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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10월 (1597년 10월)
767
10월 초1일 (무오) 맑다. [양력 11월 9일]
768
아들 회(薈)를 보내서 제 어미를 보고 여러 집안의 생사(生死)를 알아 오게 하였다. 심회가 몹시 안달나서 편지를 쓸 수 없었다.
769
병조(兵曹)의 역꾼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 왔는 데,
770
"아산 고향의 한 집안이 이미 적에게 불타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게 없다."
771
고 한다.
772
10월 2일 (기미) 맑다. [양력 11월 10일]
773
아들 회가 집안 사람들의 생사를 알아볼 일로 배를 타고 올라 갔으나, 잘 갔는지 못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심정을 어찌 다 말하랴.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심회가 만갈래였다.
774
10월 3일 (경신) 맑다. [양력 11월 11일]
775
새벽에 출항하여 변산을 거쳐 곧바로 법성포로 되돌아 가는데 바람은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에 이르렀다.
776
10월 4일 (신유) 맑다. [양력 11월 12일]
777
그대로 머물러 잤다. 림선(林 ) ∙ 업 등이 사로잡혔다가 적에게 빌어 임치로 돌아와서 편지를 보내왔다.
778
10월 5일 (임술) 맑다. [양력 11월 13일]
779
그대로 머물면서 마을집 아래로 내려가 잤다.
780
10월 6일 (계해) 흐렸다가 비가 뿌렸다. [양력 11월 14일]
781
눈비가 세차게 왔다.
782
10월 7일 (갑자) 바람이 고르지 않고 비가 오락가락한다. [양력 11월 15일]
783
소문에 호남 안팎에는 적선이 없다고 한다.
784
10월 8일 (을축) 맑으며, 바람이 살랑거렸다. [양력 11월 16일]
785
출항하여 어외도에 이르러 잤다.
786
10월 9일 (병인) 맑다. [양력 11월 17일]
787
일찍 출항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성 밖에는 집에 사람이 살지 않 고, 인적(人跡)이 하나도 없다. 보이는 것은 참혹 뿐이었다. 그 러나 저녁에, 해남에서 흉악한 적들이 진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788
초저녁에 김종려(金宗麗) ∙ 정조(鄭詔) ∙ 백진남(白振南) 등이 와서 봤다.
789
10월 10일 (정묘) 비가 뿌리고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1월 18일]
790
항해할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렀다. 밤 열 시쯤(二更)에 중군장 김응함(金應 )이 와서 전하는 데,
791
"해남에 있던 적들이 많이 물러 간 모양입니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빌어서 놓여 왔습니다고 했다."
792
고 한다. 마음이 언짢아서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왔는 데, 배가 보이지 않은 것은 바깥 섬으로 달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793
10월 11일 (무진) 맑다. [양력 11월 19일]
794
밤 두 시쯤에 바람이 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닻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정탐인 이순(李順) ∙ 박담동(朴淡同) ∙ 박수환(朴守還) ∙ 태귀생(太貴生)을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적의 무리들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다.
795
오정에 안편 ∙ 발음도(安便發音島= 안창도 ∙ 팔금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796
육상에 내려 산마루로 올라 가서 배 감출 곳을 찾아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는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으로 뚫렸으며, 서쪽에는 비금도로 통하여 눈앞이 툭 터였다.
797
잠깐 있으니, 중군장과 우치적(禹致績)이 올라 오고, 조효남(趙孝南) ∙ 안위(安衛) ∙ 우수(禹壽)가 잇따라 왔다.
798
날이 저물어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으니,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왜적의 사실 형편을 말하고, 또 왜놈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싫어한다고 했다.
799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와서 알현하고 또 사로잡혔던 경위를 말하는데, 아픈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800
저녁에는 따뜻하기가 봄 같아 아지랑이가 하늘에 아른 거려 비올 징조가 많았다.
801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홀로 봉창에 앉았으니 심사가 만 갈래였다.
802
밤 열시쯤에 식은 땀이 몸을 적셨다. 한밤에 비가 왔다.
803
이 날 우수사가 군량선에 있는 사람에게 장단지를 몹시 때렸다고 했다. 놀랄 일이다.
804
10월 12일 (기사) 비가 내렸다. [양력 11월 20일]
805
오후 한시에 맑게 개었다.
806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절하기에 하인의 장단지를 때린 죄를 용서했다.
807
가리포첨사(이응표) ∙ 장흥부사(전봉) 등 여러 장수들이 와서 절하고 종일 이야기했다.
808
탐후선이 나흘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 아마 생각건대, 흉악한 적들이 멀리 도망가기에, 그 뒤를 쫓아가느라 돌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809
그대로 발음도에 머물렀다.
810
10월 13일 (경오) 맑다. [양력 11월 21일]
811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812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 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 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 ∙ 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
813
고 했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814
곧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 ∙ 금갑도만호 이정표(李廷彪) ∙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 ∙ 당포만호 안이명(安以命) ∙ 조라포만호 정공청(鄭公淸) 및 군관 림계형(林季亨) ∙ 정상명(鄭翔溟) ∙ 봉좌(逢佐) ∙ 태귀생(太貴生) ∙ 박수환(朴壽還)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815
저녁나절에 내려가 언덕에 앉아 윗자리에서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 장흥부사 전봉(田鳳)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816
이 날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뒤떨어진 죄를 다스렸다.
817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裵永壽)가 와서 아뢰기를, "수사의 부친이 외해에서 살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818
이 날 새벽 꿈에 우의정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했다.
819
낮에 선전관 네 명이 법성포에 이르러 내려 왔다는 말을 들었다.
820
저녁에 김응함(金應 )에게서 섬 안에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산골에 깊숙히 숨어서 소와 말을 잡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황득중(黃得中) ∙ 오수(吳守) 등을 보내어 염탐케 하였다.
821
이 날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822
10월 14일 (신미) 맑다. [양력 11월 22일]
823
밤 두 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는 데, 말이 발을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쓸어지지는 않고,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824
저녁나절에 배 조방장과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봤다. 배 조방장의 종이 영남에서 와서 적의 형세를 전했다.
825
황득중(黃得中) 등은 와시 아뢰기를, "내수사의 종 강막지(姜莫只)라는 자가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열두 마리를 끌고 갔다" 고 했다.
826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827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828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829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 하지 못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너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 네 누이 ∙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830
이 날 밤 열시쯤에 비가 왔다.
831
10월 15일 (임신) 비바람이 종일 불었다. [양력 11월 23일]
832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종일 이리뒤척 저리뒤척 했다.
833
여러 장수들이 와서 문안하니 얼굴을 들고 어찌 맞으랴!
834
림홍(林 ) ∙ 림중형(林仲亨) ∙ 박신(朴信)이 적을 정탐하려고 작은 배를 타고, 흥양 ∙ 순천 등지의 바다로 나갔다.
835
10월 16일 (계유) 맑다. [양력 11월 24일]
836
우수사와 미조항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현감도 보냈다.
837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으므로, 영 안에 있는 강막지(姜莫只) 집으로 갔다.
838
밤 열 시쯤에 순천부사 ∙ 우후 이정충(李廷忠) ∙ 금갑도만호 ∙ 제포 만호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839
왜놈 열세 명과 투항했던 송원봉(宋元鳳) 등을 목 베고서 왔다.
840
10월 17일 (갑술) 맑은 날씨인 데 바람도 종일 세게 불었다. [양력 11월 25일]
841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842
우수사가 와서 봤다.
843
10월 18일 (을해) 맑다. [양력 11월 26일]
844
바람이 자는 것 같았으나 우수사는 배를 출항할 수 없어 바깥바다에서 잤다.
845
강막지(姜莫只)가 와서 알현했다. 림계형(林季亨) ∙ 임준영(任俊英)이 들어왔다.
846
10월 19일 (병자) 맑다. [양력 11월 27일]
847
새벽 꿈에, 고향집의 종 진(辰)이 내려왔기에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848
저녁나절에 조방장과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백 진사가 와서 봤다. 림계형(林季亨)은 와서 알현했다.
849
김신웅(金信雄)의 아내 ∙ 이인세(李仁世) ∙ 정억부(鄭億夫)를 붙잡아 왔다.
850
거제 ∙ 안골 ∙ 녹도 ∙ 웅천 ∙ 제포 ∙ 조라포 ∙ 당포 ∙ 우우후가 와서 봤다. 적을 잡은 공문을 와서 바쳤다.
851
윤건(尹健) 등의 형제가 왜적에게 붙었던 두 명을 잡아 왔다.
852
어두울 무렵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다 말하랴! 이승에서의 영령이라 마침내 불효가 여기까지 이를 줄을 이찌 아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억누를 수가 없다.
853
10월 20일 (정축) 맑고 바람도 잤다. [양력 11월 28일]
854
이른 아침에 미조항첨사 ∙ 해남현감 ∙ 강진현감이 해남현의 군량을 운반할려고 여쭙고 돌아갔다. 안골포만호 우수(禹壽)도 여쭙고 돌아갔다.
855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 ∙ 정수(鄭遂) ∙ 백진남(白振男)이 와서 보고, 또 윤지눌(尹志訥)의 못된 짓을 말하였다.
856
김종려(金宗麗)를 소음도(所音島) 등 열세 곳 섬의 염전의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 감독관)으로 정하여 보냈다. 영의 둔덕에서 일하는 사화(士化)의 모친이 배 안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곧 묻어버릴 일로 군관에게 시켰다.
857
남도포 ∙ 여도 두 만호가 와서 알현하고서 돌아 갔다.
858
10월 21일 (무인) 밤 두시쯤에 비오다 눈오다 했다. [양력 11월 29일]
859
바람이 몹시 추웠다. 뱃사공이 추워 얼까 걱정이 되어 마음을 잡지 못했다.
860
오전 여덟시부터 바람이 불고 눈이 펑펑 내렸다.
861
정상명(鄭翔溟)이 와서 아뢰기를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이 들어 왔다고 했다.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관리인데, 사사로이 목숨만 보존할 꾀를 부려 수군에 오지 않고, 산골에 숨어서 달포쯤 관망하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는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이제야 나타나니, 그 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꽤씸하다.
862
저녁나절에 가리포 및 배 조방장과 우후가 와서 절했다.
863
바람불고 눈이 종일 내렸다. 장흥부사가 와서 잤다.
864
10월 22일 (기묘) 아침에 눈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11월 30일]
865
장흥과 같이 식사를 했다.
866
오후에 군기사장(軍器査長) 선기룡(宣起龍) 등 세 사람이 임금의 분부와 의정부의 방문을 가지고 왔다.
867
해남현감(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尹海) ∙ 김언경(金彦京)을 묶어서 올려 보내 왔다. 그래서 나장이 있는 곳에 단단히 가두었다.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은 가리포의 전선에 가두었다.
868
우수사가 황원에서 와서 말하기를, "김득남(金得男)이 처형되었다"고 했다. 진사 백진남(白振南)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869
10월 23일 (경진) 맑다. [양력 12월 1일]
870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 ∙ 정수(鄭遂)가 와서 봤다. 배 조방장과 우후 ∙ 우수사우후도 와서 봤다. 적량 ∙ 영등포만호가 잇따라 왔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871
이 날 낮에 윤해(尹海) ∙ 김언경(金彦京)을 처형했다.
872
대장장이 허막동(許莫同)을 나주로 보낼려고 밤 아홉시에 종을 시켜 불렀 더니 배가 아프다고 했다. 싸움말의 떨어진 편자를 갈았다.
873
10월 24일 (신사) 맑다. [양력 12월 2일]
874
해남에 있던 왜의 군량 삼백스무두 섬을 실어왔다.
875
초저녁에 선 전관 하응서(河應瑞)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처형하라" 는 것이었다.
876
그 편에 들으니, "명나라 수군이 강화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877
밤 열시쯤에 병을 다스리려고 땀을 내니 등을 적시고 밤 한시에야 그쳤다.
878
밤 세 시에 또 선전관과 금오랑이 왔다고 한다. 날이 밝자 들어오는데, 선전관은 권길(權吉)이요, 금오랑(의금부도사 주부) 홍지수(洪之壽)였다. 무안현감(남언상) ∙ 목포만호(방수경) ∙ 다경포만호(윤승 남)를 잡으러 여기 왔다.
879
10월 25일 (임오) 맑다. [양력 12월 3일]
880
몸이 몹시 불편했다.
881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종 순화(順花)는 아산에서 배를 타고 왔다.
882
집안의 편지를 받아 보니 심회가 불편하여 이리뒤척 저리뒤척이다가 혼자 앉아 있었다.
883
초저녁에 선전관 박희무(朴希茂)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명나라 수군이 배를 정박하기에 알맞은 곳을 골라서 장계 하라는 것이었다.
884
량희우(梁希雨)가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가 되돌아왔다.
885
충청우후가 편지를 보내고 또 홍시 한접을 보내 왔다.
886
10월 26일 (계미) 새벽에 비를 부렸다. [양력 12월 4일]
887
조방장 등이 와서 봤다. 김종려(金宗麗) ∙ 백진남(白振南) ∙ 정수(鄭遂) 등이 와서 봤다.
888
이 날 밤 열시에 자는데 식은 땀이 나서 몸을 적시었다. 온돌이 너무 따뜻한 탓이었다.
889
10월 27일 (갑신) 맑다. [양력 12월 5일]
890
영광군수(전협)의 아들 전득우(田得雨)가 군관이 되어 알현했다. 곧 그 부친이 있는 곳으로 돌려 보냈더니 홍시 백 개를 가지고 왔다.
891
밤에 비가 뿌렸다.
892
10월 28일 (을유) 맑다. [양력 12월 6일]
893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하여 피은세(皮銀世)에게 주어서 보냈다.
894
저녁나절에 강막지(姜莫只)의 집에서 대장선으로 옮겨 탔다.
895
저녁에 소금밭의 서원 도걸산(都巨叱山)이 큰 사슴을 잡아 바쳤다. 그래서 군관 등에게 주어 나누어 먹게 했다.
896
이 날 밤에는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897
10월 29일 (병술) 맑다. [양력 12월 7일]
898
밤 두 시쯤에 첫 나발을 불고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는데 벌써 부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샛바람이 살살 불었다.
899
목포에 이르러 보화도(목포시 고하도)로 옮겨 정박하니, 된하늬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 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보화도에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했다.
900
10월 30일 (정해) 맑으나 샛바람이 불고, 꼭 비올 것 같다. [양력 12월 8일]
901
아침에 집 지을 곳으로 내려가 앉았으니,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했다.
902
해남현감 류형(柳珩)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사람들의 소행을 전했다.
903
일찍 황득중(黃得中)으로 하여금 자귀장이를 데리고 섬 북쪽 봉우리로 가서 집 지을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904
저녁나절에 해남에 있던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鄭銀夫) 및 김신웅(金信雄)의 부인이 왜놈에게 지시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 자 두 명과, 선비 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金愛南)을 아울러 목 베어 효시하였다.
905
저녁에 량밀이 도양장의 벌레 먹은 곡식을 멋대로 나누어 준 일로 곤장 예순 대를 쳤다.
906
(** 다음은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1597년(정유)(Ⅰ) 10월 8일(乙丑) 뒷 장부터 모두 3 장으로 적혀 있는데 그 앞의 한 장은 「讀宋史」 이다.)
907
"어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綱)은 가려고 하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가.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 때야말로 종사의 위태함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만 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이어서 간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생각도 내지 못할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 젖히고서 사세가 여기까지 왔으니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렇지도 못한 다면, 짐짓 화친하려는 계획을 따라 몸을 그 속에 던져 온갖 일에 낱낱이 꾸려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어늘, 강의 계획은 이런데서 내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
908
(** 다음은 위의 「독송사(讀宋史)」가 적힌 그 다음 장에 두 장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909
"새로 급제한 원경전(元景銓) ∙ 한치겸(韓致謙) ∙ 정복례(鄭福禮)는 우병사의 진에, 남엽(南曄) ∙ 정재순(鄭在淳) ∙ 조형(趙珩) ∙ 조완(趙琓)은 진주 운곡에, 이홍훈(李弘勛) 주인집은 송곡에, 창노의 우두 머리 봉환(鳳還) ∙ 석운(石雲) ∙ 뢰손(雷孫)은 백천 별장에, 훈련정 조신옥(趙信玉) ∙ 홍대방(洪大邦)은 쌀 14 ∙ 콩 18 ∙ 파초 4 ∙ 콩 2 및 10, 대오미 2를, 흥양 정병 김득상(金得尙)은 화살쏘기로, 김덕방(金德邦) ∙ 김윤복(金允福)은 처음 벼슬에 나왔고, 처음 벼슬에 나온 조언해(趙彦海) ∙ 주부 송상보(宋象甫)는 말이 없고, 순천 이진(李珍)과 아산에서 처음 벼슬한 박윤희(朴允希)는 지금 충청도 방어사의 진중에 있는데 싸움말이 있어 적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