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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1~13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
(창 3:11-13)『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과 올바른 관계성(영적으로 한몸 됨)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누구와 관계하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볼 때 수없이 많은 것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삶을 이루고 개인의 역사와 사회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 간의 인간관계 등 모든 관계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계속되는데,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족과 관계성을 갖게 되고, 자라면서는 학교 친구와, 사회와, 교회와, 성도들과도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우리 현실에서의 관계들이 자기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관계 가운데 살아가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관계성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이든지 그 관계로 발생 되는 결과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관계성에 대한 결과를 알게 하는 말씀으로, 관계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계에 따라 이런 저런 결과가 자기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자신이 그 어떤 관계를 맺을 때에 그 결과까지 예측하고 관계를 가져야 하며, 또한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말씀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창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질문과 아담의 대답에서 관계성을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신분(하나님)과 만들어진 존재(사람)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질문에 부합하는 대답을 인간들이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보면, 주님과 바리새인의 대화를 보더라도 그렇고,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대답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무지하다는 얘기도 됩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5장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 사건을 보더라도 그러한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였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의 대답은 나를 저 연못에 넣어줄 자가 없나이다. 였습니다.
참으로 질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대답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두려워하고, 또 거부하기도 하는데 이는 율법적 사고 때문입니다.
율법적 사고란? 교회의 목사님이 가르치는 것 외에는 일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세뇌를 당한 결과 도저히 하나님의 참 말씀을 붙들래야 붙들 수 없는(유대종교인들이 된 자들처럼)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종교 교리로 만들어 진 사고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의 계시의 참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과 귀를 막아버리는 현상을 만듭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 말씀이나 섭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항상 삼가 조심하는 것이 옳습니다. (거짓 이단들의 전하는 말도 있음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나서 성경의 말씀과 같은지 또는 다른지를 비교하고 살펴보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그래서 말씀으로가 아닌 종교 교리로 반응한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따르는 목사가 혹 잘 못 된 목사라면? 우리는 이 종교의식으로, 그 사람에 의한 사고로 살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막는 문제가 되기에 신중하게 살핌이 필요합니다.
한번 고정된 사고(종교 교리와 된 의식)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이단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부분이며,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그 의식에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다시 들어가서, ~네가 먹었느냐? 하고 물었을 때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생각했어야 했으며, 생명 나무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대답을 들어 보면, 선악과 열매를 먹은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이야기이고, 무엇을 주제로 답하고 있는지 12절에 보면, 아담이 자기와 함께한 하와와의 관계성에 대한 답변을 합니다.
아담의 대답을 보면....“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한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와와의 관계성이고, 하와는 뱀과의 관계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기와 밀접한 관계성을 맺고 있는 존재 외에는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창3장 타락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고 타락하도록 놔 두었을까를 따질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 3장에서 인간의 실존,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 구원, 생명 나무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철저하게 자기 인식이 되어져야만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을 찾게 되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창세기 3장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담이 관계성을 맺은 이 여자가 누구냐? 어떤 여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나에게 준 그 여자 맞냐? 하는 것입니다.
창3장에 돕는 배필, 혹은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인 하와는, 신약성경의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신 보혜사 성령과 대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여자와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합니다. (참고로 이 관계성을 잘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창3장을 볼 때, 이 여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담의 갈빗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갈빗대로 번역된 이 단어를 원어로 보면 유난히 여기서(창세기에서)만 두번 갈빗대 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창2:21, 22) 그리고는 성경 어디에도 이 단어가 갈빗대라는 뜻으로 쓰인 적이 없습니다.
다니엘서 7:5절의 갈빗대라고 번역된 단어는 이 단어와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그런데 왜 창 3장의 이곳에서만 그렇게 번역되었을까요? 사람들이 갈빗뼈로 여자를 만들고, 그렇게 하니까 말이 되어서 갈비뼈라고 한 것입니다.
또 세어보니까 갈빗뼈 하나가 부족하니까 아하! 이것을 빼가지고 여자를 만들었구나 라고 하는데, 원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그 단어의 의미가 갈빗대가 아닌 다른 의미로도 얼마든지 번역될 수 있다는 얘기도 됩니다.
이 갈빗대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체라’인데, 이 단어가 원문직역하면 ‘갈빗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체라] 단어가 쓰여진 구절들을 살펴보면,
창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미 4: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미 4:7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습 3:19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여기서 [저는 자]는 누구를 가르치느냐 하면 야곱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자란? 실족한 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치 못한 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전 13장에서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으로의 구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체라’란 단어의 명사형은 ‘부분, 쪽, 편’ 그런 말입니다.
이 단어가 제일 많이 쓰인 곳이 어딘가 하면 모세 오경에서 레위기를 보면 법궤(증거궤) 양쪽 끝에 고리를 만들어 막대기를 꽂게 되어 있는데, 그때 이쪽 편에 고리 둘, 저쪽 편에 고리 둘, 할 때 이 단어가 쓰입니다. 즉 이 단어의 근본 개념이 [부분]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한쪽 부분이 전다”라는 의미로서 아주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단어입니다. 절망, 좌절, 타락 …같은 경우에 주로 쓰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와라는 이 여자는 근본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개념을 창세기의 하와에게 적용시킨다면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처음에 아담의 한쪽 부분으로 지으신 하와가 결국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 절뚝거리게, 즉 실족하게 만들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지 않은가 하는 말입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부족하게 만들어졌었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같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약도 아담하고 하신 것인데, 그 아담이 부족한 여자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따랐다는 것 자체가 저는 자(실족하는 자)가 되는 첫걸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잘 정리 해둬야 합니다.)
렘 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체라)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여기서 창세기의 갈빗대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체라)가 쓰였는데, 여기서는 타락한다는 개념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관계성을 맺은 여자가 바로 이런 여자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기를 기다리는 여자라는 말입니다.
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한글 개정개혁 성경과 다르다는 것에 놀라셨습니까?
지금까지의 고정 관념적 생각에서 이런 말씀을 접하게 될 때 어떤 느낌이 오는가요?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 35:15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시 38:17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환난을 당하매, 넘어지게 되었다” 절뚝거림, 또는 넘어짐(상징적으로):-역경, 주저함, 넘어짐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왜 그런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돕는 베필로 주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 이슈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로선 하나님의 주권 문제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빛도 창조하시지만 어둠도 지으십니다. 평강도 지으시지만 환난도 지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알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계획하시고 지혜롭게 처리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에덴동산의 그런 두 요소가 있었고, 아담과 하와, 생명 나무와 선악과 등이 있었다는 것, 뱀과 하나님의 그룹들이 공존했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그런 요소들이 항상 공존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다 허락하신 것들이라는 것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성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잘 간직하고 사수하라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그러한 요소들 때문에 하나님을 더 찾고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므로 결국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출생해 가지고 죄 가운데서 삶으로 인하여서 당하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구원의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와, 선악과, 뱀, 등을 허락하셨느냐는 것을 목적으로 본문이 취급되면 안 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고 따지는 것은 불신앙적인 질문이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것에 대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을 잠들게 한 후 갈빗대 (타락하게 하는 한 부분)을 빼내고 대신 살로(히브리 단어: 바사르) 채웠다고 하셨는데 그 [살]이 재미있습니다.
그 단어는 ‘신선하다, ’기쁜 소식을 전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본래 의미는 신선하다, 즉(장미꽃이 만발한, 상징적으로 즐거운); (기쁜 소식을)선포하다:- 전령, 전파하다, 공표하다, (좋은)소식(을)(전하다, 가져오다, 전파하다, 말하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여자는 남자의 여성형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여성형으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의 오묘함은 이 여자에게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정적인 존재로 만들어졌음에도 하나님이 그런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주신 목적이 뒤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하와로 지어집니다. 누구에 의해서죠? 아담에 의해 지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두 남녀를 비록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긴 하지만 가죽옷을 지어 입히므로 그들을 보호하시는 섭리를 이루십니다.
그녀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주는 자입니다. 그녀로부터 생명이 이어져 나가고 퍼져나가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놀라움을 보십니까?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주신 이상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인데 훗날 선지자들의 예언이나 선언을 볼 때 저는 자를 불러 구원하시며, 그들이 남은 자가 될 것이라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포기해버릴 것 같은 대상들을 하나님은 고치시고, 다시 쓰시며, 기어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자, 부분적인 것으로 부족하기 그지없는 자(갈빗대)를 하나님은 생명을 주는 자로 쓰십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그러하다는 것을 보이시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살면서 만난 존재들(하와, 뱀...)은 어차피 우리 주위에 항상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하여 그 말씀을 간직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의 핑계는....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위에 있는 존재들(교회, 종교, 남편, 아내, 사람, 목사 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런 사람과의 관계를 가질 때 저들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합하는가? 를 늘 질문하며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하라... 율법적 요구와 강요가 있는데, 그런 요구에 대해서도 왜 꼭 그래야 되는가에 대해서 성경을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교리로 살면서 구원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을 잊어선 안 되게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경을 통해 직접 듣거나 보지 않고 사람의 말(가르치는 자)만 듣고 그렇게 쉽게 동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관계성을 가진 저들이 음녀에 속했거나 바벨론에 속한 자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여자의 대답도 보면 기이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입니다. (13절) 그럼 여자는 뱀이 꾀었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왜 꾀임을 받는 순간엔 몰랐다가 일을 저지른 다음에야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정당한 대답인가? 하는 것입니다.
롬3:19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고 나면 입이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유구무언이란 말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했습니까? 라든가, 나를 왜 요모양 요꼴로 만드셨습니까? 라는 말들이 나올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핑계에 불과한 말들이 인간사의 모든 불평, 불만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11절 이하를 보시면....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의,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는 참으로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롬3:10~11)
하나님이 왜 생명과는 먹어도 되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깨닫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생명 과에 무관심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방인들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길로 갈 자들입니다. 지금 말하는 대상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에 대한 얘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이 핑계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핑게를 대거나 할 말이 많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지 못했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이 감추신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 직접 듣는다 해도 알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직접 대화를 했으나 저들은 전현 못 알아 들었음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롬 3:13 – 18)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대답이 나오는 것이지 어떻게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까? 여기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실과를 먹었느냐? 입이 안 열려져야 합니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먹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입에 말이 많습니다.
눅 18: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인간의 사회생활과는 연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생활이 너무 힘이들어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제대로 못했노라고 혹은 못하겠노라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식은 안 통한다는 얘깁니다.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눅 17: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이것이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위치를 올바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줄 때 아담에게 아무런 번민이 없었을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도 생각나고 여자의 달콤한 권유와 충동질 사이에서 갈등이 없었을까요?
우리들의 현실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이 싸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인데 내 생각과 현실 상황은 이렇다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때마다 인간의 죄악성은 자기를 합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대답도 동일합니다.
처자식, 먹고사는 것, 사업… 등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일이고, 하나님 섬기는 일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자기의 일이란 것에도 하나님의 시키심과 허락하심의 섭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일도 주님 안에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중요하다고 하여 하나님의 직접 시키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바로 그 일에 실패한 것이 아담의 모습입니다.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버리고 ‘누가 나에게 ~라고 하므로(주므로)라는 것이 핑계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다라는 것으로 깨닫고 또 믿고 있는데, 누가 그게 아니고 이거야 라고 말하므로 내가 따랐나이다가 하나님께 통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왜 두려워합니까? 노아가 실패해서 거지가 되었다면, 엘리야가 실패하여 비참하게 되었었다면,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몸을 사렸다고 할 것인데, 성경이 증거 함에도 왜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했느냐? 그리고 왜 음녀의 말에 넘어갔느냐? 지적한다면 할 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담대하게 구걸해라. 뭐가 없으니 좀 달라고 말이다. 욕심과 교만과 자존심이 살아 있으니 그런 구걸을 못하는 것입니다. 거지처럼 살더라도 중심에는 항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담은 마귀의 미혹에 넘어갔다기보다 하나님의 시험에서 낙제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와와 같은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셔서 아담의 그렇게 되어진 결과를 보여 주시고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여자가 누구냐? 오늘날의 하와가 누구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을 권하는 여자 그가 누구냐? 이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여자의 실존을 모르면서 그 여자가 주는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바로 실패한 아담입니다.
그리고 나서 언제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저 여자가 나에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만 되풀이하고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망한다는 진리를 뒷받침하는 사건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일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써 그것이 나의 합리화의 대상이 된다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아담은 하와를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까? 교회(개인)는 교회(전체)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만나면 지금껏 자기가 살아왔던 모든 생활의 환경을 접고 그리스도에게 맞는 것으로 옮겨야 합니다.
여자가 신랑을 만나기 전에는 살림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할 수 있지만 신랑을 만나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 키우는 일에 전념해야 마땅한 원리가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자라면 이제는 이전의 행하던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 있는 남편이란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아 기르다가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중심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칼이 이삭의 심장을 향해 내려 꽂히려는 순간까지 지켜보시다가 막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자세를 보신 것입니다.
그 마음에 있는 것처럼 그대로 실행까지 이어지는 것의 확실성을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아시겠지? 하고 실행으로 옮기는 일을 미룹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1㎝ 앞까지 실행하는가? 아니면 풀무 불 속까지 들어가는가? 들어가십니다. 사자 굴 속에 실제로 들어가는지를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앞에서 너무 계산적이고 약삭빠른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시겠지! 내 형편, 상황은 잘 아시겠지, 하면서 실행을 안 합니다.
성경 공부하는데 시간을 내지 않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이나 모든 면에 너무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데 빠른 것이 복을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원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실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만 해 놓고 별거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분을 만났을 때의 감격과 황홀한 감사 그리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그분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수준이 문제가 됩니다.
남편의 수준에 따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자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살아봐야 하고 신앙생활은 해 봐야 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서 큰소리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담 사건을 통해서 여자를 주신 목적, 여자의 출처, 여자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들에게 주어진 관계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관계성들이 주어지게 되었고 생기게 되었는가? 도움이면 도움, 행복한 삶이면 삶, 환란이면 환란, 분노면 분노, 배신이면 배신… 이런 모든 관계성들이 과연 내게 유익했는가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나에게 귀한 선물로 주셨는가? 아니면 미혹의 요소로 허락하셨는가? 물론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주목적임엔 틀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분별하고 깨달음으로 허송세월하지 않고 푯대를 향해 더 빨리 달려갈 수 있는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부모, 남편, 아내, 자식, 친구…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해서 모두 나를 위해 있는 것 또한 아닌 것입니다. 그런 요소들 가운데서 나를 넘어지게 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와를 교회에 빗대어 생각해 볼 때 어느 날 정통 교회가 사탄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금령을 어겨 변질 되었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고 역사가 증거 하는 사실인데 어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