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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한인 모임- 두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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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야기(중국한국)&문답 스크랩 西岳 華山에 올라 兵馬俑을 부르다
김봉선 추천 0 조회 180 06.06.06 12:13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Ⅰ. 여행일정

 

                           ◉ 전체 4박 5일 일정

 ☞ 1일(5월 2일) : 北京西站 T75次 硬臥 兰洲 행 승차 18:53분 發

 ☞ 2일(5월 3일) : 西安站 오전 07: 50분 도착

    ①唐御坊 ②아침 ③華淸池 ④점심 ⑤兵馬俑 ⑥저녁 ⑦숙소투숙(渭南 花園酒店)

 ☞ 3일(5월 4일) : ①華陽市 華山(西岳) 上山 ②서안 龍海酒店 투숙

 ☞ 4일(5월 5일) : ①大雁塔 분수광장 ②大慈恩寺, 大雁塔 ③西安站 이동

    ④T45次 硬臥  北京西站 행 승차

 ☞ 5일(5월 6일) : ①오전 06:22분 北京西站 도착 ② 귀가


Ⅱ. 그 다음

 1. 첫 날

 어느새 중국에서 4번째의 노동절 연휴를 맞이한다. 첫해 03년은 SARS의 영향으로 꼼짝도 못한 기억이 새롭다. 그땐 흔한 말로 쫄아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었다. 지나고 나면 괜찮았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 움직이지 않아 아무 탈 없이 지금까지 지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사하는 맘을 가져야겠지.

 아마 노동절 연휴 때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다. 상해에서는 하루일정으로 상해주변 가까운 곳을 다녀온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몇일을 일정으로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다.

 

 상해에서도 가봐야지 하면서도 가보지 못한 곳. 서안을 이번 행선지로 정하였다. 상해에 있는 아는 분 가족과 함께 서안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정을 잡아보았지만,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서안에서 만나야 하는 것이라 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일정 및 여러 가지 문제를 조율하다가 결국을 우리 가족만 움직이기로 하였다. 아쉬움이 남는다.

 왕징4구에 있는 神舟여행사를 통하여 서안, 화산을 돌아보는 여행일정을 확인하고 예약을 한다. 그 유명한 진시황의 병마용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이번 여행의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를 것이야 뭐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병마용을 널리 알려져 있기에 한번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그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경험으로 남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이번 여행에 대해서는 크게 싫다는 반응이 나오질 않는다. 예전 같으면 “무엇하러 가요” 하는 투정이 나오기도 했는데 말이다.

 

 2일 오후에 집을 나선다. 오전에 차를 하나 빌리러 정찰을 나선다. 택시에는 우리 5명이 다 타기 어렵다. 짐도 제법 있으니까. 그래서 봉고차를 하나 얻어 보려고 나서는 것이다. 왕징3구와 4구 사이에 가니 차량들이 많이 있다. 쓸만한 봉고차가 있어 값을 물어본다. 북경서역까지 200원 달란다. 너무 비싼 것 같아 돌아섰다. 내 150원에 하자고 하니 별 반응이 없었다. ‘정 안되면 택시 두 대 타고 가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 온 것이다.

 4시경에 이 기사에게 다시 전화를 해본다. 아마 아직도 일거리가 없어 노는 모양이다. 내 다시 북경서역가자고 했다. 150원 하잔다. 나는 조금 더 깍아 130원에 합의를 본다. 4시 50분에 집 앞으로 오라하고 전화를 끊는다. 잘 한 것인지 모르겠다. 보통 택시타고 가면 약 60-70원 가량 나온다고 한다. 두 대 값이면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한차에 모두 타고 가니 안전성면에서도 나은 듯싶다.

 

 5시에 출발한다. 북경서역까지는 조금 멀어 보이지만 도로가 양호하여 약 40분만에 도착한다. 북경서역은 처음이다. 역 규모가 북경역보다 크다는 느낌이다. 역 앞이 혼잡하다. 길 건너에서 오는 육교가 연결되어 있고 그 육교아래에는 1층부터 연결이 되어 있어 아주 혼잡하다. 또 택시도 2층에서 타게끔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짐 검색대를 통과하여 역에서 기다리는 가이드를 만난다. 만나 바로 열차표를 건네받고 확인한다. 모두 가는 사람들은 48명이다. 각자 모여 열차표를 받고 열차를 타는 것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대합실을 사람들로 복잡하다. 자리 잡고 누운 사람도 있다. 기다리는 모양들이 정말 다양하다. 많은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고향에 가는 것인지? 대부분이 여행객 같다. 우리가 차는 기차는 T 75편으로 兰洲(란주)를 가는 차이다. 즉 종착역은 란주이다. 거기 못미쳐 서안에 잠시 정차하고 가는 것인 모양이다. 이 기차는 가는 도중 몇 군데 정차를 하는 것 같다. 도착시간은 다음날 아침 오전 7시 50분이다. 대략 13시간 가는 것이다. 지루한 시간들이다. 역에서 마침 일행 중에 우리 한국인 가족 3명을 만난다. 두 딸과 어머니 한분 모두 셋이다. 용감하신 분이다. 여자 셋이서 여행을 가는 것을 보면, 첫 여행이라고 하신다. 다행인 것은 일행 중에 한국인이 있다는 것이다.

 

 기차의 우리 칸에 자리를 잡는다. 지민이는 첫 여행이고 기차도 처음 타보는 것이다. 성제나 하영이는 일전에 4인승 기차도 타보았고 또 6인승 기차도 타보아서 새로운 기분은 아니다.

 이제 한밤을 지내면 서안에 도착할 것이다. 준비해 온 저녁을 먹는다. 김밥과 라면도 있다. 저녁을 먹고 편한 차림으로 휴식을 취한다. 기차내가 시끄럽다. 10시 정도가 되어야 좀 조용해지고 잠을 잘 것이다. 성제는 게임을 하고 하영이와 지민이는 가져온 책도 보고 쉰다. 난 일찍 잠을 청해본다. 8시도 아니된 것 같은데.......

 이전의 경험으로는 기차에서 곤한 잠을 자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면 많이 피곤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번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자다보면 분명 깨지겠지만.

 

 한참을 잔 듯싶어 깨진다. 주변은 어둡고 조용하다. 다들 취침중인가보다. 시계를 보니 이제 10시하고 45분이다. 아직도 긴긴밤이 남아 있다. 걱정이다. 이제 한번 깼으니 다시 잠이 들려면 어려운데 말이다. 주변을 보니 아이들은 아주 곤하게 자고 있다. 녀석들 흔들거려도 잠을 잘 잔다.

 

 

 

2. 둘째 날


 어느새 동이 튼다. 창밖은 환함이 있다. 밖을 보니 날이 흐려있다. 새벽이라 그런가. 창밖으로 해도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출발하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았을 때, 서안의 날씨는 흐리고 비도 조금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3,4일 모두. 내일 화산행이 조금은 걱정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6시경이 되니 열차 안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기상과 동시에 세면들을 하느라 좁은 복도가 혼잡하다. 물론 세면장도 마찬가지이다. 줄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한다. 화장실 앞도 같은 현상이다.

 우리는 아침을 간단하게 한다. 어제 남은 밥과 아이들은 컵라면으로 한다. 서서히 서안역에 진입한다. 비로소 서안 땅을 밟게 되는 것이다.

 서안역에 내리니 날은 흐려있다. 예상했던 대로이다. 출구로 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여행객을 맞이하는 사람들이다. 일부는 작은 깃발을 가지고 표시를 하였다. 가이드들이다. 우리 일행 역시 가이드를 쉽게 찾는다. 미리 알려준 깃발을 가지고 있다. 하나 둘씩 가이드 앞에 모인다. 48명이 쉽게 모여든다.

 

 준비된 버스에 오른다. 버스를 타고 서안역을 벗어난다. 오른쪽 창밖으로 성벽이 보인다. 과연 이 성벽에 오를 수 있을지….

 버스는 시내 밖으로 향하는 것 같다. 도로에는 많은 관광버스들이 지나다닌다. 연휴와 더불어 서안이 관광지임을 느끼게 한다. 차에 오르면서부터 가이드는 마이크를 잡고 쉬지 않고 말을 한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우리의 일정 그리고 서안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다. 크게 개념치 않고 간다.

 

 우리가 처음 도착하여 버스에서내린 곳은 唐御坊이라는 곳이다. 커대한 돌 조형물이 하나 서있다. 이 조형물을 뒤로하여 커다란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唐御坊이라고 하면서 꾸미고 있다. 지금 막 공사가 진행 중이다. 2007년 개방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화청지까지는 직선거리로 1km 정도이다. 이 공원의 조형물을 배경으로 전체 사진을 한 장 박는다. 나중에 이 사진을 줄 것처럼 하더니 결국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어서 도착한 곳은 아침 식사하는 곳이다. 오늘 아침은 아니 먹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식당(君義飯店)으로 데리고 간다. 좋은 곳은 아닌 듯싶다. 안내되어 3층으로 올라간다. 삶은 계란, 몇 가지 야채나물, 밥, 흰 빵 등이 나온다. 우리는 기차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한 셈이어서 식욕이 별로 없다. 한 두점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내려온다. 이 식당에서는 점심까지 해결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화청지로 향한다. 800m 남았다는 표지를 보고도 차는 한참을 간다. 가기보다는 서 있다가 조금 움직이고 한다. 양쪽길이 차로 꽉 막혀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겹다. 무슨 차들이 이리도 많은지. 역시 휴일임을 느끼게 한다. 많은 사람과 많은 차량들로 하여금.

 

 주차장입구에서 내려 우리는 화청지로 향하고 버스는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가이드를 따라 화청지 입구에서 기다린다. 표를 사야하는데 복잡하다. 학생증 있는 학생을 학생증을 제출하고 또 키가 작은 학생은 무료입장을 하기 위하여 키를 확인한다. 여기 서안에서의 표를 끊는 것은 매 창구마다 가서 확인하고 끊는다는 것이다. 반표, 전표 등 할인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꼭 확인하고 센다. 이전의 여행지에서는 단체의 경우 가이드가 가서 단체표를 끊어서 오곤 했다. 그때는 각 표가 없고 영수증 한 장으로 처리하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매번 숫자를 세고 그 숫자에 맞게 입장표를 개인이 사는 것처럼 사가지고 온다. 그리곤 개인별로 나누어준다. 학생은 학생 반표를 어른은 전표를. 이러다 보니 표를 사는데 한참이 걸린다. 보통 30분을 기본이다. 어떤 때는 더 기다리기도 한다. 무료입장도 반드시 무료표가 있다. 우리는 성제와 하영이 지민이가 학생증이 있어 반표를 사게 된다.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 입장하게 된다. 들어가야 특별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참!

 

 

 

 

 

 

 

 

 

 

 

 

 

 

 

 

 

화청지를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만나는 것은 앞을 막고 있는 산 하나이다. 驢山이라고 한다. 즉 화청지는 여산의 북측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들어가니 특별함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작은 돌 비석이 앞에서 화청궁임을 나타낸다. 이 앞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우리도 잠시 머물다가 발길을 돌린다. 오른쪽으로 도니 제법 큼직한 연못이 나타난다. 오전이라 그런지 분수도 돌아가지 않고 조용한 연못이다. 연못주변으로 몇 개의 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넉넉하게 유람시간을 잡은 것이 아니라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 연못이 九龍湯인데, 안내책자에는 이 구룡탕에 양귀비의 조각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 보는 구룡탕에는 아무것도 없다. 분수장치인지 몇 개의 장치가 있을 뿐이다. 발길을 돌리다 보니 그 양귀비 조각상은 다른 곳에서 발견한다. 연못이 아닌 화단 한 가운데에 있다.  해당탕 앞에 작은 화단을 설치했는데 이 화단 가운데에 하얀 색을 한 양귀비 조각상이 있었다. 그 화단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푯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서고 있었다. 사진이 중요하니까 그 배경으로 말이다. 이 해당탕이 양귀집의전용 욕조였다고 한다. 그리 크지 않은데

 

  우리는 발길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하나하나의 누각 안에는 크고 작은 탕들이 있다. 물론 물은 없다. 옛날의 탕 자리만 뎅그라니 자리 잡고 있다. 양귀비 탕(해당탕)이라니. 왕의 탕(연하탕-현종황제의 전용욕실)이라는 등 하면서, 가만 보니 그 규모는 제법 크다. 또 한편에는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로 사용했다는 흔적도 있다. 몇 개의 누각을 돌아서 뒤쪽으로 가니 1号水源 2호수원, 3호수원 하면서 물이 나오고 있었다. 1호수원은 우물같이 해놓았는데 어른이 엎드려 손을 내리면 물에 닿을 정도로 조금 깊은 편이다. 사람들이 엎드려 물을 만져본다. 집사람도 해본다. 물이  따스하단다. 아이들이 해보기에는 조금 깊은 감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온천물인가 보다. 화청지 내에는 온천을 할 수 있는 목욕탕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사지도 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로 수익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관광수입 말고도 또 다른 수입원을 찾은 셈인 듯싶다. 또 태자탕은 밖에 있었는데 건물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서안에서 25㎞ 정도 떨어진 여산(驪山) 산록에 있는 온천으로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중국 국가에서 보호하는 중요 문물 보호단위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西周시대에 이곳에 驪宮을 세웠으며, 秦대에는 이곳에 石宇, 당나라 현종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華淸宮”이라 고쳤다. 또한 이곳이 온천위에 지워졌으므로 “華淸池”라고도 불리웠다.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의 온천물이 가득한데 일반인에게 공개되므로 몸을 담가 볼 수도 있다. 이 화청지의 온천은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목욕 후에는 기분이 상쾌해지며, 신경통과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화청지는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된 것은 청 나라말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규모의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이다.

이곳은 또한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장학량 (張學良)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하려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곳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의 온천물이 가득한데 일반인에 게 공개되므로 몸을 담가 볼 수도 있다. 이 화청지의 온천은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목욕 후에는 기분이 상쾌해지며, 관절염과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온천물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중국 국가에서 보호하는 중요 문물 보호단위이다.

 

 아쉬운 것은 우리는 가이드를 따르지 않아 화청지 뒤편에 있는 五間廳을 보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오간청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인데, 장개석에 대한 구테타 사건이 일어나게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데 확인하지 못하고 내려온 것이 아쉽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알고 들어갔는데 움직이다 시간을 많이 빼앗겨 그만 둘러보지 못하고나오게 되었다.

 

 화청지를 나와 주차장으로 가서 버스에 오른다. 우리가 제일 먼저 나온 셈이 되었다. 시간을 칼같이 잘 지킨 것이다.  약 30분이 더 지나서야 일행들이 나타났다.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아침 먹었던 식당으로 다시 간다. 2층에 자리를 잡는다. 우리는 아이들이 먼저 올라가 한 테이블을 차지한다. 우리 일행이 8명이라 한테이블을 잡고 나머지 두 좌석은 중국분들이 합석한다. 이것저것 푸짐한 차림이나오는데 우리들에겐 그다지 반가운 식단은 아니다. 아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일단 입에 맞는 나물류하고 밥하고 해서 점심을 해결한다. 어딜 가도 우리 아이들이 먹는 것은 한결같다. 준비해 온 김치와 고추장 등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일단 밥만큼은 넉넉히 먹어두는 셈이다

 

 

 

 

 

 

 

 

 

 

 

 

이어서 버스에 올라 병마용을 향한다. 한참을 달리다 입구에 다다른 것 같은데 차가 잘 빠지질 않는다. 앞이 꽉 막혀있다. 오른쪽을 보니 진시황릉이다. 눈 앞에 제법 커다란 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능인 것이다. 이전에 높이는 115M 였다는데, 지금은 많이 낮아져 75M 정도 된다고 한다. 하나의 산이지 무덤이 아닌 것이다. 그 능 앞에서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길은 왕복 2차선이니 막힐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능으로 가는 길에는 옆으로 간판이 하나 있는데 이런 글귀이다. ‘先拜始皇 後看俑’ 먼저 시황에게 절하고 나서 병마용을 보라는 이야기다. 길 가에 이 글 간판에 몇 개 설치되어 있었다. 진시황릉 입구를 벗어나니 차가 좀 달린다. 그러나 멀지 않아 바로 병마용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도 입구는 혼잡하다. 사방에서 들어오고 나오는 차량으로 복잡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리는 다시금 걷는다. 약 10여분 걸어야 병마용 입구 매표소가 나온다.


 하나의 공원을 찾은 것 같은 생각이다.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는데 우리는 일단 자유롭게 움직이기로 한다. 모이는 시간을 지키기로 하고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서도 학생은 학생증이 있는 경우 반표를 구할 수 있다. 성제와 하영이 지민이가 이에 해당이 된다. 입장을 하면서 우리는 제일 먼저 1호갱을 들어간다. 갱입구에는 정복차림의 군인인가? 암튼 군인 같은 사람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아이들이 보고는 놀란다. 나무가 서있듯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가끔 눈동자만 움직이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참으로 대단하다. 얼마나 오래 서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갱안은 조금 어둡다. 조명을 설치했지만 그다지 밝은 것은 아니다. 1호갱은 상당히 넓다. 축구경기장만 하다. 유물들은 우리가 보기에 아래에 있다. 관람석을 유물 가장자리로 울타리를 설치하고 볼 수 있게 하였다. 사진과 그림으로만 보아왔던 그 엄청나다는 것을 오늘 비로소 실물을 확인하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유물들이 모두 땅속에 묻혀있었다는 것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일부러 저렇게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도 어려운데 그 오래전에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들이 실제로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는 조금 그 느낌이 달라 보인다. 그림든 천연색으로 표현이 되어 있어 그 느낌이 좋았는데 실제로 보니 그 느낌이 나지 않는 것 같다. 크고 넓고 많다는 것은 다가오는데 말이다.

 1호갱은 1974년 발굴된 최초의 갱도이다. 3개의 갱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규모도 커 동서 230m, 남북 62m의 크기를 자랑한다. 전시되는 병마용만 해 도 6000여 점으로 당시 중국의 1개 군진 규모의 병력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군진의 배치인데, 실제 전쟁 시 사용하는 배열로 군사들을 배치해 고대 군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1호 갱군단의 선봉은 13열의 궁수부대로 원거리 타격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던 부대인 것으로 보인다. 선봉대의 뒤로는 38개의 종대로 이루어진 본진이 자리 잡고 있다. 각 1개 종대는 말 4마리가 포함된 전차가 12대씩 배치되어 있다. 군단의 북, 남쪽의 각각 1열의 병마용들이 서 있는데, 이는 전투 중 혹시 있게 될지 모르는 역습을 겨대비한 배치로 보인다.

 

 듣던대로 병마용의 얼굴들은 제각기 다르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어 보인다. 이 1호 갱에는 모두 6000여개의 병마용이 있다는데 그 모습이 제각각이다. 겉모습도 장군과 장교 일반병사의 모습도 다르다. 어찌 이런 것들을 만들 생각을 하고 만들었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진시황이라는 사람은. 또 이를 가능케 한 그 권력도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감히 어느 누가 일인을 위하여 이런 장식물들을 만들겠는가?

 

 사람이 너무 많아 근접하여 볼 수가 없다. 어찌어찌 비집고 들어가 본다. 한번 자리 잡은 사람은 쉽게 나오질 않는다. 봐야하고 사진도 찍어야 하니.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고 눈치껏 이리저리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아이들은 키가 작아 사람들 뒤쪽에서는 볼 수도 없다. 그러니 사람 틈을 헤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정면에서 한번 그 수고를 하고 이어서 오른쪽 측면으로 돌아가면서 옆모습들을 구경한다. 우리도 사람들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잠깐 잠깐 사진도 찍어본다. 그런데 주변이 어두워 잘 찍히지 않는 듯하다. 일단 카메라의 후레쉬를 끄고 찍어 본다.

 

 많은 무리들 틈을 빠져나와 2호갱으로 들어선다. 2호갱은 1호갱보다 그 규모가 작다. 이 2호갱은 1076년에 발견된 것으로 1호갱의 동단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두 갱의 거리는 겨우 20m 정도이다. 크기는 동서 124m, 남북 98m 이다. 1호갱에 비해 갱내부가 여유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널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갱내부의 유물은 적다. 이 갱의 병마용은 1300여점이라고 한다. 이중에는 전차 89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고. 이 갱의 특징은 보병, 기병, 전차대, 궁노수들이 잇다는 것이다.1호갱은 주로 보병이었는데 이 2호갱은 다양한 군사가 배치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병마용 중에는 얼굴이 없는 것들이 많았다. 발굴 중에 망가진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뒤쪽으로 궁노수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궁노수의 앞에는 앉아 있는 궁노수로 160개이고 뒤쪽은 서있는 궁노수가 172개이다. 지금으로 바꾸어 말하면 소총수가 앉아 쏴 자세가 한 부대, 그리고 서서 쏴 자세가 한 부대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앉아쏴 부대와 서서 쏴 부대가 동시에 한발씩 날릴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2호 갱에는 전차부대도 배치되어 있다. 네 마리의 말이 전차 한대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관광용 책자나 안내책자에 소개된 것처럼 그 숫자가 많지 않아 보인다. 일부 치운 것인지. 아니면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2호갱을 나와 마지막 갱인 3호 갱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유물이 많지 않다. 지금 막 발굴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닥에 유물 흔적들이 보인다. 아직 전체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3호갱은 가장 작은 규모라고 한다. 유물 숫자도 적다. 지금까지 72개의 병마용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차 1대. 이곳에서 발굴된 전투용 전차는 유물전시관에서 보았는데 제법 위용이 있어 보였다. 유리 속에 보관된 전차는 특이하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또 기대했던 것 보다 맘에 다가오는 느낌은 적었던 것 같다. 기대가 커서 그런가.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찾아보지 볼 수 없는 특이한 유물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죽어서까지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던 자. 죽어서도 두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죽어서도 살았을 때의 권력을 누리고자 했었던 것일까. 죽은 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지금 남아있는 것들로 추측을 해보는 것일 뿐, 나 혼자.

 3호갱 내부에서는 병마용 모조품을 만들어 놓고 이 사이에 들어가 사진을 찍게 하였다. 한 장면당 10원씩을 받는다. 카메라는 본인의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었다. 즉 대신 찍어주고 배경화면을 빌려주는 값이 10원인 셈이다. 여기도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우리도 한번 해볼까 하다가 기다려야 하는 것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섰다. 몇 군데 이런 코너가 더 있었다. 우리는 그냥 지나쳐 나온다.

 진시황릉 쪽 방향으로 기념품 판매대가 있다는데 우리는 이곳을 둘러보지 않고 바로 나오면서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간다. 지하 1층과 2층 규모의 전시관인데, 진시황릉과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내부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다. 갱내에서 볼 수 없었던, 전차와 진시황이 탔다는 청동마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로 붐벼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아이들도 힘겨운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빨리 밖으로 나갔으면 하는 생각들이다. 진시황 때의 갖가지 유물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힘도 들고 해서 여유 있게 찬찬히 둘러보지 못하고 서둘러 나온 셈이 되었다.

 우리는 아주 자세히는 아지만 대략 둘러본 것 같다. 첫날이라 그런지 조금 몸들이 무겁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것 같다. 아이들이 더욱 더. 유물전시관을 나와서 잠시 1호갱 앞 광장에서 쉬면서 기다린다. 다른 일행들이 나오기를. 거의 만나는 시간이 다 되었다.

정문을 빠져나오면서 한참을 걸어 내려온다. 주차장을 향하여, 내려오는 길목에 많은 사람들이 품에 무엇을 품고 서성거린다. 기념품을 팔려고 한다. 중간 중간 관리인과의 눈을 마주치지 않게 위하여 애를 쓴다. 그 관리인 들을 만나면 손쌀 같이 달아난다. 기념품은 다른 것이 아니고 병마용 4개 들이 작은 상자이다. 마차모양을 한 것도 있고. 그러나 대단한 것은 아니다. 모조품인데 마차의 경우는 플라스틱에다 금빛 나는 칠을 한 것인데 가만 들여다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조금 값을 치루더라도 기념품 매대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50원에 판단다. “아니 산다”고 한다. 그러니 따라오면서 20원으로 내려간다. 이어서 더 10원까지 내려간다. 순식간에 가격의 80%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럼 처음에 부른 가격은 뭐란 말인가? 외국인인지 알고 처음부터 높게 부른 것이다. 물건을 보고서는 살 맘이 생기지 않았다. 거의 다내려 와서 중국인이 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 중국인은 이 같은 물건을 5원에 사더라. 아주머니는 7원을 달라하고 이 아저씨는 5원에 빼앗아가다시피 하면서 가지고 간다. 결국 5원짜리 물건은 내게는 50원을 달라고 하였다. 내가 싸게 샀다고 해서 20원 정도에 샀다고 하면, 난 많이 깎았다고 할 것이고 그 장사하는 아저씨는 엄청나게 바가지를 씌운 셈이다 라고 생각하겠지. 그 거품이 얼마나 되는지 새삼 느껴본다. 아니 사기를 잘한 모양이다. 잘난 척하고 마구 덤벼들어 물건을 살 일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정품이 아니고서야. 각 관광지의 공식 기념품 매대에서는 제법 비싸긴 하지만 그나마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이렇게 길 밖에서 모조품으로 사는 것은 그들이 부르는 가격에서 한참을 내려 불러야 하는 것 같다.

 주차장에 와 버스에 오른다. 주차장에서도 많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기념품을 사라도 여기저기서 달려든다. 하나라도 팔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오늘 일정은 마친 셈이다. 이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이동하면 된다. 오늘 하루가 참으로 길다.

 근처의 식당으로 가기 전에 식당 옆의 특산품 가게에 들린다. 이곳은 서안의 각종 특산품을 파는 작은 상점이다. 아마 관광객들이 들려야하는 필수 코스이기도 한 모양이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버스가 제법 들어서있다. 우리도 들어가 본다. 이 매장에는 마른대추며 견과류가 많다. 견과류로 만든 껌 모양의 식품들이 많다. 대추, 키위, 석류 등으로 만든 것들이다. 그리곤 병망용 조각품들도 많고, 옥제품들도 조금 있다. 이곳을 대충 둘러보고 나온다. 우리는 그 대추, 키위, 석류로 만든 제품을 하나씩 구입한다. 그리고 바로 옆의 식당으로 옮긴다. 식당은 秦韓飯店 이다. 이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이곳 역시 식당 한쪽에서는 각종 족자와 그림을 판다. 아예 화가 한 사람이 자리 잡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일행 중의 중국인 아가씨 둘이랑 같이 앉는다. 한 테이블에 10명이 앉아야 하니 늦은 사람은 자기들 일행과 떨어져 앉을 수밖에 없다. 오늘 저녁은 제법 푸짐하다. 그러나 그림의 떡이다.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주 제한적이다 보니 그렇다. 일단 밥과 탕 종류가 나온다. 닭고기도 있고 돼지고기도 있다. 또 양파돼지고기볶음, 호박볶음, 청경채볶음 등의 요리가 나온다. 밥을 위주로 해서 먹을 만큼 먹어둔다. 저녁이니 이 시간 지나면 달리 먹을 것이 없다.

 

 

 

 

 

 

 

 

 

 

 

 

 

저녁을 먹고 이동을 한다. 이번에는 서안을 벗어난다. 渭南으로 향한다. 내일 화산을 가야하기에 화산 가까운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약 1시간 30분가량은 가야한다고 한다. 이때쯤 형우아빠에게서 연락이 온다. 일단 우리 버스에 1자리뿐이어서 혼자라도 내일 화산등산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숙소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몰라 숙소에 도착하면 연락을 한다고 하고 일단 통화를 마친다.

 버스는 조용하다. 저녁을 먹고서 그런지 다들 자는 모양이다. 어둠이 깔린 도로를 달려나간다. 시골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에 깔린 밖 풍경은 어느 농촌풍경이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들판과 농경지가 보인다.

 나 역시 잠깐 졸았나 보다. 어느새 시가지에 들어선다. 渭南花園酒店에 도착한다. 호텔이제법 근사해 보인다. 방을 배정받고 들어선다. 그리곤 남태욱과 전화통화를 한다. 호텔 주소를 알려준다. 내일 아침 우리가 6시쯤에 출발한다고 한다. 호텔내 빈방이 있나 알아보니 없단다. 결국 태욱이는 아침 일찍 우리와 합류하기로 하고 통화를 마친다. 우리도 부지런히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난 카메라 충전을 하고 눕는다.

 피곤하다. 여행 첫 날이 아무래도 힘든 것 같다.기차에서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작한 첫 일정이어서 더 그런 모양이다. 잘 자야 또 내일 하루 일정을 버티어내지. 내일은 산을 올라야 한다.

 

 

 

 

 

3. 셋째 날


 5시에 일어난다. 아이들도 전화를 해서 깨운다. 5시 30분에 아침이 있다. 현관 로비에 남태욱이 와 있단다. 전화가 온다. 일찍 도착했는데 자는 것을 깨울까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내가 일어난 시간에 도착한 모양이다. 일찍 출발하여 늦지 않게 도착하여 화산을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빵과 숭늉 같은 죽 그리고 삶은 달걀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한다. 등산을 할 것이게 배가 좀 든든해야 한다. 아침을 먹고 모닝커피를 아쉬 간단하게 한잔하면서 차에 오른다. 자리를 잡는다고 아이들을 일찍 보냈는데도 어느새 다른 일행들이 좋은 자리는 다 잡고 앉는다. 나와 태욱이가 마지막에 올랐는데 자리가 마땅치않다. 둘이 함께 앉은 자리가 없다. 마침 우리와 일행인 한국인 아주머니가 자리를 양보해주시어 태욱이와 내가 함께 한자리에 앉고 아주머니는 중국분 옆에 앉으신다.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말을 건네고 우리자리에 앉는다.


 화산을 오르는 날인데 날이 흐려있다. 오기전 예보를 보았는데 오늘 화산의 날씨는 흐리고 조금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예보가 맞는 모양이다. 흐리면 등산하기는 좋지만 산세를 멀리 볼 수 없어 조금은 아쉬운 맘이 생길 것이다. 이를 어쩌나! 기달려 봐야지 하늘이 도와주기를 비만이라도 내려주지 않기를 ….


 약 1시간 가량을 달려 화산 입구에 도착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내린다. 가이드의 잠깐 안내를 받아 이동을 한다. 이곳 화산의 등산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등산로를 통해 처음부터 걸어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방법이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방법을 택하여 케이블카를 타기 위하여 이동한다. 우선 작은 미니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정류장까지 이동을 해야 한다. 이 버스비가 왕복 20원이다. 편도는 10원이고. 이 표를 사는데도 약 30분이 걸린다. 아이들 확인하고 표 받고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고 나서 관리원이 올라와 사람 수와 표수를 확인하고 다시 반표를 산 아이들 키까지 확인한다. 버스에 다 오르고 나서도 몇 분을 넘기고서야 차가 비로소 출발한다. 그런데 또 짜증을 나게 하는 것은 이 등산로 입구 즉 ‘華山東門’에 또 한번의 점검이 있다 .이번엔 남지 직원이 올라와 다시 사람 수를 세고 키를 확인한다. 여기서 또 잠깐 머문 다음 비로소 등산길로 오른다. 이 버스를 타고 산길을 오르는데 약 15분 정도 걸린다. 비탈길로 굽이굽이 오른다.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산세는 좋다. 바위산이다. 바위가 깍아지른 듯이 서있는데 금방이라도 내게 넘어올 듯한 형상이다. 거의 90도를 이룬 바위산들이 사방에서 나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산세에 들어와서 그런지 공기도 맑고 깨끗하다. 또 아침이라 그런지 더욱 신선한 맛을 느낀다.

 

 

 

 

 

 

 

 

 

 

 

 

 

 

 

참으로 좋다. 날이 조금 흐려있어 맑은 맛은 좀 덜하지만 그래도 등산하는데 땡볕보다는 한결 낫다. 버스가 도착한다. 바로 케이블카 타는 지점이다. 약 5분정도 걸어 올라가 매표를 하게 된다. 가이드가 표를 사고 우리는 줄지어진 뒤로 이어 선다. 그런데 이 줄이 장난이 아니다. ‘ㄹ’ 자로 만들어진 미로이다. 이 미로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금방 해소될 것 지만 정말 장난이 아니다. 한번 돌아서 방향을 바꾸어도 1m 도 전진하지 못한다. 자그마치 여기서 거의 2시간 정도를 기다린다. 케이블카를 타기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뒤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우리도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보다 더 일찍 왔는지 어느새 케이블카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케이블카는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12시간 운행된다고 한다. 6인승 케이블카인데 속도는 매우 빠르다. 한 대가 내려와 사람을 내리고 다시 오르기 시작하는데 약 23초 걸린다. 케이블카가 오르는 시간은 약 5분이다. 그러니 왕복 10분하고 내리고 타는데 약 40초면 11분에 한대가 왕복하는 셈이다.


 정말 지루하다. 돌고 돌아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걸어 올라가는 것인데, 걸어가는 등산로를 택하면 약 2km라고 하니까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이미 표를 샀으니 바꿀 수는 없다. 기다려 타야지. 사람들이 중간 중간에 새치기 하지 못하도록 관리원에 곳곳에 의자를 놓고 높이 올라가 감시를 한다. 누군가 끼어들라치면 소리를 지르고 호각을 부르면서 제지를 한다. 그러다보니 감히 새치기 하려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다른데 같으면 중간에 끼어드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여기서는 없다. 아마도 감시의 눈이 있어 그런 모양이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은 하지만 진도가 빠르지 않다. 거의 10시가 되어서 우리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창밖을 보니 아찔하다. 높은 허공에 달랑 줄에 매달려 있는 신세다. 기둥을 지날 때 흔들리는데 정말 아찔한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앉은 중국 꼬마는 아주 좋단다. 겁이 없는지 신나한다. 나는 감히 내색은 못하지만 속으로 좀 떨린다. 고공공포증이 조금 있는 터이라.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산 아래와 옆 위는 좋다. 산세가 맘에 든다. 바위산에 나무는 많지 않지만 그 절벽과 형상이 괜찮다. 정말 5분만에 케이블카는 산 중간 역에 도착한다. 케이블카 종점 있는 곳이 화산의 北峰이다. 이곳 화산은 봉우리가 5개가 있다. 각 동봉, 서봉, 남봉, 북봉 그리고 중봉.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산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바위를 깍아 만든 등산로에 안전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이 등산로 아래로는 한참 낭떠러지이다. 케이블카 종점에서 바로 윗 봉우리가 북봉이다. 가장 낮은 1614m 이다. 케이블카 종점에서부터 중복으로 이르는 등산로를 탄다. 그런데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있다. 가만있어 보니 이는 다른 냄새가 아닌 바로 오줌냄새이다. 누군가(?) 등산로에다 볼일을 본 것이다. 바닥이 바위라서 그 볼일의 물체는 마르면서 그 냄새가 주변을 진동시킨 것이다. 아주 지독하다. 아이들이 코를 잡고 지날 정도이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오줌냄새를 맡아보긴 했지만 여기처럼 지독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조금 더 오르니 화장실이 한 채 있다. 그런데 이곳 화장실도 상태는 말이 아니다. 말이 화장실이지 보고 맡기는 정말 힘들 정도이다. 차라리 다른 노지에서 볼일을 보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이 정상에서 이런 냄새와 비 위생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등산로 주변으로는 많은 휴지와 장갑 비닐들이 널려있다. 등산입구에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등산하면서 사용하라고 파는 목장갑이 이곳에서 사용하고 나서는 바로 아무 곳에나 던지고 가버린 것이다. 그 흔적이 나뭇가지 위에도 등산로 옆에도 있었다. 산은 아름답고 멋지고 좋건만,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과 멋짐과 좋은 것은 순간의 맘과 행동으로 망가트리고 있는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아직은 산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이 산을 가꾸고 지키려는 맘은 저 멀리 버리고 오는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는 산을 찾으면 다른 사람과 산을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는데, 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곳 중국사람들은 아직은 그런 의식수준이 부족한 것을 이번 산행을 통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우리는 산지도를 펼쳐보고 일정을 잡아본다. 일단 봉우리 중에 하나를 오르기로 하고 가장먼저 지도에 나오는 仓龙岭까지 가보고 나머지는 그때 결정하기로 한다. 처음 오르는 곳부터가 제법 높은 경사이다. 바위를 깍아 만든 계단을 오르는데 제법 아찔하고 힘들게 한다. 어느새 성제엄마와 아이들은 힘겨워하는 눈치이고 다른 곳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성제와 나 그리고 남태욱이는 앞장서서 열심히 올라간다. 仓龙岭에 올라 잠시 다리품을 쉰다. 이어서 성제엄마와 하영이 지민이와 다른 한국인 가족이 올라온다. 여기서 한참을 쉬고나서 우리 선두는 다시 오르기를 시작하고 성제엄마와 다른 사람들은 오르다가 힘들면 다시 내려오기로 한다. 그러다 중간쯤에서 만나하산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성제와 내가 다시 앞장서고 남태욱이 뒤를 따른다. 등줄기엔 제법 땀이 흘러 축축한 느낌이 전해온다. 날이 흐려 해가 나지 않아 그나마 땀이 덜한 것 같다. 선선함이 있는 등산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이다. 다만 오르면서 주변을 명확하게 살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물론 보이긴 하지만 산세 등이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안개 탓에 흐리게 보일 뿐이다.그래도 산세는 좋다. 커다란 바위봉우리가 솟아있고 그 주변으로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다. 우리는 두 번째 휴식지로 金鎖關 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작은 쉼터가 있다. 식사도 할 수 있도록 음식점도 있고 잠도 잘 수 있는 숙박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느끼는 중국인들의 재치라고 할까. 등산로를 이 건물 중앙을 통하여 오르게끔 만들어 놓았다. 통과하는 중에는 차를 판다든가 식사를 하도록 권유하는 등 상술을 아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제법 올 것 같아 가방에서 우의를 끄내 착용한다. 셋이서 의견을 모은다. “비가 오는데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것 같으니 그만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하니, “그래도 화산까지 왔는데 한 봉우리는 밟고 가야지” 하는 의견이 있다. 성제는 조금 힘이 드는지 그만 내려갔으며 하는 내색이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비가 내리더라도 중봉까지는 밟고 가자” 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오르기 시작한다. 화산을 왔는데 한 봉우리도 밟지 못하고 간다면 나중에 얼마나 아쉬워 하겠는가. 물 한 모금씩을 하고 다시 힘을 내어 오르기 시작한다. 가방에 몇 개 준비해온 복숭아도 한 입씩 깨물어 보고.


걱정하던 빗줄기는 다시 줄어든다. 아무래도 오늘 모든 봉우리를 밟으라는 신호인가보다. 오는 모양이다. 金鎖關 입구에는 많은 열쇠들이 묶여 있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 모양도 가지가지이다. 크기도 그렇고. 빨간 피본을 달아 열쇠를 난간 쇠줄에 매달아 놓았다. 이름도 새기고 또 자신들이 바라는 소원도 적어놓았다. 암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 산마다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그 옆에는 자물쇠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즉석에서 이름과 다른 문구를 새겨준다.


 여기서 우리는 중봉을 향하여 간다. 어느 정도 중봉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데 앞에는 깍아지른 절벽에 계단으로 만든 사다리가 보인다. 높이는 약 10m 나 될까말까. 그 옆에는 철판계단도 있다. 그 옆 바위에는 雲梯(구름사다리)라고 크게 적혀있다. 어느 유격장에서 보는 한 코스 같다. 거의 90도에 가까운 절벽이다. 높이는 높지 않지만 양쪽에 준비된 쇠사슬을 잡고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돌계단을 오르고 성제는 옆 철판사다리를 오른다. 뒤이어 남태욱이 돌계단을 오른다. 비지땀을 흘리면서. 힘들어 하면서도 쉬지 않고 또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오르는 태욱의 모습이 멋지다. 이 구름사다리를 오르고 나니 우리의 등산로는 중봉이 아닌 동봉으로 바뀐다. 구름사다리 옆길이 바로 중봉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의 첫 번째 등정목표였던 중봉을 옆으로 하고 동봉으로 향한다. 이쯤부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오르는데 막힘이 없다. 중봉은 다른 이름으로 玉女峰이라고도 하며 그 높이는 2042m 이다. 화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조금 더 올라 우리가 도착한 동봉의 정상은 바위이다. 커다란 바위가 엎어져 있는 듯한 형상이다. 그 아래는 바로 천길 낭떠러지이다. 운무 탓에 앞에 있는 봉우리가 희미하게 보인다. 크게 고함을 외쳐본다. “야호!”하고. 동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다시 약간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동봉에서 남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등성이를 타고 조금 이동한다. 산등성이는 바위인데 그 옆으로 안전난간을 설치하여 이를 잡고 이동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난간 밖은 바로 바위절벽을 타는 낭떠러지이다. 동봉에서 조금 내려오면 출입금지를 한 鷂子翻身(요자번신)이라는 바위가 있어 이어서 작은 봉우리에 정자가 하나 있었다. 下棋亭이라는 이름의 정자였다. 그러나 이 바위와 정자로 향하는 길은 출입금지 표지판이 막고 있었다. 가만 내려다보니 일반인들이 드나들기에는 조금 위험성이 있어 보였다. 우리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잠시 이 휴식터에서 콜라 한 병을 사 한 모금씩 마시고서는 다시금 갈 길을 재촉한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내리막길이다. 큰 바위에 계단을 만들어 놓고 내려가게 되어 있다. 바위가 널찍한 것이 엄청나게 큰 것이다. 그 바위 옆 낭떠러지 부근에 멋지 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낙낙장송인가? 말그대로. 암튼 그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멋지게 나올 듯하다. 반대편의 봉우리도 제법 운치가있기에.이 동봉에서 바위계단을 내려오니 바위틈새에 작은 암자 같은 것이 있다. 이름하여 迎陽洞이다. 성제와 남태욱이 쉬는 틈에 올라가보니 절 같은 작은 건물이 있고, 바위틈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문이 잠겨져 있다. 그리고 그 건물은 지금 수리중인데 숙박도 가능한 곳이었다. 이곳을 지나 우리는 약 100여미터를 내려가 다시 남봉으로 오르는 오르막 길에 들어선다. 이제 화산의 최고봉인 남봉을 눈앞에 남겨두고 있다. 약 200여미터만 오르면 바로 남봉이 있는 것이다. 조금 오르다 보니 휴게소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南天門 이라는 문이 하나 있다. 지금도 공사중이었다. 그 뒤로 長空棧道(장공잔도)가 있었고 그 위로 楊公亭이라는 정자도 있었는데 우리는 이곳을 찾지 않고 바로 남봉으로 향했다. 잠깐 휴게소에서 쉬는데 배가 조금 출출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에서 컵라면도 팔고 있었다. 우리는 남봉을 오르고 내려올 때 이곳에서 컵라면을 점심삼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곳 화산의 등산로가 일방통행식이다. 남봉에서 다시 서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올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안갔던 곳을 지나가는 것이 나을 듯싶어 먼저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오르기로 하였다. 컵라면을 하나씩 먹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빗방울은 오래가지 않는다. 라면을 다 먹고 나니 다시 사라진다. 조금 배가 불러 거북하긴 하지만 그래도 시장기를 해결하니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이제 남봉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오르다 작은 화장실건물이 있어 내가 볼일을 보려고 들어간다.

그러나 화장실 내부는 소변과 대변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형태로 되어 있다. 칸막이도 없고. 겉은 共廁이라고 멋지게 쓰여져 있는데 들어가 보면 볼일을 보고 싶은 생각이 달아날 정도이다. 그래도 일단 볼일을 보고 다시 오른다. 곧 정상에 이른다. 정상 역시 바위언덕이다. 그 최고위치에 화산 정상을 알리는 돌 푯말이 하나 서있다. 잠시 앉아 숨을 돌린다.


 

 

 

 

 

 

 

 

 

 

 

정상에는 제법 사람들로 붐빈다. 다들 이 비석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고 서둔다. 바위 바닥에는 갖가지 모양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흔적을 남기길 좋아한 모양이다. 어딜 가도 큰 바위에는 커다란 글씨들이 많이 새겨져 있으니까. 정상에 올라왔다는 보고를 한다. 남태욱이도 상해 쪽으로 전화를 한통 발사하고. 그런데 내 전화기는 감이 떨어져 통화가 되질 않는다. 잠시 태욱이 전화를 빌려 성제엄마와 통화한다. 어느새들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중간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내려가 케이블카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가 기다린다고 한다. 언제 우리가 내려갈지 모르는데, 다른 일행들은 대부분 하산 한 것 같다. 우리말고 몇 사람이 산에 남아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정상 바람을 쐬고 이제 하산 길에 접어든다. 하산 길에 바로 아래에 있는 서봉도 들렀다 가기로 한다. 어차피 내려가는 길이 서봉 쪽으로 있으니까. 내려오면서 마침 용덕형님하고 연결이 된다. 여기는 화산정상이라는 메시지를 날려본다. 서봉은 내려오는 길목이라 힘들지 않게 밟는다. 역시 서봉아래쪽은 무시무시한 낭떠러지이다. 내려다보기가 겁날 정도로. 긴 바위가 서봉꼭대기까지 이어져 있다. 서봉에는 기상관측소도 한 곳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봉을 둘러보고 이제 진짜 하산길로 접어든다.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야 한다. 벌써 주차장에서 만나는 시간에 내려가기는 틀렸다. 시간을 많이 초과한 것이 되었다. 제시간에 맞추려면 일찍 등산을 포기하고 내려갔어야 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부지런이 내려가는 수밖에. 서봉을 지나 조금 내려오니 鎭岳宮이 있다. 절이라고 한다. 이 절은 들어가 보지 않고 바로 내려온다. 이 궁 앞에 커다란 나무가 하나있는데 장군수라고 한다. 나무 앞에 ‘장군수’라는 푯말이 있다. 이 산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수령이 약 천년이 된다고 하며 그 이름은 ‘대장군수’라고 하며 다른 말로는 ‘壽星樹’라는 존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壽星’ 에 대한 의미를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부터 궁금해 했다. 입장표를 사는데 있어 군인증과 이 ‘壽星証’이 있으면 반값으로 할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 서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 친구들도 "不知道"라고만 답한다. 아무래도 나이와 관련이 있을 성 싶은데 말야. 이렇게 궁금증을 알고 올랐는데 이 장군수 앞에 다시 壽星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아주 명확하게는 아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다가온다. 그 범위가 정확치 않지만 그냥 나이가 지긋한 분에 대한 예우가 아닌가 싶다. 보다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하여 다른 분께 물어보아야겠다. 이 장군수를 통과하면서 무난한 하산 길이다. 잠깐 처음 걷는 길을 걷다가 이어서  金鎖關을 만난다. 이곳부터는 오르던 길을 내려가는 것이다. 오전에 오를 때보다는 사람들이 적다. 오히려 내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내려가는 길이라 그런지 한결 발걸음이 가볍다. 실은 다리는 무거운데 말이다. 맘이 그렇다는 것이지. 진짜 몸은 천근만근이다. 무릎도 조금 아파오는 것 같고, 성제도 힘이 든다고 이야길 한다. 뒤따라오는 태욱이도 많이 힘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어쩌랴. 걷던 길을 계속 걸어야 하거늘. 이곳을 내려오면서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한국사람 부부이다. 2살난 여자아이를 등에 업는 기구를 이용하여 데리고 가고 있었다. 오르던 중 한 길목에 서서 사과를 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청도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가 약 3시간 정도는 걸어야 정상을 두루 밟을 수 있다 하였더니 여자분께서는 조금 걱정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남자분은 까지것 하는 눈치이다. 계속 오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 “수고하세요”라는 인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내려가는 길을 재촉한다.


 仓龙岭을 통과할 때까지는 오전에 거쳤던 길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일행을 만난다. 아가씨 둘인데 계속 정상을 향하여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사 내려오는 중인데 지금 올라가면 언제나 내려올지 걱정이다. 어느새 주차장에서 만나는 시간은 이미 넘긴 상태인데. 그래도 이 두 아가씨는 싱긋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加油!’를 외쳐준다. 이곳을 지나서는 내려가는 길이 오를 때와 달리 다른쪽으로 나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를 맞이하는 곳이 달라진다. 앞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있다. 그 바위를 배경으로 군복을 입을 젊은 남자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름하여 日月崖이다. 중간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나무문으로 앞을 막아놓았다. 들어가 볼 수 없다. 아쉽다. 몇군데  ~洞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모두 다 나무문으로 막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이 일월애를 막 지나서 바로 아래 길이 막혀있다. 왜 막혔나 하고 살펴보니 사람들이 약 6m 정도 되는 언덕을 내려가야 하는데 이 언덕이 바위로 된 계단이어서 사람들이 힘겹게 내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天梯였다. 오르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을 분리해 놓았다. 이곳에는 관리원이 지키고 서있다. 혹시라도 새치기나 사고의 위험성 때문인 것 같다. 오르는 곳에서는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곳을 통과하니 바로 앞이 북봉이다. 북봉을 오르는 입구에 바로 中華石이라 이름을 가진 작은 바위상이 하나있다. 정말 바위에 새겨진 모양이 중국지도모양을 하고 있다. 신기하다. 인공으로 조각을 한 것도 아닌데 자연모습으로 생긴 것이 중국땅덩어리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중화석’이었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걱정이 앞선다. 바로 아래가 케이블카를 타는 정류장인데 그 앞으로 늘어선 줄들이 정말 한없이 길었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엉켜있다. 오르는 사람과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서로 붐벼 그런 모양이다. 저 줄 끝을 찾아 서있다고 해도 막상 케이블카를 타려면 어느 정도를 기다려야 할 지모를 일이다. 지금도 도착 시간을 넘긴 상태이다. 참으로 걱정이다. 결정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기다려 탈것인지. 아니면 걸어 내려갈 것인지.


 성제도 그냥 걸어가자고 한다. 또 태욱이도 그렇게 하자고 한다. 내려오는 등산로를 물으니 약 2km 된다고 한다. 2시간 가량을 걸어야 한단다. 조금 서둘러 걸으면 1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기다리는 시간보다는 서둘러 내려가는 것이 조금 힘들더라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걸어서 내려가기로 결정으로 하고 내려가는 길로 방향을 잡는다. 원래 우리 케이블카 티켓을 왕복용이다. 내려가는 값은 반값이 55원이다. 내려가면 환불이 되는지도 모른다. 어디가서 물어보기도 뭐하다. 정류장에 가서 물어봐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줄이 엄청나서. 그냥 내려가다가 필요한 사람 있으면 팔지 하고 편하게 맘 먹고 내려간다. 막 내려가는데 뒤에서 태욱이가 부른다. 표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장당 20원에 사겠단다. 어떤 여자이다. ‘그래 팔고 가자’하고 서서 성제 것 내 것 그리고 태욱이 것 이렇게 3장을 건네주고 60원을 받는다. 우리는 그냥 환불 못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잘되었다고 하고 서로 위안을 한다.

 

 

 

 

 

 

 

이제부터 힘든 하산 길이다. 생각보다 늦은 시간인데도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다. 내려가는 길은 智取華山路라는 등산로이다. 길이 아니라 바위이다. 바위를 깍아 계단을 만들고 옆으로 안전 난간을 만들었다. 급하다고 마구 내려갈 수가없다. 높이가 낮은 계단이고 우리어른 한발이 다 들어설 수없을 정도로 계단 폭이 좁다. 그러니 약간 옆으로 비스듬히 밟고 내려가야 한다. 그러다보니 무릎이 뒤틀린다. 그러면서 무릎을 둘러싸고 있는 근육이 조금 뻐근해 오는 것을 느낀다. 아직 내려갈 길이 멀기만 한데. 앞에서 한 사람이라도 멈칫하면 뒤 사람 모두가 서야 한다. 앞서서 내려가는 것은 혹시나 하는 위험성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냐? 성제와 나는 요리조리 앞사람을 피해가면서 추월을 감행한다. 계단의 경사도 심하다. 양쪽의 안전줄을 잡지 않고는 감히 내려가기 어려운 길이다. 오르는 사람들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들은 얼굴 빛이 조금은 두려운 표정들이다.


 경사진 곳을 한참 내려온다. 그러니 조금은 경사가 완만한 곳이다. 조금 편하게 걷는다. 나와 성제는 서둘러 걷는다. 뒤의 태욱이는 따라 오겠지하는 생각으로 접는다. 어른이니까.

 중간쯤 왔을라나. 감히 거리를 예측해 본다. 오르던 길이 아니라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다. 머리위로는 케이블카가 연실 오고 간다. 하늘이 온통 흐려 안개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케이블카도 어렴풋하게만 보인다. 산등성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곧 어둠이 올 것 같은 기후이다.


 중간쯤 오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방에 버리지 않았던 비닐우의를 꺼내 입는다. 바닥은 빗방울로 미끄럽고 우의를 입은 몸은 조금은 덥다.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나 어쩌랴. 내려 갈 길은 아직 멀기만하다. 아래 정류장에서는 성제엄마와 아이들이 기다린다.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일행들은 산 아래 주차장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와 산에서 만난 아가씨 둘이 아직 산속에 남아있는 셈이다. 오후 3시 만나는 시간을 한참 넘기면서….


 한참을 내려오고 나니 사람들이 뜸하다. 이제 늦은 시각이어서 오르는 사람들은 적다. 그래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내려가기만 하면 될 것을.

 부지런히 내려오다 보니 앞에 어렴풋하게나마 정류장이 보인다. 이제 다 온 것이다. 정류장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다. 내려가는 버스를 타려고 줄 지어있는 사람들뿐이다. 성제엄마와 아이들도 그 무리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만나서 먼저 내려가라고 한다. 성제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난 남태욱이를 기다린다. 같이 내려가야 하니까. 약 30분 정도 더 기다리니 남태욱이 힘겨운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내려오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중간에 삶을 달걀과 물을 사 먹고 내려왔단다. 하긴 허기가 질만도 하다. 6시간 정도 걸으면서 고작 컵라면 한개 먹은 것이 다다. 그러니 배가 고플 수밖에 없지. 우리도 마찬가지고. 땀에 젖은 건지? 비에 젖은 건지?


 서둘러 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어느새 시간은 4시가 넘었다. 큰일이다. 우리가 마지막 일행이라면 정말 사람들 볼 면목이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챙피하고 불안한 일인가? 먼저 내려가 있는 성제엄마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니 겁을 준다. “사람들이 표정들이 심상치 않다”고, 갑자기 긴장된다. 내려가서 다른 일행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까? 하고. 그러나 어쩐담. 이미 일은 이리 되었거늘. 뻔뻔하게 버티는 수밖에. 버스에서 내려 주차장 쪽으로 가는데 가이드 아가씨와 일행 중의 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다른 아주머니가 가이드에게 좀 따지는 듯한 인상이다. “ 왜 처음부터 넉넉하게 시간을 잡던가. 아니면 재촉을 해서 모두 시간을 지키게 하던가?” 이다. 우리는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버스 쪽으로 간다. 버스 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버스 밖으로 나와 서성거리고 있다. 일부는 버스에 앉아있기도 하고. 자랑스런 얼굴을 할 수 없다. “ 不好意事。"라는 말로 죄송함을 표현한다. 몇 사람이 ”괜찮다“고 한다.다행인 것은 우리말고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 5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면피를 한 셈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5시를 넘겼다. 산중에 있는 사람들은 연락도 되지 않는다. 연락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먼저 가자”고. 결국 해결책을 찾는다. 경위서 비슷한 것을 가이드가 만든다. 그리곤 일행 모두가 여기에 사인을 한다. 그리곤 버스는 서안을 향하여 출발한다. 5시 30분을 넘기면서. 여기서 서안시내도 약 2시간을 가야한다고 한다. 오늘 일정이 생각보다 많이 늦추어진 것이다. 산행에 대한 예측을 충분히하고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어야 하고, 또 일행들이 아쉽지만 시간을 지켰어야 했다.그렇다면 예정된 일정을 맞출 수있었을 것이다.


 버스는 조용히 출발한다. 사람들은 말이 없다. 다들 피곤한 모양이다. 힘도 들고 배도 고픈 상태이다. 그러니 버스에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할 여건이 아닌 것이다.

 버스는 조용하게 고속도로를 달린다. 창밖을 비를 맞은 들 풍경이 들어온다. 여기는 논이 있어야 할 곳인데 논은 보이지 않고 모두 밭이다. 밀밭이다. 논농사가 없는 것 같다. 첫날 기차타고 오면서 본 밖 풍경이가 같다. 논을 볼 수 없었다.


 어둠이 깔린 서안에 도착하니 시간이 제법 되었다. 7시 40분이나 되었다. 서안역 근처의 호텔(海龍大酒店)에 들어간다. 오늘 저녁은 자율식사이다. 그런데 시간이 늦어서 각자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방 배정을 받는다. 우리는 방에 짐을 놓고 저녁을 나가서 먹기로 한다. 가기 전에 ‘신라방’이라는 식당을 알아두었다. 서안에서 조선족이 하는 한국식당인데 규모도 크고 제법 이름난 곳이라고 해서 메모를 해갔다. 호텔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대략 근처를 일러준다. 그래서 정확하게 모른채 택시를 타고 나선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간 길은 잘못되었다. 결국 그 신라방은 찾지 못하고 다른 한국식당을 하나 찾았다. ‘한성불고기’ 라는 간판을 단 식당인데 중국식이었다. 말만 한식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단 들어가 본다. 자리가 없다. 조금 기다리니 한자리가 난다. 사장님을 찾아 이것저것 물어본다. 한국식이긴 하지만 중국사람들 입맛에 맞춘 현지화 된 한국식당이었다. 파전, 김치찌개, 된장찌개, 냉면, 불고기 등을 주문하여 식사를 한다. 딱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다. 아쉬운대로. 여기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태욱이와는 헤어진다. 내일다시 호텔에서 만나기로하고. 우리도 호텔로 돌아가 간단하게 정리를 하고 서안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한다. 힘든 하루였다. 본 것은 없는데 몸은 제법 힘든 하루였다.

 

 

 

3. 넷째 날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밖은 흐려있다. 비라도 내릴 듯한 날이다. 이곳의 일기예보가 맞는 것 같다. 비가 오면 정말 귀찮고 성가신 일인데, 보는 것도 좋지만 비가 오면 불편하다.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래본다. 오늘 아침은 여유가 있다. 일찍부터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전 11시에 체크아웃하고 나선다. 때문에 아침에 모처럼 여유를 가져본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으로 나선다. 오늘의 아침은 메뉴가 풍성하다. 밥도 있고  샐러드도 있고 중식과 한식 양식이 고루 갖추어진 아침상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먹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많다는 것이 다행 아닌가?


 아침을 먹고 나니 9시가 된다. 내 생각 같아서는 조금 서둘러 다른 곳이라도 한군데 둘러보고 싶은데, 아이들에게서 거부반응이 나온다. 할 수 없다. 조금 힘든 몸들이라 여유있게 쉬게 한다.

 나는 로비로 나가 자전거를 한대 빌린다. 호텔 로비에 자전거가 2대 있는데 빌려준단다. 호텔 투숙객에 한하여. 1시간에 20원이란다. 난 카메라가 든 가방을 메고 대여절차를 밟는다. 사인하고 야진으로 500원을 내란다. 자전거 한대를 빌려 상태를 확인하고 끌고 나간다. 토요일 아침이라 시원하긴 하다. 그러나 곧 비라도 내릴 것 같다. 서안시내의 도로는 가로수가 풍성하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수령이 제법 된 것 같다. 양쪽에서 버티고 서있는 이나무로 인하여 인도는 항상 그늘이 지는 것 같다. 여름철에 시원한 나무아래서 산보를 하는 것이 흥미로울 것 같다. 아침에도 마찬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해방로로 나선다. 건국로 쪽으로. 정확한 지리를 모르기에 일단 가는 길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되돌아오는 길로 여겨야 한다. 거리는 한산하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 휴일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약 10여분을 달리다 우회전을 하여 다시 나간다. 생각으로는 서안 성벽을 찾아 성벽에 올라가고자 한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조금 가다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산도 없고 우의도 준비하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면 포기하고 얼른 돌아가야 할 판이다. 우회전 하여 한참을 가다보니 커다란 건물이 나오고 그 앞에 분수대가 하나있다. 제법 큰 광장이다. 가만 보니 서안인민정부 건물이다. 건물 앞 도로도 시원하게 뚫려 있다. 날이 흐려있는데도 분수는 열심히 물줄기를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다. 이곳에 정차하여 잠시 거리풍경과 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숙소에서 좀 더 멀리 달아나려고 하는데 하늘이 도와주질 않는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다. 다시 숙소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도로 옆으로는 간단한 간식거리를 파는 상점 등이 보인다. 면류 즉 빵과 快早餐用인가보다. 가는 도중 한 장면을 목격한다. 한 가방을 맨 중국인 같지 않은 사람과 현지 사람과 흥정하는 모습이다. 가방에서 작은 돌을 꺼내 서로 가격흥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玉인지, 수정인지 확실치 않다. 팔려고 하는 사람은 분명 서안사람은 아니다. 형색을 보니 조금 이국적이다. 아마도 신장쪽 사람인 것 같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도로변의 상점 주인인 것 같다. 주인은 작은 공기돌만한 것 3개를 80원을 달라고 하고 사려는 사람은 50원에 달라고 한다. 돌을 먼저 손에 쥔 사람이 주머니에서 50원을 준다. 그러나 돌 주인은 아니된다고 하면서 돌을 다시 받아간다. 결국 이 흥정을 깨지고 만다. 50원으로는 안팔겠다고 하고 사려는 사람도 50원 이상은 주고 아니살라고 하니 거래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잠깐 둘러보았지만 이곳 서안에도 서쪽지방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상해나 북경에서 보던 사람들 같다. 어디나 이 민족 사람들이 살기위해 행상을 하는 모양이다. 고향을 떠나서.


 이 길을 쭉 달려가니 서안역 앞 광장이 나온다. 빗방울이 더욱 커졌다. 서안역에서 호텔을 가까우니 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잠시 서안역 광장에 서성거리다 전화벨소리가 울려 전화를 받는다. 집사람인데 남태욱이가 아이들 데리고 호텔로 왔다고 한다. “내 곧 가마” 하고 끊는다. 호텔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반납하고 야진을 돌려받는다. 남태욱의 아이들 형우와 지은이가 왔다. 어제 만나려고 했는데 아이들은 다른 약속이 있어 오늘 잠깐 보기로 하고 호텔로 온 것이다. 성제와 형우가 오랜만에 만나게 된다. 호텔에서 아침 커피를 한잔하고 체크아웃 준비를 한다.

 짐을 챙겨 아래로 내려간다. 어느새 다른 일행들은 내려와 있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도 있고. 어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무사하게 도착한 모양이다.

 버스에 올라 오늘 일정을 시작한다. 오늘은 대안탑광장에서의 분수쇼를 보고 이어서 대안탑을 둘러보는 것이 일정의 다이다. 점심 먹고 기차시간 기다리면 되는 것 같다. 조금 더 일찍 서둘러 다른 곳 한 두 군데 더 보았으면 싶은데, 이것은 내 생각인 뿐인가 보다. 시간을 안배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길에서 버린 시간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대안탑으로 가는 길목도 제법 막힌다. 코 앞에서 많이 기다리게 된다. 가면서 서안대학 정문을 잠깐 보고 같다. 대학구경도 좀 했으면 좋으련만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대안탑 광장쪽으로 움직인다. 가는 길목에 포장마차 식으로 매대를 설치하여 갖가지 전통공예품들을 팔고 있다. 이곳의 가로등도 특이하다. 시구나 한시 등을 적은 사각형 기둥모양의 가로등이다. 특색이 있다.

 대안탑 앞의 광장에 왜 사람들이 많이 모였나 했더니, 12시부터 분수쇼가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2시가 넘었다. 쇼는 막 시작한 모양이다. 분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싸여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높이 솟아오르는 하얀 물줄기만 보인다. 분수광장이 4개는 펼쳐져 있다. 계단식으로 약간의 높이를 두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각기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음악과 함께 물줄기가 뻗치기도 하고 솟구치기도 한다. 그 물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우산을 쓰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잠시 물줄기가 쉰틈을 이용해 찍다가 물벼락을 맞는 사람도 있다. 암튼 재미있고 흥미있고 신나는 시간이다. 약 20분 정도 쇼가 진행된다. 다양한물줄기는 아니지만 답답함과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이 물과 함께 날려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밤에 보는 것이 더 장관이라고 한다. 형형색색의 물빛이 음악과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룬다고 한다. 밤에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어제 저녁에 왔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도 물 옆으로 바짝 다가가 사진을 찍어본다. 그러다 위의 공간으로 가다가 그만 잠시 내가 옆에서 쏟는 물총세례를 받았다. 허리 쪽이 다 젖어버렸다. 이런 낭패가. 그나마 다행이다. 다행인 것은 아침에 빗방울이보이다가 우리가 나서면서 날이 개어 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조금 후덥지근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럴 때 물줄기를 만난다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약 20여분간의 공연이 끝나자 그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없어진다. 사람들로 빽빽하던 공간이 확 트인다. 저 앞으로 대안탑과 절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 모를 일이다. 그 많던 사람들이 금방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도 그 중의 일부였지만. 우리는 다시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광장에는 정복을 한 아름다운 아가씨와 남자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군데군데 더러는 한사람씩 더러는 두 사람이 같이 서있다. 분수쇼를 보겠다고 조금 높은 난간에 올라가니 금방 다가와서는 내려오라고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보다. 더러는 안내도 하고. 키도 크고 늘씬한 선남선녀들이다. 이 분수쇼는 무료이다.


 이번엔 대안탑을 보기 위하여 이 대안탑이 있는 大慈恩寺로 들어간다. 역시 입장표를 사기위한 시간이 제법 길어진다. 표를 하나씩 받고 들어간다. 이 대자은사는 당 고종이 어머니 문덕황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황실 사찰이란다. 국가에서 주도한 사찰이니만큼 건립당시에는 23만평방미터의 부지위에 세워진 엄청난 규모였다고 하나 당 말기의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단다. 한동안 대안탑만 남아있었다. 2005년 현재 급속도로 복원작업을 진행중인데, 너무 기교에 치우친 건축으로 인해 경박하다는 느낌마저 든다고 한다. 혹자는. 대안탑은 4각 7층으로 67m 의 높이를 자랑하며, 대당서역기의 주인공인 현장법사가 가져온 불교 경전의 보관과 번역을 위해 세운 전탑이다. 652년 건립되었을 때는 인도식 불탑으로 각 층마다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전란의 와중에서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에서는 인도풍 불탑의 양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대안탑을 오르는데 20원의 별도의 요금을 내고 입장표를 사야한다.

 

 

 

 

 

 

 

 

이 대안탑 위에는 현장법사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기념관에는 현장법사와 관련된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불경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대자은사는 넓었다. 들어가면 바로 양쪽에 작은 종루가 하나씩 있다. 이를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앞에는 역시 향을 피우는 거대한 향로가 하나 놓여있다. 이곳에서는 한 무더기씩의 향들이 그 내음을 연이어 내고 있었다. 향냄새가 진동을 한다. 향불을 피우고 무언가 소원 내지는 기원을 드리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중국 절의 어딜가나 같은 모습들이다. 바로 옆에는 그 향을 피우는 작은 매점이 하나 있다. 대웅전 앞에서 또 무릎을 꿇고 절을 드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대웅전 안은 거대한 불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을 둘러서 다시 걸어 나간다. 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정원 같은 생각이 든다. 뒤로 돌아가니 그 대안탑이 자리 잡고 있다. 대안탑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장표를 사야한다. 우리는 올라가지 않기로 하고 그냥 겉모습만 둘러본다. 조금은 황량하다는 생각이 든다. 탑 내부는 어쩐지 모르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눈에 정겹게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너무 커서 그런가. 아니면 벽돌로 쌓은 탑이라 그런가. 우리네 탑은 아기자기한 멋도 있는데 이 대안탑은 그런 멋을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탑을 배경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고 탑 혼자만의 사진을 찍어보기도 한다. 이탑을 돌아가니 다른 건물이 있다. 이 건물들에는 기념품 판매대도 있다. 현장법사 기념관이다. 다양한 현장법사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현장법사의 서역기행 루트도 나와 있기도 하다. 우리는 가이드와 떨어져 달리 움직였기에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전시실에 쓰여 있는 설명으로만 대략 짐작하고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내 여행의 단점이 사전조사를 준비해가지고 가도 현장에서 만나는 실물과의 차이로 인하여 조금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가지고 가지만 현지에서는 아주 간단한 설명서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한자이기에 해독에 문제도 좀 생기기도 하고. 대략의 뜻은 알지만 정확하고 자세한 것을 아는 데는 한계에 다다른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다른 쪽으로 걸어 나온다. 이번에는 몇 개의 비석을 만난다. 많지는 않지만 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음료수를 한 병씩 샀는데 그 뚜껑에 행사를 하는 표시가 있었는데 성제 것에서 당첨이 되었다. 콜라를 한 캔 더 준다는 것이다. 나오면서 매점에 이를 제시했더니 캔 콜라 한 병을 준다.

 막 나오는데 성제가 이창규아저씨를 봤다고 한다. 다른 전시실로 들어갔다고 해서 내가 뛰어 가보니 없다.아마도 성제가 다른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다. 막 나오려던 참에 화장실을 들렀다. 그런데 이화장실을 알리는 안내판이름이 특이하다. 淨心閣

이란다. 우리의 해미의 개심사에 가면 解憂所라고 하는 화장실을 다르게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도 이렇게 아주 운치 있게 이름을 만들었나보다.


 대자은사를 나오니 정문 앞에 큰 광장이 있고 그 광장 한가운데 현장법사 동상이 하나 있다. 이곳을 잠깐 둘러보고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이로써 서안의 공식 일정을 마친다. 이제 남은 일은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다. 서안에서 마지막으로 먹을 식사인 것이다. 중국식이기에 큰 기대는 없다. 그래도 먹는 일이 작지 않은 것이거늘, 부족한대로 아쉬운대로 배를 채워야 다른 일을 진행할것이다. 이번에 가는 식당은 新苑酒店이다. 이 식당 역시 점심때인지라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새 오후 2시 50분 세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서안에서 머무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였으면, 성곽이라도 한군데 더 갈 수 있었는데 가이드도 점심먹고 다른 일정을 잡지 않은 것 같다. 식사후 잠시 상점을 찾는다. 이번에 찾는 상점은 聚元祥購物이다. 주로 옥제품이 주상품이고 곁가지로 병마용제품 기타 다른 상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주전자와 잔이 하나로 되어있는 상품인데 특이하다. 우리의 소설 상도에서 나오는 誡盈杯같다. 주전자는 바닥으로 물을 넣을 수 있다. 그러면 바닥으로 새지 않는다. 특이한 구조이다. 그리고 잔 역시 약 반정도만 차면 잔속에 물이 남는데 그 반을 넘으면 잔속의 물이 슬그머니 새버린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 한 세트가 180원이란다. 크기에 따라 값이 조금 차이가 난다. 그 주전자는 倒裝壺라고 하고 잔은 公道杯라고 한다. 우리는 어느 상점을 가도 기념품을 잘 사지 않는다. 그냥 둘러보고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 값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관광객으로 가면 괜히 비싼값으로 사는 것 같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지 않는다. 몇군데 다녀온 곳이 있지만 그 지역을 다녀와서도 기념할 물건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러나 이번엔 그 주전자가 맘에 들어 하나를 산다. 값을 흥정을 하는데 잘 깍아주지 않는다. 두 개를 사도 세 개를 사도 할인을 하여주지 않는다. 중국인들에게도 그런 것 같다. 겨우 20% 할인해준다고 한다. 한참을 망설이고 재다가 결국 한세트 산다. 20% 할인된 가격에.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병마용 모형을 하나씩 사려고 한다. 그런데 그 작은 모형을 세 개에 10위앤을 달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우리 일행인 아주머니가 4개에 10위앤에 샀다. 그래서 우리보고 살짝 “4개에 10원”이라고 귀뜸을 해주신다. 덕분에 우리도 세 세트를 각 10원에 샀다. 쇼핑점에서도 가능하면 앞서서 살 것이 아니라 따라다니면서 흥정하는 모습들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다시 흥정을 하면서 사는 것이 요령인 것 같다. 처음에 무턱대로 사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더 싼값에 사는 모습을 보면 괜히 열을 받는다. 그러니 너무 서둘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디서나.

 이곳을 나와 우리는 다시 시내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아직 기차시간은 조금 남아있다. 그런데 아직 기차표를 받지 못하였다. 기차표를 받는 곳이 시내 쪽 어디인모양이다. 가이드가 그 사무실로 가서 기차표를 받아 나누어주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일행 중에 의견충돌이 있다. 가이드와 어제 화산에서 늦게 온 사람과의 언쟁이다. 버스비를 받네 못받네 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다. 가이드 쪽에서는 안된다고 하고 그 사람은 받아야겠다고 하면서 북경 여행점에 문의를 하고 난리다. 결국 가이드가 승리를 한다. 교통비를 받지 못하고 끝내는것 같다.

 

 

 

 

 

 

 

 

다시 버스에 올라 서안역으로 향한다. 서안역으로 향하면서 각 가정별로 입장료금 할인액에 대한 확인을 한다. 그러면서 가이드가 그 내역을 적을 종이를 한 장씩 준다. 사인을 한 다음에. 이 용지를 북경에 도착해서 각 여행사에 제출하면 그 금액만큼 되돌려준다고 한다. 우리는 학생입장요금 할인액이 245원이다.

 시간이 오후 5시가 되어서 서안역 근처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기차표를 받는다. 상, 중, 하칸을 골고루 분배한다고 다시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내가 표를 받아 내리면서 바로 역으로 걷는다. 어떤분은 거기서도 작은 인력거를 이용하여 짐을 운반한다. 인도 옆으로 많은 리어커들이 대기하고 있다. 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짐을 실어다 주는 것이다.

 표받고 급하게 온다고 가이드와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 그러면서 가이드에게 맡긴 아이들 학생증을 받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나중에 우편물로 보내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기차를 타고 자리를 잡고 가이드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전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문자로 주소를 알려주고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인사를 마친다.


 서안역 대합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여기도 정말 사람이 많다. 이제 연휴를 대강들 마치고 도회지로 나가는 사람들인가보다. 여행객들도 많고 짐보따리를 가득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우리는 저녁을 먹지 못하였기에 역 내 슈퍼에서 과일과 간식거리를 조금 준비하여 기차를 탄다. 기차표를 보니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가 받은 기차표는 10호칸과 11호칸이다. 9,10이 한칸이고 11,12가 한칸인데 우리는 벽을 두고 있게 된셈이다. 그래서 옆에 오는 사람과 표를 교환한다. 나 혼자만 10호상칸을 잡고 나머지는 11호에 자리를 잡는다. 이제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단 내자리가 확보되었으니 잘 쉬면서 여행을 마무리 하면 되는 것이다. 남은 두 개의 컵라면으로 아이들에게 저녁삼아 먹게한다. 그리고 바나나와 다른 간식거리로 저녁을 해결한다.

 서안에서의 시간들이 점점 멀어져간다. 기차가 속력을 내면서부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다. 글쎄 다시 한번 올 기회가 있으려나?

 

 Ⅲ. 여행 후

 6일 아침 6시 22분에 북경서역에 정확하게 도착한다. 새벽이다. 그런대도 역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빠져나가는 통로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먼저나가려고 용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뒤로 끌고 가는 가방 탓에 쉽게 먼저 나가지 못한다. 움직여야 더 불편할 뿐이다. 가만 기다리면 될 것을.

 우리는 택시를 탈까하고 일단 역 밖으로 나온다. 택시 타는 승강장은 2층이다. 조금 벗어나니 택시도 있고 일반 봉고차를 이용할 사람들을 찾는 기사들이 있다. 봉고차 기사에게흥정을 시도해본다.  180원 달라고 한다. 왕징까지 150원에 하자고 하니 안된다고 한다. 우리 5명하고 다른 가족 3명이 있어 모두 8명이다. 160원에 하잔다. 좋다고 하고 육교를 건너 봉고차가 주차되어 있는 길목으로 간다. 차를 타고 왕징을 향한다. 이른 아침이라 차도 막히지 않는다. 토요일이라 더욱 그런가. 생각보다 빠르게 집에 도착한다.

 우선 아이들을 씻게 하고 가방을 대충 정리한다. 그리곤 아침밥을 먹는다. 빠르게 간단하게 준비하여 오랜만에 맛난 아침을 먹는 셈이다. 이렇게 김치찌개가 꿀맛일수가. 아이들도 잘 먹는다. 동안 먹어도 부족한 식사였으니까.

 노동절 연휴를 서안행을 하고 나니 금방 지나간다. 이제 내일 하루 쉬면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휴일을 잘 쉬었으니 일도 다시 열심히 해야겠지.

지민이가 북경에 온뒤로 처음 가는 여행이었다. 성제나 하영이는 이전에 한 두곳 다녀온 경험이 있으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지민이의 경우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녀석이 워낙 말이 없어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중국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기억해 주었으면 싶다. 언젠가 그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테니까. 나나 아이들에게도 병마용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커다란 수확이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계적으로 그 현실을 불가사의로 여기고 있는 유적지이다보니 한번은 봐야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더욱 더. 서안의 다른 부분들을 더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다. 서안시내의 모습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여야 했는데 시간과 일정이 충분치 않았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오늘의 이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언제가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서안이여 기다려라. 내가 가마.


<부록 1> 입장요금

가. 화청지

입장요금 40원, 학생(학생증 소지자), 군인 및 반표 20원

나. 병마용박물관

입장요금 90원, 학생(학생증 소지자 어른과 동행입장시 무료), 군인 반표 45원

다. 화산

케이블카 정류장까지 미니버스 왕복 20원(편도10원), 화산입장료 100원(학생, 140cm 이하 반표), 케이블카 왕복 110원(편도 55원)

라. 대자은사

문표 25원(대안탑 별도 20원),학생 15원

 

<부록 2>

서안 안내

 서안은 면적 9,983㎢, 인구 226만 명(1998)으로 중국 산시성의 성도이며, 행정구역은 8개의 구와 5개의 현으로 나뉜다. 관중분지(關中盆地)의 중앙부, 북쪽으로 웨이허강(渭河)이 동류하고 남쪽에 중난산(終南山)이 솟아 있는 곳에 위치한다. 서안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鎬京)에서 비롯되며, 그뒤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단속적이었으나 국도(國都)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그 동안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1943년에 시(市)가 설치되었다.

 가장 번영했던 당대(唐代)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의 규모에 인구 10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 현재의 시역(市域)은 명(明)나라 때 구축한 주위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와 교외로 되어 있으며, 명·청대에 서안부(西安府)를 설치한 바 있으나 중화민국 때에 그것을 폐지하고 산시성에 직속시켰다. 구시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고도(古都)의 면모를 간직하는 한편 관공서와 상점 등이 밀집해 있다.


 연평균기온 13.3℃, 1월 평균기온 -1.3℃, 7월 평균기온 26.7℃, 연평균강수량 604mm이다. 성 밖의 동교(東郊)·서교(西郊)에는 신흥공업지구가 형성되어 대규모 화력발전소가 건설되고 면방직·기계·항공발동기·비행기제조·전자공업 등이 활발하다. 특히 면방직공업은 규모가 큰 여러 공장이 가동되어 생산량이 많은데, 그 원면은 질·양이 다같이 뛰어난 관중분지산(産)의 목화로 충당된다.


★ 钟楼(종루)

 钟楼位于西安市中心,城内东西南北四条大街的交汇处,建在方型基座之上,为砖木结构,重楼三层檐,四角攒顶的形式,总高36米,基座高8.6米,每边长35.5米,面积约1377.4平方米,内有楼梯可盘旋而上。在檐上覆盖有深绿色琉璃瓦,楼内贴金彩绘,画栋雕梁,顶部有鎏金宝顶,金碧辉煌。以它为中心辐射出东、南、西、北四条大街并分别与明城墙东、南、西、北四门相接,这就是西安人引以为自豪的钟楼。它是我国古代遗留下来许多钟楼中形制最大、保存最完整的一座。西安是明代西北军政重镇,它的钟楼无论从建筑规模、历史价值或艺术价值各方面衡量,都居全国同类建筑之冠。

 特点:钟楼始建于明太祖朱元璋洪武十七年(公元1384年),因楼上悬挂铁钟一口而得名。初建时,地址在今广济街口,与鼓楼对峙。明神宗万历十年(公元1582年)由巡安御使龚贤主持,将钟楼整体迁移于今址。钟楼呈典型明代建筑艺术风格,重檐斗拱,攒顶高耸,屋檐微翘,华丽庄严。这座正方形砖木结构建筑物,自地面至楼顶高36米,由基座、楼身和楼顶三部分组成。基座每边长35.5米,高8.6米,全部用青砖砌成,四面正中各有高竞均为6米的十字交叉券洞,过去是东南西北四条大街交会的通道,人流车辆从券洞通过,随着城市建设的发展,券洞无法适应交通流量需要,现在券洞早已封闭;在钟楼周围另辟圆形环道。钟楼的设计构造体现了我国古代人民的高超智慧。外部的重檐三滴水歇山顶式不只是增加建筑形制的美观,而且缓和了雨水顺檐下落时对建筑的冲击力.描梁之端的斗拱巧妙地运用了力学原理形成均匀负荷。四角攒尖的楼顶按对角线构筑四条垂脊,从檐角到楼顶逐渐收分,使得金顶稳重庄严。楼上琉璃瓦的板瓦之间扣以筒瓦,以铜质瓦河固定,更使建筑稳固结实,成为浑然一体的建筑艺术珍品。整体拆迁:钟楼的二楼西墙上,嵌有一方《钟楼碑》,记述了这座巨大建筑经历过一次令人难以置信的整体拆迁。钟楼初建于明洪武十七年(1384年),当时它的位置在西大街以北广济街口的迎样观,距目前所在位置约1000米。这一位置正在唐长安城的中轴线上,也是五代、宋、元时长安城的中心。虽然明代初年扩建了长安城,但那时人们大概圃于习惯心理,初建 钟楼时没有与扩建后的城市格局相适应。过了两个世纪后,随着城市中心东移,城门改建,新的东、南、西、北四条大街形成,位于迎祥观的钟楼便日益显得偏离城市中心。到了明神宗万历十年(1582年),在陕西巡抚龚俄贤的主持下,钟楼来了个整体拆迁。据碑文记载,移建工程除重新建造基座外,本质结构的楼体全是原样原件,所以耗资不多,工程迅速。完成这样一座庞大建筑的拆 迁装建,即使在现代也不是轻而易举的。它既需要高超的建筑安装技术,又需要严密精细的工程组织,这项完成于16世纪的特殊工程,实在是我国建筑史上值得自豪的创举。

 巨钟轶闻 :钟楼的西北角上陈列着一口明代铁钟,重5吨,钟边铸有八卦图案,建造于明成化年间(1465~1487年)。但它比钟楼早先悬挂的铜钟却小得多了。钟楼原先悬挂的巨钟是唐代景云年间铸造的“景云钟”(现藏于碑林博物馆)。据说,迁到今址之后,虽然楼的式样大小并没有改变,景云钟却怎么也敲不响了。无可奈何,只有另换。

 浮雕故事:钟楼的门扇槁窗雕楼精美繁复,表现出明清盛行的装饰艺术。仔细欣赏门扇上一幅幅浮雕,它们会告诉你古代许多饶有趣味的典故轶闻。第一层北门,自西向东依次为;虬髯客;木兰从军;文姬归汉;吹箫引凤;红叶题诗;班昭读书;博浪沙椎秦;唱筹量沙。第一层东门,自北向南依次为:长生殿盟誓;连环计;黠鼠 夜扰;挂角读书;卞庄刺虎;嫦娥奔月;东坡题壁;李白邀月。第一层南门,自东向西依次为;文王访贤;伯牙鼓琴;画龙 点睛;斩蛇起兵;伯乐相马;柳毅传书;舜耕历山;把桥授书。第一层西门,自南向北依次为;枕戈待旦;李陵兵困;由基射猿;龙友颂鸡;黄耳传书;孙期放豚;陶侃运砖。第二层楼南门,自东向西共八幅“八仙过海,各显神通”的画面,依次为钟离权、张果老、吕洞宾、曹国舅、铁拐李、蓝采和、韩湘子和何仙姑。第二层北门,自西向东共八幅勺“仙醉酒”画面,依次仍为钟离权、张果老、吕洞宾、曹国舅、铁拐李、蓝采和、韩湘子和何仙姑。第二层东门,自北向南依次为;单刀赴会;击鼓金山;岳母刺字;孟母择邻;子路负米;画获教子;温娇绝裙;闻鸡起舞。第二层西门;自南向北依次是:写经换鹅;茂叔爱莲;灞桥折柳 ;踏雪寻梅;陶潜爱菊;寻隐不遇;孤山放鹤。


★鼓 楼(고루)

 鼓楼,东与钟楼隔广场相望。现为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鼓楼建于明洪武十三年(1380年),比钟楼大四岁,迄今已有611年历史,为重檐三滴水与歇山顶的木结构,高大雄伟。清代曾两次修耷。楼上原有巨鼓一面,傍晚击鼓报时,故名鼓楼。昔日楼檐下悬挂有巨匾,南为“文武盛地”,北为“声闻于天”。鼓楼斗拱彩绘,外观庄重绚丽,与钟楼为姐妹楼,亦有 “晨钟暮鼓”之说。

 鼓楼系古典建筑,基座为长方形,用青砖砌成,楼高33米,面积1924平方米。楼基正中辟有南北券门洞,连通北院门和西大街。建筑结构采用重檐三滴水式与歇山琉璃瓦顶形式,与钟楼相辉映,楼内有梯可上,登至二楼,凭栏可眺望终南山与全城景观。


서안에서 멀고 먼 실크로드로 떠나는 출발지로서, 루(樓)위에 오르면 멀리 서역이 보이는 듯하다. 시 중심부 대로에 종루가 있고, 그 근처에 고루가 있다. 원래 종루에는 종이, 고루에는 북이 있었는데 현재 종루는 무게 5,000근의 거대한 철제 시계가 하나 걸려 있으며 고루에 있던 북은 남아있지 않다. 예전에는 낮에는 종을, 밤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小雁塔(소안탑)

 建于唐景龙年间(707—709),是唐代著名佛教寺院献福寺的佛塔,位于大荐福寺内。荐福寺的原址在唐长安城的开化访,创建于公元684年,原名献福寺,建于唐睿宗文明元年,是唐高宗生日,宗室皇族为他“献福”而建造的。唐代高僧义净曾居此译经。她曾是唐太宗的女儿香橙公主的住宅,睿宗文明元年(公元684年)立为大献福寺,武则天天授元年(公元690年)改称大荐福寺。唐中宗再次登基后,在开化坊南面的安仁坊西北角修建了寺塔,塔园大门向北开,正好与荐福寺门隔街相望。后荐福寺搬到了塔院中,塔寺和一,也就是今天的小雁塔所在地。这座密檐式砖塔略呈梭形,原高十五层,现余十三层,高43.38米,共 15级,现存13级,其平面呈正方形,底边各长11.56米,每层迭涩出檐,南北两面各开一门。底层南北各有券门,上部各层南北有券窗。底层南北券门的青石门相。门框上布满精美的唐代线刻,尤其门媚上的天人供养图像,艺术价值很高。塔身从下面而上,每一层都依次收缩,愈上则愈细,整体轮廓呈自然圆和的卷刹曲线,显得格外英姿飒爽。塔底南门入口的石质弓形门上,刻有阴文蔓草花纹和天人供养的图像,与大雁塔的门楣相同。但因年久及保护不善,已残缺不全,模糊不清。

 小雁塔建于唐景龙年间,塔形似大雁塔,因塔身小,故称“小雁塔”,比大雁塔年小55岁,小雁塔在一千二百多年漫长的岁月里,经受了风雨的侵蚀和70余次地震考验,历史上曾经历过三次离合,这种现象引起了人们的注意, 迄今未得到十分令人满意的解释。明成化二十三年(1487)陕西地震,据民间传说,塔身裂缝从上到下宽约尺余,第一次自裂自合,可是过了几十年,又一次大地震,竟使原来的裂口“神合”了。在小雁塔门楣刻石上有记叙:“明成化末,长安地震,塔自顶至足,中裂尺许,明澈如窗牖,行人往往见之。正德末,地再震,塔一夕如故,若有神比合之者。”其后又有两次这样的现象发生。一个砖塔经过6次地震不倒塌,反而自然复合起来,确是一件奇事。

相关典故:

 雁塔晨钟:荐福寺的钟楼悬有一口金明昌三年(1192年)铸造的大铁钟,高3.5米,口径2.5米,周长7.6米,重10吨。它原是武功崇教禅院故物,后来流失沉落河底。清康熙年间,有农妇在河畔捣衣,忽然听见石中发出金属声响。人们掘开石头,重新发现这口巨钟,于是移入西安荐福寺。清代每天清晨敲钟,声闻数十里,钟声嘹亮,塔影秀丽,“雁塔晨钟”遂成 “关中八景”之一。清代诗人朱集义题诗写道:“噌弘初破晓来霜,落月迟迟满大荒。枕上一声残梦醒,千秋胜迹总苍茫。”这就是著名的长安八景之一“雁塔晨钟”的生动写照。

 义净法师: 如同慈恩寺与玄奘关系密切一样,荐福寺则使人想起唐代另 一位高僧义净。义净也曾游学印度多年,不过,他由海路自广州离开中国。公元671年,义净只身搭乘波斯商船出国,先到印尼 苏门答腊,后转抵印度,也在佛学中心那烂陀寺留学11年,又游 学印度各地,经历30余国,于武则天证圣元年(695年)回到祖 国,带回梵文经典400余部。义净回到长安后,在荐福寺主持怫经译场,共译经56部,230卷,是玄奘之后在佛经翻译上取得成 就最大者。他还将途经海道诸国和所闻赴印度求法高僧的情况,撰 成《南海寄归内法传》和《大唐西域求法高僧传》,是研究中印文化交流史的珍贵资料。


大雁塔(대안탑)

 慈恩寺是唐贞观二十二年(648)太子李治为了追 念他的母亲文德皇后而建。大慈恩寺是唐长安城内最著名、最宏丽的佛寺,它是唐代皇室敕令修建的。

 唐三藏--玄奘,曾在这里主持寺务,领管佛经译场,创立佛教宗派。寺内的大雁塔又是他亲自督造的。所以大慈恩寺在中国佛教史上具有十分突出的地位,一直受到国内外的重视。寺门内,钟、鼓楼东西对峙。钟、鼓是寺院的号令,俗有"晨钟暮鼓"之说。东侧钟楼内悬吊明代铁钟一口,重三万斤,高三米多。唐代学子,考中进士后到慈恩塔下题名,谓之"雁塔题名",后沿袭成习。唐代画家吴道子、王维等曾为慈恩寺作过不少壁画,惜早已湮没。但在大雁塔下四门洞的石门楣、门框上,却保留着精美的唐代线刻画。西石门楣上的线刻殿堂图尤为珍贵。

 今日的慈思寺是明代以来的规模,而寺内的殿堂则是清代末年的建筑。现在大雁塔经过修复,古塔雄伟,寺殿香火缭绕,庭院鲜花争艳,是一处特别吸引国内外游人的游览胜地.


 서안시 남쪽 4㎞ 지점의 자은사(慈恩寺) 경내에 있으며 서안시의 상징적인 탑 중의 하나이다. 서유기로 잘 알려진 당나라의 소승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의 번역과 그것을 소장하기 위해 정부에 건의하여 세운 탑으로 처음에는 5층탑이었으나 뒤에 10층으로 증축되었고 병화로 일부 허물어졌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현재는 높이 64m, 둘레 25m의 7층탑으로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뛰어나다.


秦始皇陵(진시황릉)

 秦始皇陵位于西安以东30公里的骊山北麓,南依骊山,层恋叠嶂,山林葱郁;北临渭水,逶迤曲转,银蛇横卧。高大的封冢在巍巍峰峦环抱之中与骊山浑然一体,景色优美,环境独秀。

 秦始皇是中国历史上一位杰出的政治家,姓蠃名政,秦庄襄王之子,公元前259年出生于赵国京都邯郸,公元前246年13岁即立为秦王,22岁加冕亲政。自公元前236年至公元前221年的15年中,秦国先后灭掉了韩、赵、魏、楚、燕、齐六个诸侯国,彻底结束了战国群雄割据的历史,在血与火中,建立了中国历史上第一个统一的、多民族、中央集权制的封建王朝--秦王朝。"秦皇扫六合,虎势何雄哉;挥剑决浮云,诸侯尽西来。"秦始皇--这位叱咤风云的旷世君主,不仅为后人留下了千秋伟业,还留有这座神秘莫测的皇家陵园。

 古埃及金字塔是世界上最大的地上王陵,中国秦始皇陵是世界上最大的地下皇陵。

 秦始皇陵于秦始皇即位起开工修建,前后历时38年之久,比著名的埃及胡夫金字塔的修造时间还长8年,动用修陵人数最多时近于80万,几乎相当于修建胡夫金字塔人数的8倍。

 陵园仿照秦国都城咸阳建造,大体呈回字形,陵墓周围筑有内外两重城垣,陵园内城垣周长3870米,外城垣周长6210米,陵区内目前探明的大型地面建筑为寝殿、便殿、园寺吏舍等遗址。秦始皇陵的封土夯筑而成,形成了三级阶梯,状呈覆斗,底部近似方型,底面积约25万平方米,高115米,但由于经历二千多年的风雨侵蚀和人为破坏,现封土底面积约为12万平方米,高度为87米,整座陵区总面积为56.25平方公里。秦王朝是中国历史上辉煌的一页,秦始皇陵更集中了秦代文明的最高成就。秦始皇把他生前的荣华富贵全部带入地下。

 秦始皇陵地下宫殿是陵墓建筑的核心部分,位于封土堆之下。《史记》记载:"穿三泉,下铜而致椁,宫观百官,奇器异怪徙藏满之。以水银为百川江河大海,机相灌输。上具天文,下具地理,以人鱼膏为烛,度不灭者久之。"考古发现地宫面积约18万平方米,中心点的深度约30米。陵园以封土堆为中心,四周陪葬分布众多,内涵丰富、规模空前,除闻名遐迩的兵马俑陪葬坑、铜车马坑之外 ,又新发现了大型石质铠甲坑、百戏俑坑、文官俑坑以及陪葬墓等600余处,数十年来秦陵考古工作中出土的文物多达10万余件。在陵园里设立有多处文物展台,展示了秦陵近二十年来出土的部分文物;布置有水道展区,重现当年陵园内科学周密的排水设施;相信随着考古工作的进展,肯定还会有更大的意想不到的发现。

 在凝重的绿色和高大的墓冢之间,为了让游客身临其境的感受王者的尊荣、王者的威仪,秦始皇陵上演有大型的"重现的仪仗队--秦始皇守陵部队换岗仪式"表演和集"声、光、电"于一体的秦始皇陵陵区、陵园、地宫沙盘模型展示,再现二千多年前神秘陵园的壮观场景,展示数十年来的考古成果,生动直观的揭示秦陵奥秘,展示其丰富内涵。

 秦始皇陵是中国历史上第一座帝王陵园,是我国劳动人民勤奋和聪明才智的结晶,是一座历史文化宝库,在所有封建帝王陵墓中以规模宏大、埋葬丰富而著称于世。1961年被国务院公布为第一批重点文物保护单位,1987年被联合国教科文组织列入世界文化遗产保护目录,成为全人类共同的财富。2002年秦始皇陵荣膺国家AAAA级旅游景区。


华清池(화청지)

 华清池,南依骊山,北临渭水,西距古都西安30公里,优越的地理位置,旖旎的山水风光使其倍受历代帝王垂青。如今,华清池已成为闻名中外的游览沐浴胜地。

 “不尽温柔汤泉水,千古风流华清宫”。这里自周幽王修建骊宫至唐代几经营建,先后有“骊山汤”、“离宫”、“温泉宫”之称。唐天宝六载(公元747年),唐玄宗李隆基诏令环山列宫殿,宫周筑罗城,赐名“华清宫”,亦名“华清池”。后安史之乱,建筑残存无几。宋、元、明、清至民国逐渐衰败。解放后,依照唐代形制几经扩建,始具现今规模。1959年,郭沫若先生游览华清池后感慨万千,挥笔写下“华清池水色青苍,此日规模越盛唐”的诗句,恰如其分地概括了华清池的风貌与发展。1982年,华清池被列入全国重点风景名胜区。同年2月,西安事变旧址五间厅被列为全国第二批重点文物保护单位。1996年,国务院公布华清宫遗址为第四批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1998年,华清池跻身百名“中国名园”之列。

 近年来,唐华清宫遗址区域内相继发掘、出土了我国现存唯一一处皇家御用汤池群落和我国最早的一所皇家艺术院校,并在其遗址上建起了唐御汤遗址博物馆、唐梨园艺术陈列馆,以翔实的文物资料展示出华清池的6000年沐浴史和3000年皇家园林史,从一个侧面再现了盛极一时的唐代遗风。

 九龙湖景区内龙桥卧波、柳石匝岸、龙吐清泉、湖光粼粼。飞霜殿、沉香殿、宜春殿、龙吟榭、龙石舫、九曲回廊等十多座古式建筑雕梁画栋、金碧辉煌、环湖而列、错落有致。石牛、石狮、石象及自然碑石点缀其间、相映成趣。游人至此,顿觉心旷神怡,难辨人间天上。

 环园乃华清池故园,荷花阁、望湖楼、飞虹桥、望河亭、飞霞阁、桐荫轩、棋亭、碑亭及"西安事变"时蒋介石下榻的五间厅等参差座落其间。历经一个世纪的风雨洗礼,环园更显古朴雅致。唐华清宫御汤遗址博物馆建于1990年,徜徉莲花汤、海棠汤、星辰汤、尚食汤等遗址之间,不禁使人遥想当年杨贵妃“春寒赐浴华清池,温泉水滑洗凝脂”的娇媚。在唐代梨园旧址小憩,可欣赏优美的仿唐乐舞和唐宫廷茶道表演。设施完备、服务上乘的温泉宾馆恭候宾客光临。

骊山温泉,千古涌流,不盈不虚,水温恒止43℃,内含多种矿物质,宜于沐浴疗疾。华清池现有各类浴池一百多间,可供数百人同时沐浴。

 亭殿楼阁尽是画,山水风物皆有情。悠久的历史,迷人的风光,有据可证的人文景观,俯拾皆是的轶闻趣事将给您的华清池之行留下美好回忆。


 여기 입장료는 30위엔(우리돈 4000원정도) 서안에서 동쪽으로 3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산 기슭에 있습니다.

 화청지 여기 온천은 당나라 때 왕제와 후궁들이 즐겨찾은 휴양지로 유명했다. 여기 가려면 서안 기차역에서 306번 공공버스나 307번 버스를 타면 된다.


 서안에서 25㎞ 정도 떨어진 여산(驪山) 산록에 있는 온천으로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중국 국가에서 보호하는 중요 문물 보호단위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西周시대에 이곳에 驪宮을 세웠으며, 秦대에는 이곳에 石宇, 당나라 현종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華淸宮”이라 고쳤다. 또한 이곳이 온천위에 지워졌으므로 “華淸池”라고도 불리웠다.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의 온천물이 가득한데 일반인에게 공개되므로 몸을 담가 볼 수도 있다. 이 화청지의 온천은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목욕 후에는 기분이 상쾌해지며, 신경통과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화청지는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된 것은 청 나라말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규모의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이다.

이곳은 또한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장학량 (張學良)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하려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곳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의 온천물이 가득한데 일반인에 게 공개되므로 몸을 담가 볼 수도 있다. 이 화청지의 온천은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목욕 후에는 기분이 상쾌해지며, 관절염과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온천물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중국 국가에서 보호하는 중요 문물 보호단위이다.


兵马俑(병마용)

 1974年3月,陕西临潼县晏寨乡西扬村村民在秦始皇陵东1.5公里处打井时,意外地发现了许多碎陶人,经考古工作者探测,这是一个长方形的秦代兵马俑坑。1976年通过钻探,在此坑的北侧20和25米处分别又发现了两处兵马俑坑。按照它们发现的时间把它们分别定名为兵马俑一、二、三号坑。三个坑的总面积为22,780平方米。

 一号坑平面呈长方形,东西长230米,宽62米,深5米,总面积14,260平方米,为坑道式土木建筑结构,东西两端各有斜坡门道5个,坑道内有10道2.5米宽的夯土隔墙,隔墙上架著粗大的横梁,再铺芦席、细泥和填土。底部以青砖墁铺。一号坑兵马俑按实战军阵排列。俑坑的东端是一个长廊,站著三排面向东的战袍武士俑,每排70件,共210件,手持弓弩,他们是一号坑军阵的前锋部队。长廊南边有一排面向南的武士俑,是右翼;北边有一排面向北的武士俑,是左翼;西头有一列面向西的武士俑,是后卫。他们手执弓弩等远射兵器,担任整个军阵的警戒任务。在10道隔墙隔开的11个过洞里排列着38路面向东的纵队,每路中间都排列有驷马战车。陶俑全部身披铠甲,手执长兵器。他们是一号坑的主力部队。一号坑共有27个探方,根据每个探方里兵马俑排列的密度推算,全部发掘后可出土兵马俑6000余件,其中以步兵居多。

 一号坑东端以北20米是二号坑,它是由4个单元内的4个不同兵种构成的一个曲尺形军阵,面积6000平方米,估计可出土陶俑1000多件,兵马和鞍马近500多匹。第一单元即俑坑东边突出的大斗子部分,是由334件弩兵俑组成的小方阵。第二单元即俑坑的南半部,包括一至八过洞,是由64乘驷马战车组成的方阵,每乘战车有军士俑三件。第三单元即俑坑的中部,包括九至十一过洞,是由19乘战车和100余件随车徒手兵俑组成的方阵。第四单元即俑坑的北半部,包括12至14过洞,是由战车6乘,鞍马和骑兵俑各124件组成的骑兵阵。四个单元有机联系构成一个大阵,又可以分开构成四个独立的小阵,能功能守,自我保护力强,反应快速。二号坑的四个单元中就有三个布有车兵,战车占到整个军阵面积的半数以上,证明在秦代车兵仍为作战的主要力量。木质战车因为年久已朽,但车辕、轮等却在泥土中留下了清晰的印迹,车上的铜质构件尚存在。

 三号坑在二号坑以西、一号坑以北25米的地方,平面呈凹字形,面积为520平方米,仅有4马1车和68个陶俑。它的东边是一条长11.2米,宽3.7米的斜坡门道,与门道相对应的为一车马房,车马房两侧各有一东西向厢房,即南厢房与北厢房。共出土陶俑64件。这些陶俑的编组排列与一、二号坑不同。一、二号坑内的陶俑都是按作战队形排列。三号坑内武士俑所持兵器也与一、二号坑内武士俑不同。后者配备的有长射程的弓弩,近距离格斗的矛、戈、钺、剑等,而三号坑内只发现了一种无刃兵器铜 殳。铜 殳在秦代是一种专门用于仪仗的兵器,在北厢房内还发现有残鹿角一件、动物朽骨一堆。可能是专供战前占卜或祷战活动的场所。通观三号坑整个布局,它可能是整个地下军阵的指挥部-军幕。

 在我国,陶俑最早出现于战国时期,但那时制作的陶俑体形较小,火候低,制作粗率。而秦兵马俑不仅形体高大,而且制作精细,造型准确,工艺水平极高。1980年12月在秦始皇陵西侧20米处,发掘出土了两乘大型彩绘铜车马,按照发现的顺序,被编为一号和二号铜车马。当时皆被埋在7米深的坑里,外面用一个木椁装着。出土时,因木椁腐朽,土层塌陷,两辆铜车马都残破严重,其中二号铜车马已碎成1,555片,经过考古工作者和各方面专家两年半细心艰苦的修复,二号铜车马于1983年10月1日正式对外展出,一号铜车马也于1988年正式展出。

 这两乘车都是四马单辕,呈前后纵向排列,前面的一号车应为古代的“高车”。二号车叫“安车”,分为前御室和后乘室。两室之间隔以车墙。赶车的人坐在前御室,主人坐在后乘室。乘室前面及左右两侧有三个车窗,后面留门,门窗都可以灵活启闭,窗上的小孔可以调节空气,从中外望。车上有椭圆形伞状车盖。此车通体施以白色为底色的彩绘,二号车配有1,500余件金银构件和饰物,显得华丽富贵。它可能是供秦始皇灵魂出游时乘坐的。一号车上配备有弓弩、箭头、盾牌,驾车者带有官帽,这说明此车是用来保护后面二号车的安全的。

 铜车马是我国时代最早,驾具最全,级别最高,制作最精的青铜器珍品,也是世界考古发现的最大青铜器。它的出土,为考证秦代冶金技术、车辆结构、工艺造型等提供了极为珍贵的实物资料。


 중국 최고의 역사 유적지라면 만리장성과 북경의 고궁 그리고 서안의 여기 병마용이다

2000년 역사의 병마용은 세곳의 갱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여기는 1호 갱으로 황제의 릉 주위를둘러싸고 영원히 주군을 보호(?)하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지금도 흙의 모습으로 놀랍게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갱내에 있는 토병과 말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줄을 지어 정열하여 있다. 특이한 것은 남쪽과 북쪽의 토병들이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남쪽의 병사는 남쪽을, 북쪽의 병사는 북쪽을 바라보며 서있다. 또한 동쪽에 있는 가로 3열의 토병들은 무사토용(武土傭)으로서 손에는 먼곳을 저지할 수 있는 궁수병기를 쥐고 있다. 그 뒤로 약 6000여명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정열하고 있는데 손에는 창과 같은 긴 병기를 들고 서있다.


 2호 병마갱의 평면은 曲자형태로 되어있다. 갱내에는 기마병, 보병, 궁병과 전차들이 혼합된 대형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크게 4등분을 하여 나눌 수 있는데 궁병들이 모여 있는 궁병용부대, 말과 전차가 있는 전차병부대, 보병, 기마병이 혼합되어 있는 부대, 기마병만 있는 부대 등 4개의 부대가 서로 독립된 단위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병마용은 약 1300여건이며 전차가 80여량과 함께 다량의 금속병기가 출토되었다.


 3호 병마갱의 평면도는 凹자형태로 되었다. 면적은 520평방미터이다. 이곳은 1호와 2호갱을 통솔하는 지휘본부로서 6개의 토기 병마용과 4마리의 말과 1대의 전차가 함께 출토되었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이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1호갱은 세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230m, 넓이는 612m로 총 면적이 12㎢이다.1호갱은 동서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될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있을거라고 보고 있다


西安碑林(서안비림)

 西安碑林位于西安三学街陕西省博物馆内,始建于北宋哲宗年间(公元1090年),距今已有900多年的历史。 碑林现有7个大型陈列室、8座游廊和8座碑亭,收藏了从汉代到清代的碑石共2300多方,现展出的碑石达1000余方,其中多数是唐人所刻。在这里,你不仅可以欣赏到篆、隶、草、行等各种书体,还有机会一睹欧阳洵、颜真卿、柳公权等书法家的亲笔刻石,以及王羲之、苏轼等名家的墨宝。


 송나라 때 개성석경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개성 석경은 114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경(655,025)을 조각한 것이다. 여기에 당대 명필 구양순과 안진경, 이양수 등의 친필 석각과 조철, 소식, 조맹부 등 명사들의 진적비 등이 집중되어 비석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 하여 비림이라 일컬어진다.


华山(화산)

 华山位于华阴县境内,为五岳中的西岳。华山之险居五岳之首,有“华山自古一条路”的说法。华山名字的来源说法很多,一般来说,同华山山峰像一朵莲是分不开的,古时候“华”与“花”通用,正如《水经注》所说:远而望之若花状”,故名。华山有东、西、南、北、中五峰。东峰是华山的奇峰之一,因峰顶有朝台可以观看日出、美景,故又名朝阳峰。北峰也叫云台峰,山势峥嵘,三面绝壁,只有一条山道通往南面山岭,电影 《智取华山》即取材于此西峰叫莲花峰, 峰顶有一块“斧劈石”,相传神话传说故事《宝莲灯》中的沉香劈山救母就发生在这里。南峰即落雁峰,是华山主峰,海拔2083米,也是华山最险峰,峰上苍松翠柏,林木葱郁,峰东有凌空飞架的长空栈道,中峰亦名玉女峰,依附于东峰西壁,是通往东、西、南三峰的咽喉。

 华山山路奇险,景色秀丽,沿山路从玉泉院到苍龙岭可以看到许多胜景,从华山脚下到青坷坪,一路上风光幽静,山谷青翠,鸟语花香,流泉垂挂,令人心旷神怡。青柯坪以东才是真正爬山的开始,这里有一巨大的回心石,站在石上往上一看是危崖峭壁、突兀凌空的“千尺幢”,胆小的人就在此停住,准备往回走了,只有不畏艰险,勇于攀登的人才有机会领略到华山险峰上更美的风光。千尺幢窄陡的石梯容纳一人上下,370多个石级,非铁索牵挽,难以攀登。过千尺幢经百尺峡就到了“老君犁沟”,这是夹于陡绝石壁之间的一条沟状道路,有570多个石级,其尽头是“猢狲愁”,顾名思义,连猴子都发愁,说明崖壁是多么陡峭了。过了猢狲愁就到了华山北峰。

沿途主要景点:

●玉泉院 位于华山北麓峪口,为华山山门。游人从这里入口进山。

●五里关 是华山第一险关,距华山峪口5里,关隘据险设障,筑石作垣,西接绝壁,东临深涧,为上山 咽喉之地。

●青柯坪 古今游人多在这里暂作休息,也是登山的起点。

●回心石石前万丈陡崖直耸云端,游人至此,上则畏险,下则不舍,往往徘徊不定,故名      “回心石”

●百尺峡 峡中有一巨石,状如鱼脊,山崖陡绝,需攀铁索登石梯山道而上。

●千尺幢 为华山第一险道,凿有台阶370多级。游人手挽铁索,拾级而上。仰望天际,一线天 开。俯视脚下,如临深渊。石级顶端有如井口,倘若把“井口”用铁盖盖住,通往华山的道路便被堵塞,所以称之为“太华咽喉”。

●苍龙岭 山势拔地而起,是北峰到其他诸峰的通道,形如苍龙,全长约1500米,开凿石阶246级,宽仅1米。岭脊坡度40°,行走其上,心惊目眩。据说,唐代文学家韩愈游华山到苍龙岭时,只见 山势高耸,两侧断崖深谷,雾起云漫。他心惊胆战,进退两难,不禁放声大哭起来。最后,

只好给家里写了一封绝书和求救信投入山下,山下的人发现后,才把他搭救了。现在此处     “韩退之投书处”六个大字,仍然镌刻在石壁上。

●仙掌崖 过苍龙岭,经五云峰南望东峰峭壁,可见黄、白色相同的花岗岩石,形如巨掌,称“华岳仙掌”,为关中著名八景之一。传说古代河神巨灵,左手托起华山,右足蹬去中条山,给黄河     劈出一条入海的河道,排放出洪水,拯救了万民,仙人掌即巨灵推山时留下的手印。掌上半     轮如月,光可鉴人,题称石月。

●北 峰 北峰也叫云台峰,山势峥嵘,三面绝壁,只有一条山道通往南面山岭,电影《智取华山》即 取材于此西峰叫莲花峰,峰顶有一块“斧劈石”,相传神话传说故事《宝莲灯》中的沉香劈

山救母就发生在这里。峰上还有猢狲愁、群仙观等。

●中 峰 中峰亦名玉女峰,依附于东峰西壁,是通往东、西、南三峰的咽喉。传说春秋时萧史善吹玉萧,箫声之优美引起了秦穆公女儿弄玉的爱慕。弄玉毅然放弃宫廷生活,与萧史同居于此。

玉女峰由此得名。峰上还有玉女祠、玉女洗头盆等。每年初夏,由于阳光、云雾的共同作用,如你在玉女峰的无量洞边,可发现自己似置身在七彩光环之中,光环随人移动,景象奇妙,人称华山佛光。

●东 峰 东峰是华山的奇峰之一,因峰顶有朝台可以观看日出、美景,故又名朝阳峰。朝阳峰位于华山之东,那里尚存甘露池、下棋亭、鹞子翻身等胜迹险景。

●南 峰 南峰即落雁峰,是华山主峰,海拔2083米,也是华山最险峰,峰上苍松翠柏,林木葱郁,峰东有凌空飞架的长空栈道,峰顶有老君洞。相传老聘曾在此隐居。经有太上泉,池水碧绿,冬夏不涸,俗称仰天池。在长空栈、朝元洞等处,游人都要攀缘铁索,非常险峻。峰上还有

炼丹炉、八卦池等胜迹。峰东侧有南天门。

●西 峰 (即莲花峰)悬绝异常。峰顶有翠云宫,前有巨石,状如莲花故曰莲花峰。旁有长形巨石,石中有一大裂缝,犹如斧劈,人称“斧劈石”。传说是沉香劈山救母处。民间传说,古代有一书生刘彦昌进京赴考途经华山,与华山娘娘相爱,生一子名沉香。娘娘乃是玉皇大帝的小女儿。娘之兄二郎杨戬认为妹妹私配凡人有失仙体,把她压在西峰大石下。沉香成人后,刻苦学艺,终于战胜恶神杨戬,用宝斧劈开华山,救出母亲。

●华山特产风味

 地方风味:有传统的大刀面、炉齿面、线烧饼、六棱蒸馍、状元祀塔等。

 特  产:有银杏、红梅、沙果、黄河鲤鱼、华山松、青竹菜。

 工 艺 品:有草秸编织、针织纳绣、土法染花、民间剪纸、彩扎裱绘等


건릉(乾陵)은

 서안에서 60km, 건현에서 서북쪽으로 6㎞ 떨어진 양산(梁山)에 있으며, 고종과 황후 측천무후(則天武后)를 합장한 곳이다. 현재 내부는 모두 도굴되어 버렸지만, 500m나 되는 참도(參道)에는 고종의 장례에 참배했다는 외국사절과 헌상된 동물을 본뜬 120개의 석상이 줄지어 서 있다. 신도의 끝부분에는 왕빈상(王賓像)이라는 61체의 석상이 있는데, 원래 등부분에 국적이 적혀 있었으나 1300년의 세월 속에서 지워지고, 모두 목이 잘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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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6.08 17:55

    첫댓글 우와, 대단하시네요... 마침 저희 가족(4명, 상해~시안)과 같은 기간에 아주 비슷한 코스를 여행하셨는데... 어찌 이리도 상세하게 기록과 묘사를 잘 하셨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화산 구경은 오일절같이 붐빌 때는 좀 피하는 편이 나을 뻔 했고...(케이블카를 타느라고 기다라면서 흘려버린 시간이 아까워서... 근데, 시골에서 온 듯한 중국 사람들 그마저도 마냥 들뜨고 즐거워서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는 것을 보고 느낀바가 많긴 했슴.), 이 담에 한번 더 가면 반드시 시안성 박물관을 가봐야 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왔답니다.

  • 06.06.07 16:18

    ..

  • 06.06.08 06:54

    김봉선 선생님의 "서안 , 화산 여행기" 잘보았습니다...개별적으로 갈려고 하는분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되겠네요...단체로도 마찬가지이구요,,상해에도 근무하다 북경으로 간 모양이네요.

  • 06.06.08 16:50

    재미있게 잘읽엇습니다. 다음에 시안여행 잘 참고 하겟습니다..

  • 06.06.09 09:22

    정말 책을 쓰도 될 정도로 자세하군요..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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