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가 찾아온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논에 도착해보니, 써레질이 잘 되어 가지런한 논에는 모내기에 필요한 물이 적당히 고여 있고 군데군데 모내기하기 편하게 모가 날라져 놓여 있어, 논 주인의 성품을 잘 나타내는 것 같다.
벌써 나와 논에서 모를 추스르고 있는 아주머니는 희수 아버지가 어떻게든 모가 고사하는 것을 줄여 보려고 급하게 구한 품앗이 일꾼으로 동네 아주머니란다.
아주머니와 현영이가 못 줄을 잡고 희수 아버지와 영섭과 현수가 모를 내기로 했다.
모내기의 속도는 느리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를 내며 뒤를 돌아다보면 누렇게 황토 빛을 띠고 있던 흙 위에 초록색 커튼이 깔리는 것 같아 힘은 들지만, 기분은 좋았다.
모내기를 하는 동안 희수 아버지와 동네 아주머니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모내기를 잘한다고 칭찬했다.
의례적인 인사인지 몰라도 칭찬을 듣는 것은 하는 쪽보다 기분이 좋은 법이다.
10시쯤 힘들고 지쳐 갈 무렵 희수 어머니가 막걸리와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안주로 새참을 가져오셨다.
힘도 들고 허리도 아파오고 꾀가 날만 한 적당한 시기에 새참으로 허기도 달래고 쉴 시간도 가졌다.
날씨는 푸르고 맑았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가고 구름이 일으키는 바람이 논둑에 포풀라 나무 잎을 흔들고 공중을 나는 참새 떼들의 움직임도 부산하다.
등줄기에 땀이 식어 갈 무렵 모내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닷 마지기 논에 1/2쯤 모가 꽂혀갈 무렵 점심때가 되었다.
희수 어머니가 점심 광주리를 이고 나오시는 뒤로 주전자를 든 고등학생 또래의 처녀가 따라오고 있다.
그것을 본 아주머니가
“희수가 물 주전자를 들고 나오는 군.” 하신다.
포풀라 나무 아래 그늘진 적당한 곳에 점심 광주리를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았다.
어머니가 밥을 푸시고 희수가 국그릇을 돌린다.
국그릇을 받던 영섭은 희수를 보고 속으로 감탄한다.
‘시골에 이처럼 청순하고 예쁜 여학생이 있다니.’
영섭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희수의 얼굴에 홍조가 어린다.
현영도 영섭과 같은 생각을 하며 국그릇을 받았다.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현수가
“아참! 내가 깜박했구나, 내 동생 희수를 소개하는걸
내 동생 희수다. 신산리에 있는 S고등학교 2학년이다. 미인이지? 미스코리아가 꿈이시다.”
하는 소리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고
“오빠도 싱겁기는?”
하고 희수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는다.
웃음이 끝나자
“희수야 이쪽은 오빠의 대학 동기들로 영섭과 현영이다. 오늘은 무보수 일꾼이지만 앞으로 오빠처럼 대해라.”
현수의 소개에 이어 동네 아주머니가
“희수는 좋겠다. 이렇게 잘 생기고 헌칠한 오빠들이 둘씩이나 새로 생겼으니.”
하신다. 그 말에 희수가 웃으며 수줍게
“오라버님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했고
“그래, 나도 희수랑 친하고 싶구나.”
“예쁜 동생! 우리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
하고 영섭과 현영이 각각 인사를 했다.
점심이 끝난 후 광주리를 챙긴 어머니와 와 물 주전자를 든 희수는 집으로 향하고 다른 사람들은 점심 후에 휴식으로 적당히 쉴 그늘 같은 곳을 찾고 있을 때
“으악! 뱀!”
하며 희수가 논둑에서 펄쩍 뛰더니 논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뒤따라가시던 어머니는 깜작 놀라 광주리를 팽개치고 뛰어갔고 쉬려고 자리를 잡던 사람들이 모두 허둥지둥 달려갔다.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희수가 넘어진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현영이다.
정신을 잃은 희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곁에는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광주리가 논바닥에 처박혀 있고 깨어진 그릇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이를 지나 저만치 살모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멀어지고 있다.
논둑을 지나가던 뱀을 희수가 못 보고 밟은 모양이다.
쓰러진 희수의 종아리에는 뱀에 물린 자국이 뚜렷이 있다.
현영이 급히 허리띠를 풀어 뱀에 물린 자리보다 15Cm 위쪽의 다리를 묶고 늘 열쇠고리에 매어 가지고 다니던 주머니칼로 물린 자국을 2Cm 정도 절개하고 입으로 독을 빨아내는 등산반에서 배운 응급조치를 재빠르게 취했다.
응급조치가 끝난 후 셋 중 등치가 제일 좋은 영섭이 희수를 업고 동네로 향하고 현수는 택시를 부르러 동네로 먼저 달려갔다.
희수는 병원에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렸다.
병원에서는 응급처치가 신속히 잘 이루어져 독이 많이 퍼지지 않아 하루나 이틀 정도 입원해 있으면 된다고 했고 이 말을 들은 희수 부모님과 현수는 불행 중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희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현수가 희수와 같이 병원으로 간 뒤 영섭과 현영은 다시 논으로 가서 흐트러진 점심밥 광주리를 정리하여 동네로 가져와서 결과를 기다리며 가슴 조이고 있다가 현수가 돌아와 전해 주는 말을 듣고 마음을 놓았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난 후 정신을 차린 희수가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 돌아가서 남은 모를 마저 내시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논일이 마음에 걸려 마을로 돌아오신 부모님은 그러나 충격으로 몹시 힘들어하시고 얼굴도 초췌해 보였다.
한동안 넋을 놓고 계시는 희수 아버지에게 다가간 현수가
“아저씨 모를 마저 내야하지 않겠어요?”
하고 묻는다.
“학생들한테 미안하군.”
영섭이 들을 보고 아저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신다.
“아저씨 놀래셨죠?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하는 영섭의 대답에
“모를 내긴 내야겠는데---” 힘없이 말 하신다.
“아저씨가 괜찮으시면 저희들은 괜찮으니 걱정마시고 다시 시작하시죠.”
하는 영섭의 말에 “그렇게 하시죠.” 하고 현영도 찬성을 표시하고
“희수 아버지 그럼 남은 모마저 내죠?”
동네 아주머니도 동의하셔서 다섯은 다시 논으로 갔다.
저녁 새참을 내오신 희수 어머니는 그때까지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이 잘 안 놓인다고 하셨다.
희수의 일로 모내기는 20;00시 쯤 돼서야 끝났다.
어두워진 시야에도 초록색 모들이 꽂혀있는 논이 주위보다 더욱 검게 보이며 하루에 이루어 놓은 노동의 량을 나타내고 있다.
노동에는 언제나 거기에 맞는 결과가 따른다.
그 노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면 그 노동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그 노동에 참여한 사람이 보람을 느끼게 한다.
논을 나서며 영섭과 현영은 자기들이 이루어 놓은 노동의 결과에 마음이 흐뭇했다.
‘낮이라면 초록색 융단 위로 파란 손을 내민 모 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살랑살랑 손짓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던 영섭은 모들이 모두 잘 자라 올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며 잠시 모내기가 끝난 논을 둘러보았다.
그 모양을 본 현영도 싱긋이 웃으며
“힘들었어도 보람은 있지?” 한다.
“그래! 이게 오늘 우리가 한 일이야.”
“너희들 힘들지 않았니?” 현수가 끼어든다.
“솔직히 힘들었다. 그러나 기분은 좋아.”
하는 영섭이 대답이 끝나자.
“학생들 오늘 참 수고했어. 희수 일도 고맙고.”
희수 아버지가 다가오며 말하신다.
“괜찮습니다. 아저씨가 희수 일로 더 놀라셨죠.”
“그래 놀랬긴 했어도 너희들이 도와줘서 모든 일이 잘되어 내가 고맙지.”
이런 말을 하며 논둑을 타고 시냇가로 향하는 영섭이네는 낮에 생긴 희수의 일로 찝찝한 가운데도 노동 후에 오는 안도와 피로감을 느낀다.
시원한 시냇물에 들어서 흙탕으로 더러워진 손발을 씻고 머리를 감으니 상쾌한 감이 온몸에 번지며 맡겨진 하루의 일을 뱀 소동 가운데서도 무사히 마쳤다는 자부심이 든다.
희수 아버지는 몇 번을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저녁은 희수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해주신 식사로 맛있게 먹었다.
저녁 후 희수 아버지가 수고했으니 내일 천렵할 때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주신 돈 봉투를 감사하다고 그러나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고 마루 끝에 놓아두고 나오며 영섭이네들은 몸은 고단해도 보람된 하루를 보냈다는 흐뭇함에 저절로 즐거움이 솟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수네로 돌아온 영섭 등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누웠다.
첫댓글 즐독입니다
즐~~~~감!
기상조건님!
무혈님
간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즐감하고 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