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 성 이(李). 자 담(聃). 이름 이(耳).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河南省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노자의 도
"천지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음양의 두 기가 서로 작용하여 조화로운 기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노자가 주장하고 있는 도란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근원과 법칙임을 알 수 있다. 도는 기(물질)이면서 리(법칙)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만물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가 만물을 발생한다고 했을 때 도는 혼성된 물의 존재이다.
그래서 "혼돈 가운데 이루어진 무엇이 있으니 그것은 천지에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도는 만물을 떠나 있는 일종의 절대적 '리'이다. 상도(常道), 즉 영원불변하는 도라 불린다. 영원불변하는 도는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있으므로 형상이 없다. 그래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뒤섞여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도는 어떠한 성질을 가질까?
첫째, 도는 이름이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그러한 도(常道)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도를 무한한 것으로 어떠한 규정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계가 있는 명칭으로 이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논어』에서 발견되고 있는 도란 무엇인가?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공자가 강조한 인과 예는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도는 참된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둘째, 도는 공평무사하다. 노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도로 변화시키면서 도의 성질을 객관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고,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한다. "천지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는 아무데나 버리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도가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함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도는 허정(虛靜)하다. "도는 텅비어 있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도는 공허한 것이어서 영원히 충만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도는 또한 고요히 머물러 있다." 만물은 모두 장대하게 생장하지만 최후에는 모두 그것들이 본원인 도로 돌아간다. 이것을 두고 만물이 근원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데 결국 고요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 노자의 덕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덕론이란 만물의 본성을 토론하는 것이다. 노자는 우주의 본원인 도가 만물에 깃들여 만물의 본성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만물의 본성은 곧 도의 덕성이다. 노자가 말한 '덕'은 '자연'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하다',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욕망도, 행위도 없는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 노자의 윤리론
노자는 최고의 인격을 갖춘 성인은 우주의 본원인 도의 덕성을 체현하고 무위자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한 도덕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가. 갓난아이와 같이 유약(柔弱)하라.
"덕성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자는 마치 처음 태어난 갓난아기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아직 남녀의 성교도 모르는데 고추는 서 있다. 최고로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단단한 것으로 변한다.
초목도 자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세고 강한 것은 죽음에 속하는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에 속하는 무리이다. 따라서 무력이 강하면 오히려 적을 이길 수 없고 , 나무도 억세면 결국 생명을 마치고 만다. 그러니 강하고 큰 것은 결국 아래에 깔리게 마련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로 오르게 마련이다."
가. 돈후하고 질박해야지 경박하거나 겉치레를 꾸며서는 안된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게 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있게 되었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있게 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있게 되었다. 예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엷어서 나타난 것이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재앙의 시작이다. 근거도 없이 하는 억측은 도의 겉치레에 지나지 않으니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따라서 대장부는 돈후함으로 처신하지 경박함으로 처신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진실함으로 처신하지 겉치레로 처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박함과 겉치레를 버리고 돈후함과 질박함을 취한다." 따라서 그는 성인이라면 겉으로는 비록 남루한 옷을 결쳤을망정 안으로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은 듯하다고 하였다.
나. 겸허히 아래에 처해야지 교만하거나 우쭐대서는 안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강이나 바닷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곳에 잘 처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분명하지 못한 것이며, 자기가 식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총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를 뽐내는 것은 도리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니 후왕(侯王)은 스스로를 '외롭고(孤)', '부족하며(寡)', '좋지 못한(不善)' 사람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뿌리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최고의 영예는 도리어 영예가 아니다. 옥같이 귀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돌같이 굳세기를 바라지 않느다." 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겸손하게 아래에 처한다고 표시하여 영원히 자신의 겸허한 미덕을 유지하는 것이 다. 사심과 욕망을 줄여야 한다.
"욕심이 많은 것보다 죄악이 큰 것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해악이 큰 것이 없으며, 얻겠다는 탐욕보다 죄의 근심이 큰 것은 없다. 만족할 줄 알아 그치는 사람만이 영원히 만족한다." "성인은 사사로이 자신의 것을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많게 된다." 노자가 사심이 없음을 사심에 있음에 도달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한 것은 아지곧 사심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 원칙은 결코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는'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있는' 그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라.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 ???적에게도 덕을 베풀어 주라. ??? 선한 사람도 그를 선하게 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나는 그를 선하게 하니, 이것은 덕이 선하기 때문이요, 신실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고, 신실치 못한 사람도 내가 그를 신실케 하니 이는 덕이 신실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악이란 '선이 결핌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이고, 도는 선과 악을 갈라서 악을 박멸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 노자의 생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보이는 노자의 전기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려향(려鄕) 곡인리(曲仁里)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고, 자는 백양(伯陽), 시(諡)를 담(聃)이라 하였으며,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라는 벼슬을 지냈다. 일찌기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으려 하였는데, 노자는 '그대는 교기(驕氣)·다욕(多欲)·태색(態色)과 음지(淫志)를 버리라'고 꾸짖었었다.
뒤에 노자는 주나라 왕실이 쇠하는 것을 보고서 서쪽으로 떠나가려 하였으나, 이때 관(關)의 영윤(令尹) 희(喜)라는 사람의 요청으로 도덕(道德)의 뜻을 말하는 오천여언(五千餘言)의 책 상하편(上下篇)을 지어놓고 떠났다.]고 한다. 따라서 옛부터 <노자>는 공자의 선배인 노담(老聃)의 저서라고 믿어져 왔었으나, 최근에 이르러는 노자 자신의 생애와 함께 <노자>의 저자 및 <노자>의 저술연대가 모두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크게 문제되고 있다.
이미 <사기>의 열전에서도 '혹은 말하기를 노래자(老萊子)도 역시 초나라 사람으로 도가의 말을 써서 책 십오편(十五篇)을 지었는데 공자와 같은 때 사람이라고 한다.'하였으나, 장수절(張守節)은 그의 <정의(正義)>에서 '사마천은 노자가 혹은 노래자일 것이라 의심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쓰고 있다.'는 설명을 가하고 있다. 또 <사기> 열전에는 '공자가 죽은 뒤 백이십구년에 주(周)나라의 태사(太史) 담(담)이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뵈었다....혹은 말하기를 담이 곧 노자라고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다고도 하는데, 세상에서는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도 하였다.
이로서 이미 한대(漢代) 초기에도 노자의 생애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이 있었고, <노자>의 저자도 이담(李聃)인지 노래자(老萊子)인지 태사(太史) 담(담)인지 확실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대(唐代)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후한 허신(許愼)의 설이라 하여 '담(聃)이란 귀가 늘어졌다는 뜻으로, 그래서 이름은 이(耳), 자를 담(聃)이라 하였다. 이를 자를 백양(伯陽)으로 알고 있으나 바르지 않은 것이다.'라 설명하고 있어, 노자의 성과 이름을 이이(李耳)라 보는 이도 있었다.
노자라는 인물에 대하여는 청대(淸代)의 최술(崔述) 같은 고증학자(考證學者)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었다.(<崔東璧遺書>) 이 뒤로 어떤 학자는 <노자>의 저자가 이이(李耳)라고도 하였고, 어떤 이는 노래자(老萊子)라고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사실은 태사(太史) 담(담)이 그 작자라고도 하였다. 또 <노자> 작자의 생존연대에 있어서도 그는 바로 공자가 예(禮)에 관해 물으려 하였던 공자의 선배인 노담(老聃)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공자보다 후세의 사람이라 하였으며, 심지어 장자보다도 후세의 사람이라 주장한 이도 있었다(錢? <先秦諸子?年>).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한가지 근거에 의하여 이처럼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대(漢代)의 사마천(司馬遷)이 이미 <노자>의 확실한 작자를 알 수 없었으니만치 지금 와서 더욱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곤란한 것이다. 사마천은 <노자>의 작자가 이담인지 노래자인지 또는 태사 담인지 확실히 몰랐지마는, <노자>라는 위대한 저서가 후세에 끼친 사상적인 영향 때문에 애매한대로 그러한 열전을 쓰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의 사상이 <무위(無爲)> <무아(無我)>를 크게 내세우고 있어 그것은 결국 <무명(無名)>으로 통하는 것이므로 도가의 인물들이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이름을 들어내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작자도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숨어 산 현인(賢人)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사마천의 시대에 이미 노자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있었고, 그가 지은 책 <노자>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그 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확실히 알 수 없었던 것은 이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에 와서 <노자>의 작자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 가를 고증하려 든다는 것은 무리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미 미국 학자 R. B. Blakney는 그가 번역한 <노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마도 사실은 노자란 본시 가명(假名)이었을 것이다. <노(老)>란 성이 아니고 다만 형용사로서의 <노>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저술(著述)의 관습에 의하면 <도덕경>의 작자는 반드시 고인(古人)일 것이라고 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책을 쓸 적에는 반드시 노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추정(推定)은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볼 적에는 근거없는 일이지만, 역사적인 상식에서 볼 때에는 퍽 그럴사한 이론인 듯하다. 노자의 생애나 그와 관계되는 기록은 사마천 이전 것으로는 전혀 믿을만한 게 없다. 따라서 우리는 노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고증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산 사람인지 모른다해서 <노자>란 책의 가치나 의의가 줄어들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가의 창시자로서 옛날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노자라는 사상가가 있었는데 그는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내세우던 분이라서 그의 생애나 이름같은 것은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인식이 될 줄로 믿는다.
▶ 도가사상
1. 도가사상 형성의 시대적 배경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노자의 생존 년대는 불확실하지마는 적어도 그에 의하여 대표되는 도가사상은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 왕조의 세력이 약해져서 각 지방제후의 나라들이 서로 멋대로 다투어 무수한 나라가 생겨났다가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망해간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보려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바로잡을 경륜을 들고나와 자기의 주장을 선전하기에 힘썼다. 후세에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를 비롯하여 유가·묵가·명가·법가·병가·농가·음양가 등 수많은 유파들이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란 혼란이 극한 시기이기는 하였지만 한편 이처럼 다양한 사상가들이 나와 중국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학문의 꽃이 피어났던 것은 자기의 독특한 경륜을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출세를 해보려는 개인의 공리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여러나라의 임금들이나 권세가들이 각기 어진 사람들을 자기 밑에 끌어들여 이들을 보호해 줌으로써 자기 세력을 기르려 했었다는 데도 큰 원인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제나라 위왕같은 이는 직하에 송견·윤문·신도·전변·환연·접자 같은 사상가들을 모아놓고 자유로이 학문을 연구하며 서로 토론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귀족으로는 제나라의 재상을 지낸 맹상군이 평소에도 수천명의 식객을 집에서 먹여 길렀었고, 뒤에 그는 이들의 힘을 빌어 여러가지 큰 일을 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이처럼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기본 경향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가 혼란하기는 하였지만 그 시대의 봉건제도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는 이들과 부정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이들이다. 유가와 묵가를 긍정적인 학파들의 대표라 한다며는 도가와 법가는 부정적인 학파들의 대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긍정이나 부정에 있어서도 그 내용이나 성격에 큰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유가가 이미 존재하여 오던 권력의 지배관계를 기초로 하는 봉건제도를 올바른 도덕으로서 다시 바로 잡아보려고 애쓴데 비하여, 묵가들은 일종의 사회계약설로서 봉건지배의 기초를 삼고 그 권력관계를 종교적인 의미의 지배로서 존재케 하려 했었다. 그리고 부정하는 쪽에 있어서도 법가는 인위적인 제도를 강화하여 강력하고 빈틈없는 권력의 지배관계를 집권적 독재정치로 승화시키려 한데 비하여, 도가는 혼란한 세상의 인위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무위자연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불행의 요소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자유로운 인간의 경지를 추구하려 했었다.
따라서 노자를 비롯한 이 시대 제자백가들의 사상의 발생과 전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주나라 봉건제도의 붕괴와 정치사회상의 혼란 및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의 유가와 도가는 왕조의 흥망성쇠와 사회의 치란과는 거의 표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후세에까지도 발전계승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더욱 일체의 인위와 인간들의 가치평가를 부정하는 도가사상이란 결국 어지러운 세상에서 뜻 잃은 지식인들의 도피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논어>만 보더라도 장자·걸익·접여 같은 수많은 은자들의 언행이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숨어 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이 심화하여, 도가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도가사상을 비현실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규정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조그만 자기욕구나 지나친 성취 같은데 억매이기 쉬운 인간관계를 초극하고, 거시적인 입장에서 인생과 사회와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을 그에게서 배워야 할 줄로 안다.
2.도론 - 도의 본체
노자의 사상은 <도>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의 학파를 도가, 그의 학문을 도학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자도 <논어>에서 '아침에 도에 관해 들어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는다고 하여도 괜찮겠다.'는 등 <도>란 말을 쓰고 있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도와 도가의 도는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이 올바로 살아나가고 세상을 옳게 다스릴 수 있는 올바른 <도리> 또는 <진리> 같은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도>는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또 우주와 만물이 존재하고 변화하는 섭리가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도>는 사람의 지각으로서는 인지할 수도 없고, 또 사람의 지혜로서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어떤 물건이 혼돈히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생성보다도 앞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형체도 없지마는 홀로 존재하여 변화하지 않고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라 할만한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라고 이름하였고, 억지로 그것을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노자>의 첫머리에서
'<도>라고 알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절대 불변하는 참된 <도>는 아니다.'고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도>라는 것의 성격은 황홀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이처럼 <도>란 사람의 지각으로서는 제대로 인지할 수도 없는 미묘한 것이지만, 그것은 위대하여 세상에는 그것에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 미세하여 티끌이며 가는 터럭 속이고 그것이 들어 있지 않은 것도 없다. <한비자> 해로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말이 <도>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도>라는 것은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요 모든 이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물은 제각기 이치가 다르지만 <도>는 만물의 이치의 모든 근거가 된다....'
<도>는 우주의 본원이며 만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곧 우주 만물은 도로 말미암아 도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노자는 만물생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았다.'
이는 마치 <역>의 생성과정과도 흡사하다. 여기의 일이 태극이라면 이는 음양, 삼은 오행과도 비슷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도>의 성격은 <황홀한 것>이라 하였는데, <황홀하다>는 것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으며, 변화하면서도 변화하기 전의 아직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언제나 <무>는 도의 묘용을 들어내보이려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있다. 다시 '천하의 말들은 <유>에서 생겨났고, <유>는 <무>에서 생겨났다.'고도 하였다. <도>와 <무>의 관계는 미묘하다. <무> 이전에도 <도>는 존재하여 만물의 생성과정에 있어서는 <도>가 <무>를 이루고, <무>가 <유>를 낳았다는 것이다.
도가의 <무>의 철학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무>의 철학은 장자에게서 더욱 발전하여 그는 심지어 <무의 무> <무의 무의 무> 식으로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추리하기 힘든 절대무의 경지까지도 추구하게 된다.
도는 만물을 생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존재케 하고 변화시키는 법칙이 되기도 한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는다.'고도 하였다. 만물은 도에 의하여 존재하고 변화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자연의 상태로서 그렇게 된다.
노자는
'위대한 도는 장마물처럼 왼편 오른편 어디에나 퍼져있다. 만물은 이것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얘기하지 않으며... 만물을 입혀주고 길러주고 하면서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는 안하는 일이 없이 큰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작위도 없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의 위대한 작용이나 존재는 의식조차도 못하기 일수이다. <도>처럼 아무런 작위도 가하지 않고 되어지는 것을 <무위>라하고, 그러한 상태를 <자연>이라 부른다. 도가의 이른바 <무위·자연>의 사상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노자 왈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일도 없다.'고 말한 것도 이것을 설명한 말이다. 도는 언제나 <무위>하고 또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
3.도론-도의 작용
<도>는 만물을 생성하며 변화시키고 있지만 그 작용에는 도가의 사상을 특징지우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고 하였다. <도>는 만물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 이때 만물의 발전은 반드시 일정한 정도(곧 극점)에 이르면 다시 자연히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물 중에는 무조건 영원히 발전해나가기만 하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다. 생물들은 태어났다 자라서는 늙고 죽음으로써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변화의 단계를 노자는
'... 그것을 <도>라고 이름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대>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멀리 극도에까지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도>란 위대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슨 사물이든 발전하여서는 극점에 이르고, 극점에 이르러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운동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것이다.
'만물이 아울러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그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본다. 만물이란 번성하고 있지만 제각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고도 하였다. 이것은 도가의 무위와 자연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표현한 것인데, 고요하이란 운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운명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일정한 법칙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고 설명을 덧붙인 것은 이러한 변화의 법칙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가 <무위>한 것이어서 그것을 <고요함>이라 표현한 것이며, 또 그것이 <자연>이기 때문에 그것을 <일정한 법칙>이라 표현한 것이다. <도>의 움직임은 되돌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무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올바른 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유>보다는 <무>가 본원적인 것이며, <유위>보다는 <무위>가 더 소중한 것이다. 모든 변화는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현상의 평가에 있어서는 <움직임>보다는 <고요함>이 중시되고,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앞서는 것보다는 뒤서는 것, 교묘한 것보다는 졸렬한 것, 화려한 것보다는 소박한 것 등을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약한 것>에 대한 주장일 것이다. 노자는
'약한 것도 도의 작용이다.'고 말하고 있다. 약한 것이란 물론 강한 것 또는 억센 것의 반대되는 것이다. 본시 도가 황홀한 혼돈상태에 있을 적에는 전혀 아무런 분별도 없었을 것이니, 자연히 강하고 약한 것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 혼돈상태를 벗어난 뒤에는 약하고 강한 것을 비롯한 모든 상대적인 분별이 생겨난 것이다.
강하고 약한 것을 비롯하여 모든 상대적인 분별, 곧 억센 것과 부드러운 것, 긴 것과 짧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등이 생겨난 뒤로 모든 사람들은 보통 이중의 강한 것·긴 것·좋은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만약 우주가 완전히 정지상태에 있다면 이러한 사람들의 평가는 옳은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와 만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는 언제나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상대적인 분별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분별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대적인 분별에 따른 평가란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우주가 혼돈상태로부터 변화를 시작하였다면 우주는 모두 혼돈상태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혼돈상태에는 상대적인 분별이 없다. 따라서 상대적인 분별이란 변화과정 중에 들어나는 일시적인 구별일 따름이다.
언제나 강하다거나 영원히 아름다운 것 같은 것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분별 중에서도 강한 것·좋은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은, 약한 것·나쁜 것 같은 소극적인 편의 것들보다 더 들어나고 두드러진 것들이다. 변화과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편은 극점에 가까운 것들이고, 소극적인 편의 것들은 변화의 시작에 가까운 것들이다.
'하늘의 도는 활줄을 잡아당기는거나 같은 것이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끌어올리고, 여유가 있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충해준다.'고 말한 것도 우주의 변화원칙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이 상대적인 분별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두드러지게 들어난 것들은 더욱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러한 사실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굳으면 깨어지고, 날카로우면 무디어진다.'
'군대가 강하면 멸명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어진다.'
'억센 자들은 제 명에 죽지를 못한다.'
반대로 소숙적인 편의 약한 것·나쁜 것 같은 것은 낮고 숨기어져 있는 지위의 것들이며 언제나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편의 것들이 일시적이고 위험한 상태인데 비하여 소극적인 것들이 오히려 안정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비뚜러진 것은 온전히 되고만다. 구부러진 것은 곧게 되고만다. 움푹한 곳은 가득 차게 되고만다. 낡은 것은 새롭게 되고만다. 적은 것은 더 보태어지고만다. 많은 것은 미혹되어 잃게 되고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강한 것 같은 적극적인 편의 것들은 결국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알고보면 그것은 소극적인 것들보다도 더욱 일시적이고 불안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노자가 약한 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 중세서 그것이 가장 <무>나 <자연>의 상태에 가까운 것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도 하였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고 역설적인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노자는 약하면서도 실제로는 강한 본보기로 물을 들기도 하였다.
'천하에는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도 그것을 당해내는 것은 없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상징이고, 억세고 강한 것은 죽음의 상징이라고까지 하였다.
'사람이 살아있을 적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만물이나 초목도 살아있을 적에는 부드럽고 갸냘프지만, 죽으면 마르고 뻣뻣해진다.'
약한 것이야말로 생명이 있으며 발전하는 것을 뜻하지만 강한 것은 죽음과 멸망을 뜻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강약에 있어서 노자의 이상은 약한 것보다도 더 나아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에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도의작용 곧 만물의 변화에 있어서 중시해야 할 것이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이라는 말이다.
4.노자의 가치관
앞에서 노자는 상대적인 분별에 있어 약한 것 또는 부드러운 것 같은 소극적인 편의 것을 강한 것 또는 억센 것보다 높히 평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상대적인 분별이 나타날 때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노자는 원칙적으로 모든 상대적인 분별에서 오는 가치관판을 부정한다. 높고 낮은 것, 길고 짧은 것, 강하고 약한 것, 좋고 나쁜 것같은 판단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모두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들어나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사물의 참된 성질이나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높고 낮은 곳, 길고 짧은 것, 강하고 약한 것, 좋고 나쁜 것같은 판단은 모두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 추상적인 개념에는 이러한 판단을 뒷바침해줄 확실한 기준이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높은 것이라도 그것을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낮은 것이 될 수가 있고, 아무리 긴 것이라 하더라도 더 긴 것과 견줄 적에는 짧은 것이 된다. 모든 상대적인 판단은 때와 장소 또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자에 따라 언제나 변화한다.
노자는
'네 하는 대답과 어 하는 대답에 차이가 얼마나 있는가? 선한 것과 악한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가?'고 말하고 있다.
실상 여러가지 상대적인 분별들을 자세히 따져보면 모든 사물의 상대적인 것들은 아울러 함께 존재하고 서로 상대방에 힘입어 그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높고 긴 것들은 언제나 높고 긴 한편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 반드시 다른 한편에 낮고 짧은 것이 있기 때문에 높고 긴 것들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는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은 서로를 이룩해주며,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그런 형체를 만들어주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 그렇게 만들어주며, 음악과 소리는 서로 조화하여 그렇게 해주고, 앞과 뒤는 서로 위치에 따라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상대적인 분별은 결국 <유>와 <무>에게까지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를 중히 여기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이것이 인간들이 불행해지고 부자유스럽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행복을 추구하지만 절대적인 행복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행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고, 똑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노자는
'화에는 복이 깃들여져 있고, 복에는 화가 숨기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모든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로 하였지만, 이 되돌아가는 만물의 변화는 결국 상대적인 것들이 서로 변화함을 뜻하기도 한다. 긴 것은 짧아지게 마련이고, 아름다운 것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올리는 것>이 도의 원리인 것이다. 사애(四愛)적인 분별은 어느 한편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나 반드시 그 상대적인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또한 노자는 <약한 것>을 존중하였다고 설명했지만, 약한 것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두가지편 중에서 길고 높고 좋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 같은 적극적인 편보다는 짧고 낮고 나쁘고 약하고 추한 것같은 소극적인 편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것은 적극적인 편의 것일수록 소극적인 방향으로 반드시 변화해야만 하는 불안하고 일시적인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미 소극적인 편에 있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적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소극적인 편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무>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 주장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분별에서 오는 가치평가에 있어 일반 사람들은 판단을 크게 그릇되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5.윤리관
노자는 사람의 존재도 우주 속의 자연의 한가지 현상으로서 파악한다. 사람도, 봄에 돋아났다 가을에 서드는 풀이나 산에 솟아있는 바윗돌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연의 한 요소라는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사람이 나서 자란 다음 늙고 다시 죽는 것은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도의 변화>소그이 한가지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욕망과 평가를 쫓아 자연변화의 도를 어기고 자기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가 자연의 한가지 현상에 불과하며, 자기의 욕방이나 가치판단이 모두 헛되고 그릇된 것이을 깨닫지 못한다. 여기에서 사회의 혼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불행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자기> 또는 <아집>을 버릴 것을 주장하다.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의 입장에서 <아집>을 가지고 남을 대하여 사물을 본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들어내려 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노자는
'스스로 들어내고자 하는 자는 밝게 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들어나지 않고, 스스로 뽑내는 자는 공로가 없게 되며,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약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사상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들어내어 남보다 두드러지는 자는 언제고 외부의 공격을 받아 큰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려면 남과 다투어서도 안된다.
노자는
'성인의 도는 일을 이루기는 하되 다투지는 않는다'고도 하였다. 남과 다툰다는 것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의 <강함>을 행사하려는 뜻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서는 그와 더불어 다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고도 하였다. 다툰다는 것은 이기게 되더라도 결국 도의 변화법칙에 따라 자기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것이 된다. 그뿐 아니라 이미 다툰다는 자체가 자연의 도를 어기는 자기를 해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남과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에 앞서려는 마음까지도 없애버려야 한다. 노자는 사람의 세가지 보배 중의 하나로서
'감히 천하에 앞서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감히 천하에 앞서는 입장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능한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고도 설명을 붙이고 있다. 뒤에 <장자>에서도 '남들은 앞서려 들지마는 자기는 홀로 뒤서려 든다'고 하였다. 이것은 약한 것을 지키고 남보다 얕고 못하게 처신하는 것을 뜻한다. 앞서고 강하며 들어나는 것같은 것은 도의 변화원칙으로 보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침 내내 불지를 못하고, 소낙비는 하루 종일 계속하여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만드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조차도 오래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하늘과 땅>이란 바로 자연을 뜻하며, 그것은 또 도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노자는 이러한 도의 변화원리를 따른 올바른 사람들의 몸가짐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잠시 그것을 불어나게 한다. 약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잠시 그것을 강하게 한다. 피폐케 하려면 반드시 잠시 흥성케 한다. 뺏어버리려 한다면 반드시 잠시 더 보태 준다.'
곧 자기가 잘 살고 싶다면 남과 다투지도 말고 남보다 앞서려 들지도 말며, 언제나 약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그래서 성인은 그의 몸을 뒤로 미루지만 자신이 앞서게 되고, 그의 몸을 소외하지만 자신이 잘 보존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사사로움이 이룩될 수가 있는
▶ 도가사상의 발전
1.도가의 사상
춘추시대(BC722-BC467)에 발생한 노자의 사상은 전국시대(BC466-BC221)에 이르러 장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이른바 도가가 형성되었다. 전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도가사상은 유가사상 다음 가는 가장 유력하고도 보편적인 한 학파로 발전한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만 보더라도 도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삼십가가의 수많은 저술들이 재록되어 있다.
이들의 저서를 읽어보면 이들의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기기도 하였으나 원칙적으로는 모두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내심의 수양을 통하여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인위적인 일체의 행위를 반대하며, 그러한 인위에 의하여 발전한 모든 문화제도를 무시한다. 이러한 문화제도는 모두가 허망한 실속없는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 <무위>함으로써 완전한 <자연>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이야말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상태이며, 바로 <도>의 작용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연>은 완전하고도 전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힘이란 도의 변화원리만을 어길 수 있을 뿐이지 <자연>에는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개인의 몸가짐이나 일을 하는데 있어 언제나 <자연>의 방법에 따를 것을 주장한다. <자연>의 방법에 따른다는 것은 일체의 인위적인 행동을 배격하고 <무위>함을 뜻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무> 또는 <무위>와 <자연>의 개념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도가라면 원칙적으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사상가들인 것이다.
2. 도교의 발전
그러나 한대에 이르러 노자의 영향아래 도가와는 전혀 다른 도교가 발생한다. 도교는 후한 말엽에 장도릉이란 사람에 의하여 창립되었는데, 도교의 성립에는 노자의 사상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두가지가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첫째 중국에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던 민속신앙이다. 그중에도 여러가지 무술과 점술 및 잡신들의 신앙같은 것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는 전부터 전해내려오던 술수로서 천문·역보·오행·시귀·잡점·형상의 여섯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미신적인 술수들이 뒤에는 모두 도교의 영역 안으로 숨어들어오게 된다.
둘째 신선사상과 방사이다. 신선사상은 전국시대에 생겨났다. <사기> 천관서 봉선서 및 <한서> 교사지 등을 보면 연나라와 제나라 지방(지금의 하북·북동 지방) 사람들이 발해에 생겨나는 신기루를 보고서 일종의 신선사상을 발전시켰다 한다. 그들은 발해 속에는 봉래·방장·영주라 불리우는 세개의 신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공중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신선들이 살고 있고,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선약들이 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나라 위왕과 선왕, 연나라 소왕 등이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진시황이 서복으로 하여금 동남동녀 오백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동해로 나가게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전한다.
이러한 여건 아래 직업적으로 신선과 선약을 구하는 방사들이 생겨났다. 방사들은 보통사람들보다도 신선의 성격이나 신선의 세계를 잘 알고 있어 신선을 부를 수도 있었으며, 또 여러가지 술법으로 먹으면 죽지않고 신선이 된다는 선단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하였고, 어떤 자는 신체와 마음을 단련하여 오래 살고 신선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신선을 좋아하는 여러 임금들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진시황 대의 서복, 한무제때의 이소군, 공손경 등이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이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임금으로 하여금 신선을 구하도록 만들어, 그사이 자기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었다. 이러한 풍습은 위진남북조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유행하여, 뒤에는 방사들이 여러가지 부록과 주술로서 귀신을 쫓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선사상과 방사의 도술이 직접 도교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노자도덕경>을 그들의 이론근거로 삼았다. 다만 여기에 더욱 현묘한 이론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일찌기 도가에서 황제를 끌어들이어 도학을 흔히 <황로지학>이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보통 도교에서는 노자를 교조로 받들어 모신다. 특히 동진때 <포박자>를 지은 갈홍이 나왔고, 북위에는 태무제의 신임을 받은 구겸지 같은 사람들이 나와 도교에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는 한편 열심히 이를 선전하여 도교는 중국에서 가장 강대한 종교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뒤에 당나라 때에는 왕실이 노자의 후손으로 자처하면서 노자를 숭상하였으므로 도교는 더욱 성행하였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교조로 받들면서 노자를 신선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노자 아래로도 수많은 신선이 있는데, 이를 사이에는 일정한 계급과 각기 분장하는 직무가 있고 각기 맡고 있는 지역이 따로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 나라들의 정부조직과 비슷하다. 다만 이들과 노자와의 관계나 이들 신선 사이의 관계는 이야기하는 사람들마다 달라서 종잡기 어렵게 되어있다. 그것은 도교가 기독교와 같은 성실하고 경건한 신앙이 없이, 각기 개인의 이익을 기구하고 자기가 늙어 죽지 않는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게 그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교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종류로 크게 분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늙어 주지 않고 오래 사는 신선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신선이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권능을 습득하는 것이다. 신선의 권능으로는 귀신들을 쫓거나 형체를 변화시키는 등 여러가지 초인적인 능력들이 있다. 이러한 능력의 습득을 위하여는 부록·주술·무술·요술 등 여러가지 신묘한 방법을 익힌다. 그리고 신선이 되기 위하여 마음과 몸의 수양을 쌓아야만 하는데, 도교의 수양에는 내단의 수련과 외단의 수련의 두가지가 있다.
내단과 외단의 수련방법은 무척 복잡하고도 신묘하여 간단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내단의 수련이란 자기 신체 내부의 기능들을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 것이고, 외단의 수련이란 자기 신체 이외의 물건의 힘을 빌어 신선이 되는 것이다. 곧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선단을 만드는 연단술이나 선약의 제조 같은 것이 외단의 방법인 것이다.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도가>와 <도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들은 다같이 노자를 받들기는 하지만 도교에서는 노자를 신선으로 알기만 했지 그의 심오한 철학을 중히 여기지는 않는다. 도교에서도 <노자도덕경>을 경전으로 받들기는 하지만, 이들은 <도덕경>의 사상적인 연구는 하지 않고 도를 닦고 신선술을 구하는 이론적인 근거로 삼을 따름이다. 이러한 도가와 도교의 구별은 근래에까지도 혼동됨이 없이 중국사회에 계승되었다. 따라서 후세까지도 도교는 미신적인 일종의 민간신앙이라 할 수 있고, 도가는 중국사상의 한 유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을 가리킨다는 구별은 변함없이 지속된 것이다.
▶ 노자의 현대적 의의
노자는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따라서 그의 저서 <노자>는 후세에 와서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도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이다. 그의 뒤를 이어 장자(莊子)라는 사상가가 나와 도학(道學)을 발전시켰으므로, 도학은 흔히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불리어졌고, 도가에 있어서의 노자와 장자는 마치 유가(儒家)에 있어서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처럼 여겨지고 있다.
유가사상이 중국의 북방(황하 유역)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면, 노자의 도가사상은 남방(장강유역)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다. 중국에 있어서의 북방과 남방의 차이는 기후와 자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학술·문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 성격의 차이를 보여준다. 북방은 기후가 차고 자연조건이 거칠며 매말라 사람들은 생존(生存)을 위하여 외부조건들과 투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던데 비하여, 남방은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아무런 걱정없이 생활을 영위(營爲)할 수 있었다는데서 생겨난 성격의 차이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북방 사람들억세고 투쟁적이며 현실적인 데 비하여,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적이며 낭만적이다. <중용(中庸)>에서도 공자가 강(强)함을 설명하며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써 가르치고 무도(無道)함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인데, 군자(君子)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다. 무기와 갑옷 위에 넘어져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북방의 강함인데 강자(强者)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북방과 남방의 기질적인 차이는 옛부터 뚜렷했던 것같다.
아뭏든 유가사상이 현실적이라면 노자의 도가사상은 초현실적(超現實的)이다. 공자는 어지러운 현실사회를 인의(仁義)와 같은 훌륭한 덕(德)과 올바른 예의제도(禮儀制度)로서 다스려보려고 애썼는데 비하여, 노자는 그와 정반대로 도(道)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그릇된 자기 위주의 가치판단 아래 세상을 그릇된 판단으로서 다스리려들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노자는, 공자를 비롯한 일반 사람들이 훌륭하다 또는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절대적인 훌륭한 것이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 하였다.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올바른 것은 그릇된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불행에 빠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혼란과 싸움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무위(無爲)·무지(無知)·무욕(無欲) 등 무(無)의 사상과 자연(自然)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무>나 <자연>은 <도>의 현상이며, 이것은 사람들을 불행케 하는 모든 가치판단이나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뜻한다. 그것은 말을 바꾸면, 자연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인간의 인간 본연(本然)으로서의 회복 또는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있어 한대(漢代) 이후 이천 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유교(儒敎)가 그 정치와 사회의 윤리의 바탕이 되어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유교는 현실주의적인 학문이어서 언제나 정치적으로는 군주(君主)의 봉건전제(封建專制)를 지나치게 형식화시키고, 사회생활을 판에 박은 듯한 예교(禮敎)로서 무미건조(無味乾燥)하게 만들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막바지에 이르면 언제나 초현실적인 도가사상이 끼어들어 지나친 정치의 형식화나 사회의 예교화를 막아, 정치나 사회를 조화시켜주었다.
그들은 늘 빈큼없는 예의제도를 내세우면서도 도가에서 그것이 참된 인간 본연의 것인가를 반성할 여유를 얻었던 것이다. 예술·문화도 유가의 실용적(實用的)이고 공용적(功用的)인 사상만을 따른다면 결국은 지나치게 형식화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나 문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할 여지를 갖게 되어, 중국의 예술과 문화는 언제나 새로운 생각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역대 예술 비평가들이 즐겨 사용한 질박(質樸)이나 고박(古樸)의 표현이 그 일면인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올바로 살고 큰일을 해보려고 노력해도 뜻대로 안될 때, 도가사상은 그 현실을 초극(超克)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속에 묻혀 유유히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중국 역사를 보면 각 왕조의 멸망이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처럼 혼란했던 시기에는 언제나 도가적인 사상들이 유가사상 이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가적인 경향은 중국 문화의 영향이 미쳤던 동양 여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그것은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동양사상의 일면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흔히 동양사상의 소극적(消極的)인 일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가치판단 또는 인류가 지양(止揚)해야 할 동류(同類) 사이의 경쟁 또는 투쟁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말미암은 불행의 완전 해소(完全解消)를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사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논리(論理)의 필연(必然)>을 추구해온 서양의 과학문명을 흔히 위기(危機)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논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며, 더우기 자기의 가치판단을 바탕으로 한 자기 욕망 추구의 경쟁은 지금 인류를 멸망 직전으로까지 몰고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문명이나 현대적인 우리의 가치관에 대하여 냉정한 반성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우리는 와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는, 이러한 현대인의 반성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경전의 하나가 될 줄로 믿는다. 인류의 행복은 <나>의 입장보다도 인간 본연의 추구를 통해서 비로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자>는 현대 세계가 혼란해질수록 더욱 인간의 예지(叡智)가 담긴 위대한 저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동양인으로서는 올바른 동양인으로서의 자아(自我)를 되찾기 위해서도 꼭 읽어보아야만 할 책이라고 믿는다.
▶ 노자[책]의 전래와 그 연구
<노자>란 책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상당히 세상에 알려졌었다. <순자><여씨춘추>에 이미 노자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보이고, <한비자>에는 해로편 유로편 같은 <노자도덕경>의 중요한 내용을 강설한 부분이 있다. 같은 <한비자> 현학편에서 '세상의 두드러진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가의 세력이 유가나 묵가만은 못했던 것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유가와 묵가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며는 세상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도가들은 일체의 사람들의 의식적인 작위를 부정하고 물러나 자신을 세상에 들어내지 않으려고 했던 학파이므로, 자연히 유가나 묵가처럼 세상에 두들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이미 전국시대에 유가나 묵가 못지 않은 중대한 영향을 세상에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한비자>는 황제와 노자의 학문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그 밖에 양주·신도·전변·접자·환연 등이 노자의 사상에 직접 간접으로 양향받고 있고, 심지어 병가인 <손자>에까지도 그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리고 노자와 함께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알려진 장자의 저서 <장자>를 보면 여러 군데에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천하편에서는 노자를 중요한 학파의 하나로 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장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노자>의 사상을 부연 발전시킨 것이다. 근인 임어당이 영역한 <노자>를 보면 매 장마다 그 아래 <장자>에 보이는 같은 성질의 문장을 참고로 인용하고 있어 <노자>와 <장자>의 관계를 알아보기에 편하다. 이 책에 의하면 <노자>의 거의 모든 장 아래 같은 성질의 <장자>의 말이 인용되고 있어, <노자>의 각 장에 보이는 사상은 거의 모두 <장자>에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대로 들어와서는 초기에는 황제나 황후 및 고관들 중에 노자의 술법을 좋아하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고조 때에는 조참이 황노의 술법으로 제나라를 다스리어 명성을 크게 떨친 뒤, 다시 한나라의 상국으로서도 훌륭한 정치를 했었다. 그리고 황제 중에서는 문제와 경제가 도학을 좋아했고, 경제의 어미니 두태후는 열렬한 도학의 옹호자였다. 따라서 한나라 초기 경제시대에 도학은 극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노자>의 권위도 이 무렵에는 대단히 높아졌을 것이다.
청대의 초횡도 <초씨필승> 권삼에서 '<노자>는 본시 자서였는데 한나라 경제 때에 비로서 경으로 바뀌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근거로 한 것이 삼국시대 오나라 학자의 말이어서 확실한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사실은 역사적인 여건들로서 볼 때 틀림없는 얘기일 것같다. 고조와 혜제시대에는 조참 이외에도 진평과 육가, 문제와 경제시대에는 등장·왕생·전숙·직불의·사마담, 무제때에는 급암과 정당시 등이 모두 도학을 좋아했었다. 따라서 무제 이후로는 유학이 한대정치의 이론적 근거로 확립되었다고 하지마는, 실상 음으로는 도학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고, 유학 자체도 형이상학적인 이론과 사유에 있어 도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지금 전하는 하상공본 <노자>는 한나라 문제때의 하상에 숨어살던 이가 주를 단 책이라 한다. 그러나 근래, 모두 이것은 유조시대에 씌어진 책이어서 왕필본보다도 오히려 뒤늦게 나온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다만 전한 초기에 <노자>의 연구가들이 이미 나왔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후한으로 들어와 환제 같은 노자의 존숭자가 나왔던 것도 전한의 앞에서 얘기한 기풍이 은연 중 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제는 노자를 고현의 사당에 모셨고, 변소라는 학자에게 명하여 노자를 칭송하는 비명까지 짓게 하였다.
후한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도학을 좋아하는 경향은 지식인들 간에 더욱 심하여졌고,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송명청으로 이어지기까지 황실중에서도 노자를 떠받드는 습속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사대부들을 비롯한 일반사회에는 더욱 그 학문이 유행했었다. 중국사회는 겉으로는 유교가 그 윤리의 바탕이 되어 왔지만 사회 생활 속 깊숙한 곳에는 도가의 사상이 크게 퍼졌던 것이다. 그중에도 전한때의 사마담의 도학 존숭을 비롯하여, 한말 오두미도를 내세웠던 장로가 그의 전 신도들에게 <노자> 오천문을 외우게 했던 일, 진나라 시대 죽림칠현이 나와 도가의 사상을 받들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살았던 일 같은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건들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위나라 왕필에 의하여 지금 전해지는 판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주석이 씌어졌었다. 그리고 앞에 얘기한 것같은 도학의 성행으로 말미암아 그 뒤로는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노자>의 주석서들이 나왔다. 근인 마서륜의 <노자핵고>같은 것은 이 방면 연구의 좋은 참고서라 할 것이다. 마서륜을 비롯한 근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노자>에는 수많은 판본들이 있지마는 그중의 근본적인 이본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가지라고 할 수 있다.
1.왕필 <노자도덕경주>
2.하상공<도덕진경주>
3.부혁 <교정고본노자>
4.당 현종 <도덕경주>
이중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설명을 하였다. 특히 하상공본은 한나라 문제때의 은사인 하상공이 쓴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왕필본보다도 늦은 육조무렵의 작품인 듯 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돈황에서 나온 당초본들과 일본에 전해진 고초본들 및 당대의 <도덕경> 경비와 경당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이들을 종합해 볼 때 하상공본의 체재가 왕필본보다는 고형인 것으로 생각된다. 세째 부혁본은 당나라 초기의 도사 부혁이 왕필본과 하상공본을 비롯한 몇가지 다른 판본의 <도덕경>을 비교하여 심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맨 끝의 당나라 현종주본은 임금 스스로가 <노자도덕경>의 원문에 많은 이동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통일하고 또 그때 왕필본과 하상공본의 두가지 판본에 대한 우열의 문제가 시끄러웠으므로 이것을 귀일시키기 위하여 개원이십년 임금 자신이 쓴 것이라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왕필본과 하상공본을 기초로 한 주석서이다. 그리고 직례의 역주에는 개원 이십육년 시월에 세운 <개원어주도덕경비>와 <개원어주도덕경당>이 있고, 같은 직례 형대에는 그 다음 해인 개원 이십칠년에 세운 <개원어주도덕경비>와 <개원어주도덕경당>이 전한다. 이미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당송원명청에 이르는 각 시대마다 수많은 <노자>의 주해서들이 쏟아져 나왔었지만 모두 크게는 이 네가지 주해서의 기본적인 입장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청대에 고증학이 크게 성행한 뒤로 노자의 생애와 그의 저서인 <노자도덕경>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업적이 두드러지게 나왔다는 것도 특기할 일이다. 그중에도 명대 초횡의 <노자익>과 <노자고이>를 비롯해 청대의 위원의 <노자본의>, 손이양의 <노자찰이>, 왕념손의 <노자잡지>, 혜동의 <노자집해>, 필원의 <노자고이>, 유월의 <노자평의>, 노문소의 <노자음의고증>, 유사배의 <노자핵고>, 마기창의 <노자고>, 우성오의 <노자신증>, 나진옥의 <노자고이>, 고형의 <노자정고> 및 그 <보정>, 양수달의 <노자고의>, 전목의 <노자변>, 양가락의 <선진노학문헌고>·<노자년보>·<노자서목>·<의로문헌변정> 등의 저서와 함께 후외려의 <중국고대사회여노자>, 양가락의 <선진노학문헌급노자서전본원류신설>, 장백잠의 <노자인물고 및 노자저술고>, 호적의 <노자기인기서적년대문제> 등이 두들어진 연구 업적들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일본학자들의 노자 번역과 노자연구논문들이 있고, 유럽 여러나라에 소도 우수한 번역서와 연구업적이 나와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으로는 고 김경탁교수의 <노자>(한국자유교육협회 간행)가 가장 우수한 번역서라 할 것이다.
▶ 노자와 공자
노자는 주나라 수도 낙읍에서 몰락해가는 주왕실 서고를 지키는 기록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아있는 주대의 귀중한 책들을 밤낮으로 접할 수 있었다. 노자는 공자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공자가 익히 알고 있는 예의 규범에 관해서도 노자가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의(葬儀) 때 일식(日食)에 부딫치면 어떻게 하는가? 자식이 죽었을 때 묘소를 가까이 할 것인가 멀리할 것인가? 나라에 상사(喪事)가 있을 때 전쟁을 피할 것이냐 어찌할 것이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죽은 국왕의 위패를 딴 곳으로 옮길 것이냐 그만둘 것이냐? 등등의 문의에 노자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명확하게 답을 주었다.
공자는 낙양에 수일 동안 머물다가 귀로에 올랐다. 노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전송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듣자하니 사람들이 전송을 할 때,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주고, 돈이 없는 사람은 충고나 격려의 말을 남긴다고 합니다. 나는 돈도 없는 데다 잠시나마 도덕과 학문이 있는 척하고 있으니, 당신께 몇 마디 남기고자 합니다. 첫째,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우러러보던 이들은 이미 육체와 뼈마저 썩어 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남긴 헛소리분이외다. 그러니 옛 것을 익히되 새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봐선 점포가 빈 것 같고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고 했소. 그러니 제발 그 교만과 욕심 그리고 잘난 체하는 병과 잡념을 내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외다."
면박을 당한 공자는 노나라에 돌아와 제자들에게 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새가 잘 날고 물고기가 헤험을 잘 치며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이라면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험치는 놈이라면 낚싯줄로 낚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화살로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라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오늘 만나 본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인물이다."
도 경(道經) / 작 성budha
제 1장 체도(體道)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변함없는 도가 아니며,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 이름은 변함없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을 때는 우주의 시작이며 이름이 있을 때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없음은 그 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음은 미세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본다. 이 둘은 다 같은 데서 나왔고 이름만 서로 다를 뿐이며, 그 둘은 같아서 모두 현묘하다. 아무리 알려 해도 알 수 없는 그것은 모든 사물의 현묘함이 들고나는 문이다.
제 2장 양신(養身)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미가 되는 것은 언제나 미인 줄 알지만, 그 미란 것이 오히려 추가 된다는 것을 모르며, 그리고 누구나 선이 되는 것은 언제나 선인 줄 알고 있지만, 그 선이 도리어 악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룩되고, 긴 것과 짧은 것이 서로 드러나며, 높음과 낮음이 서로 기울고, 홀소리와 닿소리가 서로 어울리며, 앞 뒤가 서로 따른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무위가 하는 대로 맡겨 둔다. 행하되 말로 가르치려 들지 않고, 만물이 이루어지되 말꼬리를 달지 않으며, 낳아주되 갖지 않으며, 되게 해주되 그렇다고 믿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연연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지만 머물러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제 3장 안민(安民)
아는 것이 많아 현명하다고 하는 자를 높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한다. 얻기 힘든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되며, 지나친 허욕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문란하게 되지 않는다. 성인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아래와 같이 한다. 마음을 비우게 하며, 배를 부르게 하고, 허영된 뜻을 약하게 하며, 몸을 튼튼하게 해주라. 그리고 항상 백성에게 지식을 앞세우지 않게 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게 할 것이고, 아는 자들이 턱없는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라. 무위로 정치를 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
제 4장 무원(無源)
도는 빈 것을 쓰되 때로는 꽉 채우지 않는다. 그래서 깊고 깊어 가늠할 길이 없노라. 도는 만물의 뿌리와 같다. 예리한 것을 무디게 하며, 뿔뿔이 흩어진 것을 해결하고 빛살을 어울리게 하며, 보잘 것 없는 것도 같게 한다. 깊고 깊어 알 수는 없으나 어쩌면 존재의 모습 같다. 나는 그 도가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신보다 먼저 있었노라.
제 5장 허용(虛用)
천지는 인간처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는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삼는다. 성인도 천지를 닮아 백성을 길가에 버려진 풀강아지처럼 삼는다. 천지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다. 풀무 속은 텅 비어서 아무리 풀무질을 해도 다함이 없고, 풀무질을 할수록 더욱 나온다. 이에 대하여 말이 많으면 궁해질 뿐 알맞음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제 6장 성상(成象)
도를 말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텅 빈 산 골짜기의 신과 같고 그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신비로운 암컷이라고 한다. 신비로운 암컷의 자궁을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 그 뿌리는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고 천지만물이 자궁의 문을 아무리 써도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제 7장 도광(韜光)
하늘은 길고 땅은 영원하다. 천지가 길 수도 있고 오래일 수도 있음으로써 제 욕심을 내세워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길이길이 오래 살 수가 있다. 성인은 천장지구를 본받아 자기를 뒤로 하고 남을 앞세우며 자신을 잊고 있으므로 자신을 존속하게 한다. 그렇다면 성인에게는 자기가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자신을 없애므로 자신을 능히 이룩할 수가 있다.
제 8장 역성(易性)
지극한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를 좋아할 뿐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극한 선은 도에 가깝다. 사는 것은 땅을 좋아하며, 마음은 깊은 곳을 좋아하고, 더불어 있는 것은 어질기를 좋아하고, 말은 신용을 좋아하며, 정치는 다스리기를 좋아하고, 일하는 것은 능력을 좋아하며, 움직임은 제 때를 좋아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모름지기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이란 것은 없다.
제 9장 운이(運夷)
간직하여 가득 채우려는 것은 하나도 갖지 않는 것만 못하다. 헤아리는 바가 날카롭기만 하다면 오래가지 못한다. 금과 옥이 방 안에 그득 차면 도둑의 손길에서 지켜낼 수가 없다. 부귀를 누린다고 교만하면 스스로 더러운 허물을 남기게 된다. 공이 이루어지면 이름을 물리치고 물러가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제 10장 능위(能爲)
만물을 분별하지 않고 하나로 안고 있는 도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는가? 생명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 부드러움이 지극하여 갓난아이 같이 될 수 없는가? 씻고 털어내 맑은 거울처럼 마음에서 때를 벗겨낼 수 없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조작하는 짓을 없앨 수 없는가?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데 암컷이 될 수 없는가? 명백이 사방으로 두루 통하는 앎은 없는가? 낳아 주고 길러 준다. 그러나 낳아 줄 뿐 갖지는 않는다. 일을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주재하지 않는다. 이를 깊고 넓어 신비로운 덕이라고 한다.
제 11장 무용(無用)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두 바퀴 구멍 주위로 모이고 바퀴 구멍이 있으므로 수레의 쓰임새가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 속이 비어 있으므로 그릇의 쓰임새가 있다. 벽을 뚫어 외짝문과 창을 내야 방이 되는데 빈 곳이 있어야 방의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있는 것으로써 이로움을 삼고 없는 것으로써 작용을 삼는다.
제 12장 검욕(檢欲)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 게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오미는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을 타고 달리며 새나 짐승 사냥을 하는 짓은 인간의 마음을 미쳐 버리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이러하므로 성인은 배를 채울 뿐 겉치레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색, 오미, 오음 등을 버리고 배부름을 택한다.
제 13장 염치(厭恥)
총애를 받는 것도 황송하게 여기고 버림받는 것도 황송하게 여기고, 큰 근심 걱정을 내 몸같이 귀하게 하라. 총애를 받든 잃든 황송하게 여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총애는 위에서 주고 버림은 아래서 받거늘, 총애를 받아도 황송하게 여기고 총애를 잃어도 황송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를 총욕 약경이라고 한다. 큰 근심이나 걱정을 제 몸같이 귀하게 하라 함은 어떤 것이냐? 나에게 큰 근심 걱정이 있다는 것은 내 몸이 있는 까닭이며, 만일 나에게 몸이 없다면 어찌 나에게 큰 근심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 몸을 위하는 것보다 천하를 귀하게 하는 자는 천하와 더불어 살 수가 있고, 제 몸을 위하는 것보다 천하를 사랑하는 자는 천하를 맡을 수 있다.
제 14장 찬현(贊玄)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라고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라고 한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라고 한다. 이 세가지는 아무리 규명해 보아도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혼연하면서도 하나이게 된다. 아무리 사유해 보아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감성으로 만나면 분명하다. 이어지고 이어진 끈 같아라.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없지만 무물로 되 돌아오는구나. 이를 일러 모습이 없는 것의 모습이라 하고, 동작이 없는 것의 동작을 일러 황홀이라고 한다. 도를 맞이해도 그 앞을 볼 수가 없고, 도를 따라가도 그 뒤를 볼 수가 없다. 우주만물이 있기 전의 도를 붙들고 간직하며, 지금에 있는 것을 다스려 보면 맨 처음 시작되었던 것을 알아 볼 수는 있다. 이를 일러 도의 발자취라고 한다.
제 15장 현덕(顯德)
도의 경지에 들어 간 선비가 된다는 것은 그 모습이 미묘하고 깊고 깊어서 아무리 깊이 헤아려도 알 수가 없고 아무리 따져 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그 모습을 비유해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추운 겨울 냇물을 건너기를 망설이는 코끼리 같구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두려워 조심하는 개 같기도 하구나! 초대받아 손님으로 간 것처럼 엄숙하구나! 앞으로 녹아 물이 될 얼음처럼 풀리는구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무 등걸처럼 꾸밈이 없구나! 텅 빈 고을처럼 비어 있구나! 탁류에 휩쓸려 있는 것 같지만 맑은 물이구나! 누가 탁류에 머물러, 가만히 있으면서도 서서히 맑게 할 것인가? 누가 편안히 영주하면서 활동해 서서히 맑음을 살아나게 할 것인가? 이러한 도를 간직한 자는 무엇을 채울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채울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는 있던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이룩하려고 하지 않는다.
제 16장 귀근(歸根)
비워내고 비워내 텅텅 비게 하라. 고요하고 고요해 도타움을 지켜라. 만물이 모두 아울러 이루어 지는구나! 내가 그 만물이 되돌아감을 가만히 살펴 볼 때 무릇 무엇이나 무럭무럭 피어나 저마다 본래의 뿌리로 되돌아가는구나.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고 한다. 고요함을 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명에 따르는 것을 변함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변함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이 밝음이라고 한다. 변함이 없는 것을 모르면 경망스러워 흉한 짓을 범한다. 변함이 없음을 아는 것을 포용이라고 한다. 변함없음을 아는 것은 두로 통하는 것이며, 두루 통하는 것은 왕복하는 것이고, 왕복하는 것은 하늘이며, 하늘은 어디나 통하는 길이고, 그 길은 영원하다. 그러면 몰락하게 하려는 것이 있다 해도 자신은 위태롭지 않다.
제 17장 순풍(淳風)
더할 바 없이 훌륭한 임금은 임금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백성이 모르게 한다. 그 다음으로 훌륭한 임금은 임금노릇을 친절하게 하여 백성들로부터 명예를 얻는다. 그 다음보다 못한 임금은 임금노릇을 두렵게 하고, 아주 못난 임금은 임금노릇을 부끄럽게 하여 백성의 신뢰를 얻지 못해 불신을 당한다. 말을 귀하게 하니 다스림이 유연하구나! 덕을 쌓아 이룩하고 말없이 무위로 이루고 다해 백성은 모두 저마다 스스로 그냥 저절로 이르게 된다고 한다.
제 18장 속박(俗薄)
자연의 도를 버리자 인의가 있게 되었고, 인간의 지혜가 나타나자 엄청난 속임수가 있게 되었으며, 육친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되자 효도와 자애를 강조하게 되었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있게 되었다.
제 19장 환순(還淳)
성인이 된다는 것을 끊어 버리고 지모를 버린다면 백성은 백배로 이롭게 되리라. 어질다는 것을 끊어 버리고 옳다는 것을 버린다면 백성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리라. 기교를 끊어 버리고 이익을 버린다면 도적이 생겨나지 않으리라. 이 세 가지는 인간의 것으로 해결하기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따르게 할 본분이 있다. 소박한 것을 찾아 지니게 할 것이며, 사사로움을 작게 하고 욕심을 줄이게 하는 것이다.
제 20장 이속(異俗)
지식욕을 없애면 근심 걱정은 없어진다. 윗사람에게는 존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반말을 한다고 하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예하고 답하든 하게로 답하든 그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보기 좋은 것이 있고 보기 싫은 것이 있다지만 눈으로 보는 것일 뿐이라고 친다면 그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바를 나 또한 두려워 할 수밖에는 없다. 마음에 중심을 잡지 못해 어디인지 모르게 이리저리 헤매는 것 같아 황망하구나! 사람들은 봄 언덕에 올라 쇠고기와 양고기를 마음껏 먹으며 회포를 풀면서 잔치 기분에 들떠 있다네. 하지만 나 홀로 그럴 줄 몰라 홀가분해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구나! 방랑이 길어 돌아 갈 곳이 없는 것 같구나! 사람들은 가진 것들이 많아 여유롭게 살지만 나만 홀로 무엇을 잃어 버린 것 같구나! 나는 천하에 바보같아 순진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사람들은 시비를 가리는데 분명하고 똑똑하지만 나 홀로 멍하니 있는 것 같구나! 사람들은 꼼꼼하고 세심하지만 나만 홀로 담담하다. 덤덤해 소금기 없는 바다 같구나! 이리저리 흘러 다녀 멈출 곳이 없는 것 같구나! 사람들은 모두 잘 적응하고 쓸모가 있지만 나만 홀로 완고하고 누추하구나! 나 홀로 남들과 달라 나를 먹여주고 길러 주는 어머니를 귀하게 여긴다.
제 21장 허심(虛心)
오로지 도에 의해 크고 텅 빈 덕의 움직임은 따른다. 도의 작용인 덕으로 만물이 된다. 황홀하고 황홀하다. 공덕 가운데 움직이는 모습이 있으니 얼마나 황홀한가! 공덕 가운데 만물이 있으니 얼마나 황홀한가! 공덕 가운데 만물의 정수가 있으니 얼마나 아득하고 깊은가! 그 정수는 절대의 진리여서 그 진리 가운데 진실이 있다. 예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사라진 적이 없었고, 만물이 펼쳐져 온 내력을 알 수 있다. 내가 만물이 그렇게 되는 내력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위와 같이 도의 공덕의 작용을 터득해서 알게 되었다.
제 22장 익겸(益謙)
휘어진 것이면 온전하게 한다. 굽은 것이면 곧게 한다. 움푹 패인 것이면 채우게 한다. 못 쓰게 되면 새 것이 되게 한다. 적으면 얻게 하고, 많으면 잃게 한다. 이러하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법이 되게 한다. 성인은 자기를 과시하지 않으므로 총명하고, 제 주장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으므로 옳게 드러나며, 자기 자랑을 일삼지 않아 공을 이루고, 자기를 뽐내지 않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다툴 마음이란 아예 없으므로 천하에 어느 누구와도 다툴 수가 없다. 옛날에는 이러한 것들을 휘어진 것이면 온전하다고 일컬었다. 어찌 이 말을 거짓이라 할 것인가! 더 할 바 없이 온전하면 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 23장 허무(虛無)
자연은 꾸며서 말하지 않는다. 돌개바람은 한나절을 끌지 못하며, 소낙비는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 무엇이 이렇게 하는가? 천지가 그렇게 한다. 천지도 그렇거늘 하물며 인간이야 말 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도에 따라 일에 임하는 사람은 도가 되어 도와 함께 하며, 얻은 것에 따라 일에 임하는 사람은 얻은 자가 되어 얻은 것과 함께 하고, 잃은 것에 따라 일에 임하는 사람은 잃은 자가 되어 잃은 것과 함께 한다. 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도로 하여금 그를 얻게 하고, 덕과 함께 하는 사람은 덕으로 하여금 그를 얻게 하며, 실을 함께 하는 사람은 실로 하여금 그를 얻게 한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불신이 있게 마련이다.
제 24장 고은(苦恩)
발꿈치를 들고 발가락 끝으로 서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발걸음을 크게 벌려 성큼성큼 걷는 사람은 오래 갈 수가 없으며,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현명할 수 없고,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사람은 남으로부터 찬성을 얻어낼 수 없으며, 자화자찬을 일삼는 사람은 성공을 이룩할 수 없고, 오만하고 방자한 사람은 유능하고 뛰어난 자가 아니다. 자연의 도에 따라 보자면 위와 같은 짓들은 날마다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에 불과하고 얼굴에 매달린 혹부리에 불과한 것이며, 만물도 이를 싫어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도에 따르는 사람은 그러한 짓에 물들지 않는다.
제 25장 상원(象元)
혼성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하나는 천지보다 먼저 있었다. 그 하나는 너무 고요해 들을 수 없고 너무 아득해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구나! 그 하나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독립해 있으므로 바뀌지 않고, 두루두루 작용해도 위태롭지 않다. 그 하나를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억지로 글자로 말한다면 도이고, 억지로 그 이름을 지어 말하자면 크다는 것이다. 그 크다는 것은 끝이 안 보이게 사라져가는 것이고, 사라져가는 것은 아득히 멀어져 떠나는 것이며 아득히 멀리 떠남은 다시 어딘가에서 만나 되돌아오는 것이다. 도가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또한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도 그 중의 하나로 산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제 26장 중덕(重德)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한 것이 조급함을 다스린다. 이로써 성인은 종일토록 행하고 고요함과 무거움에서 떠나지 않는다.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높은 곳에 있는 제비집에서 사는 것처럼 초연하다. 하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 나라를 가볍게 다룰 것인가? 가벼우면 뿌리를 잃고 조급하면 다스림을 잃는다.
제 27장 교용(巧用)
자연의 도가 행하는 것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 자연의 도가 말하는 것에는 잘못된 흠집이 없다. 자연의 도가 셈하는 것에는 계산기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연의 도가 닫는 것에는 자물쇠가 없지만 잘 닫혀 열 수가 없다. 자연의 도가 묶어 놓은 것에는 노끈이 없어도 잘 묶어 놓아 풀 수가 없다. 이로써 성인은 변함이 없는 선으로 사람을 구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성인은 변함없는 선으로 만물을 구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만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대대로 이어오는 크나큰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도의 길을 걷는 자는 도의 길을 벗어난 자의 스승이 되고, 도의 길을 벗어난 자는 선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스승이라고 해서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제자라고 해서 애지중지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비록 자연의 도를 알지라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를 지극히 신비로운 것이라고 한다.
제 28장 반박(反朴)
수컷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암컷이 어떤 것인가를 지키면 천하를 두루 껴안는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자연의 도와 멀어지지 않아 갓난아이로 되돌아간다. 흰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검은 것을 지킨다면 천하의 격식이 된다. 천하에 두루 통하는 격식이 되면 변함없는 덕은 그릇될 수 없게 되어 시비나 분별이 없는 경지로 되돌아간다.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굴욕을 지키면 천하를 넣어 둘 수 있는 텅 빈 고을이 된다. 천하를 넣어 둘 수 있는 텅 빈 고을이 되면 변함없는 덕은 만족되어 순박한 것으로 되돌아간다. 있는 그대로의 나무토막을 쪼개고 깎고 다듬으면 그릇이 된다. 그러나 성인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활용해 다스리는 장관이 된다. 크게 다스리는 것은 이패저패로 갈라지지 않는다.
제 29장 무위(無爲)
장차 천하를 쟁취해 다스려 보겠다고 욕심을 내는 일이 있다면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욕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천하는 자연의 도가 만든 것이므로 그러한 욕심은 불가능할 뿐이다. 욕심을 내고 시도하는 자는 패할 것이고, 놓치지 않으려고 틀어쥐고 있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앞에서 나아가기도 하고 뒤에서 따르기도 하며, 내쉬기도 하고 들여쉬기도 하며,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위에 실리기도 하고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으므로 성인은 심한 것을 거두며,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며, 태만하거나 오만함을 멀리한다.
제 30장 검무(儉武)
자연의 도로써 임금을 보좌하는 사람은 군대의 힘으로 나라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 군대의 힘으로 자행한 일은 그 후환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군대가 주둔하는 자리에는 가시가 돋아나고 병사를 일으켜 큰 전쟁을 치룬 뒤에는 흉년이 들고야 만다. 그러므로 무력을 쓰지 않고 덕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과감할 뿐이다. 선자는 남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려고 하지 않으며, 스스로 과감할 뿐 남에게 과시하지 않으며, 스스로 과감할 뿐 남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않으며, 스스로 과감할 뿐 교만을 떨지 않으며, 스스로 과감할 뿐 결코 획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스스로 과감하되 억지로 힘을 부리지 않음을 말한다. 힘을 쓰는 것은 융성하다 쇠퇴한다. 이를 부도라고 한다. 부도는 일찍 끝나고야 만다.
제 31장 언무(偃武)
무릇 아름다운 무기는 모두 상스럽지 못한 것이다. 만물은 무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도를 걷는 자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군자가 자신을 다스려 자연에 따라 일에 임할 때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할 때면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무기라는 것은 상스럽지 못한 것이므로 군자가 사용하는 수단이 아니다. 군자가 어쩔 수 없을 경우에나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안정된 것을 제일로 삼고 승전을 거두어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승전을 아름답게 여기는 자는 사람 죽이는 짓을 즐기는 자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의 뜻을 이룩할 수가 없다. 좋은 일은 왼쪽을 숭상하고, 흉한 일은 오른쪽을 숭상한다. 전쟁터에서 직접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은 왼쪽에 자리를 하고,전군을 통솔하는 장군은 오른쪽에 자리를 잡는다. 이는 초상이 났을 때 하는 예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죽은 목숨이 너무 많아 애통해 그 죽음을 울먹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해도 상가에서 지켜지는 예를 따른다.
제 32장 성덕(聖德)
도는 한결같고 이름이 없다. 도는 원목의 등걸처럼 그대로인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천하도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군왕이 만일 이러한 도를 따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보배가 될 것이므로 천지가 서로 합하여 단비를 내릴 것이요,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골고루 평등해질 것이다. 이것저것 분별하는 제도가 시작되어 이름이 붙게 된다. 이름이 있는 것은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변하는 이름에 붙들려 있지 말고 무릇 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변함이 없는 도에 머물러 있을 줄 알라. 그러면 위태로울 것이 없다. 도의 작용에 천하가 있다는 것을 비유해 말하자면, 산골짜기의 개울이 시내가 되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다.
제 33장 변덕(辯德)
남을 알려고 하는 자는 겉만을 아는 자이고, 자기를 알려고 하는 자는 속을 아는 자이다. 남을 이기려는 자에게는 힘이 있고, 자기를 이겨내는 자는 강하다. 만족할 줄 아는 자는 부유하고, 자기를 이겨내는 힘을 행하는 자에게는 뜻이 있다. 안을 다스릴 바를 놓치지 않는 자는 영원하고,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자가 수명을 누리는 것이다.
제 34장 임성(任成)
크나큰 도가 충만하구나. 좌우로 없는 곳 없이 그득하다. 만물은 도를 어머니로 삼아 태어나 도를 떠나지 않으며, 도는 만물을 이루어 낸 공이 있지만 공치사를 하지 않고, 도는 만물을 사랑하고 길러 주면서도 주인노릇을 하지 않는다. 도는 항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도는 작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만물이 도의 품으로 되돌아가지만 도는 주인노릇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도는 큰 일을 다 마치고도 스스로 크다고 자랑하지 않으므로 능히 그 큰 일을 이룩할 수 있다.
제 35장 인덕(仁德)
큰 사랑을 행하는 도를 터득하면, 천하에 걸림없이 두루 왕래할 수 있다. 그러한 왕래는 방해받지 않으므로 편안하고 화평하고 태평하다. 큰 사랑의 도가 들려 주는 음악과 먹게 하는 음식은 지나는 길손의 발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도의 드러냄은 담담할 뿐 맛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도의 큰 사랑을 아무리 보려고 해도 다 볼 수 없고, 도의 큰 사랑을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다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도의 큰 사랑을 아무리 활용해도 다하여 소진될 수 없다.
제 36장 미명(微明)
무엇을 접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펴주어라. 무엇을 약하게 해주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강하게 해주어라. 무엇을 폐지해 버리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흥하게 해주어라. 무엇을 빼앗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을 도의 섭리라고 한다.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 굳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는 연못을 튀어나와서 살 수 없고, 나라의 제도는 백성에게 과시할 수 없다.
제 37장 위정(爲政)
도는 항상 하는 것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도 없다. 만일 군주가 자연의 도를 따라 지켜 주면, 만물은 저절로 생성하고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저절로 생성하고 발전하게 만물에 맡기지 않고 인간들이 조작하려고 하면 나는 그러한 짓을 못하게 자연의 덕으로 진정시키리라. 자연의 덕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고요하고, 욕심이 없어 고요하면 천하는 저절로 바르게 된다.
덕 경(德經)
제 38장 논덕(論德)
지극히 높은 덕은 인위의 덕이 아니며, 인위의 덕이 아니어서 덕이 된다. 지극히 낮은 덕은 덕을 행했다고 들추어내 덕이 없어진다. 지극히 높은 덕은 자연의 덕이며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극히 낮은 덕은 덕을 행했다고 하면서도 덕을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높은 인은 어질되 어질지 않음이 없고, 높은 의는 실천하되 실천하지 못함이 있으며, 높은 예는 행하되 응하지 않으면 팔을 휘둘러서라도 행하게 한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을 부르짖게 됨이요, 덕을 잃은 뒤에 인을 주장하게 된 것이며, 인을 잃은 뒤에 의를 앞세우게 된 것이고, 의를 잃은 뒤에 예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예라는 것은 충성과 믿음이 얄팍해진 것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머리가 되며, 예에 밝음을 앞세우는 것은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이러하므로 대장부는 수수하고 꾸밈없이 넉넉하게 살고, 얄팍한 잔꾀 따위에 머물지 않으며, 겉과 속이 한결같아 진실하게 살고, 겉보기만 화사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얄팍하고 꾸민 것을 떨쳐 버리고 수수하고 꾸밈없는 것과 표리가 한결 같은 진실을 취한다.
제 39장 법본(法本)
태초에 하나를 받아 얻은 것이 있다. 하늘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써 맑고, 땅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써 안전하며, 천지의 덕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써 신령하고, 골짜기가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써 가득하며, 만물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써 태어나며, 임금이 그 하나를 받아 얻음으로써 천하를 곧게 하는 것이므로, 임금이 더할 수 없게 천하를 곧게 하는 것은 곧 그 하나이다. 하늘이 맑지 못하다면 아마도 무너질 것이고, 땅이 안전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꺼질 것이며, 천지의 덕이 영험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명지가 쓰러질 것이고, 골짜기가 그득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만물이 메마를 것이며, 만물이 태어나지 못한다면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만일 임금이 곧게 하지 못하고 높은 것만을 귀하게 여기면 아마도 그 조정은 파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한 것을 귀하게 하여 근본으로 삼고, 아래를 높게 하여 그 바탕으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임금은 스스로 외롭다 하고 덕이 부족하다 하며 선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닦고닦아 빛나는 보석같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갈고갈아 반들반들한 돌같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제 40장 거용(去用)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 약한 것은 도의 씀씀이다.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유는 무에서 태어난다.
제 41장 동이(同異)
으뜸가는 인간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지켜 행한다. 중간치의 인간은 도를 들으면 도를 믿는 것 같기도 하고 믿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아래치의 인간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데, 아래치의 인간에게 도를 말해 주어도 그가 비웃지 않는다면 그러한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옛책에 이르기를 밝은 도는 어둡게 보이는 것 같다. 나아가는 도는 물러가는 것 같다. 평평한 도는 굽은 것 같다. 높은 덕은 낮은 골짜기 같다. 아주 새하얀 것은 검은 것 같다. 넓은 덕은 온전하지 않은 것 같다. 넉넉한 덕은 빈약해 보인다. 질박한 도는 어리석어 보인다. 크나큰 것은 모서리가 없고, 크나큰 그릇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며, 크나큰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없고, 크나큰 모습은 겉모양이 없다. 도는 숨어 드러나지 않지만, 오로지 도만이 제 것을 만물에 잘 빌려주고 잘 이루어 준다.
제 42장 도화(道化)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받고 양을 껴안으며, 음은 양을 얻고 양은 음을 얻어 서로 합하는 것이 화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부덕하며 불선한 것을 싫어하지만, 왕공은 스스로 자신이 외롭고 부덕하며 불선함을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 물정은 손해를 보았다가 이익을 보고, 이익을 보았다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이러한 물정을 가르쳤고 나 또한 그 점을 가르쳤다. 힘을 믿고 앞세우는 자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나는 앞으로 이를 가르쳐 줄 선생이 되리라.
제 43장 편용(偏用)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것을 길들여 부린다. 모습이 없는 것은 틈이 없는 사이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를 보고 무위가 유익함을 안다. 그러나 무위가 유익하다는 것을 말로 가르쳐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무위가 유익한 것이 세상에서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제 44장 입계(立戒)
명성과 목숨 중에서 어느 것이 소중한가? 목숨과 돈 중에서 어느 것이 귀중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괴로운가? 이렇기 때문에 너무 소중히 하고 아끼면 반드시 크나큰 손해를 보며, 많이 감추고 숨겨서 간직하면 반드시 톡톡히 잃어 버린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을 것이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제 45장 홍덕(洪德)
크나큰 이룸은 모자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쓰임새는 흠이 없다. 크나큰 채움은 텅빈 것 같지만, 그 쓰임새는 다함이 없다. 크나큰 곧음은 굽은 것 같고, 크나큰 말씀은 어눌한 것 같다. 고요함은 초조함을 이기고, 차거움은 뜨거움을 이긴다. 이것이 천하의 바름이다.
제 46장 검욕(儉欲)
천하에 도가 있으면, 병마를 거름내는 농마로 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천하에 도가 없으면, 무기를 적재한 수레를 끄는 병마가 변방에서 양생된다. 죄 중에서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환난은 없다. 항상 얻으려고만 하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를 만족할 줄 알면 언제나 부족함이란 없다.
제 47장 감원(鑒遠)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세상을 알며, 바라지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엿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본다. 바깥을 알아보려고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 지식은 점점 작아져 아는 것이 없게 된다.이러하므로 성인은 행하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름을 짓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 낸다.
제 48장 망지(忘知)
배움(爲學)은 매일매일 불어나고, 터득(爲道)은 매일매일 줄어든다. 줄이고 또 줄여 무위에 이르게 되므로, 무위는 억지로 하지 않을 뿐 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천하를 얻은 자는 항상 억지로 만들어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억지로 만들어 하는 일이 있게 되면, 천하를 얻어 다스린들 만족할 수가 없다.
제 49장 임덕(任德)
성인은 어떠한 이념 따위를 갖지 않고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그래서 선한 것은 성인을 선하게 하고, 선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성인을 더욱 선하게 한다. 이것이 덕의 선이다. 그리고 다시 신실한 것은 성인을 신실하게 하고, 신실치 못한 것은 오히려 성인을 더욱 신실하게 한다. 이것이 덕의 신실이다. 성인이 천하에 있으매, 성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천하를 위하여 그 마음을 다 쏟는다. 그래서 백성은 모두 성인의 이목을 주시하게 되고, 성인은 모든 백성을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순박하게 한다.
제 50장 귀생(貴生)
세상에는 오래 살 수 있는 몸을 버리고 사지에 뛰어드는 자가 있다. 본디 인간 중에 오래 살 수 있는 자는 10명에 3명이고, 젊어서 죽는 자가 10명에 3명이지만, 세상에 살아서 공연히 사지로 향하는 인간이 또 10명에 3명이다. 그 까닭은 무엇이냐? 그들이 너무나 강하게 생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런 속담이 있다. 생을 기름에 능숙한 사람은, 육지를 여행해도 맹수를 만나지 않고, 전쟁에 임해도 무구(武具)로 몸을 무장하지 않는다. 뿔소도 그뿔을 치켜들 사이가 없고, 호랑이도 그 발톱을 걸어올 사이가 없고, 무기도 칼날을 가할 사이가 없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었이냐, 그 달인(達人)에게는 죽음의 위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제 51장 양덕(養德)
도는 낳고, 덕은 길러 주고, 만물은 모습을 지니며, 형세가 이루어 진다. 이러하므로 만물은 도덕을 높이 받들지 않을 수 없다. 도덕은 존귀하면서도 존귀하게 되려고 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냥 그대로일 뿐이다. 도가 만물을 낳으면, 덕은 키워 주고 자라게 하며 편한케 하고 보살펴 돌보아 준다. 그러나 도는 만물을 낳아 주되 갖지 않고, 해주되 공치사를 하지 않으며, 길러 주되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을 현덕이라고 한다.
제 52장 귀원(歸元)
천하에 도가 있다. 그 도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이미 만물은 어머니를 두었으므로 그 자식임을 안다. 끊임없이 그 어머니를 모시면 일생 동안 위험을 당하지 않는다. 바깥 것을 알려는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막으면 일생 동안 애끓이며 바둥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구멍을 열어 두고 바깥 일로 얽매이면 일생 동안 구제를 받지 못한다. 작음을 보는 것을 명이라고 하며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이라고 한다. 맑음이 내는 빛을 활용하여 그 맑음으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붙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이 함을 습상(習常)이라고 한다.
제 53장 익증(益證)
나로 하여금 잠깐 동안이라도 아는 바를 갖고 대도를 행하게 할 때는 비록 그렇게 해보는 것마저도 두렵다. 대도는 매우 평탄하지만 인간은 험한 샛길을 좋아한다. 그래서 관청은 높은 누대에 서고, 논밭은 황폐해지며, 곡식을 쌓아 둘 곳간은 텅텅 비고 만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허리에 차며, 맛있는 음식을 먹다 버리고, 돈이 넘치고 재물이 남아돈다. 이러한 짓들을 큰 도둑이라고 하며 이는 결코 도가 아니다.
제 54장 수관(修觀)
잘 세우는 것은 뽑혀지지 않으며, 잘 껴안은 것은 벗어나지 않는다. 덕을 짓고 놓치지 않는 자손은 잊지 않고 조상에 제사를 올린다. 몸으로 덕을 닦으라. 그러면 그 덕은 참으로 진실하다. 집에서 덕을 닦으라. 그러면 그 덕은 참으로 넉넉하다. 고향에서 덕을 닦으라. 그러면 그 덕은 참으로 길다. 나라에서도 덕을 닦으라. 그러면 그 덕은 참으로 풍족하다. 그리고 천하에서도 덕을 닦으라. 그러면 그 덕은 참으로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몸을 몸으로써 살피고, 가정을 가정으로써 살피며, 고을로써 고을을 살피고, 나라로써 나라를 살피며, 천하로써 천하를 살핀다. 내가 어떻게 세상이 그러한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위와 같은 것들로 미루어 안다.
제 55장 현부(玄符)
품은 덕의 두터움은 갓난아이와 같다. 독이 있는 벌레는 갓난아이를 쏘지 않으며, 사나운 짐승도 갓난아이를 할퀴지 않고, 매서운 새도 갓난아이를 채가지 않는다. 쥐는 뼈대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럽지만 힘은 굳세다. 남녀의 성교를 모르지만 갓난아이의 고추가 서는 것은 조화의 힘이 지극한 것이며,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의 어울림이 지극한 것이다. 어울림을 아는 것을 상(常)이라 하고, 변함없음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그러나 사는 것만을 위하는 것을 상(祥)이라 하고, 마음이 기운을 억지로 부리는 것을 강(强)이라고 한다. 사물은 성하다가 쇠한다. 이것은 변함없는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닌 것은 오래 갈 수가 없다.
제 56장 현덕(玄德)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자는 모른다. 앎의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아라. 앎의 예리함을 무디게 하고, 그 분란을 풀어라. 앎의 빛남을 흐리게 하여, 먼지를 묻혀 같게 하라. 이를 일러 알 수 없지만 신비로운 같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얻었다고 친하게 할 것도 아니고, 무엇을 얻었다고 소홀하게 할 것도 아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이롭게 할 것도 아니며, 무엇을 얻었다고 해롭게 할 것도 아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귀하게 할 것도 아니며, 무엇을 얻었다고 천하게 할 것도 아니다. 그래서 천하는 귀하게 된다.
제 57장 순풍(淳風)
바르게 나라를 다스려라. 계략으로 병사를 써라. 그리고 일을 내지 말고 천하를 취하라. 나는 어떻게 해서 위와 같은 것을 알게 되었는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세상에 못하게 하는 법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진다. 백성들에게 편리한 물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혼미해진다. 백성들에게 기술과 재주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묘한 물건들이 다투어 나타난다. 법령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도적은 더욱 많아진다.그러므로 성인은 다음처럼 말했다. 내가 무위하면 백성은 저절로 잘 되고, 내가 일을 벌리지 않으면 백성은 저절로 부유해지며, 내가 허심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정직해지고, 내가 무욕하면 백성은 저절로 순박해지며, 내가 사사로움에 빠지지 않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맑아진다.
제 58장 순화(順化)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대범해 걸림이 없다면 백성은 순순해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번잡하고 옹색하면 백성은 절망한다. 불행이여! 그것은 행복을 뒤따라오는 것이다. 행복이여! 그것은 불행의 복병이다. 어느 누가 치우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까? 그러한 치우침에 공명정대함이란 없다네. 치우침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이상한 것으로 되고, 선하다는 것이 요망스런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착각한다. 인간이 이렇게 착각한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이로써 분명하고 숨김이 없으면서도 결판을 내지 않으며, 청렴하면서도 인색하지 않고, 솔직하면서도 수작을 부리지 않으며, 빛나되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
제 59장 수도(守道)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것은 농부의 농사와 같다. 무릇 심고 길러내 거두는 것은 서슴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서슴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듭거듭 덕을 쌓는 것이라고 한다. 거듭해 덕을 쌓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으며,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면 극단적으로 달릴 줄 모르고, 극단적으로 달릴 줄 모르면 나라는 망할 수가 없다. 나라를 망할 수 없게 하는 어머니는 능히 장구하다. 이러한 것을 깊고 튼튼한 뿌리라고 하며,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도라고 한다.
제 60장 거위(居位)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으로 생선국을 끓이는 것과 같다. 도로써 세상에 임하면 귀신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다. 귀신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이 백성을 상해하지 않는다. 하늘이 백성을 상해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성인도 또한 백성을 상해하지 않는다. 무릇 어느 편에서도 서로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서로 오고가게 된다.
제 61장 겸덕(謙德)
대국이란 것은 하류와 같다. 하류에서는 모든 물이 모여든다. 하류는 천하의 암컷과 같다. 암컷은 항상 근본에 안겨 있으므로 수컷을 이긴다. 수컷을 이겨도 근본에 안김으로써 아래를 취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겸허하게 대하면 작은 나라를 취할 수가 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겸허하게 대하면 큰 나라를 취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취함으로써 겸허할 것이요, 작은 나라는 겸허하게 취할 것이다. 그러면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백성을 부양하려는 것에 불과할 것이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들어가 돕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두 나라는 각기 원하는 바를 얻게 되므로 큰 것은 마땅히 아래가 되어야 한다.
제 62장 위도(爲道)
도라는 것은 만물에 드러나지 않고 속에 있는 원자이다. 그것은 선한 사람의 보물이지만, 선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간직하고는 있다. 착하고 아름다운 말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며, 존경스러운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황제를 세우고, 삼정승을 두고, 수레를 타고 가 현자에게 보물을 주어 모시는 것일지라도, 가만히 앉아 이와 같은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보다 못하다. 옛부터 이러한 도를 소중히 해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매일 구하지 않아도 얻어지고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는 까닭이 아닌가? 그래서 천하에서 귀하게 된다.
제 63장 은시(恩始)
무위하라. 무사를 받들어라. 맛없는 것을 맛보라. 큰 것은 작은 것에서 비롯되고 많은 것은 적은 것에서 생긴다. 덕으로 원한을 갚아라. 어려운 일은 쉬운 일에서 계획되고, 큰 일은 사소한 일에서 빚어진다. 천하에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도모되고, 큰 일은 반드시 사소한 일에서 꾸며진다. 이로써 성인은 끝끝내 크게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큰 일을 이룰 수가 있다. 무릇 경솔한 약속은 신빙성이 적은 것이고, 너무 쉽사리 처리된 것은 반드시 일을 어렵게 한다. 이와 같으므로 성인은 쉬운 일도 어렵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성인에게는 끝내 어려움이란 없다.
제 64장 수미(守微)
편안함은 지키기 쉽고, 징조가 들어나기 전에는 처리하기가 쉬우며, 취약한 것은 절단나기가 쉽고, 미약한 것은 흩어지기가 쉽다. 일어나기 전에 해치울 것이요, 분란이 나기 전에 다스릴 것이다. 등걸을 안고 있는 나무는 터럭 같은 잔뿌리 덕으로 사는 것이며, 구층의 누대도 흙을 쌓아 올려 세우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일을 꾸며 하는 자는 실패하고, 놓치지 않으려고 붙들고 있는 자는 잃는다. 이로써 성인은 무위하므로 실패가 없고, 붙들고 고집부리지 않으므로 잃는 것이 없다. 백성이 일에 임하는 데 성급하게 이루려고 하면 항상 실패하게 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면 일을 망칠 이가 없다. 이로써 성인은 욕심을 내지 않기를 바라고, 취득하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우고, 사람들이 지나친 짓을 범한 것을 되돌려 만물을 자연으로 되찾아 주고, 감히 턱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제 65장 순덕(淳德)
옛날 도로써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밝히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백성을 어리석게 했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겉보기 지식이 많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겉보기 지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도적이며, 겉보기 지식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이 본보기가 된다. 이러한 본보기를 알 수 있는 것을 일러 현덕이라고 한다. 사물과 더불어 도로 되돌아오게 하라. 그런 연후에야 크나큰 순리에 이르게 된다.
제 66장 후기(後己)
강과 바다가 온갖 계곡의 왕자로 될 수 있는 바는 온갖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모여드는 하류가 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래 차지를 좋아하므로 강과 바다는 계곡의 왕이 될 수가 있다. 이와같이 백성을 다스릴 사람이 백성의 위에 있고 싶으면 반드시 말을 낮추어야 하고, 백성 앞에 서고 싶다면 몸은 백성의 뒤로 물러서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다스리는 자가 위에 있어도 백성은 무게를 느끼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해롭지 않다. 이와같이 하면 즐거움이 쌓이고 염증은 없어져 서로 다투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더불어 다툴 수가 없다.
제 67장 삼보(三寶)
세상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도가 크다고 하면서 어딘가 모자란 데가 있다고 한다. 무릇 큰 것은 크기 때문에 모자란 것처럼 보인다. 모자란 것 같은 것이 오래 간다. 만일 온전하게 큰 것임을 알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작은 것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나는 그 보물을 지녀 잘 간직한다. 첫째의 보물이 사랑이요, 둘째가 검약이며, 셋째가 다투어 나서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므로 용감할 수 있으며, 검약하므로 풍족할 수 있고, 다투어 앞서지 않으므로 사물을 좋게 이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의 마음을 버리고 한사코 용기만을 추구하고, 검약의 마음을 버리고 한사코 풍족하기만을 바라며, 뒤로 물러서기를 버리고 한사코 앞에만 서려고 한다. 그래서 망하고 만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으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지키면 견고하다. 하늘이 이러한 것을 구하려고 하면, 사랑의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지켜야 한다.
제 68장 배천(配天)
훌륭한 무사는 무력을 믿지 않고, 전쟁을 잘 치르는 자는 노기를 품지 않으며, 적을 잘 물리쳐 승리를 거둔 자는 과시하지 않으며, 사람을 잘 쓰는 자는 남의 밑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것들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고도 하고, 사람을 쓰는 힘이라고도 하며,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며 옛부터 있는 극치라고 한다.
제 69장 현용(玄用)
병을 쓰는 것에 관한 말이 있다. 나는 감히 주가 되지 않고 객이 되고, 감히 한 뼘쯤 나아가지 않고 몇 발 뒤로 물러선다. 이는 행동하지 않기를 행하는 것이며, 완력을 사용하지 않고 물리치는 것이요, 병을 일으키지 않고 붙잡는 것이고, 적의 저항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적을 얕보는 것보다 더 큰 탈은 없다. 적을 얕보고 소홀히 하면 내가 지닌 보물을 단번에 잃게 된다. 그러므로 병력을 일으켜 서로 증강하는 것을 슬퍼하는 자는 승리한다.
제 70장 지난(知難)
말에는 근원이 있고, 일에는 근본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은 아주 알기 쉽고, 아주 행하기도 쉽다. 그러나 세상은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구나! 나에게는 다만 무를 아는 것만 있다. 이 때문에 세상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다면 그만큼 나는 귀한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갈포옷을 입고 옥을 가슴에 품는다.
제 71장 지병(知病)
알되 모르는 것처럼 하는 것은 위이고,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것은 병이다. 무릇 병을 병이라고 알면 그것은 병통이 아니다. 성인에게 병통이 없는 것은 병을 병인 줄 알기 때문이며 이렇게 아는 것은 병이 아니다.
제 72장 애기(愛기)
사람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커다란 재앙을 만난다. 재앙을 맞지 않으려면 사는 곳을 얕보지 마라. 그리고 삶을 싫어하지 마라. 그러면 무엇 하나 싫어하는 것이 없으므로 저절로 싫어하지 않게 된다. 이러하므로 성인은 자기를 알되 과시하지 않으며, 자기를 사랑하되 대접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를 대접해달라고 바라는 쪽을 버리고 자기를 알고 자기를 사랑하는 쪽을 택한다.
제 73장 임위(任爲)
과감한 것에 빠져 용감하면 죽고, 과감한 것에 빠져들지 않고 용감하면 산다. 이 두가지의 용기는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천하가 싫어하는 까닭을 어느 누가 알 것인가. 이러하므로 성인도 그 점을 어려워 한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고 잘 이기며, 말을 하지 않고도 잘 응하며,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잠자코 가만히 있어도 뜻을 잘 세운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글지만 어느 것 하나 빠져나가게 하지 않는다.
제 74장 제혹(制惑)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임 따위로 백성을 두려워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인간으로 하여금 목숨을 위협하여 못된 짓을 시키는 자가 있다면, 내가 그런 놈을 잡아 죽이고 싶다. 하지만 누가 감히 죽이는 짓을 하겠는가? 항상 살인을 맡아 하는 자가 있으며, 살인 청부업자의 소행 또한 죽이는 짓이다. 이를 일러 도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베는 짓이라고 한다. 도목수를 밀쳐내고 나무를 베는 자는 제 손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제 75장 탐손(貪損)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치자들이 너무 많은 세금을 받아먹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은 굶주리게 된다. 백성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치자들이 못할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스리기가 어렵게 된다.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치자들이 자기네들만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구걸하지 않는 것이 생에 애착을 갖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제 76장 계강(戒强)
인간의 산 몸은 부드럽고 연약하다. 인간의 죽은 몸은 굳고 단단하다. 살아 있는 초목은 부드럽고 연약하다. 그러나 죽은 초목은 말라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현상이다.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생의 현상이다. 이러하므로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 나뭇가지가 강하면 부러지고 만다. 굳고 강한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다.
제 77장 천도(天道)
하늘의 도는 활을 메우는 것과 같도다. 활을 메울 때 위는 눌러 주고 아래는 치켜 올려 주며, 남아 있는 긴 줄을 덜어내 모자란 줄에 더해 준다. 이처럼 하늘의 도는 남는 것에서 덜어내 부족한 것에 보태 준다. 그러나 인간의 도는 그 같지가 않아 부족한 것에서 덜어내 남아도는 쪽에 바친다. 누가 남아 나는 것으로 천하에 봉사할 것인가? 오로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자 밖에는 없다. 이러하므로 성인은 일을 하되 그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남보다 현명한 체를 않는다.
제 78장 임신(任信)
세상에서 부드럽고 약하기로는 물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리고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자면 물보다 더 나은 것이란 없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물을 대신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드러움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연약함이 강한 것을 이긴다. 세상은 유약이 강강을 이긴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한사코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허물과 치욕을 맡는 것이 임금이요, 천하의 불상사를 떠맡는 것이 황제라고 했다. 바른 말은 뒤집어 놓은 것처럼 들린다.
제 79장 임계(任契)
큰 원한을 풀려고 하면 앙금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큰 원한을 푼다고 해서 어찌 선하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하므로 성인은 빚문서를 지니고 있을 뿐 채무자에게 빚 독촉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덕이 있으면 빚은 스스로 갚아지고, 덕이 없으면 놓은 빚을 억지로 받아내야 한다. 천도에는 사사로움이 없고, 언제나 선한 사람과 더불어 어울린다.
제 80장 독립(獨立)
작은 나라에는 사는 사람도 적다. 수많은 사람이 쓸 수 있는 기물이 있지만 쓰지 않게 하고, 죽음을 중하게 여겨 멀리 떠나지 않게 한다. 비록 배가 있고 차도 있지만 그것을 타는 바가 없고, 비록 병사가 있지만 전선에 배치한 바가 없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아득한 옛날의 덕치로 돌아가 생활하게 한다. 거둔 곡식으로 밥을 지어 맛있게 먹고, 손수 길쌈한 천으로 옷을 지어 아름답게 하고, 손수 지은 집에서 편안히 살며, 손수 가꾼 습속을 즐긴다. 인접한 두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울음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고가지도 않았다.
제 81장 현질(顯質)
미더운 말은 꾸미지 않고, 꾸민 말은 미덥지 않다. 선한 사람은 어눌하고, 구변이 좋은 사람은 착하지 않다. 진실로 아는 자는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자는 진실로 아는 것이 없다. 성인은 덕을 쌓아두지 않고 남을 위해 베풀어주므로 더욱 자기에게 덕은 불어나고, 남과 더불어 이미 나누었으므로 덕은 많아진다. 자연은 이롭게 돕되 해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남을 위해 일하되 다투지 않는다.
첫댓글 길어서 다 읽진 못하였지만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_()()()_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