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타국에 나라를 빼앗긴 슬픈 현실, 말문마저 탄압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이중섭은 민족의 존엄성을 그림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 존엄성을 은밀하게 담아 우리 민족만이 알아챌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할 존재는 소였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틈만 나면 들에 나가 소를 구석구석 관찰하며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기숙사에 있는 그의 방에는 소의 몸통, 앞발, 뒷발, 꼬리, 머리 등을 스케치한 그림들로 가득했고, 중섭은 그 스케치와 함께 잠들었다고 합니다. ‘소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내겠다’는 그의 열정은 주변 지인들이 보았을 때 미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44)
우리는 왜 이중섭을 국민화가라 부를까요? 아마도 그의 삶에서 나온 소를 비롯한 모든 그림이 20세기 한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타인의 삶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 자체를 소에 이입해 그렸죠. 그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당시 한반도 위에서 생을 이어가던 모든 이의 고난과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과 아픔을 직접 겪어본 적 없지만, 이상하게도 중섭의 그림을 볼 때마다 마치 기억 속에 묻어둔 어떤 파편을 끄집어내 마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마 중섭이 시대의 산증인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그림에 온전히 이입시키고 있기에 가능해진 일일 것입니다. 그 결과, 중섭의 그림은 영원히 살아 숨 쉬며 우리와 감정으로 소통합니다. 중섭과 중섭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와 ‘애달프면서도 따뜻한’ 기억의 조각이 됩니다. 그렇게 중섭은 국민화가로 우리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습니다.
(59)
이를 위해, 혜석이 선택한 아이템은 붓과 펜이었습니다. 붓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자신의 화업을 만들어가는, 신여성의 길을 가는 지팡이였습니다. 펜은 여성 운동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현해 세상에 알리는 확성기였죠. 사실 혜석을 최초의 서양화가라고만 기억하고 평가하는 것은 많이 아쉽습니다. 글쓰기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문필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글을 정말 잘 씁니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작법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단순히 논설문을 넘어 시, 소설, 희곡, 수필 등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글로써 자신의 생각과 감정, 더 나아가 사상까지 솔직담백하게 담아냅니다. 그녀의 글은 흡입력이 상당하죠.
(114)
“당시 내 머릿속에는 민족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모두들 서양화만을 그린다면 동양화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는 동양화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전통 동양화가 아닙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조화롭게 융합시키는 미지의 길을 선택합니다. (사실상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 길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죠. 동양화로는 이미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응노. 그렇기에 이제 그가 할 일은 서양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가족들에게 논밭까지 장만해주던 간판점 ‘개척사’를 미련 없이 처분하고 말이죠.
(121)
노력. 그것도 목적이 있는 노력. 50대의 나이에도 항상 깨어 있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작품에 반영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이응노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예술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시대에 깨어 있던 그의 작품은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됩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판매되어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됩니다. 곧 이어 자크 라센느(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가 프랑스로 그를 초청하죠. 이미 한국미술계에서 승승장구하며 환갑을 앞두고 있던 거장 이응노. 이제 좀 쉬겠다고 해도 누구도 안 말릴 나이에 그는 새로운 도전에 또 한 번 몸을 내던집니다.
(138)
한국인이지만 한국에 갈 수도, 작품을 나눌 수도 없던 예술가. 20년 전부터 주변에서 권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이 거절해왔던 그것, 프랑스로의 귀화를 1983년의 응노는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되나, 나는 한 번도 내 조국을 잊어본 일이 없어요. 비록 조국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난 나의 피와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조국을 버릴 수 없지.’ 유럽에 온 이후 끝까지 한국 신문을 놓지 않았던 그. 전시를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저 멀리 보이는 한반도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 프랑스 유수의 미술관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국가사업을 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재능이 외국을 위해 사용되고 있음에 깊은 안타까움을 토론했던 그.
(139)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 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습니다.”
-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 중에서
격동의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 끝없이 변모하던 시대의 물결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자신의 작품을 변신시킨 예술가. 자칫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민족의 예술정신을 현대에 살아 있게 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던진 예술가. 86년의 생애 수없이 작품의 외형을 변신시켰지만, 그 안에는 오직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을 채웠던 고암 이응노. 시대를 초월해 그의 작품에서 영원히 울려 퍼져 나갈 시는 이것이 아닐까.
모두, 함께, 어울려, 자유와 평화의 춤을.
(167)
그(유영국)에게 사업은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키고, 자신이 예술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예술에 대해선 무한한 꿈을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돈이라는 수단이 기반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던 현실주의자였죠. 그런데 그는 또 너무 많은 돈을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243)
백자가 가진 평범한 빛깔과 평범한 형태. 한마디로 ‘평범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환기는 ‘지극히 평범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직관으로 깨닫습니다. 즉, 조선 백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닭이 알을 낳듯이 자연에서 출산한 것’임을 환기는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백자를 빚은 조선의 ‘도공’에게서 찾습니다. 조선의 도공은 완벽한 비례와 균형을 갖춘 도자기를 잘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이론, 규범, 기교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잘 만들고 싶은 ‘마음 없이’ 그저 꽃을 피우는 ‘무심(無心)’한 자연처럼, 도공은 무심하게 백자항아리를 빚습니다. 자연과 하나되어 무심의 경지에 이른 도공이 빚었기에 백자항아리가 ‘자연 그 자체의 미=평범의 미’를 고스란히 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조선이 가진 미의 정수이며, 우리의 미가 가진 특유의 멋임을 통찰하게 됩니다.
(290)
그 평범한 서민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생존을 위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일’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 그리기를 반복하는’ 수근처럼 말이죠. 전쟁이 몰고 온 비참한 상황 속에서 가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수근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반복적인 그림 그리기’와 서민들의 ‘반복적인 일’이 결국 모두 ‘가족을 위한 노동’이었음을. 평범한 서민 중 한 명이었던 수근은 자신과 그들과의 끈끈한 동질성을 발견합니다. 문만 나가면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서민들에게서 깊은 동정과 연민을 느끼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따뜻한 온정을 느끼며. 마치 그들에게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던 수근은 그들을 화폭에 담습니다. 그 어떤 고상한 정신도, 심오한 주제도 그의 그림에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고, 주변에서 함께 숨 쉬며 하루를 살아내던 사람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수근은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그 평범한 사람들을 화폭에 담고 또 담기를 반복합니다.
(316)
“나는 소녀 적부터 가슴속에 커다란 감상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그 주머니가 이날 이때까지 나를 살게 하는 것 같다.”
소녀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 온 ‘감상의 주머니’. 그 주머니에서 외할아버지와의 행복한 추억이 담긴 <조부>가 나왔듯이 뱀 역시 그 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경자에게 뱀은 행복한 추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화자)가 산나물을 캐다 독사에 물려 죽은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는 만큼 뱀은 ‘저주를 불러오는 악한 것’이었죠. 자신의 삶이 저주의 늪에서 빠져나와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상의 주머니’에서 뱀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대상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저주를 물리치기 위해 뱀을 그리며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합니다. 말이 좋아 예술이지 그녀에게 이 행위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