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번쯤 감상을 올려봐야지 하고 있다가 잊어버릴 뻔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표지에 나와있다시피 리첼렌이고, 여기 카페에도 몇번 소개된 바 있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폭종)"이 대표작입니다. 본작은 폭종의 후속작(물론 세계관 공유는 아닙니다만) 격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후기에서 작가가 밝힌 바에 따르면 폭종의 주인공 이형(고종)이 '이상한 놈'이라면 폭통의 주인공 조지원은 '나쁜 놈'이라고 합니다. 작가가 대놓고 나쁜놈이라고 평할 정도이니, 사실상 본작은 악역이 주인공인 피카레스크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은 대체역사물의 전형적인 전개로 시작합니다. 1회차 인생에서 능력을 미처 발휘하지 못한 주인공이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을 받아 과거 인물로 환생하는 전개죠. 처음에는 지리산 산신령이 1904년 한일협정 체결 직전의 친일파 '이지용'으로 환생시켜주는데, 그때쯤 되면 아무리 조정 고위관료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극히 제한적이었죠. 그래서 회담장에 다이너마이트를 몰래 가져가 다 함께 폭사하는 것으로 2회차 인생을 끝냅니다.
네. 진짜로 첫 화부터 주인공이 폭사하면서 끝납니다. (...)
사실상 본작의 전개는 따라서 3회차 인생부터 시작하는데, 기껏 빙의시켜줬더니 폭탄테러나 하는 걸 보고 빡친 산신령이 이번에는 경복궁 전투에서 사망한 대한제국군 장교 조지원의 몸에 다시 빙의시켜버립니다. 본격적인 내용은 대충 조지원이 거기서부터 어찌저찌해서 일본의 러일전쟁 수행을 사보타주하고, 제정을 폐지하고, 시대를 앞서간(?) 파쇼혁명으로 초강대국 발해연방을 만드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
이렇게만 보면 뭔가 옛날에 유행하던 양산형 국뽕 자위물같지만, 본작의 특징은 그런 국뽕물에서 종종(사실상 거의 대부분) 간과되던 어두운 부분들을 최대한 부각시킨다는 점입니다. 가령 한반도 국가로 일본과 중국을 꺾는 과정에서 독가스를 살포하고, 저항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며, 타국의 재난을 기회로 이용해 복구작업을 사보타주하는 장면은 보통 "우리 정의로운 한국이 악랄한 쪽바리에게 복수한다! 만세!"처럼 묘사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폭통에서는 독가스 살포로 인해 고통 속에 죽어가는 적국 병사들을 불편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점령지에서의 시위진압을 총칼로 다스리는 장면을 매우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함으로써 "이게 맞나?" 하는 느낌을 준다.. 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디씨 대체역사 갤러리에 작가 본인이 올린 글에 따르면 이러한 연출은 지극히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데, 2000년대에 범람하던 국뽕류 대체역사소설/트립물들에 대한 안티테제이자 비틀기를 보여주는 것이 창작의도라는 점을 밝힌 바 있습니다. 최대한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하자면 결국 조지원이 이끄는 발해연방은 정신나간 파쇼 행보를 보이고 주변국들을 정벌하며 서구 열강의 식민지를 '해방'해 나갑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건재한 것도 딱히 정의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작중에서 발해연방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음...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
주제의식은 대충 그렇고, 본작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폭종으로 검증된 리첼렌 작가의 플롯 구성력과 필력입니다. 사전정보 없이 들으면 말도 안되는 정신나간 전개도 어떻게든 09/10 시즌 바르셀로나 뺨치는 빌드업을 통해 "어? 그럴듯한데?" 급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참... 일품입니다. 문장구성력은 대체역사물 작가 중 상위권이라고 말할 만 한데, 물론 이건 주관적인 평가이고 오히려 "왜 이렇게 문체가 올드하고 아저씨같아졌냐"라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댓글들도 꽤나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자세히 언급하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작중 등장하는 정신나간 대사들과 상황들, 그리고 그것들이 이상하게도 나름 개연성있게 전개되는 걸 보고 있으면 리첼렌 작가의 필력 하나만큼은 인정하게 됩니다.
본작의 가장 큰 단점은 상기한 묘사나 전개방식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가 많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해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스타일입니다. 전작인 폭종이야 뭐 이미 대중적인 "조선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주제를 맛깔난 필력과 플롯짜기로 구성했기에 그리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없었지만, 본작은 아무래도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악 vs 악의 구도가 펼쳐지므로 읽는 사람에게 피로감을 줄 여지도 분명 크다고 봅니다.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가 평면적으로 변하며 약간의 용두사미 끼가 보인다는 단점도 존재합니다. 초중반부에 참신한 구성과 생동감 넘치는 전개가 이어지며 간혹 던져지는 과감한 대사들이 일종의 MSG 역할을 해주어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느낌이라면, 후반부의 경우 루즈하고 심심한 전개를 자극적인 장면이나 대사들("나는 원래부터 000가 싫었어"라던지...)로 어떻게든 커버치는 느낌이 강합니다. 이건 실제로 전작인 폭종에서도 어느 정도 지적된 부분이긴 합니다.
-
아무튼, "그래서 이 소설을 추천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전 그렇다고 답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소설 축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호이 TNO나 레드플러드 모드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잘 맞을 것 같네요. "주인공은 정의롭고 정당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뭐 제국주의 열강들 참교육하는 게 어느 정도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긴 합니다만, 음... 그 방법들이라고 묘사된 게 좀 거시기하니까요.
별점: ★★★☆
첫댓글 저랑 평이 좀 다르군요 전 리첼렌 작가의 폭봉이나 고종 빙의 태종 보면서 용두사미의 끝판왕인데 그래도 전개 하나로 먹고사는구나 싶어서 읽다가 현타가 자주 오더라구요. 그래서 폭통도 걸렀는데 이거 보니 볼까 생각이 드네요
용두사미긴 합니다. 전 계속 따라갔어서 좀 덜 느꼈던 것일수도 있겠군요.
같은시기 웹툰 왕그리고황제의 이토의 최면세뇌스마트폰 덕분에 리첼렌이 패배를 인정하여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지던 시대를 잘못탄 작품
최면빔은 전설입니다…
???:패배를...인정합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은 이 작품이 사이다인줄 아는 일부 독자들이죠(...)
작가가 후반부로 가다가 뇌절한 이유도 그때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시간으로 따라갔었는데..
댓글창에 K-파시스트들 넘쳐나죠… 작가도 “이래도 사이다야? 이래도?” 하는 게 느껴졌고요.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꺼라위키에 조지1세가 왜 좌익파시즘(민족생디칼리슴)인지 적어놨었는데, 나중에 누가 은근슬쩍 조지1세를 옹호하는 내용과 함께 행동동기를 국수주의와 애국주의(...)라고 적어놨더라고요(시진핑이 조지1세보다 더 악랄하다는(??) 중혐텍스트와 함께요) 그래놓고는 작가의 의도가 실패했다느니 하는 글귀를 적어놓은걸 보면 참..
조지1세가 작중한국을 유사민주주의 국가에서 부유한 북한으로 바꿔가는동안에 작중 인물(주로 실존인물이죠)들이 어떻게 타락해가는지도 꽤나 볼거리였는데, 그런 텍스트를 읽어낸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단 것도 안타까웠습니다. 작중 묘사를 보면 작가양반 시선에선 소련도 한국에 비하면 착한 국가였단 말이죠.
@렌지파일 아무리 좋게 봐줘도 럭키 나치 정도인데 말이죠...
폭고와 폭통 둘다 끝까지 봤지만 폭통은 이건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다 재미있게 봤지만요.
일단 작가의 필력이 기본적으로 평타 이상은 치니까 내용이 거시기해도 그럭저럭 볼만은 했던 것 같습니다. ㅋㅋ
개인적으로 흔히 말하는 사이다패스를 정말 싫어해서 이 작품이 나왓을때 반겻습니다.
사이다패스에 대해서 꼬집는 작품이라서요. 근데 독자들 반응이 무슨 "이게 우리가 원하던 사이다야!!" 이러는거보고..............
작가가 진짜 "어? 뭐야 이거 왜이러지???" 싶은 반응이 적나라 하더라구요 ㅋㅋㅋㅋㅋ
독자들 반응을 보고 왜 나치즘이 그렇게 흥했는 지 단번에 이해가 되더라고요. ㅋㅋ
후속작..폭구..연재중입니다..ㅋ
폭구도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분량이 쌓이면 그것도 리뷰를 한번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