에서는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창49:19)고 하니, 역전의 용사와도 같은 인상을 갖게 합니다. 공격을 받았을 때 그것을 되받아 치면서 오히려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갓지파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신33:20-21):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갓이란 이름은 “횡재”, 혹은 “운수”인데, 그것들조차도 “광대하게 하시는 이”, 곧 참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우연이라는 것, 운명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역사하시는 역사의 한 형태입니다. 갓지파가 “암사자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어서” 반격하여, 대전환이 일어나는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업을 택하였다는 것”은 요단강 동편에 르우벤지파, 므낫세반지파와 함께 기업을 먼저 배정받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와 연관해서, 여호수아서에 자세히 나옵니다. 가나안정복전쟁이 모두 끝나게 될 때까지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않겠노라 하였고(수22:1~4), 또한 전쟁 이후에도 자신들의 여호와신앙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엣”(증거)라는 제단(수22:34)을 쌓기도 한 것이 바로 이 갓지파인 것입니다.
4. 갓지파는 이 증거에 신실했습니다. 역대상5장18절~20절에 보면,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와 함께 갓지파의 용사들을 용맹한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데, 20절에서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특별히 다윗왕 시대에는(대상12:8),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같다”고 하였고, 14-15절에서는, “이 갓 자손이 군대지휘관이 되어 그 작은 자는 백부장이요 그 큰 자는 천부장이더니 정월에 요단 강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에 이 무리가 강물을 건너서 골짜기에 있는 모든 장에게 동서로 도망하게 하였더라”고 합니다. 다윗의 건국역사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5.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용맹함은 쉬 쇠퇴해 버리게 되고, 자주 아람국에 침략을 당하기도 하고(아합왕 전후해서 벌어진 200년 동안의 길르앗라못쟁탈전), 결국 예레미야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무자하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에 거함은 어찜이뇨?”(렘49:1)고 탄식할 정도로, 괴롭힘을 먼저 당하기도 하였던 곳이 갓지파와 르우벤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의 요단강 동쪽지역이었습니다. 공격을 당하였을 때, 반격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모세의 예언에서 분명히 강조되어 있는 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분깃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시금 돌아가서 확인하기를 바랍니다(신33:21):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6. 우리는 이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주는 것이 이 대목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입법자의 분깃”을 받았다는 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의 수호자로서의 분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용감해야 했고, 공격을 받아도 되받아치고 대반전을 일으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입니다. 자신들의 분깃을 지키는 역할은, 바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하였던 갓지파의 세 인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사 입다인데(삿11:1~12:7), 그는 가나안정복시대의 역사지식이 분명하여 율법의 정신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고, 맹세에 철저하여, 딸을 맹세한 대로 처녀로 평생 살게 하는 것도, 율법에 철저함을 보여줌, ‘십볼렛/쉽볼렛’발음시험으로 에브라임지파를 구별해 내어 도륙한 것도 율법에 철저함을 보여주는 예시). 둘째는, 바르실래인데(삼하17:27~29),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이 쫓길 때,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통하여 이뤄질 율법이 구현되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율법수호정신이 분명했던 것은, 바로 엘리야입니다(왕상17~왕하2장). 선지자를 대표하여 나중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에 변화산상에서 만났던 두 명 중의 한 명이 바로 엘리야였는데, 모세의 율법의 정신을 수호하는 역할을 엘리사가 잘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율법 그 자체였었고,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을,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을 통하여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7.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입니다. 갓지파가 흥왕하였던 것은 바로 여호와의 공도와 율법을 실천하고 실행하였을 때입니다. 그렇지 못하였을 때는, 바로 멸망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공격을 당하더라도 반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가능했습니까? 바로 율법을 따라서 살고, 율법을 수호하는데 진력하였을 때에 그 역할이 가능했습니다. 자신들의 꾀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사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반격이 가능한 것은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반격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갓지파처럼, 하나님의 율법인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묵상하고 또한 그 뜻을 좇아 순종할 때, 어떤 세력도 반격하여 물리치고 승리의 대전환을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10. 아셀(복)-진정한 복의 기쁨을 누리자
창30:12-13
1. 레아가 동생 라헬이 자신의 여종 빌하를 통해서 두 아이를 갖게 되자, 레아도 자신의 여종 실바를 통해서 첫 아이를 가졌는데, 횡재야! 라는 뜻의 “갓”이었습니다. 우연의 신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한글성경의 번역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도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성경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복(혹은 축복)을 말할 때, 바룩이라는 단어와 아세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1편1절의 “복 있는 사람은...”할 때의 복이 “아세라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와 연관된 것이 바로 레아가 실바를 통해서 낳은 둘째 아들의 이름으로 붙인 “아셀”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 “복되다”고 해야 하는데, 우리의 한글성경에서는 “기쁘다”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제가 “기쁨”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렇게 번역된 한글성경에 대해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하여튼, “아셀”이나 아셀지파에 대해서 기록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시에도(삼하24장) 사무엘하24장9절에는 130만명으로 계산하였다고 나옵니다만, 역대상27장을 보면, 인구조사를 끝내기도 전에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셀지파의 지도자만은 그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지파는 참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장군도, 정치가도, 예술인도, 사사도, 선지자도 없습니다. 구약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인데, 히스기야시대에 온 이스라엘지파에 보발군을 보내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자 하였는데, 코방귀를 끼고 대부분의 지파들이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는데, 아셀지파, 므낫세지파, 스불론지파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정결례를 위하여 성전에 들렀을 때, 시므온과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였던 84세의 안나가 바로 아셀지파였는데, 흥미롭게도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눅2:36-37).
3. 아셀지파를 생각하면, 참 소박한 지파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기업의 몫도, 단지파처럼 북쪽이면서도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있지 않고, 나중에 두로와 같은 이방인들과 섞여 살게 되는 갈멜산 북쪽의 해안지대에 거주합니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별로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는 이 지파에 대한 야곱과 모세의 예언은 어떤 것들일까요? 야곱이 임종시 아셀에 대하여 한 축복은,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食物)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창49:20)는 것이었습니다. 왕을 잘 섬길 수 있는 품질좋은 진상품들이 산출되는 지역을 기업으로 갖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지역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모세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그의 마지막 축복을 선포했을 때, “아셀은 다자(多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 있으리로다”(신 33:24-25)라고 말했다. 여기서 “다자하고”, “그 발이 기름에 잠긴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하겠지만, “형제에게 기쁨이 되고”,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라”는 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원입니다. 그런 역할을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자한 복은, 나중에 민수기를 보면, 출발할 때는(민1장), 4만천오백명이었는데, 도착할 때쯤에는(민26장), 5만삼천사백명으로 늘어났다는 점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긴다”는 것은, 해안지역의 풍부한 물산으로 역시 이뤄졌습니다. 그렇다면, “형제에게 기쁨이 되고,”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4. 그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게 전에, 이 아셀지파의 복의 특징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평범한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에 대해서 좀더 상고해 봅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성경에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복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셀”과 함께 “바룩/바락”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단어들로 나타내는 복들이 어떤 것들이며 그 복들의 관계는 어떤 것들일까요? 먼저, 바락은 수직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주시는 물질적이거나 영적인 복입니다. 아셀은, 수평적입니다. 바락이 우리들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상태라고 할까요? 너무 지나친 단순화인지는 몰라도, 간단히 기억하기 좋도록 이렇게만 강조해 둡니다. 이런 기회에 우리나라에서는 복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동양에서는 성경의 다윗시대쯤에 해당되는 주나라의 글을 5백년뒤쯤에 공자가 수집해 둔 서경의 주서, 홍범편에 보면, “일왈수, 이왈부, 삼왈강녕, 사왈유호덕, 오왈고종명”이라고 해서, 오복을 강조해 왔습니다. 네 번째 것을 빼면, 모두 하늘이 내린 바락의 복입니다. 그런데, 유호덕이라는 것, 곧 덕을 좋아하는 성품의 문제는, 아쉘의 복입니다. 산상보훈에서 팔복을 말할 때의 복이 아쉘의 복, 곧 마카리오스라고 표명되는 복입니다.
5. 말이 나온 김에 동양인들, 특별히 중국인들이 추구해 왔던 복이, 아셀지파가 누렸던 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에 한번 설교에서 언급하였던 임어당이란 분이 ‘생활의 발견’이란 책에서,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간신히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어 인류를 위해서 대단한 공헌은 없었지만 사회에서 다소의 일은 하였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이름은 알려져 있지만 그다지 유명한 인물은 아니라는 그런 정도의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지향했던 것입니다. 생활 걱정이 우선 없고, 그렇다고 전혀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닌 정도, 이름이 알려졌다면 알려졌고 알려지지 않았다고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 약간의 재정 능력을 가진 조촐한 환경의 사람들“을 바랬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전형으로, 도연명같은 시인의 삶을 대표적으로 제시합니다. 도연명은 AD 4세기쯤의 사람으로서, 40세까지 공무원생활을 하다가, 먹을 것 위하여 부정부패에 짝하여 산다는 것이 구차하여 모든 것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귀거래사“라는 노래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돌아가자!(歸去來兮)/전원이 장차 황폐하려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田園將蕪故不歸)/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나(旣自以心爲形役)/어찌 상심하며 홀로 슬퍼하기만 하겠는가(奚惆悵而獨悲)/이미 지나간 날은 어쩔 수 없으나(悟已往之不諫)/지금부터는 바른길을 갈 수 있지 않느냐(知來者之可追)/실로 길을 잃었으나 다행히 멀리 가지 않았으니(實迷途其未遠)/지금이 옳고 어제가 잘못이었구나(覺今是而昨非).
물론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인으로서 지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사도가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이 더욱 도전적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 있고 징계를 받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한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고후6:7-10절).
6. 우리가 자연과 전원을 벗삼아 안빈낙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삶을 추구한 것 같은 아셀지파는, 참 복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없의 땅에 들어가서는, 그만 안빈낙도의 삶을 살다가, 두로와 시돈지역을 차지하지 못하고 나중엔 그곳에서 태어난 이사벨과 아달랴에 의해서 온갖 고통을 당합니다. 무엇을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아셀, 곧 형제의 기쁨, 이스라엘의 빗장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역(수로보니게)에 방문하셔서 그 지역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역할이 여기에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을 방어하여서 형제들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도 될 것입니다.
11. 잇사갈(값)과 스불론의 출생의 교훈
창세기30:14~21
1. 오늘은 야곱의 아홉 번째 아들이면서, 레아를 통해서 낳게 되는 다섯 번째 아들인 잇사갈과 그의 동생 스불론에 대해서 상고합니다. 자녀 생산이 단절되는 듯 했는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의 계기로 다시금 야곱과 관계하게 된 레아가 잇사갈과 스불론, 그리고 디나까지 낳게 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그 출생의 계기를 살펴봅시다. 사건은 바로 야곱의 장남인 르우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정확한 나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10세초반 사춘기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밀 거둘 때”라고 하는데, 팔레스타인의 계절상 5월초입니다. 요즘 같은 때라고 하겠습니다. 르우벤이 어디를 나갑니까? “들에서 합환채를 얻”습니다. 여기서 “합환채”란, 쉽게 말하자면, 최음효과, 곧 성적인 흥분을 돋구는 식물인데, 이것을 르우벤이 발견해서는 캐어온 것입니다. 르우벤이 이 “합환채”라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를 알기나 했을까요?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르우벤의 자랐던 환경을 고려하면, 르우벤은 성적 호기심이 일찍부터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장막에 작은 엄마도 들어가고, 작은 엄마 여종인 빌하도 들어가고, 또 자기 엄마 여종도 들락거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동생들이 생겨납니다. 신기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적 관심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호기심으로 배운 일종의 지식으로 “합환채”에 대한 지식도 알았을 것이고, 그것을 들에서 발견하고는 자기 동생들에게나 자기 엄마에게 은근히 으쓱대면서 자랑하고 싶은 생각으로 집으로 가져와서는 자기 엄마 레아에게 줍니다. 이런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가 나중에 엄마의 여종인 빌하와 동침하게 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의 앞날에 큰 그림자를 지우게 된 일을 기억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성에 대한 관심을 우리는 정당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것을 정상적으로 배출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유교적 분위기에서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너무나도 잘못해 왔던 것을 반면교사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르우벤이 “합환채”를 들고와서는 레아에게 주는 것을 라헬이 보았습니다. 라헬도 “합환채”가 무엇인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녀를 가지기를 무척이나 사모해 왔던 라헬이기에 이런 방면에 대한 지식도 잡다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에게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한글번역으로는 명령투이지만, 영어번역으로는 please!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혹은 I pray thee!라고 까지 하니, 애걸복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레아가 흥정을 합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라헬이,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고 합니다. 라헬이 야곱을 자신의 남편이라고 “내 남편”이라고 합니다. 사실, 먼저 언니가 결혼해서 첫부인은 레아인데, 그런 것을 싹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와 그 뒤에 집에 들어오는 야곱을 향해서 레아가 하는 말, 곧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고 하는 것을 고려하면, 오랫동안 야곱이 아예 레아를 상대해 주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참 불쌍한 레아입니다. 야곱의 소행을 보자면, 참 어리석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르우벤이 라헬의 여종 빌하와 동침하게 되는 것도 이런 어리석은 소행이 뿌려놓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낳게 된 아이가 “잇사갈”, 곧 “값”으로 샀다는 뜻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이런 사건을 통해서 자녀를 낳게 된 것을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 말씀은 흥미롭습니다. 레아가 말하기를,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보면, 남편과의 관계를 갖게 된 것이 단순하게 “합환채”의 값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합환채를 라헬에게 준 댓가이면서도, 레아 자신이 느끼기기로는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준 것이 또한 그녀가 지불했었던 댓가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에 너무 풍성하셔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기도같지 않아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연약하고,부족하고, 결함이 많습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아가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는 것과도 같은 어리석은 간구가 뒤섞여 있는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남편에게 여종을 주면, 남편은 나를 사랑하겠지, 혹은 하나님께서 또 다른 자녀를 허락하셔서, 남편의 마음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인가 하는 기대같은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개인기도회도 그렇고, 공동기도회도 그렇습니다.
4. 그 다음에 고려해야 할 것이 레아가 곧 이어서 스불론을 낳게 되는데,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한 말에서 나왔습니다. “거함”이라는 뜻입니다(개정개정역의 난외주에 있는 “더함”은 잘못됨).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에 대한 것을 상고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둘이 항상 함께 거명되는 경우가 많은데, 스불론이 먼저 거명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이 있는 창세기49장을 보면, 13절에 스불론에 대한 예언(“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이 나오고, 14절에 잇사갈에 대한 예언(“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세의 축복인 기록된 신명기33장18~19절에 보면,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하면서 스불론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그 속에 잇사갈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스불론이 레아를 통해서 여섯 번째 아들이고, 잇사갈이 다섯 번째인데, 이 둘 중에 스불론이 오히려 형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성경에서 반복되어서 강조되는 하나의 패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혈통의 순서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인이 형이고, 아벨이 동생이지만, 구원의 계열은 아벨로 이어집니다.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자랑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가장 기본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문이라는 것으로 자랑하거나 은근히 과시하기도 하는데, 참된 십자가의 복음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5. 이것을 전제로 하여 오늘 마지막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혈통으로 구원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의 손주들의 구원을 위하여 힘써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1세대는 은혜를 알아서 열심을 품고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그 자녀들과 그 후손들이 되어지면 점차 그 신앙의 열기가 식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을 따라서 빚어지는 자연스러운 형태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스러운 형태입니다. 하지만, 은혜라는 것은, 이런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패턴과는 다른 패턴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고신의 1세대는 회개운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회개의 신학이 없었습니다. 그저 풀뿌리를 잡고 뽑아대는 탄식과 통곡을 하면 그것이 회개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에는 회개라는 것을 강조하면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회개의 “신학”이 전승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중생과 회심의 신학이 전승되지 않으면, 자녀들, 나아가서 손주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신앙의 전승이 힘들어 집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복음에 기초한 회심과 중생의 “신학”까지도 체득하고 그것으로 자녀들이 회심하도록 힘쓰고, 그 자녀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의 회심을 위하여서도 힘쓰도록 우리가 자녀들을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12. 스불론(거함)지파- 주님과의 거함이 나타나는 헌신과 열정의 삶
창세기49장13~14절
1. 지난 주일에는 잇사갈과 스불론의 출생을 중심으로 해서 상고하였는데, 오늘은 야곱과 모세의 예언들과 관계해서 이 두 지파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교훈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잇사갈이 형이고 스불론이 동생이지만, 성경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먼저 스불론부터 상고하겠습니다. 스불론에 대한 야곱의 예언은 이렇습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49:13). 그리고 모세의 예언은 “스불론에 대하여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33:18-19)입니다.
2. 먼저, 상고할 점은, 이들의 예언이 지형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취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지리적인 면에서 살펴봅시다. 참 이상한 것 같기 때문에 교회의 밴드에 올려놓은 그림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야곱의 예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매는 해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간단히 지도상으로 보아도 “해변”과 접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해변” 지중해가 아니고, 게네사렛(혹은 갈릴리) 호수라고도 하는데, 물론, 게네사렛을 “바다”라고도 표현하는 것이 상례적이라고 하더라도, 이 야곱의 예언을 해석하는데는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의 예언을 보면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면서, 지중해 해변의 한 도시국가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스불론의 이 “해변”은 지중해 해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불론지파가 기업의 몫으로 할당된 곳은 지중해 해변과 접하지를 않습니다. 이 점은 모세의 예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예언이나 축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3. 가장 쉬운 해결은 “스불론은 해변에(러호도프) 거주하리니”라는 구절을 “스불론은 해변을 향하여 거주하리니”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변을 향하여 큰 강이 있다면 그 강을 따라서 무역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유명한 갈멜산에서 내려와서 지중해와 이스르엘 골짜기를 따라서 흐르는 기손강이 있는데, 현재의 강의 모습은 배를 띄울 정도가 아니지만, 요단강의 이전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이전에는 기손강이 굉장히 넓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대적한 엘리야선지자가 그 우상숭배자들을 사로잡아 바로 이 기손강으로 내려와서 모두 쳐 죽였던 기록은 아주 유명합니다(왕상18:40). 또한 이 기손강에서의 유명한 전투도 있습니다.곧 여선지자 드보라의 명령과 지원을 받아서 사사 바락이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더불어서 전투를 하여 크게 승리를 한 곳이 바로 다볼산 가까운 기손강이었습니다. 상류에는 다볼산이 하류에는 갈멜산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결론은, 스불론지파는 해변에 접하여 거주한 것이 아니라, 해변을 향하여 거주하였고, 그 당시 최고의 해상활동국가였던 시돈과 더불어서 많은 무역들을 하면서, 부를 쌓았던 지파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이 점을 강하게 예언하여서 “스불론아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예언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닌데,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스불론지파가 굉장히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지파였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스불론지파의 성격은 그들이 자신들의 기업을 제비뽑기를 통해서 배정받았을 때, 해변과는 전혀 접하지 않은 내륙지방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분명하게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위치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야곱과 모세의 예언(축복)을 비교해 볼 때, 처음에는 너무나도 의아하고 이상하게 여겼을 지 몰라도, 분명히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야곱과 모세를 통하여 주신)을 묵상하면서,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들을 고안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고 하나님의 계획된 뜻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성취해가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그저 단순한 현대심리학에 제공하는 '적극적 사고방식'과도 천양지차입니다.
4. 그 역사를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락의 기손강전투에 대한 회고의 노래를 보면,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쇼페르)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삿5:14)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잇사갈지파도 “큰 결심이 있었도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 있어서 굉장히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스불론지파와 잇사갈지파였던 것입니다. 이런 적극적인 모습은, 다윗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아직 사울과 싸우던 중 먼저 유다지파에 의해서 헤브론에서 왕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 다른 지파들도 다윗에게 나와서 충성서약을 합니다(대상12:33): “스불론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전열을 갖추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 오만명은 다른 어떤 지파보다도 숫자가 많습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였다”는 점도 너무나도 강하게 인상적입니다. 스불론지파의 성격을 우리는 특징지울 수가 있습니다. 굉장히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수동적이거나 머뭇거리거나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스불론이라는 이름의 뜻이 “거함”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거함”이라는 것이 그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의 거함”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주님과 함께 거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구약역사에서나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고려하면, 그 이후 그 열심과 헌신의 진취적인 성격이 쇠하여서 결국 망하게 되었지만, 다시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 오셨을 때, 바로 이 스불론지역을 가장 먼저 돌이켜 보셨다는 것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곧,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예언하였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자라셨던 곳이 바로 이 스불론지파의 땅에 있던 나사렛입니다(성경상의 출처는?). 그리고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렇게 하셨는데, 이 가나가 바로 스불론지파에게 속한 곳이었습니다. 스불론지파의 성격과 그 지리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예수님께서 맨처음 가장 인상적인 기적을 베푸신 곳이 바로 스불론지파지역의 가나에서였던 것이, 스불론지파의 그 열심과 헌신을 회복시키고 싶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6. 이런 생각을 가져보는 것은, 모세가 스불론지파와 잇사갈지파를 함께 염두에 두고 예언하고 있는 신명기33장19절을 보면,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고 하는데, 여기서 산이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고 할 때, “시온산” 혹은 “예루살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스불론지파 사람들이 먼저 회복되어 사람들을 시온산에 이르게 하여 의로운 제사를 드리게 할 것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역사를 위하여, 그들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이며 진취적인 활동을 통하여,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7. 스불론지파의 사사였던 엘론(삿12:11-12)이 아주 사사로서 아주 조용하게 봉사하였 점을 고려하면, 이들 지파는, 그렇게 진취적이고 헌신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말로만 떠들고 시끌벅쩍했던 그런 헌신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진취적이지만 조용한 헌신, 열정적이었지만 표나지 않는 섬김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지금 이 시대에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스불론의 가나에서 베푸셨던 생명의 기적, 허드렛물로 포도주를 바뀌셨던 기적의 은혜가 바로 우리들에게 임하기를 소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13. 잇사갈(값)-희생의 값을 치루며 살아야 할 교훈
창세기49:14~15/신33:18~19
1. 지난 주일에는 동생인 스불론을 먼저 상고하였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비슷한 지리적 여건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육지 깊은 곳에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로 나아가서 진취적으로 외국과 교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현실을 야곱과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예언과 비교해 보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이뤄지기가 어려운 여건인데, 스불론은 그 예언이 자신들에게 성취될 것을 믿고 진취적으로 적극적으로 그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정의 신앙입니다. 너무나도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능동적으로 진취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잇사갈은 지리적인 여건을 보면 스불론과 동일하게 내륙지방에 기업을 얻었지만, 토양이나 환경적 여건을 보면 스불론보다 더 나은 지역입니다. 이스르엘 평원의 대부분이 바로 잇사갈지파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예언한 것을 보면,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나귀”라고 하는데, “양의 우리”가 널려져 있는 곳이 바로 잇사갈지파의 땅이었습니다. 아주 비옥하여서 “이스라엘의 빵주머니”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넓은 평원이 있어서 므깃도라는 유명한 전쟁터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있던 곳이 이 지역입니다. 이 평원은, 지중해연안을 끼고 있는 블레셋평야, 샤론평야, 악고평야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내륙 깊은 곳까지 펼쳐져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그러니, 잇사갈지파에게는 가장 기름진 곳을 기업으로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동쪽 한 켠으로는 갈릴리바다까지 이어져서 지중해는 아니지만, 큰 호수의 물산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3. 그런데, 이 잇사갈지파는 그 동생 스불론지파와는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향 때문에, 형인데도 형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말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먼저, 야곱의 예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은 먼저, 잇사갈이 그런 비옥한 토지를 물려받은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너무 좋습니다. 건장한 나귀로서 그 평원에서 나는 물산을 나르면서 훌륭하고 멋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나귀는 짐을 나르거나 일을 하는 모습이 당장 떠오릅니다. 그렇게 축복도 많이 받게 되었으니, 사명도 큰 셈입니다. 문제는, 그런 축복을 축복으로 알지 못하고, 너무나도 게을르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특징을 보였던 것이 바로 잇사갈지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예언의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쉴 곳을 보고 아름다운 평원을 보고 감탄하며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편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생의 본능입니다.그래서 기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높아지는 유익이 매우 큽니다. 그것이 산업혁명 이후, 현대문명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컴퓨터사회와 제4차산업혁명이 지향하는 것고 그것입니다. 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편하면 편하여서 그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하면 좋은데, 문제는, 사람의 본성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과 여건을 잘 활용하면서, 더욱 영원하고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깨닫고 그 사명을 성취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고, 게을러지고 자꾸만 게을러지게 되다가, 건강을 해치고 오히려 무력감에 빠져버리고, 스스로가 만든 문제들과 불행한 삶을 변명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4. 그것이 바로 잇사갈지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너무 좋은 여건에 너무 편하다 보니, 다른 사람이 쳐들어와도 그래서 자신들을 압제하고 통치하여도 별반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견뎌내고 용인하고 그렇게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삶의 특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5. 실제 역사를 통해서도 잇사갈지파가 처한 것이 이런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가령, 사사시대에 기손강전투와 므깃도전투에서는 잇사갈이 제역할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다윗시대까지만 해도 좋았습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 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대상 12:32)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고, 타락한 북이스라엘이 가장 타락하게 되는 지역이 바로 잇사갈지파의 지역이었습니다. 여로보암과 나답을 이어서 북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조를 이룬 바아사도 잇사갈지파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바알숭배를 북이스라엘에 도입하였던 이세벨의 거점지역이 이곳이었습니다. 아합이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였던 나봇의 포도원이 있던 곳이 바로 잇사갈지파의 땅, 이스르엘평원에 있었습니다. 이스르엘성읍의 사람들이 아합과 이세벨을 편들어서 나봇을 살해한 것도 바로 잇사갈지파였던 것입니다. 야곱이 예언하였던 것처럼,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방종교의 위협에 스스로 멍에를 지고 노예의 짐을 감당하였던 자들이 이 지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망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6.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이고 패턴이기도 합니다. 스불론지파가 어둠 가운데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잇사갈지파도 그러하였습니다. 특별히 엘리사선지자 선지자를 집에 모시고 섬겼던 여인의 집이 있던 곳이 수넴인데, 바로 잇사갈지파의 영역이었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금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앞으로 빛으로 오셔서 이 지역만 아니라, 세상의 빛이 되셨던, 예수님께서 또다시 죽은 자를 살려내신 기적을 베푸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었는데, 이 나인성이 있는 곳이 바로 잇사갈지파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한 결혼식에서 허드렛물이 극상품 포도주로 바뀐 기적의 장소였던 가나가 스불론지역이어서, 복음의 회복을 통해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헌신의 삶을 살도록 다시금 기회가 주어졌다고 하였는데, 잇사갈의 땅에서 베풀어진 이런 부활의 기적도 복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잇사갈지파가 회복되어질 것을 예언하고 또한 기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모세의 예언을 보면, 스불론지파와 더불어서 잇사갈지파에도 동시에 주어졌던,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33:18~19)는 예언도, 십자가의 복음으로 회복되어질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7. 잇사갈지파에 대한 이 예언은 바로 우리들 모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이름 잇사갈대로, 값을 치러야 하는데, 값을 치루지 않으려고 하였던 지파의 게으른 습성을 변화시켜서, 노예근성을 지워버리고, 이제는 해방된 노예로서, 주님의 종이 되어서,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일군들이 되는 것입니다.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33:19). 주어진 삶의 여건을 즐거워하면서,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 모두가 잇사갈지파의 회복된 모습에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손성은 목사(천국제자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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