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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12~20절/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신 세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만드시려고 만물을 창조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십시오. 죄와 어둠과 사망의 역사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전쟁, 지진. 테러, 살인, 마약, 폭력, 범죄, 기근, 질병, 가난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정보를 가진 사람이 20이고, 정보를 갖지 못한 사람이 80인 것이 지구의 현실입니다. 먹고사는데 문제없는 사람은 20%이고, 먹고사는 데 문제가 있는 사람이 80%나 됩니다. 인류는 미래에 대해 점점 더 희망을 상실해 가는 것 같습니다. 아마 지구의 미래가 밝고 희망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어디서 테러가 발생할지 항상 불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에도 이런 절망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죽음과 절망과 어둠은 우리 시대의 전유물만은 아닙니다.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 거대한 로마의 정치, 군사력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시대만 다를 뿐이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세상도 환경만 다를 뿐이지 똑같습니다. 이런 세상에 대해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하시며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죽음, 절망, 어둠 가운데서 미래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겠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
12절 말씀에서 세 가지 뜻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로 세상은 사탄의 지배 안에 들어갔습니다. 죄가 관영하여 인류는 홍수의 심판과 바벨탑을 쌓음으로 흩어짐을 당하였습니다. 인류는 지구 종말을 맞아 불의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노아 시대 때 ‘심판은 있을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것처럼, 죄를 짓고 있는 현대인들은 아무도 미래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도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써 천국을 부인하고 지옥을 부인하려 합니다. 종말과 심판을 말해 주면 부담스러워하며 자꾸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도 있습니다.
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죄는 죄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까만 것에 까만색을 칠하면 표시가 나지 않는 것처럼 어둠은 어둠을 모릅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죄인들은 모릅니다. 죄인은 일상적으로 죄짓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를 지어야 편하고 어둠에 있어야 안심합니다. 세상은 어둠입니다. 진실도, 정의도, 순결도, 의로움도 없는 곳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빛을 가져오시는 분이 아니고 빛을 설명하시는 분도 아니며 오로지 예수님 자신이 빛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과 3장에서 반복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빛’입니다. 1장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3장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하실 때 많은 상징적인 언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생명과 부활이다’,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여러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내가 진리다,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주장하시는지 그 대답은 성경 말씀을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세상은 실망과 절망이 있는 곳이 아니라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지 구원받은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축복이 있습니다. 빛은 감춰지거나 숨겨지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부인하고 거부한다 해도 빛을 막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더라도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믿든 안 믿든 영원토록 계십니다. 안 믿으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인간들이 빛을 환영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거짓이고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싫어합니다. 악한 사람은 착한 사람을 싫어하고, 불의한 사람은 주변에 의로운 사람이 있는 것을 아주 불편해 합니다. 빛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빛 자체의 위력입니다.
빛의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어둠이 짙을수록 그 위력이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새벽이 깊다는 말은 아침이 가깝다는 뜻입니다. 바늘 구멍만한 틈으로도 빛은 나옵니다. 빛은 눈을 뜰 때만 있는 게 아니라 눈을 감을 때도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있고 마음의 빛도 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아도 빛이신 그분께서 내 안에 들어오면, 어두운 내면의 세계가 밝아집니다. 어떤 빛도 내면의 깊은 곳을 비춰주지 못하지만, 그분께서는 비출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세상에서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두 가지 축복을 받게 된다. 하나는 네가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는 저주스러운 현실에 있지만 그 저주가 너와 상관없게 될 것이다. 나를 따르는 자, 나를 믿는 자, 예수님의 빛을 내면의 세계로 가져오는 자에게는 어둠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지배자는 어둠의 권세를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이란 말로 구분해서 썼습니다. 세상에는 빛의 자녀들이 있고, 어둠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어둠의 자녀들은 세상 곳곳에서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세상의 어둠이 모두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세상의 어둠은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어둠이 없다는 뜻이지, 세상의 어둠이 모두 없어진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어둠은 빛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죄인은 의인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의인을 죽이지 않으면 죄인들이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의인은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예수님의 빛이 내면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면 가정은 빛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정 19절에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의 빛을 비춤으로 세상의 어둠을 폭로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세상은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며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어려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 수 있으나 믿음을 지켜 나갈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덧입혀 짐을 통해서 더욱 견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맨 먼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두 가지를 사용하셨습니다. 먼저 말씀입니다. 인간, 천지 등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빛은 창조의 시작이고 원리입니다. 빛을 창조하신 후에 6일 동안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왜 창조의 핵심에 빛이 있을까요? 그 빛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생명의 말씀이라 하는 까닭은 말씀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라는 말씀은 빛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죽음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성장하고 부활합니다. 생명은 죽은 것도 살리고 없는 것도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생명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명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생명을 우리에게 접붙여 주심으로써 영원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접붙여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존재하게 될 때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빛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사람들에게 전달된 생명이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빛이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어둠을 내쫓음과 동시에 죽음, 저주의 세력들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빛이 전달될 때 나의 질병, 절망, 좌절, 상처, 죄악 등이 깨끗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빛이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첫째, 어둠에 거하지 않게 됩니다. 내면의 세계에 숨겨져 있는 모든 어둠은 빛을 받게 됩니다. 마치 영혼이 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영혼의 창고, 내면의 세계는 밝아지고 찬송이 나오며 향기가 나고 꽃이 피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둘째,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옴으로써 우울하고 희망이 없던 영혼에 생기가 돌고 감사하며 기뻐 춤추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겁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아멘’하고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13절에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바리새인들은 반박하고 거부했습니다. 이들이 예수의 증거가 참되지 않다고 비난하는 이유는 예수를 거짓말하는 자로 매도하려는 그들의 의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흠을 잡아 넘어뜨리려 하는 그들은 스스로 자기 선언을 하고 있는 예수의 증거에 대해 거짓이라고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네 가지 방법으로 대답하시며 자신의 증거가 옳음을 주장하십니다.
첫 번째 대답은 1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자신의 증거는 참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께서는 ‘나는 알지만 너희는 알지 못한다.’ 대구법을 사용하여 자신만이 알고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요1;1) 하나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교제하셨고(요17;5) 하나님께서 보내심으로 세상에 오셨지만(요3;16) 이러한 사실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전혀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두 번째 증거는 15~16절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판단이 옳음을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만 예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권을 그 아들이신 예수께 위임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요5;22) 따라서 예수님이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판이 없음에 대한 선포나 심판에 무관심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 현재에는 심판이 일시적으로 유보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요3;16~17) 그러나 재림하실 날에는 약속대로 이 땅을 심판하시는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일치성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은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예수의 말씀, 예수의 증거, 예수의 판단들은 우리가 온전히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대등한 말씀과 증거, 약속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말을 예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셋째로 17~18절에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에 ‘두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참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 증거는 나와 하나님 두 분이 동시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자신의 증거로 율법이 충족됨과 동시에 진리의 절대 근거가 되시는 성부 하나님의 증거가 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든지 예수께서 자신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대답은 19절에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바리새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보았느냐?’ 우리들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가짐이 보통 사람들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번째 대답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증언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겐 이 논리가 명확하게 들어옵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생명의 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세상이 어둡고 절망적이며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세상에는 분명히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빛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분을 따르기로 결정하십시오. 두 가지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 생명이 역사 합니다.
20절에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한은 예수님이 빛이며, 생명이신 자기 선언이 마감되었음을 보여주며,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신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명기함으로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