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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그것으로 여러분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연구 기사 14
요점: 1 그리스도인 회중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나타내는 사랑은 정말 특별합니다. 2 ‘사랑이 어떻게 예수의 참제자들을 식별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가? 3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9) 4 무엇이 참종교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5 존이라는 형제는 "그들이 나타내는 진정한 사랑을 보고 참종교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6 “너희가 뭔데 왕국에서 우리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한 거야? 예수와 함께 열심히 일한 건 너희만이 아니야. 우리도 너희만큼 특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라고 다른 제자들이 대꾸하였다. 7 분명 예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만과 야심을 극복하고 사랑을 기르도록 참을성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8 예수의 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우리가 동료 형제 자매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20:5) 9 하나의 조직으로서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의 참제자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비평: 1 회중 성원들에게 나타내는 배려는 그들이 같은 교리와 관념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러한 관념과 교리는 워치타워 통치체의 소수 성원의 그림자가 전체 성원에게 드리워져 나타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믿음을 보이신 대표자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2 참 제자들은 조직이라는 집합체가 아니라 개인들이다. 예수께서 사랑이 자신의 제자들임을 증명한다고 했을 때, 어떤 조직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개인들을 가리킨 것이다. 즉 집합적 무리인 단체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늘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3 "네 자신처럼"이라는 말은 사랑받을 상대를 열등한 지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내가 먹고 남아서 주는 것보다는 내가 배고프니 저 사람도 배고프다라는 동일한 감정에서 나눔을 하라는 뜻이다. 거기에는 내가 베풀었으니 저사람도 내게 베풀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리는 무대가성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베푼 만큼 같은 베품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거래에 가까운 것이다. 4 참종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사실에 의한 이론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추측과 해석으로 이루어진 관념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이다. 참종교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참숭배와 참조직은 존재할 수 있다. 참 숭배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영과 진심으로 숭배하는 것을 가리키며, 참조직이란 하나님의 속성[뜻]을 발현시키는 충실한 도구로 사용되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한때 이스라엘이 그러한 도구로서 참조직이었으나 그 구성원들이 불충실한 탓으로 그 조직은 와해된 것이다. 5 존이 진정한 사랑을 보고 참조직을 찾았다고 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일 수 있다. 깊고 진정한 사랑이란 피상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함께 먹고 자고 일하는 가운데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조직은 우리의 의식주와 함께, 같은 일터에서 24시간의 삶을 공유하는 가운데서 형성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어쩌다 또는 약간 자주 만나서 환담하는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 제자들이 인간적인 권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자리들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심은 영광의 자리들은 개인의 권위나 명예를 누리려는 목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섬김과 봉사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7 제자들이 특권을 가지겠다는 다툼이 좋은 동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직은 미성숙한 탓이므로 성숙할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예수의 인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성숙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은 포용하는 마음이 있다는 점이다. 포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8 따라서 자신이 장성한 척도는 다른 사람의 개성이나 생각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로 알 수 있다. 9 바울이, 사랑은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파수대 연구기사 18항에서는 워치타워 법인은 스스로 잘났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바울이 내린 사랑의 정의에 의하면 교만한 태도이다, 즉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태도를 파수대에서 여러번 관찰하였는데, 워치타워 통치체를 비롯한 본부는 자중하여 이런 의도로 자가자랑을 앞으로 두번 다시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기 바란다. |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샘이다 파수대 연구기사의 주제 성구인 요한 13:35에서 언급된 사랑은 그리스어로 αγάπη, 아가페인 반면,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말하는 형제 사랑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φιλαδελφίᾳ 필라델피아(벧후 1:7)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가페의 특성을 형제사랑인 필라델피아에 적용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가족이나 친구 또는 교우와 같이 특정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사랑에 아가페의 특성이 적용되어야 함을 알 수 있으며, 베드로는, 이러한 특정된 사랑이 더욱 확대되어 모든 사람을 향하는 보편적 사랑인 αγάπη 아가페로 승화되어 신의 본성에 참여하게 됨을 가르쳤다. 한편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요인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보면, 크게 직업과 재물과 같은 생활의 토대, 음식과 운동을 통해 얻어지는 건강, 재충전과 재생산을 위한 유희와 쉼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이 행복이라는 목적에 이르는 도구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갖는다면, 그 목적이 되는 행복의 요인들은 우정, 연인 관계, 가족, 신앙적 삶 등이다. 이것들은 ‘사랑의 관계들’로 분류할 수 있겠다. 이 사랑의 관계들은 행복의 근원적 요인이며 다른 요인들과 관련해서 참된 행복의 실현을 위한 규범적 작용을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하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으며 이해타산(利害打算)을 뛰어넘는 사랑의 관계에 이를 때에야 물적 토대도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 직업도 단순히 생계유지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소명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자리로서 기능할 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직업은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찾을 때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이것도 ‘사랑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또한 건강과 유희·쉼과 같은 요인들은 자기 사랑과 자아실현의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자기 자신을 전인적으로 건강하게 가꾸며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다른 다양한 관계에도 건설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요컨대 사랑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는 말씀에 따라, 사랑은 행복하게 하는 샘이 됨에 분명하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반복해서 모든 성경의 본뜻이 무엇인지 밝히신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사랑이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성경의 본뜻인 ‘사랑’ 을 실천할 때 행복이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경험적(혹은 서술적) 이해와 성서적 증거를 소중히 여기면서 사랑을 규범적 차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은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하라는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지만, 우리는 친소(親疎)[멀고 가까움]를 따질 수밖에 없는 이웃 사랑의 현실을 만나게 된다. 이웃 가운데 좀 더 가까운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이들이 있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친구들이 여럿 있겠지만, 그 가운데는 친소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성경 안에도 이러한 구별이 존재한다. 친족을 적절히 돌보지 않는 이들을 일컬어 불신자보다 악한 자들이라 비난한다(딤전 5:8). 구약과 신약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편애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특별히 돌보라는 구약의 계명, 그리고 가난하고 헐벗은 지극히 작은 이들을 돌보라는 신약의 말씀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원수 사랑의 계명은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심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없다는 가치 판단을 뛰어 넘으라는 측면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강도 만난 이는 불특정 다수를 대표한다. 아가페 사랑의 보편성과, 특수 관계로 분류하는 우정, 연인, 부부, 부모·자녀 관계, 동료 신앙인, 동족 간의 유대 등이 지니는 특수성 사이의 구별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보편과 특수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보편적 사랑과 특수 관계들 속에서 발견하는 사랑은 각각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설명될 수 있는가? Ⅰ. 보편 중심적 ‘사랑’ 1. ‘동등 배려’(equal regard)로서의 아가페 이 접근은 아가페의 본질적 내용에 관심을 갖는다. 아가페의 본질적 내용은 무엇인가? 아웃카는 아가페를 ‘동등 배려’(equal regard)라 규정한다. 또한 아웃카는 이 내용을 ‘자격을 묻지 않는 배려’(unqualified regard)라는 표현으로 보충하고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면 그 의미가 상당히 와 닿는다. ‘동등’이라는 개념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가치 평가’(recipient evaluation)와 무관하다는 뜻이 되며 ‘배려’라는 개념은 ‘사랑하는 주체의 헌신’(agent commitment)과 연관된다. ‘동등’은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함을 뜻한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존재라면 누구든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 사랑이어야 한다. 자격이 되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자격을 충분히 갖추면 더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랑의 대상인 이웃이 다른 이웃들과 구별이 되는 특징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특징들이 다르거나 혹은 우월하기 때문에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구별되는 특징들과 무관하게 사랑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랑은 대상의 특수한 조건이나 자격에 따라 결정되지 않기에, 일반적으로 사랑 못할 대상이라고 판단하는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동등이라 함은 대상이 되는 사람의 동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나와의 동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사랑은 역시 아가페이다. 따라서 아가페의 특성은 나와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황금율도 역시 나와 다른 사람의 동등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동시에 사랑의 대상의 가치는 변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똑같이’ 값진 존재이며 그 사랑 안에서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랑의 대상 범위에 관한 중요한 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대상에 있어서 보편성을 가진다(universal scope).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라면 누구든지 사랑을 하고 받을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주의적 아가페(human agape)의 보편성의 근거는 계몽주의나 칸트의 철학적 공리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 인간을 품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말하는 한 가지 이유는 자신처럼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 어떤 조건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는 조건 없는 사랑인 것이다. 예를들면 교도소에 갇힌 재소자들에게 당국은 그의 범죄의 심각성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한다. 이것이 조건 없는 배려이다.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햇빛과 물과 공기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상대를 나라고 생각하며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가페 사랑을 형제사랑인 필라델피아에 적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베풀 때에 그가 내게 갚아야 한다는 조건이나, 그의 반응이 감사함이 없다는 이유로 그 베품을 거두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랑의 행위자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대가와 반응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대가나 반응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지만, 사랑의 대상이 적대적으로 반응한다고 해도 사랑한다. 사랑하되 지속적으로 또 끝까지 사랑한다. 배려는 단순히 동기나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배려라는 개념에 담긴 행위적 특징은 대상의 필요, 요구, 복지, 최선(one’s best)을 깊은 관심으로 염원하고 충실하게 찾으며 또 찾았으면 할 수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것까지, 마음의 동기와 구체적 실천을 내포한 개념인 것이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적 특징은 일방향성이다(unilateral feature). 아웃카는 일방향성이라는 원리를 감안할 때 사랑의 주체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나 대가를 그 사랑의 대상에게 요구하거나(demand) 적극적 의도를 가지고 기다려서는(await or anticipate) 안 되는 것은, 사랑이 ‘주고받음’(give and take)을 전제한 거래적(去來的) 관계로 변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방향적 베품이지 양방향적 거래가 아니다. 2 유념해야 할 점들 동등배려라고 생각될 수 있는 유사한 것들의 실례를 생각해 보는 것은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개념이다. 먼저 동등 배려에서 배려가 동정심이나 연민과 같은 ‘감정’을 의미한다면, 가까운 사람(예를 들어, 형제자매)이나 일면식 없는 잠재적 이웃에게나 똑같은 강도와 색채의 감정으로 사랑하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등배려는 이를 뜻하지 않으며, 아가페는 동등한 배려와 그러한 배려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이지, 이타적 행위(identical treatment)가 동일해야 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사랑의 주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으로서 갖는 유한성 때문에 동일한 행위를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받는 이의 입장에서 볼 때, 필요가 다른데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각 대상이 갖는 고유한 현실과 필요에 대한 적절한 고려를 배제하고 무차별성 혹은 동일성만을 생각할 수 있음을 경계한다. 동등배려로서의 아가페는 나처럼 상대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입장을 나의 입장으로 환원시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백지수표를 써 주는 것이 아가페가 아니다. 특히 적절한 자기 사랑이 배제되고 악용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는 착취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다른 대상을 착취하게 하고 망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랑의 행위자가 대상의 유익만을 생각한다면(대상의 이익만에 대해 관심한다면), 강간의 상황에서 자기희생을 규범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정당방위로서의 전쟁(just war)의 논리를 생각해 보라. 무고한 제삼자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자기희생을 권유할 수 있겠는가? 정당한 강제력을 통하여 보호 받도록 하는 것이 사랑의 명령에 충실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이 상황에서 자기희생을, 평화주의 원칙을, 비폭력-무저항의 사랑을 견지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 방기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요컨대 ‘동등배려’는 특수한 감정의 역동과 질서를 존중하며 대상의 고유한 현실과 필요에 대한 적절한 배려와 의도나 내적 동기의 구체적 실천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또한 동등배려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적절한 자기 배려를 배제한 과도한 타자지향적 자기희생적 사랑의 잠재적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2.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 사이의 관계성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편적 아가페는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지만, 다양한 특수한 사랑의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사랑의 대상들 사이에서 친소(親疎)를 따지게 되는 현실을 만나게 된다. 보편과 특수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들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사이의 관계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편적 사랑의 규범은 특수 관계들 속에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으며 또 작용해야 하는가? 메일랜더(Gilbert Meilaender)의 관계 모형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데 유익하다. 그는 ‘하향구성’(building down), ‘상향구성’(building up), 그리고 ‘둘레구성’(building around), 이 세 가지 모형을 제시한다. ① 하향구성, 형제사랑을 아가페의 축소된 형태의 구체화(narrower specification) 로 보는데, 이러한 축소화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일어난다 ② 상향구성, 축소화된 혹은 좁은 범위의 선호를 내포하는 형제사랑을 ‘덕의 학교’로 보는데, 곧 형제사랑을 통해서 아가페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③ 둘레구성, 아가페를 이용하여 우정이 정당하게 보여 주는 바 선호에 경계를 설정한다. ‘하향구성’ 모형에서는 아가페가 특수 관계들을 지배한다. 아가페 속에 특수 관계들이 포함된다. 후자는 전자의 부분들이다. 규범적으로 또 행위의 동력에 있어서 신적 아가페는 특수 관계들의 직접적 기원이요 영감이다. 니그렌의 개념을 빌려 설명하면, 인간 행위자는 하나님 사랑이 흐르는 관(tube)이어야 한다.[빛과 소금] 인간이라는 ‘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야 사랑할 수 있는데, 이는 죄성과 유한성 때문에 스스로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향구성’ 모형은 그 반대다. 특수 관계들 자체로 사랑의 규범과 동력 그리고 감정적 역동을 내재적으로 간직한다. 특수 관계들을 통해 그것을 발전시키고 확대시킬 때, 아가페가 드러나 온전히 실현된다. ‘둘레구성’ 모형은 앞의 두 모형 사이의 중간 모형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하향구성’ 모형의 약점에 유의한다. 특수 관계들의 고유한 지위를 부정할 위험이 있고 또 각각의 특수 관계들이 내재적으로 갖는 규범적, 상황적, 문화적, 실천동력적, 관계적 특성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향구성 모형은 구체적 관계들이 내적으로 갖고 있는 특수성들을 간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적 위험성에 주의하면서, ‘둘레구성’ 모형은 구체적인 특수 관계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독립적 입지를 갖고 있다고 본다. 메일랜더는 특수 관계의 한 형태로서의 형제사랑은 보편적 사랑의 한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자체의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보편 중심적 접근은 특수 관계들의 특수성을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아가페를 특수 관계로 환원하지 않는다. 또한 신적 아가페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인간 사랑의 규범적 모범과 동기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아웃카는 아가페와의 관계성을 몇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아가페는 우리 내부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관계 밖의 사람들에게 행하는 불의와 악행을 규제한다. 둘째, 아가페는 우리 관계가 지향하는 목적들을 보존하고 또 증진한다. 특수 관계들에 드러나는 본능적, 자연적 사랑은 그 관계들 속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성장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도덕적 성장을 위한 조건들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도덕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셋째로, 아가페는 끊임없이 우리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임의성이나 복종적 관계로 흐르지 않고, 긍정적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돕는다. 요컨대, 보편적 아가페는 특수한 관계들 안에서 직접적 영감이나 유일한 기원으로서 작용하기 보다는 ‘후견인’(혹은 ‘감시 자’)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아가페는 특수 관계들이 그 본래적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자극할 뿐 아니라 특수 관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갈 때 경계하고 비판적으로 성찰케 한다. II. 특정 관계 중심적 ‘사랑’ 1. 사랑의 본질과 정당화의 이론적 근거 1) 사랑의 본질에 관한 기본 이해 보편 중심적 접근은 아가페의 본질(내용)과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들 사이의 관계성에 초점을 둔다면, 특정 관계 중심적 접근은 특수 관계들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에 초점을 둔다. 앞에서 밝혔듯이 대표적 옹호자는 포우스트와 포웁이다. 아가페를 ‘동등 배려’로 보지 않고 특수 관계들 안에 아가페가 내재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특수 관계들을 통해 아가페가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며, 특히 사랑은 감정과 동반한다고 점을 강조한다. 메일랜더의 모형론으로 말하면 ‘상향구성’에 가깝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포우스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논구함에 있어서 사회생물학적 질서를 존중하며 가족이나 친족 또는 동족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호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이해한다. 생물학적 관계 형성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구현이라고 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연스러운 혹은 본능적인 사랑의 질서와 역동에서 그리스도 사랑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포웁은 사랑을 목적으로서의 선 (善)을 향한 생래적 경향이라 정의한다. 사랑은 곧 선(善)이다. 선이 목적이 되어 그것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한다. 이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나 가족과 같은 자기 자신과 좀더 가까이 있는 이들에 대한 선호를 인정한다. 포우스트와 마찬가지로 특정 대상에 대한 자연적(본능적) 사랑의 지향과 질서를 강조하며 그러한 지향과 질서에서 창조주의 섭리와 아가페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이에 관한 포웁의 견해를 들어보자. “‘동등배려’의 옹호자들은 일상에서 만나는 인간적 사랑의 삶에서 선호의 가능성을 허용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아가페 사랑에서는 전혀 선호의 여지를 찾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아퀴나스 전통의 관점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랑은 모든 진정성 있는 사랑의 표현들에 직접적으로 내용을 제공한다. 선호가 드러나는 사랑의 특성은 ‘특별한 선호’를 반영할 뿐 아니라 창조자의 섭리의 뜻을 반영한다.” 요컨대 특수 관계들 속에서의 사랑은 아가페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아가페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특수 중심적 접근에 있어서 아가페와 특수 관계들 사이의 긴장의 주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아가페는 특수 관계들 안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접근이 아가페를 동등 배려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 관심을 포기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특수 관계들에 도덕적 우선순위를 두지만, 가까운 사랑의 관계를 벗어난 이들에 대한 도덕적 관심과 책임을 결코 부정하거나 철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포웁은 모든 인간을 행한 이러한 관심과 책임을 아퀴나스에 기대어 설명한다. 아퀴나스에게서 본능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들 속의 사랑이 아닌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 대해 갖는 사랑의 지향이 있는데 이를 ‘박애’ 혹은 자선(benevolence)이라 한다. ‘박애’의 대상 범위는 보편적이다. 이 점에서 포웁에 동의하면서 포우스트는 다른 한편으로 구원론적·교회론적 지평에서 사랑의 대상 범위의 확장을 시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사역의 성취에 그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십자가의 목적에 상응하여 화해의 공동체, 사귐(상호적 관계)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한다. 포우스트는 아가페 사랑의 구현의 자리는 본질적으로 교회 공동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야기의 기초가 기독교적 사랑을 구현하고 또 지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교회 공동체라는 특수 관계 안으로 모인 사람들을 통해 구현된 이야기와 설교와 상징에 의해 오랜 기간 영감을 받고 유지되어 온 것으로서, ‘행위 아가페주의’(act-agapism)나 ‘규칙 아가페주의’(rule-agapism) 따위의 추상적 관념으로 온전히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추상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이야기화된 전통을 통해 형성해 가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이 다. 포우스트는(교회 공동체의) 이야기적 기초와 믿음의 동료 없이, 아가페는 분명히 흔들리고 결국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포우스트의 바르트 인용은 주목할 만하다. “이웃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 개념이 원리의 측면에서 인류를 향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되어 야 한다는 점을 내포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이웃은 “항상 구원의 역사의 틀 안에서 내가 만나고 또 연합해야 할 동료 인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사랑에 근거한 확장성은 바르트에게 조건적이고 제한적이다. 핵심적 조건은 문 밖에 있는 이들이 구원의 문이 열리도록 기꺼이(자발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아가페는 자유주의적 보편 구원론으로부터 독립적 위치를 고수하며 고유한 기독교 신앙고백과 공동체적 실체라는 조건에 근거하여 일정 정도 배타성을 견지할 때, 결국 그것에 안정적 지속성을 부여할 깊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가페의 행위 주체는 보편적 ‘인간적 존재자’(human existent)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특수 관계로 묶여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목적은 ‘낯선 사람들’(strangers)을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이야기와 사귐에로 인도하는 것이지, 이 공동체 생존에 급급하여 무조건적으로 그 문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포우스트는 아가페를 만인을 향한 ‘동등배려’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나사렛 예수와 사랑 그 자체를 지속적으로 회상하기 위해서 아가페를 논구하는 신학자들이 조급하게 보편성과 후기 계몽주의의 도덕 언어에 비현실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가페의 우선적 실현 자리인 교회 공동체는 그 보편적 사랑의 실천으로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자아·이웃의 삼위일체적 상호적 관계 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2) 특정 관계 중심적 접근의 이론적 뿌리로서의 ‘사랑의 질서’ 특수 중심적 접근의 사랑 이해의 근거를 생각할 때 우리는 아퀴나스의 ‘사랑’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아퀴나스는 이 접근의 사랑 이해에 가장 중요한 정당화의 근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사랑의 질서’이다. 아퀴나스는 전체 우주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거대한 공동체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전체 피조 세계를 영원법(eternal law)에 따라 섭리하신다. 피조물의 모든 행동은 영원법에 내포된 하나님의 질서(잡는 지혜)를 반영하며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에 본성을 부여하시고 그 본성에 부합하여 살고 행동하게 하심으로써 그 질서를 실현해 가신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질서에 상응하여(혹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이해에 상응하여) 사랑에는 질서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질서’론에서 기독교 사랑의 본질을 찾는다. 사랑에 질서가 있다 함은 사랑의 대상의 관점에서 우선순위가 있음을 의미한다. 아퀴나스는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원수보다 친구를, 악한 이들보다 덕스러운 이들을,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다른 그 무엇보다 자아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객관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아퀴나스의 ‘사랑의 질서’론을 정리하는데 포웁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힌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똑같이 사랑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이웃은 모두 하나님께 동등하게 관계하고 있지 않다. 더 큰 선을 보유하고 있기에 하나님과 더 가까운 이들이 있으며, 덜 가까운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강도는 관계 안에서 연합 혹은 사귐의 강도에 비례한다. 사귐의 강도에 따라 어떤 이웃을 다른 이웃들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큰 애정과 관심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아퀴나스는 이것 이 사랑의 자연적 질서라고 보는 것이다. 혈연관계가 사귐의 질에 있어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기에 사랑의 강도도 가장 강하다. 자녀보다 부모를, 배우자보다 부모를 더 사랑해야 한다. “더”는 양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아퀴나스는 다른 형태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를 ‘존경하고’ 배우자를 ‘강하게’ 사랑한다. 아가페(carias, <카리타스> 혹은 신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들 속의 사랑 (혹은 자연적 본능적 사랑)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아퀴나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앞에서 본 대로 아웃카는 아가페는 모든 특수 관계들의 직접적인 또 유일한 영감이 아니라고 하는 반면,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모든 진정한 사랑의 표현들에 직접적으로 내용을 제공한다고 한다 (inform). 바첵(Edward Vacek)의 언어로 이를 설명한다면, ‘에로스’는 나 자신을 위해(for my own sake)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 ‘아가페’는 다른 이를 위해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우정’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각각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을 지향하고 그 사랑에 기여하며, 또 하나님 사랑이 다른 사랑의 형태들에 내용을 제공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달리 말해 아퀴나스는 아가페를 은혜가 주입되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의 사귐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함이라고 생각한다. 아퀴나스에게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들 속의 사랑 사이의 관계는 상보적 이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에로 이끌어간다”는 가톨릭 신학의 공리는 아퀴나스 ‘사랑’론의 기초가 된다. 은혜는 부패한 본성을 치유하고 바로잡고 또 회복하여 바른 질서에 이르게 한다. 은혜는 자연을(본성을, 주어진 바를) 끌어 올리는데 새롭고도 초월적인 목적에 상응하는 새로운 형태를 ‘불어 넣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은혜로 주입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자연적 기질들(inclinations)과 정서적 능력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고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가장 평범한 사랑의 관계들을 가장 고상한 형태의 사랑을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요컨대 아퀴나스의 ‘사랑의 질서’론은 포우스트와 포웁과 같은 특수 중심적 접근 옹호론자들의 사랑 이해의 근본적 토대로서 작용한다. 자연스러운 혹은 본능적인 감정의 지향에 따라 특수 관계들이 형성되며 그러한 관계들 안에서 신적 아가페가 드러난다고 강조하는 점, 관계 친밀도의 관점에서 친소와 선호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있는 점 그리고 보편적 타자 지향성에 서 보다 특수한 사랑의 관계에서 기독교 사랑의 본질을 찾는 점 등에서 아퀴나스와 특수 중심적 접근 사이의 연속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2. 보편 중심적 접근에 대한 비판 위에서 살핀 특정 관계 중심적 접근의 사랑의 본질과 근거에 대한 이해는 보편 중심적 접근의 그것과 차이가 있으며 더 나아가 충돌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기에 특수 중심적 접근의 보편 중심적 접근에 대한 비판을 살피는 것은 전자의 ‘사랑’론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비판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보편 중심적 접근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비판 한다. 하나님 사랑을 자신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는 전적으로 이타적인 (disinterested)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의 대상의 반응이나 상호적, 공동체적 관계 형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오직 대상을 향해 자신을 내어 주시기만 하는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이해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지향하지 않고순전하게 내어 주는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이해한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무동기적, 무조건적, 무원인적 사랑이라기 보다는 동기가 있으며 반응과 상호적 관계를 바라며 더 나아가 공동체 형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포우스트의 아담스(Robert M. Adams) 인용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어떤 욕망(욕구)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관계 자체를 위한 것이지 단순히 우리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신적 사랑은 단순한 일방향적 사랑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보존하고 창조하려는 사랑’인 것이다. 포우스트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이렇기에, 하나님은 인간과의 소통이 제한될 때 고통하신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부재로 고통하시는 하나님에게 사랑의 이상은 우정 곧 친밀한 상호적 관계 형성이다. 상호성이 사랑의 목적이기에 하나님을 홀로 있기를 꺼려하시며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형성을 위한 다른 주체로서 인간을 찾으신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충족적 하나님, 친구도 세상도 필요 없는 하나님은 그리스 철학의 산물이지 성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과의 상호적 사랑을 추구하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사랑의 부재로 인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신 분이다. 포우스트는 이 지점에서 사랑의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고통의 문제는 통합된다고 보고 있다. 둘째, 보편 중심적 접근이 계몽주의나 칸트 철학의 영향 아래서 자아를 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독자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관계 속에 있는 자아가 참된 자아가 아니라, 독립자로 자족하는 존재가 참된 자아로 보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지적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랑은 상호적 관계 형성이나 공동체 형성을 이상으로 삼지 않고, 사랑의 규범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주체에 관심이 있다. 도덕적 행위 주체로서의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내재적 가치를 강조하다가, 사랑의 대상의 개인적 독특성을 소홀히 하게 되거나 그와 연관하여 깊은 관계성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 포우스트는 아웃카가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인간적 존재자’(human existent)로 축소시켰다고 비판한다. 창조질서에 따른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적(혹은 사회생물학적) 현실을 소홀히 하면서 ‘상호성’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에서 제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아웃카의 ‘자아’는 생물학적 실체와 사회적 실재 모두를 박탈당한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사귐이라는 나의 정의는 부분적으 로 창조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창조 질서를 따라 다른 인간 존재의 실존에 참여하고 대화하고 또 경험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 윤리학자들 가운데 인간이 자연적인 혹은 생물학적인 관계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는 점을 적절하게 고려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자아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신념은 계몽주의의 잘못된 자아관에 기인한 것이다. 계몽주의는 자아가 고유한 생물학적 역할을 담지한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소홀히 했다. 그래서 아웃카의 동등배려로서의 아가페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칸트철학의 ‘동등존중’(equal respect)에 가깝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 사랑의 중심축은 특수 관계들을 통해 실현되는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포우스트는 인간 경험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이해가 가족 등과 같은 특수 관계에 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신학적으 로 중요하다고 보면서, 사회생물학적 구조로서의 가족 질서 안에서 형성된 친밀한 관계는 특별한 가치와 의무를 내포한다고 지적한다. 자연적 혹은 본능적 사랑의 역동이 작용하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아가페의 이상이 구체화될 수 있다고 보면서 모든 사람이 가정에서 아가페를 충실하게 실현하며 산다면 모든 사람을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포우스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포우스트는 자비, 동정, 공감 등 감정적 역동이 없는 이타적 행위는 아가페를 온전히 드러내었다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가페는 규범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감정이요 본능적 지향이며 자연스러운 선호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보편적 사랑의 명령에 입각하여 어떤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차원에서 자녀를, 배우자를, 친구를, 연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랑의 대상을 향한 자연스러운 감정적 지향에 순응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의 언어 없이 충분히 다 드러낼 수 없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는 본문들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향하여 열정을 다하시는 존재로 나타난다. 사랑의 대상과의 소통의 부재로 고통하시며 또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랑의 대상 때문에 깊은 슬픔에 신음하시는 하나님이다. 풍성한 상호적 사랑의 관계 속에서 기뻐하시고 또 기쁨의 도덕적 선을 누리게 하신다. 이런 맥락에서 포우스트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범으로 삼아 기독교 사랑의 윤리가 상호성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과 ‘풍성한 상호적 사랑’이 “참된 기쁨과 관계적 안정성과 선의로 가득한 상호적 섬김”의 원천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Ⅲ. 특정관계 중심적 접근의 비판에 대한 보편 중심적 접근의 응답과 종합적 평가 1. 그리스도의 사랑의 규범적 이상(理想) 1) 신적 아가페의 관점 아웃카에 따르면,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생각한다. 니버에게 이 사랑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며, 그 속성은 ‘철저하게 자기 이해를 떠나 오직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perfect disinterestedness)이다. 완전한 자기희생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실존적, 역사적 증거들을 점검한 니버는 개인적 차원의 성화와 역사 내적 하나님 나라 실현에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고 니버가 완전한 염세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사랑의 이상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삶에서 기준으로 작용한다. 응보적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자기희생적 사랑의 실천이 그 사회의 정의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아웃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기희생으로 보는 니버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보편적 사랑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신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포우스트의 비판은 그 과녁이 니버의 신론이라면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아웃카의 경우에도 적절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오히려 아웃카의 하나님 이해는 포우스트의 비판을 무색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아웃카는 하나님 사랑과 섭리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성’에 있다고 본다. 사랑 이해에서 대상을 위한 희생이나 용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이 점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웃카는 버나비(Burnaby)의 견해를 인용하는데 이를 주목할 만하다. 끝까지 견디고 사랑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대상을 향해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그 사랑은 그 자체에 내포된 가장 고상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쓴다. 이 사랑은 무너진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그리고 거부가 응답으로 바뀔 때까지 쉬지 않는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믿음과 소망 가운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은 그것의 목적인 성령이 흐르는 연합을 이루어낸다. 사랑의 목적은 ‘연합’이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일방적 자기희생이나 타자를 위한 고통의 감내가 아니라 인격 상호간의 화합적 관계(concordant relations)를 이루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웃카는 신의 자기희생적 사랑에 근거하여 우정과 같은 상호적 사랑을 부정적으로 보는 개신교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자아 하나님 이웃이라는 삼위일체적차원에서 인격 상호간의 ‘사귐’이라는 신적 사랑의 본질에 상응하여 그리스도 사랑의 궁극적 목적 혹은 열매를 ‘상호적 사랑’으로 본다. 인간 사랑의 모범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보편 중심적 접근과 특정 관계 중심적 접근 사이의 접점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관해서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이 관계적 존재로서 친밀한 상호적 사랑을 추구하듯이, 인간의 사랑도 그러한 존재와 사랑에 상응하여 쌍방향적 사귐과 헌신을 사랑의 궁극적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인간 아가페의 관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모든 인간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하면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이웃에 대해 저울질하지 말고 차별 없이 사랑하라고 강조하며 또 사랑한 이후 자신의 사랑을 공적화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랑의 행위 뿐 아니라 사랑의 의도도 순전해야 한다. 반대급부적 사랑을 염두에 두는 숨겨진 의도까지도 철저하게 부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독교 사랑의 보편성, 무차별성, 일방향성 등을 강조 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상호성을 떼어낸다. 쌍방적 관계 형성을 전제하는 우정과 같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의심한다. 그러면서 대가나 반응에 대한 고려를 배제한 철저히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이 기독교의 이웃 배려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편성과 일방향성을 기독교 사랑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아웃카의 이론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웃카가 그와 갈라서는 지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 다. 아웃카는 자기 사랑의 여지를 차단하고 기독교 사랑을 완전한 자기희 생으로 보는 점 그리고 상호성에 늘 의구심을 갖고 있는 점 등에는 키엘 케골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웃카는 적절한 자기 배려가 철저하게 배제된 일방향적 자기희생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동등 배려로서의 아가페는 자기 자신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아웃카는 특수 관계의 고유한 지위와 가치를 존중하면서 특수 관계에 참여하는 사랑의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적 관계 역동을 전면적으로 불순하게 보지 않는다. 우정 형성과 발전을 위해 조건과 선호 등의 요소들이 작용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이해타산적(利害打算的) 주고받음을 뛰어넘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과 실천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고 아웃카는 지적한다. 요컨대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이 각각 대상을 향하여 대가와 반응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그러한 쌍방적 사랑이 상호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공동체 형성(communion)과 ‘사귐’이 기독교 사랑의 궁극적 이상 혹은 열매임을 강조하고 있다. 두 접근 모두 상호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 사이의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특수 중심적 접근은 특수 관계의 고유한 지위와 가치를 인정하면서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 사이에 우선순위 혹은 비중을 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바첵의 견해가 그 대표적인 보기가 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아가페는 다른 이를 위해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며 우정은 다른 이와 맺는 관계를 위해 다른 이 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순위를 설정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보편 중심적 접근은 우선순위를 설정한다. 아웃카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일방향적 아가페 사랑)보다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보면서 우정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지만, 보편적 아가페의 일방향성과 보편성이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사랑의 척도라고 강조한다. 위에서 본 대로 보편적 아가페는 특수 관계들이 본연의 목적을 이루도록 도울 것이며 또 경계선을 설정하여 내부 강화를 위해 외부의 개인 혹은 다른 관계 들에 해를 끼치는 것을 경계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 사이의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리라 본다. 상호성을 필수불가결하게 아가페의 핵심적 요소로 보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 사랑의 범위를 특수 관계들에 참여하는 사람들로만 제한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상호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은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꼭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독교 사랑의 계명은 변함없이 사 랑의 대상을 사랑하라고 도전한다. 또한 보편적 아가페와 특수 관계 사이 의 긴장의 약화는 아가페의 본질적 내용을 특수 관계들의 특징으로 환원할 여지가 있다. 특수 관계가 아가페 사랑을 배우고 알 수 있는 ‘덕의 학교’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일한 학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특수 관계 없이는 도무지 아가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2. 사랑과 감정 기독교 사랑에서 감정의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감정적 역동 없는 사랑의 행위가 가능하겠는가. 아웃카는 기독교 사랑을 논하면서 이성과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말한 적은 없다고 강조한다.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으로 언급했다고 해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특수 중심적 접근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역동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는 특수 관계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을 존중하면서도, 여전히 아가페의 일방향성의 원리를 견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다. 이 지점에서 아웃카의 죤 리더(John P. Reeder)에 대한 인용을 주목할 만하 다. “유한성 뿐 아니라 악도 상호성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반응은 아가페의 바람직한 열매가 될 수 있지만(desired fruition of agape) 그렇다고 필요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응은 요구되어서는 안 되고 또 필연적으로 기대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욕구될 수 있을 뿐이다 (desired).” 상호성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특수 중심적 접근이 상호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는 근거는 특수 관계의 정서적 특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부모가 자녀를 자연스 러운 감정의 지향을 따라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윤리적 논의에서 이성과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아웃카가 감정 보다는 사랑에 대한 규범적 진술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까닭은 사랑에서 감정이라는 부분이 갖는 불안정성, 변질 가능성, 악으로의 경도 가능성 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측면을 소홀히 하면 아웃카의 보편적 아가페는 친밀한 인간관계의 형성과 성숙이라는 결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하겠지만, 동시에 감정에 근거한 사랑의 필연성의 논지를 강조하다가 감정의 지향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을 사 랑하라는 도덕적, 종교적 명령을 따라 원수까지도 배려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규범적 특징을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3. 사랑과 정당화의 근거 포우스트와 포웁 뿐 아니라 바첵과 같은 가톨릭 윤리학자도 아웃카의 인간 이해를 초점으로 하여 아웃카의 ‘사랑’론의 근거가 신학이라기보다 는 철학이라고 비판한다. 도덕적 행위 주체로서의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내재적 가치에 대한 강조는 칸트의 의무론적 인간론은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특수 관계들이 갖는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인간 이해가 성서적,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칸트의 철학 곧 모든 사람들을 목적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인간 중심적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인 것이다. 이에 대해 아웃카는 기독교 사랑의 대상 범위에 있어서 보편성을 말할 때 칸트에 기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성서적이며 신학적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성경의 근거 본문을 몇 가지 제시하는데, 원수 사랑의 계명이 대표적이다. 원수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 하라 하심은 사랑 못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요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일 수 있고 또 이어야 함을 내포한다. 그리하여 원수 사랑의 계명에 담긴 중요한 규범적 원리는 사랑의 대상 범위에 관한 것이 된다. 모든 인간이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세리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마 5:46; 눅 6:32-34)는 가르침도 같은 맥락에 서 생각할 수 있는 본문이다.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없다고 함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심지어 미워하거나 박해하는 이들 까지도 사랑해야 함을 뜻하면서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사랑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윤리적 가르침의 맥락에서 십자가의 의미도 해석할 필요가 있다. 포우스트가 강조하는 대로 십자가의 목적은 화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화해만을 부각할 때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 사랑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고 싶다. 상호성도 중요하지만, 죄인임에도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롬 5:8)을 생각한다면, 전자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대가나 반응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여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규범적 의미가 약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가 대가를 바라고 죄인인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아가페의 보편성 원리의 근거를 찾는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 전통은 분명히 사랑의 대상 범위 이해에 있어서 포괄적이다. 기독교 사랑에 대한 어거스틴의 사회윤리적 이해에서도 이 보편성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신의 도성과 세속 도성의 관계를 대립으로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의 기반 혹은 공동의 추구의 여지를 남긴다. 둘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공동체적 실존에 필요한 요소로서 평화와 질서를 확보해 주시기 위해 정치사회적 체제들을 통해 섭리하신다. 하나님의 창조의 지평을 존중하는 섭리적 사랑이라 할 수 있겠다. 세속 영역에서 인간과 인간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 사랑의 품 안에 두고자 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섭리의 사랑은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확장된다. 온 인류 와 피조 세계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의 지평에 상응하면서, 기독교 사랑은 그 대상 범위에서 보편성을 띠는 것이다. 아웃카는 자신의 보편성 주장이 계몽주의나 칸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기보다는 특수주의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라는 특수한 전통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프라이(Hans Frei)의 명제를 인용하는 데, “모든 인간은 교회에게 주어진 이웃”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보는 신학적 근거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혹은 신 중심적 사랑(theocentric love)이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품고자 하시기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최상으로 사랑할 때 이웃과 자기 자신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아웃카는 기독교 사랑의 보편성에 대해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범위에 있어 보편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온 인류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유지시키시고 또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는 대로 이 사랑의 범위에 상응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그 범위에 있어(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여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은 적절한 혹은 정당한 이웃 사랑과 자기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관점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보편성에 대한 특수주의적 접근은 포우스트에게서도 발견된 바이다. 앞에서 본 대로, 포우스트는 교회 공동체를 아가페의 우선적 실현 자리로 보면서 그리스도 사랑의 보편성은 구원론적·그리스도적 지평을 벗어난 계몽주의적 만인애(滿人愛)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이끌고자 하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뜻에서 특수주의적 기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아웃카와 포우스트 사이의 접점을 발견한다.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 사랑의 보편적 범위를 논하면서 특수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접근이 아니라 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다만 아웃카는 신론적 명제에 근거하여 하나님 사랑에 상응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는 반면, 포우스트는 구원론적·교회론적 명제에 의지하여 특수 관계로서의 교우 관계의 보편적 확장을 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다른 방향에서 전개하고 있지만, 기독교 사랑의 논의를 ‘신학적 으로’ 심화시킨 점에서 그 공헌을 인정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V. 요약과 결론 행복은 희망을 향하여 어려움을 이겨내고 소명이나 과업을 수행하면서 얻게 되는 만족감·성취감에서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그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극복해낼 때, 비록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행복감에 젖어들게 된다. 이렇듯 행복은 현실적·활동적 삶 속에서 실현된다. 사랑의 동기를 가지면 결코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과 과업을 수행하여 성공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랑이 행복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일차적인 사랑은 동물적 본능에서 비롯되는,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전송하려는 목적이다. 따라서 근연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베풀어진다. 한편,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이성에 따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처럼 인간을 사랑함 같이 우리가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근연도를 따지지 않고 동등하게 배려하는 것이며, 내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근연도 내에서 실천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확장되어 모든 이들이 유익을 얻는 데에 있어서 하나가 됨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개인의 행복은 그가 속한 공동체 곧 사회의 행복과 직결되며 그 사랑은 이타심 곧 사랑이 극대화 될때, 인간이 본연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은 자연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참고 자료: 이창호. "사랑이 행복이다!." 기독교사회윤리 23.- (2012): 83-121. 현대 기독교윤리학계의 ‘사랑의 윤리’ 담론 탐색. |
질문:
1 사랑과 행복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2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특징을 간단히 기술하라.
3 아가페의 '동등'과 '배려'의 의미를 기술하라.
4 아가페가 자기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예를 들어 설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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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론에 밝다고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실천을 염두에 둔 사람은 정확한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덕에 지식을 더"해야 한다는 것은 덕을 베풀려는 사람은 적절한 분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