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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관세음보살(폭풍잤잤하고싶다..)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3등급 관세음보살이 찌는 글글글글☆
자료-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저자 혼마 야스코)
한국사傳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 (KBS)
안녕 어여쁘고 차분한 여시들아.
나능
평소에 역사 관련 다큐나 책에 무제한 관심이 있는 보살이라고 함.
반갑.
저번에
조선의 옹주와 대마도 번주 사이에, 사랑이란 존재하였는가..?
1, 2편 나누어서 쩌리방에 올렸었는데
지금 보니 으어어어어어ㅓㅗㅓ어어로ㅓㅇ 싶은거야.
뭔가 뒤쥭박쥭인 거 같고ㅋㅋㅋㅋㅋㅋ
오타랑 실수도 많았고ㅠ
그래서 한 편으로 싹 깔끔하게 정리해서 마지막으로 올림!
ㅎㅎㅎ
권비영의 덕혜옹주와
혼마 야스코의 덕혜옹주를
읽었음.
두 책에서는 공통적으로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사이에 사랑이 있었다 라고 말하고 있었음.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과연 사랑이란 존재 하였는지,
궁금했음.
나는 한국인.
존나 당당하고 존나 밥 많이 먹는
대한의 여성이자 여성시대의 3등급임.
혼마 야스코씨는 일본인, 물론 일본인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역사적인 사실
(일본원숭이들이 인정 하지 않는 역사적인 부분 만큼은 깨어있는 일본인ㅋ)
들을 토대로 자료를 수집하여 덕혜옹주라는 책을 내셨음.
사실 덕혜옹주 개인보다는 한국에서 오해 하고 있는
소 다케유키에 대해 (신상털었음)
자세하게 적은 책이라고 나는 생각함.
그래서 존나 쎄게 부족하고,
어차피 혼마씨가 쓴 덕혜옹주 책과 KBS에서 방영했던 라스트 프린세스편
리플레이가 되어 버린 것 같지만(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읎다, 미안하다)
한국인이자 여성시대 3등급 보살님의 입장에서도 써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음.
우선적으로
권비영씨 책과 혼마씨의 책 모두 다케유키의 시를 싣고 있는데
처음에는 내가 ㅋㅋ 제외를 했다가
그것도 어떻게 보면 자료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지막 부분에 소 다케유키의 시를 일부분 추가 했음.
헤헹'ㅂ'
과연 둘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 하였을까.
단순한 정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 있었을까.
결론은 나지 않더라도
같이 한 번 생각해보자능(반협박)
굵은 글씨만 읽어도 이해될....아마...어...이해될..걸...?
헤..헤헤:D
먼저
덕혜옹주가 정신분열증에 걸린 시대적 상황과 배경, 원인 간략하게 설명들어감.
일본, 일본 개객끼들 존나 좆같은 개객끼들이 배경,원인 모두 제공해줌ㅗ
(덕혜옹주가 만 5살 정도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함)
고종의 고명딸로
(고종은 총4명의 딸을 보았으나 모두 1살이 되기도 전 세상을 떠났으므로 덕혜옹주가 고종의 유일무이한 딸임)
덕혜옹주를 아지(아기)라고 부르며 궁 안에 유치원을 세울 정도로 덕혜옹주를 어여뻐함.
덕혜옹주는 양반의 자제들과 함께 유치원에 다녔었는데
한 급우가 놀다가 치마에 얼룩이 묻어 울상을 짓자
덕혜옹주가 손을 잡고 덕수궁에 들어가서는
자신이 입던 치마와 바꿔 입었다고 한다.
쾌활하면서도 수줍음이 많았던 덕혜옹주는 남을 생각하는 배려심이 깊었다고 한다.
그러다
덕혜옹주가 만 6살 되던 1919년 1월 21일
아버지인 고종이
갑작스레 승하한다.
[사실 덕혜라는 이름조차 고종이 죽은 후 지어진 이름임.
그 전까지는 일본이 왕족으로 인정을 해주지 않아
고종은 아지(아기), 궁 사람들은 복녕당 아기씨라고 불렀음]
일본으로 강제유학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
아버지는 독살 당해 죽고,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더 이상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한 채 강제적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됨.
[순종은 덕혜옹주가 성인이 될때까지만이라도 자신의 슬하에 두고 싶다고 강력하게 말하였으나..일본...일본..섬숭이들...ㅗ]
일본ㅗ넘들이 일부러 백성들이 아끼는 덕혜옹주를 일본에 유학이란 명목으로 끌고간거임;
[당시에 덕혜옹주에 관한 신문기사가 무척 많았음, 일본의 손을 타지 않은 덕혜옹주를 이뻐하는건 당연했던]
당시 나이 열 세살이었음.(지금의 초등학교6학년ㅠ)
어린 나이였으나 덕혜옹주는 아버지가 독살 당해 죽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음.
학교에 다닐 적에도 물은 꼭 본인이 가져온 보온병의 물만 마셨는데
이유인 즉 독살 당해 죽기 싫어서 라고 말함.
1926년 순종이 위독해지자 영친왕과 조국으로 잠시 돌아왔던 덕혜옹주.
하지만 순종은 결국 승하하고
순종의 장례식 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섬숭이들은 덕혜옹주를 다시 일본으로 돌려보냄.
설상가상으로 3년 후
어머니 양귀인까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남.
어머니의 죽음으로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고국으로 잠시 돌아왔으나
(덕혜옹주 만17세- 지금의 고1ㅠ)
섬숭이들은
덕혜옹주가 치루어야 할 어머니의 장례 절차조차(상복을제대로입히지않는등) 무시한 채
덕혜옹주를 급히 일본으로 돌려보냄.
그 전부터 신경쇠약 같은 모습이 종종 보였었는데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땐 아예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는 경우였음)
어머니의 죽음 이후 몽유병까지 생겼다고 함(이방자 저서 흘러가는대로에 적혀있음)
같은 학교 학생들 조차 덕혜옹주의 이상을 눈치 챌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음.
결국 열 여섯~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조기성치매, 즉 정신분열증을 진단 받게 됨.
그 직후에 바로 소 다케유키와 결혼식을 올린거임;
영친왕 이은조차 일본인(이방자)와 결혼 했다는 것 만으로도
매국노; 취급을 당하고 인정도 받지 못했는데
시대 배경상 여자였던 덕혜의 경우는..또르르르
다 일본ㅗ의 계략임..아오...ㅗㅗㅗㅗㅗㅗㅗㅗㅗ
그리고 덕혜옹주가 소 다케유키라는 인물과
결혼하게 된 배경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으으으으으 이가 갈린다.
다케유키의 후견인이 당시 테이메이 황태후(히로히토ㅗ의 어머니)의 오빠(쿠죠 미치자네) 가 있었기에 가능했음.
마침 두 사람 다 결혼 할 시기가 뙇!
(시대적으로도덕혜옹주를얼른일본인과결혼을시켜야했다능)
두 사람 결혼 시키자! 하고 빠르게 결정이 남
아옼ㅗ
1930년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이 결정된 상태에서 선(말이 선이지 결혼 전 서로 얼굴 확인하는거나 마찬가지)을
가장한 만남을 가짐.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음.
1931년 3월 덕혜옹주는 학습원을 졸업했고 다케유키는 도쿄대를 졸업을 함.
두 사람의 졸업과 동시에(그전부터)분주하게 결혼식 일정을 정함.
상황이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4월에 납채(약속한 혼인을 받아들이는 일)를 치루고(본래는 결혼 3~4개월전에 행함),
5월 초순(정확히 8일에) 결혼식을 거행함.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식 사진.
아시다시피 덕혜옹주는 이미 정신분열증에 걸린 상태에서 결혼을 한 거였음.
소 다케유키가 알고 결혼했는지 모르고 결혼 했는지는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름;
어차피 알았어도 피할 수 없는 결혼(히로히토 일왕의 어머니가 적극권유한 결혼)이었고
몰랐어도 덕혜옹주의 정신분열증 증세가 금방 나타난 것으로 보여짐.
이유는,
부부가 결혼 직후 함께 대마도를 방문 하려고 했으나(대략6월상순쯤) 10월경으로 연기가 되었다고 함.
[혼마씨가 그 당시 발간된 신문에서 발췌, 연유는 쓰여있지 않음]
결혼 후 소강상태 였던 덕혜옹주의 병이 다시 심해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해(1931년)
10월5일 이건의 결혼식, 10월 20일 이은의 생일 축하모임에는 부부가 함께 참석을 했음.
6월 상순에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가 10월 부터는 나아진게 아닐까 싶음.
(10월에 나아진 상태여서 부부가 함께 조선왕가 행사에 참여한 것 같음, 그리고 곧바로 대마도 방문을 했던걸까)
단지 다케유키에게 사정이 있어서 였는지 아니면 덕혜옹주의 병이 재발을 해 상태가 좋지 않아 미룬 것인지는 모름.
위에 처럼 이건, 이은 관련 왕가의 행사를 참석한 후
부부 동반으로 대마도를 처음 방문하게 된 것은 1931년 10월30일.
밤늦게 11시경 도착함. 11월1일 덕혜가 직접 여학교에 기념 식수를 했음.
그리고 11월3일 일본인 히라야마 다메타로의 일기에 당시의 덕혜옹주의 상태가 적혀져 있음.
백작을 포함하여 네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느닷없이 덕혜가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인사를 드렸지만 한 마디 말도 없이 답례만 할 뿐. 그리고 끊임없이 소리를 내서 웃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1일에만 해도 직접 나무를 심는 행사에 참여 할 정도로 멀쩡했던 덕혜옹주가
3일에 갑자기 병적인 증세를 보였다고 다메타로의 일기에 쓰여 있음.
이쯤 되면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상태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음.
위 사진이 대마도를 방문 했을 때 찍은 사진.
((개인적으로 결혼식 사진보다 더 예쁘게 잘 나오셨음))
덕혜옹주는 웃고 있는데 정상적으로 미소를 지은 것인지 아니면 병 때문인지는..
그냥 나만의 생각이지만 병 때문에 웃고 있는 사람을 다케유키와 세워 놓고 사진을 찍은 것 같지는 않음.
왜냐면 이 사진을 찍은 곳 자체가 대마도고 다케유키는 어엿한 대마도 번주였으니까..흠
덕혜옹주의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 했었던 시기 였을 수도..?
결혼한 당사자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 어떤 말도, 글 하나도 남기지 않아서
(덕혜옹주는 병 때문에 그러했고, 다케유키는 입을 다물었음)
더 알기 힘든건 당연; 아; 땀;
그나마 혼마씨의 책에 다케유키의 집에서 집안일을 했던
(1938년~1940년 백작가의 집안일 맡은 여성)
나카무라 쿠니에씨의 증언들을
여시들 보기 편하라고
대략적으로 압축 해 보았음.
-덕혜의 시중은 주로 미요씨와 와다씨 두 사람이 주로 들었음.
옷은 양복일 때도 일본 옷일때도 있었고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잠옷에 가운을 걸친 모습도 많았던거 같다.
-2층에서 마사에의 방으로 내려와 의자에 가만히 앉아 계신적도 있었다.
-이름을 물으면 德惠(덕혜,토쿠에) 라고 쓰셨고 아이 이름을 물으면 正惠(정혜,마사에)라고 한자로 쓰셨다.
-때때로 지압 마사지를 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왔었으나 의사 선생님 같은 사람은 온 적이 없다.
-체격이 갸날프고 손도 정말 가늘어서 예쁜 편이었다.
가끔 2층에서 아무도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웃는 소리가 들린 적도 있다.
-2층은 침실로 방 2개를 붙인 것 같은 큰 일본식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다케유키가) 이불 두 개를 깔고 주무셨다.
(2층에서 부부가 함께 잠을 자던 것으로 보임)
덕혜옹주는 고종인 아버지를 만 6살에 여의었고 어머니인 복녕당 양귀인은 덕혜옹주가 막 17세 되던 해 세상을 뜨고
소 다케유키는 아버지 쿠로다 요리유키를 만 8살 때 여의고 어머니 쿠로다 레이코는 만 17세 때 세상을 떴음.
두 사람 모두 만 17세 즈음에 양친을 모두 잃은 고아라는 점.
또한, 덕혜옹주는 일본의 볼모로
소 다케유키는 대마도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지게 되었다.
포.인.트.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능.
결혼 당시 둘 다 양친이 없는 상태였으니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증거는 없음.
(아 땀;;)
이렇게
닯았으면서도 실질적으로 확연히 다른 공통점에 대해
서로는 어떠했을까.
권비영씨의 책과 혼마씨의 책은
이 부분에서 서로에게 연민이나 혹은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음.
하지만
덕혜옹주는 이미 정신분열증에 걸린 상태였는데
남편이 된 다케유키와의 다르지만 닯은 점에 대해 생각 할 겨를이나 있었을까 싶기도 함.
이렇게
정략결혼이라지만
어찌 되었든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가
결혼 한지 1년 4개월여만에
딸 아이가 탄생함.
신기하게도 이 즈음에는(마사에가 태어나기 1년 정도)
덕혜옹주의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함.
소 마사에(정혜)의 돌 사진.
일본식으로는 덕혜(德惠)가 토쿠에라고 발음 되는데
덕혜의 이름 중 혜[惠]를 따서
마사에, 한국식으로는 정혜(正惠)라는 이름이 지어진다.
부부에게는 양친들이 안 계셨으니 아버지인 다케유키 본인이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함.
(혼마씨는 아무런 애정도 없는 부인의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었을리는 없다고 생각함)
다케유키가 직접 이름을 지었는지 않았는지는 밝혀진 것도 없음.
마사에가 어릴 때에는 소 다케유키가 어린 마사에를 데리고(덕혜옹주는 상태가 나빴던것 같음)
영친왕 관련 즉 덕혜의 친정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기도 했었음.
여기서 여시들도 궁금할 것임.
과연 소 다케유키가 딸 마사에를
아버지로써의 애정을 주었느냐, 않았느냐.
소 다케유키가 직접 그린 딸 마사에의 초상화.
위 사진은 다케유키가 직접 그린 마사에의 초상화.
1932년 11월 생후 3월에 그린 것이라고 쓰여있음.
다케유키가 생전까지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마사에의 초상화는 총 4점 정도 있었다고 함.
(1931년, 1933년, 1934년에 그린 것. 마사에가 태어난 후 1년 마다 한 장씩 그린 것 같음)
마사에에 대해서는 다케유키도 분명 아버지로써의 애정이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되어지는 증거들.
싫어하는 어린 자식을 앉혀놓고 초상화를 그릴 아버지가...있을까.
이렇게 그림 만으로는 애정을 줬는지 어쨌는지 어띃게 알아!!
라고 생각되어 제3자의 증언들을 적어놓음.
다케유키는 마사에(초등학생 때)의 방에 가끔 들러서 함께 있어주고는 했음.
마사에의 교육때문에 친히 믿을 만한 사람에게 가정 교사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음.
다케유키는 딸 마사에와 함께 등산을 가고는 했다고 함.
(마사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취미로 등산을 즐겼다고 함)
20살 정도즈음에 다케유키와 대마도를 함께 방문했었는데(이것까지 세 번 정도 함께 방문함)
아버지 다케유키와 영어로 말을 주고 받으며 웃었다고 함.
주변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부녀 사이가 돈독해 보였다고 증언들을 함.
그리고
시간은 흘러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 시작>도쿄에 첫 공습>도쿄대공습>[1945년7월경 다케유키도 육군독립3037대대에입대함]>
히로시마원자폭탄 투하>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일본 포츠담 선언 수락, 무조건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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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귀족(화족)제도 페지가 되는데
그 귀족원 백작 의원에 다케유키도 포함되어 있었음.
대마도 번주, 즉 화족(백작)의 신분이면서도 자신의 신분, 특권 박탈을 찬성하는 쪽이었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헌법이 개정된 이후 가까운 사람에게 '후련하다'라고 말 할 정도 였다고 함.
전쟁 때문에(일본니들탓이여)
안 그래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었는데
헌법 개정과 맞물려 재산세법 까지 바뀌어
화족(귀족)의 재산까지 환원하는 지경에 이르렀음.
아직 덕혜옹주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
다케유키의 집에 들렸던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의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딸 마사에가 직접 손님을 맞이하고
불을 피웠다고 함.
마사에는 아직 중학생 정도였고 다케유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번역하는 일 등으로 바빴다고 함.
(혼마씨는 다케유키가 더 이상 덕혜옹주를 돌 볼 인력도 없고
본인 자신이 덕혜옹주를 간병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라 입원을 시킨 것으로 보여진다고 함)
여기서 포.인.트.
☆ 당시는 인력도 없고 자신이 간병하기 어려워서 보냈었다고 치고, 그 후에는 왜 다시 안 데려갔을까..?
계속 어려웠었나..? 아니면 덕혜의 상태가 데리고 올 수 없을 만큼 심각했을까?
병원에서 입원 하고 있는 것이 치료가 더 잘 된다고 생각했을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1946년 가을(추정) 도쿄의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 시킨 것으로 보여짐.
이혼 전까지는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의 입원비를 지불했음.
☆병원은 생각보다 굉장히 좋은 병원이었음.
1901년 이후로는 정신병 환자를 묶는 난폭한 시술도 없애고
매번 저명한 의사들이 원장을 맡아 꾸려왔다고 함. 암튼 유명했음.
정신병원 이지만 그 당시로 치면 좋은 병원이었던 것은 확실한 듯 싶음.
성인이 된 마사에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 했었는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여짐.
(다케유키는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했음)
마사에는 대학시절 알게 된 스즈키라는 중학교 교사와 결혼을 희망했었는데
다케유키는 그 결혼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지 즉각 허락하지 않고 백부에게 찾아가 상담을 했다고 함.
다케유키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함.
조건 이란 마사에가 결혼 후에도 '소'라는 성을 사용할 것, 즉 남편인 스즈키가 데릴사위 마냥 소 스즈키로 성을 바꾸는 거였음.
마사에가 23살 쯤 가을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병원에 입원한 지 10여년이 되었을 무렵의 일임.
(1946년 가을~1955년 6월 이혼, 그 해 가을 마사에 결혼)
그 직전에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을 하는데
부부 두 사람이 이혼 합의를 본 것이 아니라
다케유키가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와 합의를 보고 이혼을 결정 지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 흘러가는대로 발췌]
1955년, 그 전부터 이혼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에는 쓰여있음.
이혼 당시 다케유키는 결혼 당시 받았던 혼례물품을 모두 반환한다.(영친왕내외에게보내짐)
요약하자면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정확히는 영친왕, 이방자 여사)와 이혼 합의를 한 뒤
마사에의 결혼식을 치루고
본인도 가쓰무라 요시에라는 일본여성과 재혼을 한다.
부인(덕혜옹주)은 병원에 가둬놓고는
강제 이혼을 시키더니 곧장 재혼을 해?
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을 결혼시키고 영향력을 행사 해 오던 테이메이 황태후가 1951년 5월에 죽었을 당시,
같은 맥락의 정략 결혼이었던 이건 부부는 그 달이 지나기도 전에 이혼을 했으나
다케유키는 이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였고
다케유키는 남편 입장이었으니
이혼을 적극적으로 원하는 쪽이 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음(시대적배경상)
딸 마사에를 위해서 였는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였는지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이 이혼을 한 것은
그 후 5년 정도가 지난 후임.
★왜 5년이나 흐른 후에 이혼을 한 것 인지 아무도 모름.,.또르르르
그런데 마사에가 결혼 후 1956년 8월 26일 아침
유서를 남겨두고 행방불명이 되어 버림.
유서내용은 정확하지 않지만 야마나시 현의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 고 쓰여있다고도 함.
하필이면 그 즈음에 태풍 때문에 제대로 된 탐색을 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못했다고 함.
다케유키는 서장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비용은 자기 쪽에서 부담하겠으니
제2차 수사 일정을 신속하게 잡아주길 바란다 라고 요청함.
하지만 결국 마사에의 시신은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장례식은 작은 항아리에 진주 한 알을 담아 치루었다고 함.
다케유키는 살아 생전 딸 마사에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음.
소 다케유키는 딸의 죽음 이후 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고 함.
그리고 생전에 마사에는 어머니 덕혜옹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나 봄..
혼마씨도 끝끝내 마사에의 어머니에 대한 증언을 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한 거 같음...또르르
그 후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을 것 같았던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소 다케유키 말년의 사진.
덕혜옹주가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뒤
시간이 흐르고
1982년
낙선재에
일본의 노신사 한 명이 홀로 찾아옴.
소 다케유키 였음.
옛 아내를 한번 문안하고 싶다. 청했으나
전주 이씨 후손인 이공재씨는 매몰차게
(당시한국사람들에게소다케유키는진짜나쁜놈이었음)
소 다케유키를 돌려 보냈음.
★ 소 다케유키는 왜 덕혜옹주를 만나러 왔던걸까.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자? 어째서?
이미 재혼을 해 1남 2녀를 보았고 교수로 재직 중이었음.
새삼 이혼한 아내를 만나러 가는게 더 이상하지 않겠음? 아니면 말고..:D
소 다케유키가
일본에서 한국까지 혼자 덕혜옹주를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인지..
이것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가 없음.
만나지 못하게 하고 결국 돌려 보냈지만
한국사傳 라스트 프린세스 편에서 그 당시를 재연 했는데
소 다케유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한 태도였던 것으로 보여짐.
소 다케유키는 2년 뒤
1985년 4월 22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집 해향 中
시 한회(閑懷-한가한 날의 그리움) 의 일부분
그리운 아내여,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많은 새들이 주리지어 날개치고 있는가.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길 마저 끊어져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 있을 뿐이오.
서로가 처음 만났을 당시와 근접한 사진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사이에 사랑이란 것이 존재는 했었을까?
사랑이 아닌 다른 형태의 무언가는 있지 않았을까?
결혼 당시 부터 이미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었던 덕혜옹주.
아픈 덕혜옹주와 25년 동안 아이를 낳고 결혼 생활을 한 소 다케유키.
그 25년이란 세월을 스스로 공백이라고 표현하고 죽는 순간 까지
덕혜옹주와 마사에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던 다케유키.
그에게 아내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가
입에 담기도 싫었던 존재들이었는지,
아니면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었던 버거운 존재들이었는지
죽은 소 다케유키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가 죽고 난 3년 후
1989년 4월 21일
지병인 정신분열증과 실어증으로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한 많은 생과 작별을 고한다.
년도는 다르지만
다케유키는 4월 22일에, 덕혜옹주는 4월 21일에 돌아가셨다.
하루 차이는 어마어마하지만
그 차이가
왠지 씁쓸하게 생각되기도 하는데 뭐라고 설명을 잘 못하겠다..
이 아이가 내 만년에 얻은 총아(寵兒)요.
이 아이 덕분에 덕수궁이 기쁨에 넘치고 있소.
내 노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건 오로지 이 아이 뿐이외다.
-고종-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사이에, 사랑이란 존재하였는가..?
끝
-결론은 딱히 없네..그치? 여시들아^^;;아 나 땀난다;
이거 정리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엄..
내가 덕혜옹주였으면 병에 걸렸을까, 안 걸렸을까..
덕혜옹주가 저렇게되기까지의 과정..
일본은 역시나 개갞끼들..
그리고 여전히 감이 잘 안 잡히는 소 다케유키의 진심..
조선왕조가 계속 존재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온전하게 있었다면
조선 왕조 옹주들 중 가장
예쁨 받는 옹주가 되셨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음..
..대한민국 만세:-)
어이고....
덕혜옹주 읽으면서 궁금했던부분이 나도 이거였어...ㅠㅠ과연 사랑했을까. 여시야 글 잘읽었어!
ㅠㅠ슬프당 진짜 마음 아픈 이야기야ㅜㅜ
왜 눈물이 나려고 할까 역사속 개인은 너무나 슬프구나ㅠㅠ
다케유키 사람 자체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인물도 좋으시네.. 다케유키는 덕혜한테 사랑과 연민 그 사이 어디쯤의 감정이었을 것 같은데 옹주 마음은 진짜 모르겠다ㅠㅠ 정말 한많은 인생을 사셨어
눈물나ㅠㅠ
뒤늦게 검색해서 봤어.. 역사란 소용돌이 속에 참 기구한 인생이었구나 덕혜옹주
눈물나 ㅠㅠ
니 울었어ㅠㅠ....사랑....글쎄...난 잘 모르겠어...근데 난 그래도 사랑했다 믿고싶어8ㅅ8우리 공주님8ㅅ8
여시야 잘 읽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