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악대의 덕국 사람 교사’라 하면 경성 안의 아동주졸까지 많이 그 얼굴을 아는 터이라 연전까지 탑골공원의 음악당에서 멋거리지게 ‘코러스’를 지도하는 양을 보겠더니 근일에 와서는 철물교 근처로 지나다니는 모양도 오래 못 보겠더라. 어쩐 일인고 하였더니 불행히 전쟁으로 인하여 금년 4월의 고용 계약 기한을 한정 삼아 해고된 후 경성에서 여생을 보내더니 작금에 병이 침중하여 욱정(회현동)의 자기 집에서 6일 오후 9시 반에 자는 듯이 운명하였더라” (매일신보, 1916. 8. 8)
에케르트
독일인 음악가 에케르트(1852~1916)는 1901년 대한제국 군악대 교사로 초빙돼 사망할 때까지 16년간 한국에 머무르며 서양 음악을 전수한 인물이다. 독일 슐레지엔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법률을 공부하라는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음악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프러시아 해군 군악대 지휘자로 근무하다가 일본 해군의 초청을 받아 일본 해군으로 파견돼 군악대 창설 실무를 맡았다. 일본에서 20년간 군악대를 운영하면서 일본에 서양 음악을 전했다. 일본 황실 오케스트라를 조직했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의 작곡에도 한몫을 했다.
1899년 독일로 돌아가 프러시아 군악대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2년만에 다시 동아시로 이주했다.
1901년 2월 에케르트는 50명의 군악대가 사용할 각종 악기를 구입해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 군대에는 서양악기를 다룰 수 있는 군인이 전무했다. 에케르트는 20세 이하의 젊은 병사 50여 명을 뽑아 오전에는 음악이론과 독보법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악기를 연습시켰다. 군악대의 데뷔 무대는 그해 9월7일 덕수궁에서 열린 만수정절(고종탄신인) 축하연회였다. 군악대가 조직된 지 불과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에케르트와 27명의 악단은 서양음악 2곡을 완벽히 연주해 정부 대신과 외국 외교관들의 갈채를 받았다. 1902년 에케르트는 대한제국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다. 군악대는 국가에서 주최하는 공식 행사와 연회뿐만아니라 탑골공원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회도 개최했다.
양화진의 프란츠 에케르트 묘비
에케르트는 한국에 서양 음악의 씨앗을 뿌리고 황실과 시민의 사랑을 받으며 회현동 자택에서 부인과 세 딸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따. 그러나 그가 조직한 군악대는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7년 만에 폐지되었다. 군악대는 제실음악대, 장려원음악대 등으로 소속과 이름이 바뀌었고, 강제 병합 이후에는 이왕직 양악대로 이어졌다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더 이상 연주될 수 없게 되었고, 그 자리는 역시 그가 작곡한 기미가요가 대신해따.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이 되면서 에케르트는 운신의 폭이 좁아졌고, 건강마저 나빠져 16년간 맡았던 악단의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임한 지 넉 달 만에 위암으로 사망해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이왕직양악대는 1919년 고종 서거 이후 해산돼 경성악대로 이어지다가 1924년 이왕직의 후원금이 끊긴 이후 최종 해산되었다.
[전봉관KAIST 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