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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황팔남
개구리소년사건은 1991년 3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에 살던 성서 초등학교 학생 5명이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갔는데 아이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으며, 부모들은 경찰서에 실종 사건을 신고했습니다.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사건이였으나 아직도 미궁에 빠진 사건 입니다.그후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성산고등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나,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습니다. 2006년 3월 25일자로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남에 따라서 이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1990년대에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경찰과 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아이들을 찾았으나 2002년 11년 6개월 만에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기까지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들이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고 잘못 알려져 흔히 개구리 소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사건 당시 경찰은 그동안 연인원 약 50만 명을 동원, 이들의 행방을 찾았으나, 잘못된 제보와 소문만 무성할 뿐 지금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였으며, 1993년에는 실종 어린이 부모들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사건 발생 후 5년이 지난 1996년에는 수사본부장이 대구경찰청 청장에서 달서경찰서장으로 바뀌고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수사요원들도 복귀하였습니다. |
그에 따른 수사가 이뤄지기를 관계 당국에 바라면서 이 보고서를 올립니다.
1. 아이들이 입은 상처 자국은 3명 모두 같은 무기로 나타났고 두개골에 나타난
<ㄷ>자형 무기는 정확히 가위로 판명됐다.
가위는 휴대하고 다니기에 부적절한 도구라서 집이 아닌 외부에서 여러 명이 가위로
가격을 했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2. 3명 중, 우철원 25군데, 조호연과 김영규 두 명이 입은 25군데를 합해 3명이 무려 50여
차례나 가격을 당했다.
따라서 만일 아이들이 결박된 상태였다면 아이들은 이미 저항력이 상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3명에게 무려 50여 차례나 미친 듯이 가격할 필요성이 없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결박된 상태가 아니라는 입증이다.
반대로 아이들이 결박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가 없고
최소한 한 명이라도 달아날 기회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범인에겐 3명에게 50여 차례나 가격할 시간적 여유가 주어질 수가 없다.
3. 그렇다면 아이들은 일정 간격을 두고 한 명씩 순차적으로 공격을 당했다는 것 만이
가장 설득력을 실어준다. 따라서 순차적 공격을 당할만한 장소라면 외부인의 출입이 극히
제한된 가정집만이 가장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가위는 한 집에 하나밖에 없는 도구이고 3명은 같은 가위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범인은 반드시 한사람의 소행이라는 결론이 떨어진다.
4. 아이들의 나이는 9세에서 13세의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범인이 성인이고, 또 남자라면
주먹과 발길질만으로 제압이 충분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굳이 흉기를 사
용해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행에 사용한 무기가 가위임을 감안해볼 때 범인은 여자(어른)가 분명하다는
최종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5. 2002년 9월 26일 오전 11시 30분 경.
유골이 와룡산에 묻혀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관(6명)이 신고자 등, 2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후 5시경까지 장장 5∼6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유골 4구를 발굴했고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유족들도 유골 4구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즉시 현장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전경을 투입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철야 경비를
섰는데 다음날 발굴현장이 아닌 100여미터 떨어진 다른 곳에서 1구를 찾았다며 밤사이에
느닷없이 1구가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서 중점이 되는 것은 유해발굴 첫날 수거한 유류품 중 두개골 4구와 팬티가 4점,
그리고 신발만 5켤레가 나왔다는 것이다. 두개골이 4구이고, 팬티가 4점이면
신발도 4점이어야 하는데 신발만 5점이며 두개골 1구는 100여 미터 떨어진 다른 곳에서
발견됐다. 그렇다면 신발 1점도 추가로 발견된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범인은 아이들 4명을 죽였고, 의도적으로 신발만 한 켤레를 더 집어 넣었다는
계산이며 추가로 발견된 1구의 정체는 개구리소년이 아니라는 명백한 입증이 된다.
6.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김영규 군의 두개골은 점퍼에 쌓인 채 엉덩이에 붙어있
었으므로 제2 장소로 이장한 것은 움직 일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생각해 보라!
유골을 이장할 때 범인은 5구를 한꺼번에 묻지, 4구 만 한곳에 묻고 나머지 1구를 다른
곳에 버렸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따라서 유골이 4구가 나왔다는 것은 즉 유족 중, 한사람이 범인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증폭시키고도 남는다.
아울러 공식적으로 DNA 감식기록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한 아이들 5명 중, 1명은 어딘
가에 반드시 살아있다는 의혹을 떨쳐낼 수는 없다.
7. 어떤 사건을 막론하고 처음엔 가족부터 점차 주변인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수사의
기본인데 경찰은 오직 실종 쪽으로만 몰고 갔었고. 뜻밖에도 유골이 4구만 나오자 당황
한나머지 어디서 1구를 대체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렇치 않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8. 현재, 개구리소년 해당 경찰서 전직 수사관이 경북대 의대 법의학 교수인 某씨를
<수사기밀 유출> 혐의 로 검찰에 고발한 상태에 있다.
이제 공소시효가 불과 8∼9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공개수사의 원칙을 무시하고
수사기밀 누출 혐의로 고발했다는 것은 국민들을 우롱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유전자 감식에 무슨 말못할 비밀이 담겨있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9. 여기에다 유족 중 한사람은 경제력이 좋고 게다가 某씨의 사촌 형이 대구의 모 경찰서
고급 간부 였다는 점이 가족 수사를 비켜간 것 아니냐는 강한 의혹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불거지고 있다.
=정황 자료=
10. 유골 발굴 당시 유골은 4구만 나왔고, 1구는 다음날 부근에서 발견함.
11. 국과수로 올라간 유골 중 1구는 경북대 의대로 되돌려 보냄
12. 유골발굴 당시 한 아이의 누나(김모양 당 11세)의 행적이 일주일간 행방불명.
13. 아이가 집을 나갔으면 점심때가 되면 어련히 들어올텐데 실종 당일 오전 11시경에
한 아이의 엄마는 아들이 없어졌다며 찾으러 나선 점.
(덧붙이자면 애생키들은 9시에 나갔는데 11시에 실종신고... 이해가 감 =ㅅ=?)
14. 한 아이의 아버지는 유족들에게 <아이들이 실종됐다. 동네방송을 해달라> 고
성화를 댔고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갔다며 유족들을 와룡산으로 이끌고 간 점.
15. 유족 중, 한아이의 할머니가 한 아이의 집에 가보니 그 집은 평소 문이 잠기는 집이
아닌데 그날따라 대문인지 골방인지가 잠겨 있었다는 점.
16. 아이들이 실종된 지 두 달 후에 한 아이의 집으로 걸려온 전화 내용 중
그 아이의 엄마는 아들과의 통화에서 보였던 덤덤한 대화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로서의
행동이 분명 아니라는 점.
17. 유족 중에 범행동기로 작용될 수 있는 괴소문(공식적으론 말할 수 없음)이 아이들 실종
전부터 온동네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범행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내포돼 있다.
18. 발굴 당시 유골이 4구만 나왔다는 것은 개구리 소년 한 명이 살아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
므로 한 명은 반드시 살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미 결정이 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 위에서 밝힌바와 같이
1) 특히 아이들이 없어지면 경찰에 신고하고 좀더 기다리는 것이 통례인데
그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즉각 방송국에 실종신고를 내는 등,
처음부터 일사천리로 실종으로 몰고 가기 위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렇다면 경찰은 발굴된 1구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며,
법의학 팀들도 경찰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을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중요한 요소를 언론들도 전혀 의심을 갖지 못했고,
유골이 마치 처음부터 5구가 발굴된 것처럼 보도됐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시민단체 또는 각 매스컴은 지금이라도 유전자 감식 자료를 내사하여
그 결과를 국민 앞에 공개하고 그에 따른 확실한 재수사가 이뤄지기를 시민의 한사람으
로서 강력히 촉구하 는 바입니다.
* 한가지 더 추가하자면 나는 경북대 의대 법의학 교수인 모 교수에게
유골 발굴 첫날 4구만 나왔는데 밤사이에 어떻게 해서 1구가 늘어난 것인지
거기에 대한 답변과 아이들 5명의 유전자가 모두 확인이 됐는가? 라는 6개항에 걸친 질의서
의 내 용증명을 보냈으나 현재까지 3주가 다 돼가도록 답변이 없다.
그러니깐 정리를 하면 5명중 1명의 부모가 4명 유인해서 집안이나 혹은 유사장소에서 한명씩 가위로 쳐죽임
자기 자식은 안죽이고 저중 4명만 ....
존내 잔인하게.. 가위로 머리를 .. 죽을때까지.. 찍어죽인다음에
시체를 은폐(산이 아닌 다른곳에 은폐했겠죠 50만명이 산을 뒤졌는데 못찾았으니깐...)하고
나중에 다시 잠잠할때 묻은거... or 50만명이 못찾았던거던가..
(연인원 50만명인데 이점도 의심스러움
그 당시 매스컴에서 완전 대박때린거라서 경찰이 대충할수도 없었음
50만명까지는 아니라고 추산된다고 하네염)
그리고 사건 25시에서 2달만에 개구리 소년중 한명이 전화가 와서
(그때 당시에는 살해되서 묻혔다기보다는
납치되거나 어디 팔려갔을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었음)
나누었다는 통화내용을 들려줬는데 생사를 모르는
자기 아들이 2달만에 전화와서 엄마 ㅎㅇㅎㅇ 나임 하니깐
어 슈ㅣ발 너구나 너 어디임 ?
그러니깐 너무 차분하게 받은거임..
잘생각해보셈 죽은줄 알았던 아들이 왔으면 오열하고 소리지르고 너 어디냐고
완전 난리를 쳤어야하는데 너무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받았음 전화를 ..
이건 납치라는 오해의 가능성을 높이기위해
계획된 통화라고 생각되지않음 ?
그리고 실종 아이들집중 한곳은 늘 문이 열려있었는데 그날따라 문이 잠겨있었다고
함..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시간에 (동네 할머니의 증언임)
실제 이경우를 의심해서 심리학 박사가 검찰을 소환하여
그 집 바닥이랑 집을 거의 해체하다싶히 뒤졌는데
아무것도 나오지않아서 명예회손죄로 짤렸음..근데?
그게 사건발생후 2년뒤였으니 당연히 시체를 돌렸겠죠
다른곳으로 .....
신기해서 걍 퍼와 봤어요..
첫댓글 음...그럴 듯한 추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