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Pq8s5AbFbg?si=Hw29Jn8wY-CRYnbt
Herbert Blomstedt dirigiert Haydn und Bruckner | NDR Elbphilharmonie Orchester
브루크너 [Josef Anton Bruckner, 1824 ~1896]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 출생.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역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뒤 조교원까지 지냈으나, 그 사이 피아노·오르간·통주저음(通奏低音)·화성·대위법 등을 공부하고, 또 성플로리안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J.S.바흐의 작품과 G.P.팔레스트리나, A.가브리엘리 이후의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하여, 그 스스로도 《레퀴엠》(1854)과 《미사 솔렘니스》(1854) 등을 쓰고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55년 린츠대성당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어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린츠극장 악장인 키츨러에게서 악식론(樂式論)과 악기론(樂器論)을 배워, 고전파와 낭만파의 기악곡형식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키츨러를 통하여 바그너의 작품에 접하여 창작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린츠시대에 그는 미사곡 3(제1·제2·제3)과 교향곡 2(0번·제1번) 같은 큰 곡을 작곡하고 1868년에는 빈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빈에 정주하였으며, 1878년에는 빈대학 강사도 겸하였다. 제2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깊이 심취하여 1865년에는 그와 만나고 작품도 헌정(獻呈)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동이 절대음악을 중시하는 전통파(反바그너派로 대표격은 한슬리크)의 반감을 사게 되었으나 이에 저항하는 그를 위해 G.말러·괼레리히·샬크형체·레베 등이 결속하여 그를 도와 주었으며, 그도 《관현5중주곡》(1879)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의 성공으로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만년에는 병에 걸려 음악학교의 직책을 사임하고, 합창곡 《타펠리트》(1893) 《헬골란트》(1893) 등 작품을 썼을 뿐 창작보다는 오히려 옛 작품인 교향곡의 개작과 퇴고(推敲)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9교향곡》을 완성 못하고 사망하였다. 1891년 그는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그는 19세기 후반의 최대 교회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1837년부터 상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소년합창단원이었다. 바이올린, 오르간, 계속저음 연주를 배웠다. 1840년에는 린츠로 가서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에서 보조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동시에 작곡에 필요한 교육과 오르간 연주 교육을 받았다.
1845년 상트 플로리안의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임시 오르가니스트(1850-1855)가 되었다. 이 곳에 19년 동안 거주하면서 마르푸르크(Fr. W. Marpurg)의 푸가 교습서를 통해 작곡을 공부했다. 그가 전적으로 작곡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 것은 1855년이었다. 이 때에 그는 린츠의 돔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1861년까지 비엔나에 있는 섹터(S. Sechter)와 킷츨러(O. Kitzler)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킷츨러는 그에게 바그너를 많이 가르쳤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열광했고, 바그너의 음악은 그에게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린츠에서 그는 오르간 연주자로 그리고 오르간 즉흥연주자로 명성을 떨쳤다.1864-68년 사이에 그의 초기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사 d단조, 미사e단조, 미사 f단조 , 1번 심포니.
1868년부터 그는 비엔나 음악원의 교수(계속저음/대위법)가 되었다. 1875년부터는 비엔나 대학의 강사(화성학/대위법)도 겸직했다. 1871-76년에는 2, 3, 4, 5번 심포니를 작곡하였고, 1879-85년에는 현악4중주 6번, 심포니 7번, 테데움, 8번 심포니를 작곡하였다. 18885년 이후에는 이미 슨 작품을 고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어떤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친 판본들이 여러 개가 남아 있다. 1887년 그는 9번 심포니 작곡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작업하였지만 마지막 악장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로 남겼다.
브루크너는 자신이 거주하던 비엔나에서 오르간 연주회를 자주 갖지 못했다. 그러나 낭시, 빠리, 런던, 스위스 등 타지에서는 오르간 연주회를 열었다. 브루크너는 당시 비엔나를 휩쓸던 전통주의자(브람스, 한슬릭)와 신독일악파(바그너, 리스트)의 싸움에 휩쓸려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명확하게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두 전통을 모두 포용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나 두 당파로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브루크너의 작품들은 그의 당대에 곧장 인정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많은 시간에 걸쳐서 차츰차츰 인정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84년에 초연된 그의 7번 심포니, 현악4중주, 테 데움을 통해 비로소 그의 음악은 인정받기 시작했다. 1891년 그는 비엔나 대학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심포니는 고전주의적 음악이 보여주는 모티브와 테마 작업, 대단한 길이에 필요한 구조적 사고를 보여준다. 또한 바그너로부터 받은 영향도 큰데, 이명동음계와 반음계의 잦은 사용, 바그너의 라이트모티브를 생각나게 하는 모티브의 이동반복적 처리, 그리고 오케스트라에 8개의 호른 사용, 4개의 바그너 튜바 사용(7-8) 등에서 그러하다. 오르간 음형처럼 소리 내는 악기그룹들의 분리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브루크너의 심포니는 각 악장들을 확대시킨다. 제시부에서부터 나타나는 3개의 테마를 사용하고, 코다 부분도 확장된다. 앞서간 악장에서 나타난 테마들을 끝악장에서 다시 사용한다. 이런 면들은 이미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브루크너는 3번 심포니부터 앞서간 악장의 테마를 끝악장에 다시 사용하였다. 브루크너의 테마들은 노래적인 구조를 가졌던 고전적인 심포니와는 다르게 작은 모티브들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작은 싹(모티브)으로부터 서서히 큰 구조(테마)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심테마는 항상 여린 소리로 시작하여 엄청나게 큰 소리로 자라났다가 다시 여린 소리로 사라진다. 이 중심 테마는 박절 적으로 보아 불규칙하며 20-30마디 정도의 길이로 펼쳐진다. 그리고 아주 많이 반복된다.
그의 제2테마는 이른바 "노래선율"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 테마는 대위법적으로 복잡한 관계 속에 나타난다. 이런 것은 대위법적인 오르간 음악의 영향으로 보인다. 제3테마는 제2테마와 대조되게 리듬적 요소가 강조된다. 여기에서는 유니슨으로 두드러지게 하는 방법이 자주 쓰인다. 전개부(발전부)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거의 동원된다. 화성적으로 편성적으로 점차로 고조시키며 갖가지 대위법적인 가능성(확대, 축소, 선율전위, 여러 테마들의 동시진행)들이 사용된다. 하지만 전개부의 비중은 코다보다 더 낮다.
재현부에서는 중심테마가 다시 나타나는데, 더 풍요로운 소리로 울린다. 코다는 마무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곡의 목표나 중심점처럼 비중이 높아진다. 심포니의 제2악장에는 엄숙한 아다지오 선율(특히 7-8번)이, 제3악장에는 오스트리아의 민속적 성향의 음악(예: 렌들러, 요들)이 흔히 사용된다.
브루크너의 교회음악은 팔레스트리나, 베니스식 이중합창, 낭만주의적 화성, 그레고리오 성가를 강조하는 체칠리아주의의 영향 등이 혼합된 것이다. 그의 미사들은 오케스트라로 반주하는 것들이다. 단지 e단조 미사는 8성부의 합창에 관악반주가 딸린 것이다. 브루크너의 미사들은 19세기적인 오케스트라 반주의 미사 전통을 이으면서도 교회음악적인 엄숙함이 배어있는 것들이다. 그의 미사 역시 그의 심포니처럼 넓게 펼쳐지는 선율선과 그 선율들을 끊임없이 이동반복시키는 것, 독립적이 되는 반주를 통해 음악이 대비적 성격을 갖는다. 또한 3도관계를 활용하여 조성을 확장시킨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ziXfdU6iTp4?si=B8BiccVq0Igev5Ml
Anton Bruckner: Sinfonie Nr. 4 mit Günter Wand (1990) | NDR Elbphilharmonie Orche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