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도빈님이 삼국지의 주요 에피소드를 축약해 올려주셔서 재미있게 보고 있다. 쉽고 간결한
문체인 데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 글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마음 한구석에 머물던 질문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나관중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방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까?”
그동안 스치듯 생각만 해오던 것들을 한번 정리해 보았다.
그림에는 화가의 모든 생각이 담기듯, 문학 역시 작가의 삶을 투영하기 마련이다. 나관중이 어떤
의도로 <삼국지연의>를 창작했는지를 알려면 그의 생애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관중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과거 낙방, 생계를 위한
소금 밀매업 종사, 원말 군벌 장사성의 막료 활동. 이것이 우리가 아는 그의 파편화된 삶의 전부다.
<삼국지연의>는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원말명초라는 피로 물든 격변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 지식인의 이상과 회한이 담긴 기록이다.
과거 시험에서 낙방했다고 해서 반드시 실력이 부족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 과거는 정치적 상황과
인맥, 운에 따라 당락이 좌우되곤 했으니, 나관중은 분명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은 그의 냉철한 역사관과 통찰을 압축해 보여준다.
“話說天下大勢,分久必合,合久必分(천하의 대세란 오랫동안 나뉘면 반드시 합쳐지게 되고,
합쳐진지 오래되면 반드시 나뉘게 된다)”
이 한 줄은 원나라의 몰락과 명나라의 건국을 지켜본 나관중의 시대 체험을 반영한다. 그는 권력의
흥망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의 순환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한 정통성은 무엇인가’, ‘난세의 군주가 가져야 할 덕은 무엇인가’,
‘배신 속에서도 지켜야 할 의는 무엇인가’를 소설 전체를 통해 묻고 답하려 했다.
진수의 《삼국지》는 서진 시대에 쓰인 정사(正史)다. 조조와 조비의 위나라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선양받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위를 정통으로 삼았다.
그러나 나관중은 달랐다. 그는 이민족인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한족의 자긍심이 철저히 짓밟힌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내세웠다. 한실의 후예인 유비가 세운 촉한을 ‘한(漢)의
정통 계승자’로 그린 것이다.
나관중에게 유비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이상적 군주의 화신이었다. 유비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의(義)’였다.
도원결의의 약속을 시작으로, 삼고초려의 겸손함과 백성을 향한 눈물어린 진심, 그리고 생사를
함께한 관우·장비와의 두터운 형제애에 이르기까지.
나관중은 이들의 행보를 통해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반면 조조는 뛰어난 지략과 포용력을 갖췄음에도 ‘간웅(奸雄)’으로 그려졌고, 손권 역시 많은 장점이
있었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는 ‘강함’보다 ‘덕과 의리’를 더 높이 평가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관중은 책상머리에만 머문 문인이 아니었다. 원말 군벌 장사성의 막료로 직접 전장을 누볐다.
소금장수 출신인 장사성이 반란을 일으켜 강동을 장악하던 시절, 나관중은 그 곁에서 전략을 세우며
난세의 실상을 목격했다.
이후 주원장과 진우량의 거대한 '파양호 수전'을 지켜보았을 가능성도 크다. 적벽대전의 화공, 연환계,
풍향 읽기 등 극적인 묘사들은 그가 직접 겪거나 목격한 생생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다.
거병 초기, 장사성은 인품이 넉넉하고 백성을 아끼는 후덕한 주군이었다. 나관중은 그 모습에서
유비의 원형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가 커지고 권력에 취해 타락해가는 주군을 보며 그는 실망했고, 결국 그의 곁을 떠나
장사성의 몰락에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무자비한 숙청과 냉철함으로 천하를 손에 넣은 주원장은 조조의 ‘간웅’ 이미지와 겹쳐졌다.
나관중은 소설을 통해 새로 등극한 주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칼끝으로 세운 나라는 칼로 망하나, 덕으로 얻은 민심은 천 년을 간다.”
현실에서 나관중이 보좌했던 주군은 패했고, 지식인의 이상은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나관중은
소설 속에서 유비를 덕과 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인자하고 빛나는 군주로 그려냈다.
그리고 관우에게는 영원한 충절의 명예를 안겼다. 이는 비정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던 작가의
'대리 만족'이자, 진정한 정통성은 무력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에서 나온다는 외침이었다.
6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유비의 인자함과 관우의 충절에 열광하는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팝송> Keep the Flame Alive / Revolution Renaissance
Keep the Flame Alive는 파워메탈밴드 Revolution Renaissance의 곡이다. Revolution Renaissance는 Stratovarius의
기타리스트,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Timo Tolkki가 설립한 핀란드 밴드다.
2009년 발매된 밴드의 두 번째 앨범 'Age of Aquarius'에 들어있다. 이 곡은 전투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희망과 인내를 잃지않는 전사에 대한 노래다. https://youtu.be/qxhyDnJ72sk
첫댓글 비온뒤님
자세히 쓰셔서
이해하기가 수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미주님.
평안한 밤 되세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話說天下大勢,分久必合,合久必分.
사회주의의 유물론에서 이야기 하는 "정반합"(正反合)과 같은 의미 같습니다.
삼국지를 써 내려가는 나관중의 모습과 심정을 그려 봅니다.
맞습니다.
변화는 정반합의 순환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며
그래서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포인님.
글 잘 쓰셨습니다.
저도 삼국지 잘 몰라도 이번 도빈님의 글만 읽고도
비온뒤님 100프로 동감합니다.
저도 언제나 일이 하나 생기면 왜? 주위상황등 6가원칙에
준하여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야 시원히 잘 풀리고 이해가 갑니다.
나관중이 자기가 생각했던것
이루지 못한 것,돌아가는 상활을 보며
잘 구성하여 이리 흥미롭고 진지하고
의리있는 글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글 잘 써주셔서 더욱 기억에도
이해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사건이나 문제를 분석하고 설명할 때
아주 유용한 것 같습니다.
나관중은 현실에서 이루고 싶었던 것을
소설속에 담아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니방장님.
덕으로 얻은 민심은 천년을 간다,
이 한아디. 만. 가슴에 새기는, ....
나관중을. 조명 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건강 하십시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주얼리님.
평안한 밤 되세요...
비온뒤 님, 나관중이라는 작가의 내면을
원말명초의 격변기와 연결해 분석하신 대목을 읽으며 전율이 돋았습니다.
과거 낙방과 군벌 막료 활동이라는 파편화된 기록 속에서,
작가가 꿈꿨던 '덕과 의리'의 실체를 이렇게 입체적으로 복원해 내시다니요.
특히 '위위구조' 같은 전략적 묘사가 작가의 실전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통찰이나,
주원장과 조조를 겹쳐 보며 느꼈을 작가의 회한에 대한 해석은 삼국지를 읽는 눈을 확 틔워 주네요.
무력이 아닌 인간의 도리가 정통성이라는 나관중의 외침을
'작가의 대리 만족'으로 풀이하신 부분도 정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제 글이 비온뒤 님께 이런 멋진 사유의 실마리가 되었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삼국지라는 방대한 세계를 관통하는 예리한 시각, 정말 많이 배우고 갑니다.
귀한 글 나누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혹시 나관중의 삶에 투영된 난세의 고뇌와 '의(義)'에 대한 갈망이
담겨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워낙 올려주신 글이 좋아서 이런 생각도 하게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