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壯途)! 친필 봉투
월요일 아침, 거금도 임성현 청년의 반가운 전화였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잘 계시지요.
내일 시간 있으세요. 광주 가려고요.
입대하기 전에 엄마, 아빠랑 무등산 올라가고 싶어서요.
교회 아이들 공부방 시간이 오후 4시라 시간이 넉넉지 않네요.
9시 30분까지 갈게요.’
‘그래, 고맙다. 참 많이 보고 싶었다.
무등산 주차장에서 만나자. 기대가 된다.
조심해서 오렴. 황 목사님 시간 되면 모시고 기다릴게..’
‘예, 감사합니다.’
이튿날, 아침 뜀질을 마치고 서둘러 나섰다.
소태동 톨게이트 내려가는 길이 병목 현상이라 막혔다.
약속 시간을 간신히 지켰다.
성현이도 교통체증에 늦었다.
기다리며 공원 초입 차량 통제실에 들렸다.
걷기 불편한 성현이 엄마 위해 승용차 출입을 허락받고 싶었다.
등산객들의 민원과 공원을
곱게 간직하려는 취지에 틈을 주지 않았다.
공원 탐방 안내센터로 갔다.
휠체어 요구에 고장 난 상태였다.
제복 입고 폼만 잡으면 뭐 하는가?
나이 든 분이나 다리 아픈 사람은
산에 접근하지 말라는 거 같았다.
건강한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골목 식당 길로 들어가 주차 공간을 확보해 뒀다.
다시 입구로 내려가 성현이 엄마 아빠를 만났다.
싱그러운 5월 햇살에 얼굴이 빛났다.
초록 숲속에 복된 아침 빛이 내려앉았다.
임 목사님의 튼실한 팔을 사모님이 의지하여
한발 한발 내디디며 가볍게 걸었다.
산들바람에 지저귀는 새소리 들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소풍 온 여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발랄한 모습은 보기 좋았다.
목사님은 장엄한 풍광에 사로잡혀 걷기 불편한 사모님은
공원 근처에서 쉬게 하고 2시간 산행으로 땀 흘리길 원했다.
지난주일 설교가 떠올랐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은 동사다.
그 속에 친밀함과 배려가 없으면 풍성과 충만을 누릴 수 없다.
난 사모님 중심의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길가에 의재 미술관이 보여 권했더니
임 목사님이 입장료를 내고 함께 들어갔다.
진도 출신 의재 허백련 화가(1891-1977)의
먹빛이 흐르는 작품 전시장이었다.
순간 고교 시절 붓을 든 제자에게
허백련 화가의 탁월함을 소개한 이준배 미술 선생님을 소환시켰다.
지금도 마음속에 묵향이 남아
서예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붓을 꺾지 않은 상태다.
붓글씨, 사군자, 문인묵화 작품을 감상하며
그분의 고매한 인격과 예술성의 탁월성에 놀랐다.
‘시는 형상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이 없는 시’였다.
그림과 시, 철학을 한 폭에 담은 선비의 예술 작품이었다.
필획에서 느껴지는 기운생동은
글과 그림이 하나라는 옛 구절이 실감 났다.
밀려오는 감동에 일일이 카메라에 담았다.
필획이 순박하고 유려하며 조화로웠다.
도톰하면서 둥글둥글한 서체는
후덕한 그의 성품을 닮았다는 평이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의재 선생의 삼애사상(三愛思想)은 그의 삶과 예술의 근간이었다.
내부 공간은 반투명 유리벽을 통해 자연광이 여과되어 들어왔다.
비움과 고요함이 만들어 내는 정일한 공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느끼는 풍경으로 작가의 예술관을 담은 상설 전시관이었다.
전시 작품 관람 후 무등산 속을 향해 천천히 오를 때
고은 시인의 ‘그 꽃’이 떠올랐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무심코 앞만 보고 빠르게 올라갈 때
눈에 띄지 않던 꽃들이 내려올 때 발견한 경우가 많다.
왜 올라갈 때 보지 못했을까?
분명히 이 길을 지났는데 말이다.
나그네 인생길, 오르막 내리막의 롤러코스터다.
인생 오르막에서 앞만 보고 달릴 때
보지 못한 일들이 인생의 내리막에서 새롭게 발견하여 만난다.
인생 오르막만 꽃길이 아니라 내리막도 꽃길이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꽃길이라
더 소중하고 귀하게 다가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울창한 숲속의 아름드리 원목이 장관을 이뤘다.
방문객의 발소리 들으며 무성하게 자랐다.
짙은 초록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들풀에게 일일이
‘너 이름은 뭐니?’ 묻고 싶었다.
처음 보는 풀꽃, 자세히 보지 않으며
스쳐 지나갔을 것인데 길가에서 첫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반가웠다.
피톤치드 풍부한 숲에 흐드러지게 핀 등나무 꽃이 화려해 보였다.
민감한 감성의 소유자인 사모님께서
와~와~ 감탄사를 날렸다.
무주 구천동 출생인 임 목사님은
나무와 열매의 특성을 세세하게 알렸다.
식물학 박사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 따라 자연산 버섯을 채취하여
짬뽕 국물에 넣어 팔았다는 체험담은
아침밥을 가볍게 먹은 자의 입맛을 돋우었다.
깊은 계곡에서 흘려 내려온 물소리에 귀를 담갔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쉬는데 엉겅퀴가 지천에 깔렸다.
시멘트 틈 사이에 개망초가 빼꼼히 나와 인사를 건넸다.
노랑나비도 꿀을 찾아 식사 중이었다.
햇살 머금은 노란 꽃들이 바람에 반짝반짝 춤을 췄다.
대숲 바람 소리도 가만히 앉아 들었다.
어마어마한 선물인 자연,
우리 교회 앞에서 35번 타고 종점에 내리면 쉽게 찾을 곳이다.
복잡한 생각 내려놓고 싶은 쉼터였지만
평소 삶의 여유를 누리지 못함이 아쉬웠다.
성현이도 학업 중에 받은 스트레스 날리기
안성맞춤인데 처음 찾는 일에 후회막급 한 눈치였다.
군대 마치고 복학하면 무등산 자주 오르겠다는 각오를 앞세웠다.
김형석 교수 책과 간디 자서전과
장석주 시인 글 보면 산보가 일상이었다.
그분들 필력은 바람결 같았다.
샤브샤브로 배불리 점심 먹고 스승의 날 선물을 받았다.
난 壯途(장도)! 친필 봉투를 줬다.
2023. 3. 6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