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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8일 월요일(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 창세 3,9-15.2
제2독서 : 에페 1,3-6.11-12
복 음 : 루카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오늘의 묵상
국 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기리는 교회는
전통적으로 “온전히 아름다우신 마리아”라는 제목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릅니다.
성모 마리아 안에서 티 없는 깨끗함을 넘어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지요.
마리아께서 원죄를 면제받으셨다는 것은
개인의 특권이기 전에, 우리를 위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선물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백치』에서 미시킨 공작의 입을 빌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과연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까요?
작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은 고통을 나누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바로 자신을 내주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는 정확히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님의 아름다움을
딸, 아내, 어머니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묵상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먼저 떠올립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려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아름다움,
자신을 잊으시고 가장 작고 연약한 이를 돌보시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십니다.’(2024년 12월 8일 강론 참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는 신화나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실제이시며,
은총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이 완전히 실현된 본보기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 안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자기를 내주는 사랑으로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선물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마리아와 함께 “기뻐하여라.”(루카 1,28)라는 천사의 초대를 받습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여성들은 자기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2013년 어떤 비누 광고에서 화장기 없는 자기 얼굴을 촬영하려고 할 때
고개를 돌리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모습을 어떤 모습을 어떤 모습이든 간에 개의치 않고
환한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대비시키면서 이런 문구를 내보냈습니다.
“언제부터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저 역시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제 머리카락은 워낙 억세서 조금만 길어도 붕 뜨면서 지저분해집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에 왁스를 발라서 지저분함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왁스를 바르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모자를 씁니다. 모자 없이 밖에 나가지 않고, 또 모자를 절대로 벗지 않습니다.
우연히 어렸을 때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다 붕 떠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뻣뻣한 머리였는데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남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쓰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시선에는 무감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죄를 범하면서도 합리화하며 하느님을 무시합니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것 절반만 하느님께 신경 쓰면 어떨까요?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시선에만 집중하고 있는 분의 대축일을 보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께서 머무실 거처를 거룩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준비를 받아들인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님 잉태 소식도 “예”라고 응답하셨고,
이로써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마침내 순종하십니다.
대천사의 말처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하십니다.
세상의 시선을 보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만 보고 계신 성모님의 굳은 믿음에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너무 쉽게 세상의 시선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하느님의 시선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한국교회의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청 기쁜 날입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화답송에서도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에서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한편, 19세기의 저명한 학자이며 교부 전문가인 헨리 뉴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초기부터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녀가 바로 두 번째 하와라는 것이다.”
또한 초대 교부들은 하와가 인류의 타락에 고유한 역할을 했듯이,
마리아도 인류의 구원에 고유한 역할을 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와는 뱀의 말에 속아서 불순종과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정 마리아는 믿음과 기쁨을 가져왔다.”(유스티누스)
“하와를 통해서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서 생명이 왔습니다.”(히에로니무스)
“사람을 속이기 위해 여인을 통해서 독약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은총 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여인으로부터 구원이 쏟아졌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실 <창세기>에 따르면,
원죄를 짓기 전에는 ‘여인’으로 불렸고 범죄 후에 ‘하와’로 불리어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가나안의 혼인잔치’와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맡기실 때’ 마리아를 “여인이여”라고 부르심은
마리아를 죄 없으신 ‘두 번째(새) 하와’로 부르심을 말해줍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마리아가 '새로운 하와'임을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창세기> 3장 15절의 ‘원 복음’을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이 대목(창세 3,15)을 “새로운 아담”의 예고라고 본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아담의 불순종을 넘치게 보상한다.
한편, 많은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은 ‘원 복음’에서 예고된 ‘여인’을
“새로운 하와”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로 생각한다.
마리아는 최초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죄에 대한 승리의 은혜를 입은 분이다.
그분은 원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고,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411항)
이처럼 예수님과 마리아를 ‘새 아담’과 ‘새 하와’로 여기는 것은,
마리아가 죄 없이 잉태되셨고 죄 없이 사셨다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마리아의 부모님이 죄가 없었다는 것도 아니며,
아들에게 죄스런 본성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죄를 씻은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신 승리에서 흘러나온 ‘특별한 은총’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를, 곧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교종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 믿을 교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처럼 '새 하와'인 마리아는 죄 없이 창조되어,
새 창조의 의로운 삶을 가리키는 ‘살아있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가정을 되돌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 되게 하셨습니다.
곧 성모님으로 하여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열리기 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여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죄를 용서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본래의 죄 없는 에덴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이 없는 상태로 건너감이며,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1)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히브12,23)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새로움으로 태어난 피조물로 축복을 입게 되었으니,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의 노래'인 오늘 입당송을 다시 불러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입당송)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 욱현 토마 신부
1. 축일의 의미와 교리의 확립
오늘 교회는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기리는 대축일을 지낸다.
이는 하느님께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실 마리아를
구속 사업의 처음부터 특별히 준비하시어,
그분 안에 죄의 흔적조차 닿지 못하게 하신 은총의 신비를 드러낸다.
교황 비오 9세께서는 1854년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Ineffabilis Deus” 교황 회칙을 통하여,
이 믿음을 신앙의 교리로 선포하셨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의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을 받아,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미리 받아 누리셨기에,
원죄의 모든 얼룩에서 완전히 보존되셨다.”
교회는 이 교리를 통해 마리아 안에서 이미 구원의 완성을 미리 보여주셨음을 선포한다.
성모님께서는 “전적으로 거룩하고 흠 없으신 분”(에페 1,4 참조)으로,
교회가 걸어가야 할 성화 길의 표징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자와 특별히 깊이 결합되셨으므로,
교회의 신앙과 사랑과 완전한 일치 안에서 모범이 되신다.”(교회 63항).
2. 인간의 자유와 순종을 통한 구원
복음(루카 1,26-38)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마리아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하느님의 계획이 크고 완전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협력이 빠져서는 완성될 수 없다.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죽음을 세상에 불러들였듯이,
마리아는 “순종의 길”을 택하여 구원을 열었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순명의 새로운 길”이라 부르며 이렇게 설명한다.
“하와가 불순종으로 인해 결박한 매듭을, 마리아는 순종으로 풀어주었다.”(Adversus Haereses III,22,4).
이처럼 하와의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왔듯, 마리아의 순종은 생명을 가져왔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셨다.
태중에 그분을 모시기 이전에, 마음속의 믿음을 통해 이미 그리스도를 품으셨다.”(Sermo 215,4).
3.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신앙의 구체적 고백
“보십시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마리아의 응답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내어 맡긴 구체적 신앙의 고백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강조한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인간적인 계산이나 의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곧바로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녀의 믿음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맡겨졌다.”(Homiliae in Matthaeum V).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이란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선택임을 배운다.
예수님의 탄생, 수난, 죽음, 부활이 모두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일상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4.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의 적용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신 순간,
그분은 단순히 하느님의 뜻을 내면적으로 동의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전체를 내어놓으셨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이웃에게 봉사의 삶으로 드러난다.
교회 56항은 이렇게 가르친다.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 가운데서 구원 사업을 위하여 아드님의 협력자가 되셨으며,
믿음과 순종으로 죄와 죽음을 물리치신다.”
그러므로 성모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응답하는 인간의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질문이 던져진다.
지금 내 삶에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가정에서, 공동체 안에서, 직장에서, 작은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내고,
기쁘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길이다.
5. 결론: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
마리아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은 단지 성모님의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고백이다.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살고 세상 안에 드러내야 한다.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은총은,
우리도 최종적으로 죄와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교부들의 말처럼, “마리아 안에서 이미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다.”(성 암브로시오).
그러므로 오늘 이 대축일에, 우리도 성모님과 함께 고백하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휴가 중에 집에 가서 앨범을 정리했습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앨범이 13권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카톡과 텔레그램에 사진을 저장하면서
아날로그 감성인 앨범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앨범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담겨 있었고, 추억과 기억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 때의 풋풋함, 군대에 있을 때의 강인함, 나환자 마을 봉사하였을 때의 열정,
부제와 사제 서품식 때의 엄숙함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독사진도 좋지만, 누군가와 함께했던 사진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는 보좌 신부로 있었기에
주로 청년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적성, 시흥5동에서는 본당 신부로 있었기에
주로 사목 위원과 구역장, 반장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취미활동으로 스키와 스킨스쿠버를 하였기에 그와 관련된 사진도 많았습니다.
복음화 학교 지도 신부를 하면서 성지순례를 함께했기에 성지순례 사진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사진은 거짓 없이 저의 43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건강 주셨고, 좋은 인연을 주셨고,
무엇보다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앨범에는 시흥5동에서 찍은 사진이 많았습니다.
제가 사진을 좋아하기도 했고, 홍보분과에서 저의 사진을 인화해서 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1년은 보좌 신부님이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온 이후에는 봉사자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적성 성당과 자매결연 맺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절두산, 수리산으로 도보 성지순례 간 사진도 있었습니다.
안면도로 가족 수련회 갔던 사진도 있었습니다.
배론으로 기차 성지순례 갔던 사진도 있었습니다.
추억의 사진을 만들어 주었던 홍보분과 봉사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앨범 정리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앨범으로 정리되고 있겠구나!”
좋은 사진을 앨범에 정리하였듯이, 나의 부족한 삶과 나의 거짓된 삶은
고백성사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학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점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성모님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응답은 배우자인 요셉과의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지만, 약혼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멀리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잘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시대를 탓하고, 가정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친구를 탓하면 진정한 자신을 보기 어렵습니다.
삶의 기준이 성공과 권력 그리고 재물이라면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기 마련입니다.
작은 꽃은 절벽에 피어도, 길가에 피어도, 비를 맞아도 탓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도 그렇습니다.
150억 년의 우주가 나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감사요, 창조의 경이로움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불리시지만, 그 모든 영광은 ‘결과’입니다.
근원은 바로 순명과 신뢰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라는 말 속에는
세상의 논리보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 지혜가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순명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성모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한 사랑의 앨범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매일 한 장씩 채워지는 신앙의 사진첩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처럼 탓하지 않고,
순명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며, 기억을 감사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제 삶의 앨범 속에서 당신의 얼굴이 드러나게 하소서.
제 기억이 감사로, 제 순명이 사랑으로, 제 관계가 평화로 이어지게 하소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 전례력 여러 축일 중에서 이름이 제일 긴 축일인 듯 합니다.
과거에는 성모 무염시태 대축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염시태(無染始胎)!
우리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없을 무자에 물들 염자입니다.
비로소 시자에 아이밸 태자입니다.
그럼 한번 연결해볼까요?
성모님께서 ‘시태!’ 잉태되셨는데, 어떻게 잉태되셨습니까?
무염 상태, 즉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물들지 않은 상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는 아무런 흠 없이 무죄한 상태로 잉태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모 무염시태’라는 용어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리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 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8세기 수도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큰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선물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욕정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마리아만이 은총이 가득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무염시태 교리는 성경에 직접적 근거를 지니지 않습니다.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무염시태 교리가 초대 교회 교부들로부터 전수된 거룩한 선물이며,
거룩한 인장으로 날인되어 계시된 교리로서, 교회 안에 항상 보전되어 왔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전수되어 내려온 일종의 전승이라는 말입니다.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이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잘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은 마리아가 주님을 원죄 없이 잉태하신 축일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주님을 잉태하셨다는 것도 사실이고 기릴만한 것이지만
오늘 축일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축일이고 그것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 성탄이나 주님 잉태처럼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며
그러기에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지만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마리아도 모르고,
부모라고 하는 요아킴과 안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를 뿐 아니라 마리아도 부모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런 공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 공로가 없다니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은 인간의 구원역사상 가장 엄청난 은총에 대한 기념입니다.
우리가 보통 체험하는 은총은 우리가 뭘 하려고 했지만
별로 한 것이 없는데도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체험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은총에는 나의 원의라도 있었거나
원의 실현을 위해 조금이라도 내가 한 것이 있지만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경우에는 잉태될 때
그럴 원의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경우는
태어나기 전 아예 존재조차 없을 때 받은 은총이며,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획되고 정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계획 안에 이미 구원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계획이 그만큼 더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계획이 완전한 사랑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2세 출산을 계획할 때 그를 키울 계획까지 합니다.
무책임한 사랑의 경우 애를 낳고는 키울 수 없어 내버리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사랑으로 애를 낳을 땐 애를 키울 계획까지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의 경우엔 창조 안에 구원이 더욱 완벽하게 있지 않았겠습니까?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구원에서 제외되도록 버려둘 리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계획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 후에야 계획된 것이 아니라
창조 때의 계획이자 창조 이전부터의 계획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창조와 구원도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생긴 계획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보다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 대단하고 소중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유한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도록 창조하신 것이며
우리의 창조 안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계획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와 구원을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축일에 기념하고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마리아 성모님께 배우는 세가지 가르침
“제자리, 성소, 순종”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두려워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이사43,1)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대림시기 성모님께 귀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참 경사스런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을 몸으로 예비 되었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원죄없이 태어나는 특은을 받았다’는 교리입니다.
초기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을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가 발표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회칙을 통해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는 확정적으로 선포되고 믿을 교리가 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한국교회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수호자로 정해줄 것을 청하였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이 요청을 허락함으로
명실공히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성모님은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비단 한국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한반도의 수호성녀 마리아 성모님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외치는 “성모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기도입니다.
“어머니!”란 호칭보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가까운 호칭도 없을 것입니다.
노년에 쓸쓸히 요양원에서 병고 중에 특히 치매로 말년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하는
많은 어머니들을 대하면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네 분의 어머니가 계십니다.
마리아 성모님, 어머니인 교회, 이미 타계하신 육신의 어머니,
그리고 구암리 카페로 변한 고향집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저절로 고향집을 찾게 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찾았습니다.
영원한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 다음 고향집과 더불어 육신의 어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선종 3개월 중 써놨던 시, <어머니를 그리며> 중반부 내용입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 없이도
웃음은 없으셨어도
한 결 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 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나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 오신 내 어머니”<2005.3. >
이제는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오로지 어머니인 교회 사랑으로, 마리아 성모님 사랑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말씀을 바탕으로 신망애의 모범인
영원한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께 배우는 세 가르침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제자리에 충실하라!”
오늘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마리아 성모님의 활약이 참 통쾌합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묻던, “너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화두처럼 우리의 제자리를 확인하게 합니다.
죄를 지음으로 제자리를 상실한 아담은 두려워 숨습니다.
제자리에 충실한 무죄한 삶이었다면 “예,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아담이요 하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완전히 분열된, 파괴된, 회복불능의 관계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실패를 만회한, 제자리의 정주에 충실했던 나자렛 시골의 마리아 성모님이었습니다.
겸손한 하느님 아버지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얼마나 장구한 세월을 기다렸겠는지요!
마침내 눈 밝은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마리아를 찾아 만나게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제자리의 정주생활에 충실했던 마리아를 발견한 기쁨에
환호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약여합니다.
새삼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 몫의 사명에 묵묵히 충실할 때
찾아 축복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배웁니다.
둘째, “성소에 충실하라!”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불림 받은 유일무이한 고유한 성소자들 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습니다.
이래야 존재감 충만한 자존감 높은 삶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의 하느님 찬가가 참 깊고 아름다우며 은혜롭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매주 월요일 저녁기도 때마다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오늘 전례에서는 일부 생략됐지만 3절에서 14절까지
한 문장으로 단숨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노래하는 찬미가입니다.
이 찬미가에서 하느님은 모든 동사의 주어로 나옵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우리의 복된 신원이, 성소가 그대로 환히 계시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주어로 내 삶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할 때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요 우리의 성소입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섭리적 존재임을 확인한다면
도저히 함부로, 되는대로, 생각 없이, 영혼 없이 막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우리에게 넘치는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성소에 충실할 때 진짜 참 나를 사는 참 기쁨에 참 행복의 삶일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사회교리를 잘 배워 인권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 불림 받은 고귀한 유일무이한 성소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 “순종의 여정에 충실하라!”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순종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아드님처럼 평생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 순종의 여정에 충실했던 <예스맨> 성모님이셨습니다.
침묵과 경청, 관상과 렉시오디비나의 대가!
마리아 성모님을 하느님은 얼마나 신뢰하셨는지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그 속내를 다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마침내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이 나오기 전 산천초목이 침묵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석합니다.
하느님도 얼마나 조마조마 초조했겠는지요!
마리아의 응답에 인류구원의 역사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혼자서의 일방적 노력이 아니라 인간의 협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에 주님의 천사는 마리아를 떠났고,
후에 마리아가 영원한 영적도반 엘리사벳을 찾았을 때 엘리사벳의 칭송을 받습니다.
이렇게 그의 순종이 응답이 옳았음을 확인받았을 때
마리아 성모님은 하늘을 나르듯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
탓할 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부족입니다.
순종의 삶으로 검증되는 믿음이요 순종과 더불어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순종의 여정,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좋은 도움을 주시며 신신당부하십니다.
“1. 제자리에 충실 하라!
2. 성소에 충실 하라!
3. 순종의 여정에 충실 하라!” 아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승화 시몬 신부
한 남자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여자에게 넘겼습니다.
그 여자는 뱀에게 넘겼습니다.
이렇게 책임을 서로 회피하는 가운데
남자와 여자, 피조물은 모두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했던 축복받은 존재들은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스스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그 사랑은 죽음과 부활로서 다시 하느님 품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느님 구원 섭리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복이 우리에게 전해졌고
아버지 하느님의 좋으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이렇게 우리를 향한 사랑이고
자녀를 끌어 모으는 아버지의 품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놀라운 신비를 통해 구원 섭리를 이루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이를 통해
구원의 희망을 품고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이를 보호하셨고
이를 통해 주어진 은총이 더 큰 은총으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미 정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공로를 통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모 마리아를 보호해주십니다.
죄로 기우는 경향에서 자기 영혼을 지키도록 이끄셨고
온갖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스스로 겸손된 자세를 잃지 않는 한
또 스스로 유혹과 악을 선택하지 않는 한
그녀를 통해 하느님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보호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백합니다.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보호받았고
이미 받은 충만한 은총이 결실을 맺어
하느님 구원 사업에 큰 역할을 하며 동참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신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의 계획을.
마리아의 겸손과 하느님을 향한 성실함을
그리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의 결실을 기도하며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섭리를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