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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9강
둘씩 둘씩 보내시며
말씀 / 마가복음 6:1-29
요절 / 마가복음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지막 부분은 헤롯 왕의 음란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던 의인 세례요한의 순교가 나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전도하십니다. 또 제자들을 전도훈련 보내십니다. 전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밝힌 것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전도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립니다. 복음성가 가사처럼 전도라는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어 온 세상을 각성시켜 태우고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또 복음 전도자로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까요?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보통 고향에 갈 때는 부모와 친인척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8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의 인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일부러 다른 마을들로 가셨습니다. 왜냐면 다른 마을 사람들도 전도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전도는 일상이었습니다.
고향 나사렛에서의 어느 안식일 날,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에 크게 놀랐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고향 사람이라면 우리 지역의 영광이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해 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로 목수였고, 그 동생들도 자기들이 다 아는 사이라며 우습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목수였던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 전까지 목수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성전에서 가난한 자들이 바치던 비둘기 두 마리를 정결 예물로 바쳤던 것을 생각해보면, 집안 형편도 가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랍비 학교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코흘리개 때부터 예수님을 보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면 마음이 위축되기 쉽습니다. 복음을 전할 의욕이 상실됩니다. 우리 교회는 캠퍼스 선교 모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캠퍼스 전도를 감당해야 합니다. 요즘 캠퍼스에 전도하러 나가보면, 말을 들어주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습니다. 잘 들어주는 것 같아 연락처를 받고 다시 전화해 보면 없는 번호로 나오는 것도 부지기수입니다. 다가가면 눈치를 채고 자리를 뜨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배척당하셨습니다. 배척당하는 현실이 우리에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 복음은 끊임없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종범, 성현 형제들처럼 영적 소원을 가진 형제자매들도 분명 캠퍼스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혼들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담대하게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척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28-30절을 보면, 회당에서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크게 화가 나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셨습니다. 이후 모든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예민해할 필요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듣든지 아니 듣든지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큰 배움의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것을 아시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얼마 후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전도하다 보면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대담한 사람이라도 배척받으면 감정이 상하고 마음이 위축됩니다. 그러나 배척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위로를 얻고 다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도 있지만, 배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잘 대해 주는 사람만 만나려고 하지 말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준비 되어져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훈련 보내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역의 현장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며 사랑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이 키우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사역 현장에 내보내셔서 직접 복음을 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연약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하셨습니다. 험한 세상에 나갔다가 힘들어져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사역 현장에 나가 복음을 전해 봐야 복음의 권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준비가 다 되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이 있더라도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권능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도 고치는 권능을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가운데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의 믿음 또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훈련 내보내면서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둘씩 둘씩 내보내셨습니다. 저도 캠퍼스에 혼자 나가 복음을 전할 때도 있지만, 같이 나가면 그냥 왠지 모르게 힘이 나고, 위안이 되고, 적극성을 띄게 됩니다. 전도할 때 혼자 나가면 지치기도 쉽고, 쉽게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함께 나가면 든든한 힘이 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합심해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주님을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하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환상적인 동역의 열매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복음역사는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서로 합심하여 동역할 때 모닥불이 타오르듯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동역하여 섬길 때 놀라운 생명구원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도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맨손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겠습니다. “주님이 내게 영적인 권세를 주셨다. 내 안에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 이 사실을 확신할 때 전도가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담대하고 확신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전도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양식, 배낭, 돈, 갈아입을 옷 등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놀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의지해 복음역사를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많은 것을 소유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그 소유물들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만을 의지해 나아가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족하게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의 전도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해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아갔습니다. 나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떠나가라!” 정말 귀신이 쫓겨나가고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병든 자들도 기름을 발라 치유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 전도 훈련 나갈 때는 조마조마하고 긴장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단순히 믿고 순종하여 나아갔을 때 능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4a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제자들이 나아가 전도할 때 철저히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 감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행하시는 능력을 보기만 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세상에 나아가 예수님을 의지해 전도했을 때 자신들을 통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들로 성장한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만 듣고 순종해보지 않으면 신앙의 능력,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UBF 세계대표 란워드 목자님은 자신의 꿈이 본래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대학 시절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꿈꾸던 자가 자기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미국에 유학생 선교사로 가신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이 박사 공부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전도했고 란워드 목자님을 만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란워드 목자님은 같이 식사를 하면 2시간 동안이나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모든 음식을 다 먹어 치울 만큼 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분이 선교사님과 성경공부를 통해 거듭나고 목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목자님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꿈꾸던 자가, 전 세계를 다니며 말씀을 선포하고 영혼들을 섬기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유럽UBF 전체 디렉터인 독일의 라이너 목자님 또한 너무나 소심해 좀처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를 독일 하이델베르크 홍갈렙 선교사님이 버스 안에서 만나 전도를 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밥을 사주며 성경공부를 했을 때, 지금은 유럽UBF 전체 디렉터로 쓰임받고 있으며 올해 유럽수양회를 책임 맡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분들뿐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현지인 목자들이 한국 선교사님들의 전도와 섬김으로 변화되어 복음역사에 귀하게 쓰임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는 그들 한 사람만의 변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남미에서는 한 사람이 변화되면, 온 가족과 친척까지 데리고 나와 큰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각 가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전도의 효과는 이렇게 크고 대단합니다.
우리는 내가 나가서 전도하는 작은 손길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전도하고 섬긴 한 영혼이 나중에 어떻게 쓰임 받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드보라 목자님이 전도하고 섬긴 한 영혼이 우간다 선교사로 쓰임 받고 있는데, 송엘리사벳 선교사님입니다. 옥합 목자님이 전도하고 섬긴 한 영혼이 진주UBF에서 동역하며 스탭 사모로 쓰임받고 있는데 김정민 목자님입니다. 우리가 전도한 한 영혼이 구원받고 목자, 선교사로 쓰임 받으며, 또 다른 생명을 낳는 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럽의 문명은 사도바울이 로마에 전도하기 위해 타고 갔던 그 배에 실려서 간 것이다.” 사도바울 한 사람의 유럽 전도가 유럽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진 전도사역은 그 지역을 통치하던 헤롯 왕에게까지 들렸습니다. 헤롯은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세례요한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헤롯은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회개하기는커녕 요한을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도 세례요한을 원수처럼 여기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어느 날 헤롯이 자기 생일에 신하들과 갈릴리 귀인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 섹시한 벨리댄스를 추었습니다. 그 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자, 신이 난 헤롯은 기분에 취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구하라. 무엇이든 구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약속해 버렸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엄마 헤로디아에게 달려가 무엇을 구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진귀한 보석 대신,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합니다. 이로서 세례요한이 한 소녀의 춤에 대한 장난거리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그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개죽음 같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왕을 책망해야 했을까요?
그러나 세례요한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와 의로운 삶은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인 후에도 여전히 왕좌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에 평강이 없고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종종 목 베어 죽인 세례요한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자,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일 헤롯이 음행과 불의를 행하는데도 모든 사람이 잠잠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세례요한같이 순교를 각오하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한 사람이 있을 때, 사람들의 양심이 깨어납니다.
마가복음은 AD 65년경, 네로황제 통치 기간에 로마 성도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AD 64년경, 로마에 화재가 발생해 14개 구역 중 11개 구역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네로황제가 미쳐서 로마에 불을 놓고 하프를 뜯으며 시를 지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아마 정적들이 이런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정치적 위기에 처한 네로는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근거는 불에 타지 않은 3개 구역이 유대인들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기독교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또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하는데 이것이 왜곡되어 성찬식 때 살과 피를 먹기 위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네로황제 때부터 시작된 박해는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2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자, 마음에 예수님이 없고 말씀의 뿌리가 없는 사람들은 환난이나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리고 타협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받아서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박해 가운데서 신앙이 더욱 분명해지고 깊어졌습니다. 그들 중에는 옥에 갇히거나 원형 경기장에 던져져서 사자 밥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받고 화형을 당하거나 사자 밥이 될 위기상황에서 ‘굳이 신앙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죽으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는 유혹이 들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세례요한은 불의와 싸우다 목 베어 죽임당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고자 방향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옥에 갇혀서도 계속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주교였던 폴리캅은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총독의 간곡한 설득에도 “내가 살아온 86년 동안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며 화형당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시민들은 “대체 저들이 믿는 종교가 무엇인가? 예수가 누구이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개종하는 자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를 볼 때 주와 복음 때문에 배척당하거나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의인은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는 두려워하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런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배척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목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내가 한 영혼을 전도했는데, 그 씨앗이 언제 어떤 열매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그 한 영혼도 귀하죠. 다만 우리가 복음의 씨앗의 능력을 믿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둘씩 합심하며 하나님을 의지해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가 미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미련해 보이는 전도를 통해 죄로 병든 영혼들을 구원하고 새사람 되게 하십니다. 한 사람만의 변화가 아니라 한 나라와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역사의 주역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위해 우리를 캠퍼스와 사회의 전도 현장에 보내십니다. 우리가 전도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전도를 감당하고,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며, 우리의 전도를 통해 캠퍼스와 지역사회가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