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벌써 보름이 지났다.
이제 해가 바꼈다는 감각은 사라지고, 언제나처럼 그 세월인 한 해를 지겹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 날이 그 날인 세월의 흐름을 이기고, 뭔가 새로운 감각을 언제나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해가 바뀌고 만난 사람들을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 들어 여기 컴퓨터 앞에 앉아 보았다.
1일, 2일, 3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별다른 기억이 없다. 아마 아내와 함께 이 식당 저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밥을 사먹고 영화도 보고(마이 웨이), 지금 보고 있는 장편 소설 <설향>의 교정을 보았을 것이다.
4일은, 안광윤의 초청으로 그의 이사간 집을 방문하였다. 구 삼풍아파트 서쪽 대로변 몇동이 전소되고 그것을 허물고 아크로비스타라는 아파트를 지었는데, 굉장히 고가라고 소문이 나 있다. 거기로 광윤이 이사를 갔는데 육십 몇 평이라고 한다. 말만 듣던 고급아파트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광윤이 회장으로 봉사하는 마로니에 산우회 회원들의 모임이 이 집에서 있었는데, 마침 감기가 심하여 불참하였더니 광윤이 특별히 초청해 주었다. 부인은 싱가폴로 골프여행을 가고 계시지 않았다.
5일은, 계간문예지 <시에>의 주간인 양문규시인과 저녁을 같이 하였다. 편집장인 장영도씨도 자리를 같이 하였다. 작년부터 전화만 수없이 주고 받았을 뿐 막상 만난 것은 처음이다. <설향>을 출간하기로한 회사이다. 양 주간은 충북 영동에 살고 있는데, 나와의 만남을 위해 아침 일찍 일부러 상경하였다. 그는 잡지사를 편집장에게 맡겨놓고 거의 상경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시에>의 지세는 대단한 바가 있다. 작년 가을, 시에 지에서 주관한 영동 천태산 시 낭독회에는 전국에서 500명이 넘는 시인들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6일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단국대학교 상과대학 김태기 교수의 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김태기 교수는 지난 18대 총선 때 여기 성동갑구에 한나라당 지역위원장이었으나, 공천에 실패했다. 무슨 저녁식사대접을 했다든가 하는 이유로 선거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참으로 아쉬워했다. 이번에 재기의 기지개를 펴려고 하는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간신히 김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앞으로 들어오는 주례부탁은 전부 나에게 넘겨버린다. 선거법 때문이라고 한다. 해병대 출신인데다가, 노동법 전공이라 해병대 선후배들이 운집하였고, 노동지도자들이 다수 모여들었다. 김교수와는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동창의식으로 묶여있는 것 같다.
7,8,9,10일은 오피스텔로 나가, 넘어온 설향 원고를 세번이나 추고하였다. 이 소설의 원고를 넘겼을 때 6번 추고하고 넘겼는데, 다시 세번을 더 추고하였으니 도합 열번을 추고한 샘이다.
11일은, 가끔 나가는 북악산우회의 신년모임에 나갔다. 일년에 한두번 나가는 모임이지만 언제나 짙은 우정을 느낀다. 제일 먼저 나에게 인사말을 하라고 해서, 이 모임이야말로 늙어가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하는 모임이라고 인사말을 하였다. 처음보는 회원 다섯명의 명함을 받았다.
12일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단생모(단국대학을 생각하는 모임,정년교수들의 모임) 신년모임에 나갔다. 고문으로 계시는 단국대 학원의 학원장이신 장충식 이사장에게 새배드리는 기회이다. 단국대학교는 한남동 캠퍼스를 팔고, 죽전으로 본교를 옮겨갔다. 그러나 한남동 부지를 사서 아파트를 지어 크게 성공한 회사에서, 단국대학에 큰 아파트 한 채를 주었다고 한다. 거기에 학원장님께서 사무실로 쓰시고 있다하여 그리로 새배하러 갔다. 북경대학에서 온 짐주창교수를 만나 환담했다. 단국대학교에 공자연구소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단국대학교가 한때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전 재기에 성공하였으며, 웅장한 죽전캠퍼스와 천안 캠퍼스를 갖추었다. 어제 전국 20대 대학에 선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나서 다들 환호하였다. 한때 학교가 상당히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30년간 봉직하였다. 단생모에 나의 초등학교 동창인 정무웅교수(건축학)을 추천하였다.
13일은 고 안수길 선생 전집간행 기념모임에 나갔다. 나는 안수길 선생의 마지막 추천작가이고, 나의 결혼 주례를 서신 분이었다.돌아가신지 35년이 지났으나 전집이 없어서 언제나 아쉬웠는데, 유족들이 힘을 합쳐 전집 16권을 간행하는데 성공하였다.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용도 만만찮게 들었을 것이다. 전집 값은 2백 5십만원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정신과의사를 하시는 둘째 아드님과 국내에서 무슨 유력한 연구소에 다니시는 세째 아드님과 사촌동생이신 안인길교수를 만났다. 유족들은 작년 년말에 있었던 안수길 탄생 백주년 기념모임이 있고난 후 내가 쓴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다고 하면서 그 감회를 말했다. 안수길 선생의 맏사위이시던 고 김국태선생의 부인이고, 안수길 선생의 따님이신 분을 만났다. 소설가 김국태 선생이 살아있을 때에는 자주 그 집에 들르곤 했었다. 김국태선생은 당시 거의 유일한 문예지이던 <현대문학>의 편집장이었다. 처음 만나는 분들도 많았고, 수십년만에 만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명함을 건네고 서로들 경조사에는 연락을 하자고 했다. 김국태는 최근에 작고한 정치인 김근태의 가형이다.
16일은 소설가협회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다. 조금늦게 갔더니 자리가 없어서 바깥에서 여러사람들을 만났다. 금방 끝날 것같지도 않아서 한 30분 가량 기다리다가 돌아왔다. 김상렬, 유익서, 이상문, 강병석, 허정수, 우선덕,김진초씨 등을 만났다.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젊으신 분들이라 존함을 다 알 수 없었다. 허정수씨와 우선덕씨는 마포에 있다가 남산 도서관으로 옮겨간 소설가 협회의 사무실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 단체에 중앙위원이라는 직책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문학단체도 책임자로서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 입장이다.
소설가 권태현 씨 장남 결혼식을 깜빡 잊어버리고 결례를 했다. 조금 늦었지만 전화를 해서 사죄하고 계좌번호를 청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섭섭함을 푸는 듯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경조사에 결례하면 그 결례를 풀 방법이 사실상 없는 것같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참다운 모습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면인지도 모르겠다.
27일에는, 동연회(안동지역 출신 재경 교수모임) 모임이 연세대 알렌관에서 예정되어 있다. 이 모임에서는 십여년도 훨씬 넘게 이 모임에서 매년 편찬한 문집인 <동년회통신>에 게재했던 글을 모아 <동년문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는데, 그 출간 기념모임이 예정되어 있다. 50여명 이상의 필진이 참여했는데, 500 페이지 책에 나의 글이 100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좌장이신 김종길 교수와, 김경동 교수, 김용직 교수들은 골수 안동인들로서 전부 학술원 회원들이다. 선비의 고장, 안동 사람들다운 학문적인 체취가 물씬하다.
한 보름 남은 일월 한달, 단단히 고삐를 잡고 하루의 한 시간을 여삼추처럼 목을 틀어쥐고 책상 앞을 지킬 것이다. 그 사이 나는 끊임없이 영어, 불어의 듣기 연습을 하였다. 별 성과도 없고, 별로 써먹을 데도 없으면서, 그냥 외국어교수로서의 타성에 젖은 행동이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하다. 소설가가 이 짓을 해서 무엇을 하겠나.
첫댓글 공사다망하신 회장님, 뒤늦게 새해 인사 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올해도 더 눈부신 활약 기대 드립니다.
동성이, 건강은 좀 어떠하신가. 사모님과 따님에게도 안부 전하네. 날씨가 좀 풀어지면 어디 우리 한번 가족끼리회동을 하세나, 화타가족과 함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